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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현장 | 가자사태가 던지는 질문들

 

순수의 종말

 

 

프레데리끄 로르동 Frédéric Lordon

프랑스의 사회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유럽사회학연구소장. 저서 『정치적 정서』 등이 있음.

 

 

* 이 글은 2024년 4월 12일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 블로그 사이드카(Sidecar)에 게재된 “End of Innocence”를 저본으로 번역한 것으로, 영어 원문은 newleftreview.org/sidecar에서, 불어 원문은 monde-diplomatique.fr에서 볼 수 있다. Ⓒ Frédéric Lordon 2024

** 각주는 모두 옮긴이의 것임을 밝힌다.



 

우리는 때때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진실을 맞이하는 축복을 받는다. “물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 프랑스 총리 가브리엘 아딸(Gabriel Attal)이 공언한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 진영이 최근에 날조한 사안을 덥석 물으며 나온 말이었다. 그는 ‘엘리뜨’ 빠리정치대학에서 가자전쟁에 반대하는 학생운동 세력의 도덕적 타락 의혹을 호되게 비난하던 중이었다.1 거짓으로 가득한 입에서 나온 것치고 기적적일 만큼 정확한 발언이었다. 물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는 말은 정말이지 이중으로 진실이다. 머리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통치자, 더 일반적으로는 지배자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부패는 이제 도처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환유적인 의미에서 사유의 작동으로, 지금의 경우에는 사유 작동의 부패로 이해될 수 있다. 심지어 그 이상으로, 즉 사유 작동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규범의 붕괴로까지 이해될 수 있다.

그런 붕괴는 단순한 어리석음 때문이라기보다(이것이 좋은 가설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기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난다. 왜냐하면 폭넓은 중개 과정을 거치더라도 어느 한 방식으로 사유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을 금하는 경향을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물질적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물고기의 썩은 머리는 그 이중적 의미를 분명히 나타낸다. 부르주아 진영의 폭력성(은유)이 그 사유형식의 강요(환유)를 통해서 표출되는 것이다.

가령 과세나 노동시간 문제에서는 그러지 않을 텐데, 가자전쟁을 둘러싼 문제에서는 왜 그렇게 맹렬히 폭력성이 표출되는 걸까? 이 국제적 사건이 국가 차원의 계급적 국면에서 그토록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건 무엇 때문일까? 한가지 대답은 서구 부르주아지가 이스라엘의 상황을 자신들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적이고 반(半)의식적인 연결로서—단순한 사회학적 친연성보다—〔표면적으로는〕 부정될 수밖에 없는 ‘지하의 친연성’에 의해 훨씬 더 추동된다. 지배에 대한 공감, 아마도 가장 순수한 지배형태이기에 지배자에게 가장 흥미진진한 방식인 인종주의에 대한 공감 말이다. 이런 친연성은 자본주의의 유기적 위기, 팔레스타인의 식민통치 위기 등 지배가 위기국면에 진입할 때 한층 고조된다. 가령 지배받는 사람들이 온갖 역경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 적들이 지배력을 재확인하기 위해 그들을 분쇄할 태세일 때가 그렇다.

그렇지만 서구 부르주아지를 끌어당기는 더 깊은 매혹도 있다. 이를 날카로운 직관으로 포착한 사람은 산드라 뤼끄베르(Sandra Lucbert)2였다. 그는 내가 결정적이라고 믿는 단어, ‘순수’를 내놓는다. 서구 부르주아지는 순수한 지배의 모습으로서 이스라엘 이미지에 매혹된 것이다. 악의 오점을 지니지 않은 채 지배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지배자의 궁극적인 환상일 것이다. 좌파 무장투사인 삐에르 골드만(Pierre Goldman)은 재판 도중 판사에게 소리친다. “나는 결백해, 존재론적으로 순수한데, 그건 당신이 어찌할 수 없는 거야.” 정황은 다르지만 홀로코스트 이후 이스라엘이 존재론적인 순수(결백) 상태에서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울림이 크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제1급 희생자, 인간 폭력사의 정점에 위치한 희생자였다. 그러나 이런 등급의 희생자라고 해서 ‘영원히 순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희생자에서 영원한 순수로 이행하는 유일한 길은 기만적인 연역법을 통한 것뿐이다.

서구 부르주아지는 이 모든 복잡한 층위 가운데 오로지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인다. 그들은 순수한 지배 자체를 너무나도 탐닉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분명 더 힘든 일이지만 그 본보기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그들은 최면에 걸려 즉각 반사적인 연대에 사로잡힌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저지르는 폭력을 직시하지 않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우선 억압받는 사람들의 등급을 낮춰버리는 방법이다. 그들이 진짜 인간은 아니라는 식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해진 위해는 사실 악이 아니며, 그럼으로써 순수함이 보전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강력하고도 흔한 방법은 자신들의 폭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테러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이다. 이는 생각을, 특히 그 무엇도 무(無)에서 나오는 것은 없다는 생각(ex nihilo nihil)을 막기 위해 설계된 범주다. 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 부정적 호혜성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경제가 있다는 생각, ‘아무것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새로 생겨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라부아지에(A. Lavoisier)의 질량 보존 법칙 같은 생각을 막기 위해 설계된 범주인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해진 무수한 폭력행위는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오로지 비난만이 유일한 지적 활동인 사람들은 다가오는 일을 미리 볼 수도, 이후 벌어질 일을 이해할 수도 없게끔 되어 있다. 때로 몰이해는 지력의 결함이 아닌 정신의 책략, 정신의 정언명령이 된다. 볼 수 없으려면 이해할 수 없어야만 한다. 자신이 그 일부인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아야만 한다…… 따라서 알고 보면 그들이 그렇게 순수한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2023년 10월 7일의 기습공격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악의적이고 특징적인 지적 타락이다. 존재론적으로 순수한 국가만이 지지할 수 있는 타락인데,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과 함께 원인 없는 결과를 믿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이 이에 동참한다. 프랑스의 경우에 그렇듯, 그들 중 수치심에 사로잡혀 숨어야 마땅할 텐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기후행동가들에게—‘생태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이며—‘테러리즘’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이들이 이제 놀랍지도 않다. 심지어 그들 자신이 경의를 표하고 대의를 지지해온 고인들조차 존중하지 않는다. ‘테러리즘’은 서구의 순수를 보호하는 방패인 것이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말의 오용도 비슷한 맥락에서 분석할 수 있다. 원뜻에서 벗어난(진짜 반유대주의도 많으므로 이런 일탈들이 모든 경우를 망라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현재의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은 인과관계를 알아보고 그런 까닭에 순수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당성을 박탈하려는 의도가 있다.

머리가 썩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보호해야 할 것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사유의 범주와 작동이 이기적으로 타락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공론의 수준이 낮아지고 심지어 저질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질화는 급진화된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는 마크롱주의가 프랑스를 휘몰아 넣은 파시즘화 과정의 전형이다. 그러니 ‘썩은 물고기’라는 말이 아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거짓말의 제국이 점점 커지는 것을 통해, 체계적인 허위 진술을 통해, 심지어 노골적인 조작이 이뤄지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과정에는—당연하게도, 그리고 늘 그렇듯이—부르주아 언론매체의 협력이 있다.

그러나 온갖 부인과 상징적 타협, 숱한 협박과 검열도 가자에서 밀려오는 가차 없는 현실의 파도를 막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진영이 도대체 무엇을 지지하는지, 그리고 어떤 댓가를 치르며 지지하는지는 이제 더이상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진 않아서 공포에 질려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정부가 지금 추락 중인—생물학적 인종주의와 메시아주의적 종말론 사이의—이데올로기적 지옥은 바닥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종말론적 정치 프로젝트란 필연적으로 대량학살 기획이라는 것뿐이다.

일란 파페(Ilan Pappé)3가 주장하듯, 정착을 기반으로 하는 식민지화의 현저한 특징은 점령된 사람들의 존재를 없애버리려는 소망인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경우 추방, 국외추방 혹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바처럼 제노사이드를 통해 제거되어왔다. 역사에 기록된 다른 경우들처럼 비인간화는 다시 한번 존재 제거를 정당화하는 탁월한 수사(修辭)가 된다. 지금 이스라엘의 공식 대변인들과 소셜네트워크상의 혼탁한 말들에는 기뻐 날뛰는 기괴함과 가학적인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는 비인간화 사례가 셀 수 없이 많다. 이것이 바로 순수의 베일이 벗겨질 때 일어나는 일이며, 언제나 그렇듯 예쁘장한 광경은 아니다.

이 절멸의 풍경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한가지 두드러진 점은 공동묘지의 파괴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절 프로젝트를, 즉 지배가 상징적 절멸의 지점까지 행해졌음을 인지하게 되고, 역설적인지 몰라도 “그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질지어다”라고 하는 스피노자에 대한 가장 엄한 파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4 스피노자의 경우 그 저주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번에도 성공4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도덕적 자살이다. 홀로코스트의 여파로 쌓아올린, 난공불락이라 여겨진 상징자본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로 낭비된 적이 전에는 없었다. 모든 이에게, 특히 스스로 서구라 칭하며 문명의 독점권을 주장하면서도 문명 원칙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이 식민지 프로젝트에 상징적 심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 문명 원칙이 잘 떠다닌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제 그 도덕적 자격은 확실히 침몰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곧 몰락할 통치자들만이 아무 댓가 없이 이 길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을 부릴 뿐이다. 소극적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 공범으로 가담하여 심지어 그들의 눈앞에서 그리고 다른 모든 이의 눈앞에서 자행되는 엄청난 범죄를 부인하는 사람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더이상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다. 온 세상이 가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고, 온 세상이 가자를 지켜보는 서구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이를 피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독일을 떠올리게 된다. 독일의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지지는 놀랄 만한 정신착란 수준에 도달했는데, 이에 대해 한 누리꾼은 “제노사이드에 관한 한, 그들〔독일〕은 항상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라고 섬뜩한 유머로 평하기도 했다. ‘우리’—프랑스—가 훨씬 더 나은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역사가 모든 이를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역사, 서구가 가자에서 만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믿을 이유가 실재하거니와, 만약 그것이 쇠퇴와 몰락과의 만남이라면 그때는 우리가 가자에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번역: 한기욱(韓基煜)/영문학자, 문학평론가


 

 

  1. 2024년 3월 13일 빠리정치대학 이사회 특별회의에 참석한 아딸 총리는 이스라엘 지지 그룹의 주장에 동조하여 이 대학에서 점거농성 중인 친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심각한 ‘반유대주의’ 행위를 저질렀다고 맹비난하며 이사들을 향해 “물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그런 반유대주의 주장은 날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2. 프랑스의 소설가로, 금융자본주의 및 대량디지털화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작품들을 썼다.
  3. 이스라엘의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인종청소’를 치밀하게 비판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
  4. 스피노자는 1656년 암스테르담의 유대 공동체로부터 최종 단계의 파문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