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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K- 담론을 모색한다 ②

 

돌봄이 정치적 기획이 되려면

 

 

백영경 白英瓊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집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및 공저서 『돌봄이 돌보는 세계』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배틀그라운드』 등이 있음.

paix@jejunu.ac.kr

 

 

한국사회에서 돌봄을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로 인지하고 법적으로 제도화하자는 논의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1 돌봄노동이 처한 현실이나 돌봄위기에 대한 논의 역시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막대한 예산을 투여했음에도 지속해서 하락하는 출생률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사회재생산 위기가 돌봄위기의 반영이라는 지적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2 다만 코로나19는 이미 심각한 위기상황에 있던 한국사회의 돌봄체계에 큰 타격을 가함으로써 돌봄을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단순히 현재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서 나아가 돌봄을 중심가치로 사회전환을 이뤄내야 한다는 주장이 다양한 각도,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지난 총선에서 돌봄 관련 공약은 여야 할 것 없이 새로운 바는 없었지만 돌봄에 대한 사회적 관심 속에 쟁점 자체는 전면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3 현재 추세로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면 돌봄기본권 보장을 위한 기본법 제정 논의도 구체화될 것으로 보이며, 헌법개정 논의가 시작되면 돌봄을 국민의 권리와 의무로 명시함으로써 돌봄민주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4 역시 힘을 받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적어도 구호로만 보면 돌봄중심사회로의 대전환 요구가 더는 소수의 목소리가 아닌 상황이다. 현재 한국에서 돌봄은 그만큼 뜨거운 화두이며, 돌봄을 대하는 방식에 큰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봄기본권 및 돌봄중심사회 관련 논의가 확산하는 것과 돌봄을 둘러싼 현실 환경이 개선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처럼 돌봄노동자들의 현실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돌봄이란 여전히 이루기 어려운 목표일 수밖에 없으며,5 돌봄 논의가 확산되었다고는 하지만 구체적 대안의 차원에서는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쟁점이든 기본법 제정만으로 해결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중에서도 돌봄은 시민들의 생활영역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로서 기본법 제정이나 헌법화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돌봄 논의가 양적으로 증가했을 뿐 돌봄중심사회로 전환할 동력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일각에서는 이미 돌봄이 다른 모든 여성 관련 의제들을 압도해버림으로써 젠더폭력이나 ‘성과 재생산 건강 권리’(SRHR) 같은 이슈들이 묻히고 있다고 우려한다. 현재의 돌봄 논의는 인간 경험으로서 돌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각 개인이 돌봄을 감당할 수 없으니 돌봄을 사회화하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돌봄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 때문이니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그치는 경향이 있다.

돌봄을 기본권으로 법제화하자는 측에서는 돌봄을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로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는 일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가치와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고 돌봄에 대한 시민의 의무와 국가의 역할을 강제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희망한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는 보편적 취약성 개념에 기대고 있으며,6 돌봄이 모든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존재이며 돌봄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보편적 취약성에 호소하면서 돌봄을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로 취급하는 방식은 과거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주장했던 복지국가의 이상과 큰 차이가 없다.7 이는 복지국가가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보편복지의 실현이라고 할 때 연상되는 여러가지 정치적·재정적 차원의 현실문제들을 돌봄중심사회라는 구호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복지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어떻게 일자리를 창출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할까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논제였던 데 비해, 돌봄을 받을 권리로만 이해하는 돌봄중심사회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를 만든 정치적 투쟁 없이 보편적 취약성과 돌봄 필요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 돌봄중심사회가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돌봄이란 어떠한 가치이며 좋은 돌봄은 어떠해야 하고, 그런 좋은 돌봄을 어떻게 확대해갈 것인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없는 기본법 제정과 헌법화는 돌봄중심사회로의 전환에 걸림돌마저 될 수 있다. 돌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의존으로 인해 생겨나는 비대칭성을 곧바로 권력의 비대칭성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8 현실로 오면 이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복지의 수혜자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낙인찍기와 정치적 공격의 역사, 자격있는 자와 없는 자의 선별은 사회복지의 역사와 줄곧 함께해온 문제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돌봄이 필요하다고 해서 정치적 논쟁과 투쟁 없이 돌봄권이 실효를 얻으리라 기대하는 건 이제까지 돌봄을 둘러싸고 존재해온 기나긴 정치의 역사를 무시하는 행태이다. 실제로 돌봄 이론의 발전과정은 1970년대 이후 복지국가 축소에 저항해온 역사이자 소수자 집단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온 역사였다.9 이 글에서는 좋은 돌봄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노력에 대한 강조 없이 곧바로 돌봄을 보편적 권리로 이해할 때 생기는 문제를 검토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아가 돌봄을 둘러싼 정치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돌봄을 사회전환을 위한 기획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돌봄의 권리라는 문제적 개념

 

돌봄을 보편적인 권리로 쉽게 수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돌봄이라는 개념이 생각보다 문제적이라는 사실이다. 최근의 페미니즘 논자들은 일반적으로 조운 트론토(Joan Tronto)의 ‘돌봄 민주주의’ 개념을 돌봄정치와 관련된 논의의 시작점으로 잡곤 한다.10 하지만 실제로 돌봄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페미니즘의 역사와 늘 함께해왔는데,11 백인 페미니즘과 제국주의 사이의 껄끄럽고도 복잡한 관계에 천착해온 페미니스트 우마 나라얀(Uma Narayan)은 1995년에 쓴 「식민주의와 그 타자들: 권리들과 돌봄담론들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에서 이미 돌봄담론이 피지배자들에 대한 보호를 표방하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던 역사를 비판했다.12 권리에 기반한 현실의 돌봄담론이 그간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온 숱한 부정의를 은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돌봄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현실의 인종적·계급적·식민주의적 부정의에 주목해야만 돌봄을 확대할 수 있다. 나라얀의 이러한 주장은 돌봄의 글로벌 분업에 내재하는 신식민적인 현실을 비판하면서 돌봄윤리와 탈식민주의적 문제의식을 결합해야 한다는 지적으로 이어져왔다.13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중산층이 꿈꾸는 안락하고 좋은 삶과 그에 필요한 돌봄은 “제국적 생활양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14 삶의 방식은 그대로 둔 채 돌봄의 결핍만을 해결해야 할 문제, 조달해야 할 서비스로 보게 되면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수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15 그러므로 지구적 차원의 분업이나 인종주의의 문제, 서구적 삶의 방식이 아니면 모두 낙후된 것으로 취급하거나 차별해온 역사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없다면 돌봄은 대안적 가치가 되기 어렵다. 자칫 모두가 돌볼 시간도 역량도 부족한 사회를 불가피한 현실이자 ‘현대적인’ 삶이라고 당연시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지금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돌봄을 서비스 차원에서 조달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돌봄은 대안적인 가치가 되기는커녕 새로운 문제발생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사회구조 자체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 권리중심의 돌봄 논의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돌봄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이 돌봄을 권리에 국한하기보다 시민적 덕성과 연결 짓고자 한 배경에도 현재의 제한적인 돌봄 개념을 그대로 두고서는 더 나은 세상을 구성하는 역동성을 낳을 수 없으리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본다. 그는 구성원들의 삶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고 재난조차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살아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돌봄에 대한 감각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시민적 덕성으로 해석하고자 했다.16 그러나 이렇듯 돌봄을 확장된 가치로 풀이하고자 하는 문제의식과 노력이 있다 하더라도 돌봄을 권리로 축소해서 받아들이는 지배적 분위기 속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이때 돌봄은 전환이 아닌 사회복지 서비스의 영역에 갇히고 만다.

돌봄이 권리로 이해될 때 생겨나는 더 큰 문제는 결국 권리보장의 주체가 일차적으로 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때 돌봄은 국가가 책임지고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영역에 위치하게 된다.17 물론 복지 차원에서 일정 부분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더라도 의존이 존엄을 해치지 않는 수준의 좋은 돌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의 책임과 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복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단순히 돌봄기본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국가주도 복지를 비판할 때 지적되어온 관료적 복지체제 속에서의 탈인격화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돌봄은 그 성격 자체가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시공간에 대한 관심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일상 속에서 늘 다르게 수행되어야 하는 일이지 표준화된 국가 시스템이나 시장 기제에 맡겨 생산하고 분배하면 그만인 물건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돌봄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하며, 그래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 혹은 개인과 자연을 포함한 주변 환경 등 여러가지 관계성으로부터 떼어놓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필자는 국가가 시장을 통해 조달한 돌봄 서비스를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역할만을 하는 한 돌봄 문제에서 국가와 시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면서, 이 문제에서 커먼즈적 접근이 필요함을 주장해왔다. 당연히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고 획일화를 막을 수 있는 시장의 역할도 인정하되, 돌봄을 상품화된 서비스로 취급하지 않는 방식이 요청된다. 또한 돌봄의 제공자로서 가족을 포함하되 가족을 돌봄의 단위로 고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재조직할 필요가 있다.18 그런데 국민이 모두 누려야 할 기본 권리로서 돌봄이 이해되어버리면 당장 여기서 배제되는 비국민의 문제, 자격이 있는 국민과 아닌 국민의 문제, 가치있는 삶과 가치 없는 삶을 나누는 자유주의적 기획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재 시장과 관료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돌봄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공동자원뿐 아니라 공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공동체 스스로 구성원들의 필요에 맞게 돌봄의 방식을 조직하고 활용할 수 있는 돌봄의 커먼즈를 지향해야 한다.

현실에서 돌봄을 커먼즈와 연결하려는 운동은 돌봄이라는 의제의 정치적 힘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가 돌봄을 일종의 정치적 전쟁이자 위기에 몰린 집단들의 생존 투쟁으로 보았듯이,19 돌봄이 권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현재 돌봄의 결핍을 초래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분석은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 또한 함께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지금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급진적 돌봄운동들은 인종주의반대운동이나 원주민권리운동 등과 결합하여 나타나고 있다.20 커먼즈운동은 현재 삶에 필수적인 물, 토지, 전기, 교육, 의료 등이 점점 접근하기 어려운 자원이 되어가는 현실에 맞서 이러한 자원들을 재분배하고 평등·상호성·책임의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돌봄에서도 공동육아나 공동부엌은 단지 육아나 식사 같은 돌봄노동을 공동으로 수행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함께 생활할 공간을 만들고 공유하는 것은 가족이 운명을 좌우하지 않아도 되는 삶, 재산 형성에 온 삶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의료 및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행위 역시 삶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는 다양한 경로를 만듦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돌봄의 커먼즈가 추구하는 권리는 삶의 기본에 대한 평등한 권리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누구도 삶의 권리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해 모두 함께 공존하는 방향을 추구하는 돌봄 커먼즈의 기획은 국가의 지원을 부정하지 않으나, 국가가 보장하는 돌봄기본권이라는 발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돌봄을 기본적이고 평등한 권리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기존의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대안적 형태의 거버넌스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저항의 성격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21

 

 

돌봄의 가치: 찬양과 평가절하 사이에서

 

돌봄 가치를 법적으로 명시함으로써 돌봄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추구한다는 전략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또다른 이유는 그동안 돌봄노동이 단순히 그 역할을 인정받지 못해서 낮은 평가를 받아왔다고만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돌봄은 “사랑의 노동”이며 따라서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고 시장의 서비스로 대체될 수 없다는 사고가 지배해왔다.22 돌봄을 사랑의 노동이라고 여기면 시장의 돌봄노동은 진짜 돌봄의 근사치일 뿐이며, 따라서 돌봄은 고귀하지만 돌봄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저렴한 노동이 된다. 실제로 돌봄노동이라는 범주가 역사적으로 늘 분리되어 존재해왔던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생산과 재생산노동이 구별되기 시작했고, 가정과 시장이 분리되면서 여성은 주부가 되어 사회적 재생산노동을 담당했다. 자연히 생계에 필요한 임금에 직접 접근할 수 없게 되어 남편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심화했다. 물론 실제로 가정주부라는 역할만을 수행한 여성의 수는 매우 적고, 특정한 지리적·계층적 범위를 벗어나면 주부의 삶이 딱히 바람직한 모델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며 여성의 노동은 일이 아닌 사랑이라는 정의는 한정된 지리적·계층적 범위를 넘어 널리 퍼져나갔으며, 여성노동 가치를 저평가하는 데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들은 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의 노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노동을 하면서 여성스럽지 못한 여성으로 취급받을 것인가의 딜레마에 빠졌다.23

시간이 흘러 점차 더 많은 여성이 임금노동에 종사하게 되고 돌봄을 외주화하는 과정에서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육체노동적 측면과 맡길 수 없는 정신적 측면이 있다는 돌봄의 상징구조가 지속되었다. 돌봄노동이 분절적으로 이해되면서 현실 돌봄노동자들의 노동은 저임금노동으로 취급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돌봄을 찬양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는 코로나19 이후의 현실에서도 확인되는 바로서, 한국사회는 우리 일상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돌봄이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면서 필수노동자들에 대한 찬양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돌봄노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코로나19를 계기로 돌봄노동을 저숙련·저임금 노동으로 간주하여 사회적으로 낮은 대우를 해온 현실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찾아오리라는 기대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돌봄이라는 가치를 담론적으로 인정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노동은 저평가하는 것, 이는 정신적 가치와 노동을 분리해서 사고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돌봄은 본질적으로 육체노동의 성격을 띠는 동시에 대상을 이해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관계 맺기의 측면 역시 포함할 수밖에 없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두 측면이 분리될 수 있다는 듯이 이해된다. 하지만 돌봄의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교감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돌봄은 때로는 분명하지 않은 욕구를 해석하고, 또 때로는 돌봄받는 이의 의사와 충돌하더라도 필요한 일을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며, 시간에 따른 변화를 지속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정신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동시에 상대의 필요에 반응해 몸을 움직여 무엇인가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육체노동 없이 존재하는 돌봄노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돌봄노동의 상징구조는 돌봄노동자들이 수행하는 돌봄을 평가절하하며, 나아가 시장에서 형성된 낮은 가격으로 인해 돌봄 일반의 가치까지 낮아지게 만든다. 돌봄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요인은 노동시장이 인종적·지역적으로 분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의 경우 글로벌 남반구 출신의 유색 여성들이나 이주여성들이 주로 돌봄의 육체노동적 측면을 맡고 있다. 이러한 인종적 구분은 이들에게 차등 임금을 주는 행위를 정당화하곤 하며, 이는 다시 돌봄노동 자체의 평가절하를 가져오게 된다.24

 

 

돌봄 앞의 이중과제

 

결국 돌봄노동의 가치를 논하는 일은 돌봄 자체의 중요성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제까지 돌봄이 이해되어온 방식 자체를 다시 짚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돌봄이 이해되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나 돌봄이 수행되는 구조적 방식을 바꾸지 않은 채 국가가 보장해야 할 시민의 보편적인 권리로만 돌봄을 사유하는 방식이 전면화된다면 돌봄위기는 오히려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국가주도의 돌봄사회화란 결국 서비스 형태로 주어질 수밖에 없으며, 국가가 한정된 재원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려다보면 차별적 임금을 주면서 돌봄노동을 떠맡길 대상을 찾게 된다. 나이 든 여성이나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하여 어떤 이유이든 더 낮은 임금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돌봄노동을 떠맡게 되는 것은 다시 돌봄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를 낳게 되면서 돌봄 기피 현상과 함께 돌봄의 위기를 심화시킨다. 이는 이들이 수행하는 돌봄노동은 돌봄의 ‘일부’이지 온전한 것은 아니라는 상징구조에 근거한다.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돌봄노동을 외주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에게 맡길 수 있는 돌봄은 일부일 뿐이고, 돌봄이란 그에 수반되는 육체노동 이상이라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의 실감에도 부합되는 바이다. 이는 돌봄의 통합적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가치있는 노동과 가치 없는 노동, 남에게 맡길 수 있는 노동과 아닌 노동이라는 상징구조는 모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관계를 맺지 않고 가능한 돌봄이 없고, 돌봄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결국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한다면 돌봄이 권리라는 말이 당연할 수 없음도 분명해진다. 그러니 돌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사회적으로 도태되지 않으며 돌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돌봄을 누리거나 돌봄 서비스를 받을 권리는 일단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돌봄 서비스를 받을 권리보다는 돌볼 시간을 보장하는 ‘돌봄소득’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25

앞서 인용한 글에서 우마 나라얀은, 중요한 것은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질문하는 일이라 지적한다.26 실제로 돌봄의 확대는 막연하게 권리를 주장하거나 명시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다. 이제까지 돌봄을 찬양해오면서도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우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코로나19 이후 돌봄노동자들을 그토록 추켜세웠음에도 실제적인 노동조건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제대로 된 돌봄을 가로막아온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함께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 병행될 때 돌봄은 확대될 수 있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돌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일단 돌봄노동자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야만 ‘양질의 돌봄노동’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식의 논의와 확실하게 선을 긋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돌봄을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실제로 수행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먼저지, 돌봄노동에 특화된 노동자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데만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돌봄노동자가 합당한 대우를 받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임금수준을 올리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한다고 해서 필요한 돌봄을 모조리 돌봄노동자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 논의가 잘 지적하고 있듯 몸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나이 들어가고 앓다가 죽기도 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잘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일들이 모두의 삶에서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서도 그럴 만한 시간과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사회가 돌봄중심사회로의 대전환이 추구하는 지향점이어야 한다. 그 방향은 인간과 생태가 모두 이윤으로 추출되는 현재의 경쟁적 시간 결핍 사회를 그대로 살아가면서, 돌볼 수 없는 삶을 돌봄노동자의 노동으로 메우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이를 위해 당연히 현재 돌봄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의 기여를 더 가시화하고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은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목적은 더 많은 돌봄노동자를 확보하고 양질의 돌봄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돌봄이란 육체적 노동과 사랑의 노동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며, 노동 일부를 외주화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는 돌봄의 관계망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현재 한국사회에서 돌봄 앞에 놓인 이중과제는 돌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더 많은 돌봄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자 동시에 이제껏 우리가 이해해온 돌봄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돌봄을 수행해온 사람들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돌봄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동시에 돌봄은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영역이며 시장에 맡긴다고 해결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이어야 한다. 또 이미 구획된 의제에 갇히지 말고 돌봄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회적 배치를 바꾸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는 그러한 사회적 배치의 한가지 가능 형태로서 국가의 지원을 활용하고 시장의 역할도 일부 인정하되, 가족을 넘어선 공동체를 통해 삶에 필요한 일들을 함께 해결하는 커먼즈적 방식을 제안해왔다. 커먼즈적 방식에 따르면 개인들은 좋은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세계의 한계와 필요들을 고려하면서 ‘제국적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함께해야 한다. 물론 커먼즈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며, 돌봄을 둘러싼 사회적 재배치도 여러 방식으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돌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돌봄이라고 이해되지 않은 영역들을 돌봄의 의제로 재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앞서도 언급한바, 노동시간 단축 문제는 일반적인 돌봄 이슈로는 사유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이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돌봄소득’과 같은 방식도 고려될 수 있다. 돌봄이 기존의 사회복지 서비스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양질의 돌봄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한 돌봄노동자 처우 개선 문제로만 국한된다면 돌봄을 통한 사회전환을 말할 근거는 사라진다. 돌봄이라는 정치적 기획은 당연히 현실의 돌봄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돌봄을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만 받아들이는 논의의 성급한 확산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돌봄중심사회가 만들어지기보다 돌봄의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국가주도의 돌봄 서비스화를 부추길 상황이 뻔히 예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봄기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돌봄이란 무엇이며 이를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필요하다. 현실의 돌봄을 중요한 투쟁의 현장으로 삼되 동시에 돌봄을 보는 방식을 끝없이 재정의하고, 나아가 지금 돌봄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해체하여 새로운 삶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돌봄이 마주한 이중적 과제라 할 수 있다.

 

 

  1. 김희강 「돌봄: 헌법적 가치」, 『한국사회정책』 25권 2호, 2018.
  2. 낸시 프레이저 「자본과 돌봄의 모순」, 문현아 옮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졸고 「커먼즈와 복지」, 『환경사회학연구 ECO』 21권 1호, 2017.
  3. 「돌봄이 전면으로, 21대 총선 교육 공약… 양당 모두 돌봄 정책 ‘재탕’」, 경향신문 2030.3.26.
  4. 구은정 「돌봄 가치를 반영하는 개헌을 위하여」, 『경제와사회』 127호, 2020; 김희강 『돌봄민주국가』, 박영사 2022; 손지현 「기본권으로서 돌봄에 대한 고찰」, 『사회복지법제연구』 13권 2호, 2022; 엄주희 「헌법상 복지국가에서 돌봄의 제도적 구현」, 법제처 2023; 홍찬숙 「돌봄사회로의 전환과 새로운 사회계약의 방향」, 『사회이론』 63호, 2023.
  5. 박주영 「좋은 돌봄은 건강하고 행복한 돌봄노동자로부터 시작된다」, 『월간 복지동향』 291호, 2023; 최시현 「가치로서의 돌봄, 노동으로서의 돌봄」,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6. 황정아 「가치로서의 돌봄」, 『개념과소통』 28호, 2021.
  7. 김희강은 『돌봄민주국가』에서 돌봄이 복지와 비교하여 취약한 인간들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가치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 역시 돌봄의 가치가 복지와 전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나, 현재 논의 수준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고 본다.
  8. 에바 페더 키테이 『의존을 배우다』, 김준혁 옮김, 반비 2023.
  9.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김현지·이영주 옮김, 갈무리 2017;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3; 김성희 「돌봄의 선언과 자기돌봄」, 『비교문학』 89호, 2023; 졸고 「전환의 지향으로서의 돌봄을 향한 투쟁」, 『창작과비평』 2023년 여름호.
  10.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 2014.
  11. Lorraine Dowler et als., “Care,” Keywords in Radical Geography, edited by the Antipode Editorial Collective, Wiley Blackwell 2019.
  12. Uma Narayan, “Colonialism and Its Others: Considerations on Rights and Care Discourses,” Hypatia, vol. 10 no. 2, 1995.
  13.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세계화의 하인들』, 문현아 옮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Gayatri Chakravorty Spivak, “In what interest, to regulate what sort of relationships, is the globe evoked?,” 2015.
  14. 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이신철 옮김, 에코리브르 2020.
  15. 「총선 앞 정부·여당이 불붙인 ‘외국인 가사 도우미’… 공(公)약인가, 공(空)약인가」, 경향신문 2030.3.27; 「‘월 100만원 가사근로자’, 본질은 차등임금제」, 포춘코리아 2023.9.1 등 참조. 보건복지부의 「2023년 제5차 장기요양위원회 개최」 보도자료(2022.12.21) 역시 요양보호사 인력 부족 문제를 지적하면서 “해외 인력 도입 등 인력 공급 경로를 다변화”하는 것을 한가지 대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16. 백지연 「돌봄의 시민성과 문학의 공동영역」, 『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
  17. 현실에서 국가주도의 돌봄사회화가 결국 시장을 매개로 더 많은 돌봄의 상품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졸고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참조.
  18. 졸고 「커먼즈와 복지」.
  19. Audre Lorde, A Burst of Light: And Other Essays, Dover 2017.
  20. Hi’ilei Julia Kawehipuaakahaopulani Hobart and Tamara Kneese, “Radical Care: Survival Strategies for Uncertain Times,” Social Text, vol. 38 no. 1, 2020.
  21. Miriam Ticktin, “Care as political revolution?,” Focaal, no. 98, 2030.
  22. 에바 페더 키테이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나상원 옮김, 박영사 2016; 낸시 폴브레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윤자영 옮김, 에디토리얼 2023.
  23. 실비아 페데리치, 앞의 책.
  24. 한국에서도 최저임금 차등적용 논의가 돌봄노동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최임 차등적용 톺아보기) “제도 취지 위배·국제규범 위반”」, 매일노동뉴스 2030.4.30.
  25. 졸고 「전환의 지향으로서의 돌봄을 향한 투쟁」.
  26. Uma Narayan, 앞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