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불가피한 미래란 없다

박문영과 정지돈의 최근 소설

 

 

김다솔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이주혜론」 등이 있음.

solmeng2@naver.com

 

 

 

1. 누구를 위한 기술력과 법안인가?

 

지난 2월, 정부는 법률적 근거에 기초한 제도가 마련되기 전까지 공공장소에서 ‘실시간 얼굴인식 기술’을 도입하거나 활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1 구성원들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기에 해당 기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정부가 수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법무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출입국 관리 시스템을 고도화한다는 명목으로 2019년부터 진행한 ‘인공지능 식별·추적 시스템 구축 사업’에서 개발을 명분 삼아 1억건 이상의 내·외국인의 생체정보를 민간 위탁업체에 무단으로 유출한 참담한 사태로부터 비롯되었다.2

딥러닝 기술의 빠른 성장으로 인공지능산업이 전세계적으로 팽창하는 가운데 기업들과 정부 역시 여러 영역에 해당 기술력을 앞다투어 도입하는 추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문제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3 이에 대응해 미국은 일찍이 ‘국가 인공지능 이니셔티브법’을 제정하여 인공지능산업 지원과 규제 근거를 마련했고, 유럽연합(EU)은 지난 3월 규제 강도가 높은 인공지능법(AIA)을 가결하였다. 개인정보 침해를 제재한다는 명목으로 세계의 각 정부들이 국경 너머의 기업과 기술력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법적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상황이 기술의 무분별한 활용을 막는 한편으로 빅테크와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근거로 귀결될 가능성 역시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4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가 말한 대로, 개인들에게서 수집된 데이터가 곧장 자본이 되는 ‘감시자본주의 시대’에서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법률 제정은 초국적 감시 형태를 제도화할 위험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5 주보프에 따르면, 감시자본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데이터로 번역한 뒤 일부는 서비스 및 상품 개선에 사용하지만 나머지는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 예측을 상품으로 만드는 데 활용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권력은 소셜미디어와 의료 서비스, 스마트홈 등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통과 편리함을 자처하며 개인의 신체뿐만 아니라 감정, 성격과 같은 내적 경험까지도 데이터로 변환한다. 이 과정은 데이터의 원재료가 되는 개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기에 문제적이다.6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예측상품을 더 많이 판매하기 위해 개인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수정하고 조종하는 시스템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이다. 예측이 곧 돈이 되는 사회에서 이제 개인은 그저 정보의 자원일 뿐이다. 따라서 친숙한 얼굴로 다가오는 기술력 이면에 숨겨진 무분별한 정보 착취와 개인 주체를 말살하려는 야심을 파악하고 대처하려는 시민적 성숙과 경각심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최근 한국소설에서도 우리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은밀히 조종하고 형성하는 권력을 향한 비판적 시선이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박문영과 정지돈은 기업과 국가가 가진 감시권력의 위세를 서늘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이에 포섭되지 않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기백을 발휘한다. 이 글은 감시자본주의 내부에서 말소되어가는 개인들의 모습과 이를 나름으로 재건하려는 노력을 함께 그리는 문학적 분투를 살펴보며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2. 초연결 시대의 관계 맺기와 ‘진짜 만남’의 추구: 박문영 「패나」

 

박문영의 첫 소설집 『방 안의 호랑이』(창비 2024)에는 그동안 SF장르를 통해 문명비판적 상상력을 다채롭게 구축해온 작가의 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어떤 때보다도 서로에게 닿기 쉬워 보이는 초연결 시대에 오히려 타자와 진솔한 관계 맺기를 회피하는 인물들에 대한 세심한 포착이다. 이들은 대상과 직접 맞닿기보다 기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하기를 택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데이터 객체이자 ‘그것’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회구조다. 감시권력은 개인을 디지털화된 객관적인 통계 수치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고 시스템에 빠르고 정확하게 반응할 뿐인 자동반사의 대상으로 상정한다.7 자신이 집단 속 무수히 많은 개체 중 그저 하나일 뿐이라고 반복적으로 학습하면서 격하를 내면화한 이들은 ‘나’라고 할 만한 능동적인 행위자로서의 감각을 상실한다.

이러한 내용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패나」를 주목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내적인 감정과 감각까지 추출하여 데이터 자본화하는 감시자본주의하에서 세계와 타인을 자주적으로 접할 가능성마저 약탈당한 인물들의 현주소를 묘파한다. 주인공인 ‘나’는 증강현실 체험기기에 중독된 아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날로그 작곡을 가르치는 강사다. 돈이 주된 목적인 직업생활을 이어가던 ‘나’는 청소년 치유캠프에서 실감기기인 ‘패나’에 중독되어 남자 아이돌의 삶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수이’를 만난다. 패나는 발신자의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정보를 수집해 수신자에게 전달하여 직접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연계하는 “실감기기”(243면)로, “그 사람 자체가 되는 감각을 느끼게”(244면) 해주는 장치이다. 소설은 일대일로 작곡 수업을 진행하며 수이와 특별한 교감을 나누다가 결국에는 이 관계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지고 마는 ‘나’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낸다.

소설의 중요한 성취 중 하나는 패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관련한 모든 현실의 실제들을 자본 창출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윤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도록 행동하게 만들며 이 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를 영구히 순환하게 하는 메커니즘임을 폭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소설은 감시자본주의의 두가지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데이터의 원재료로 철저히 도구화된 개인의 처지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 형성에 필수적인 직접적 경험을 빼앗기고 사회에 의해 특정 방향의 감각만을 겪도록 강제되면서 발생하는 ‘자기다움’의 소실이다.

패나가 보장해주는 막대한 부는 공인들이 앞다투어 생체정보를 등록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이들이 치르는 정서적 댓가는 적지 않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불특정 다수에게 일정 부분 감시당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패나에 등록한 셀럽은 팬들의 수 외에 그들 각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248면)다. “공인 말고 가까운 사람 감각을 궁금해하는 건 섬뜩한 (…) 범죄”(247면)로 여겨지지만 자신의 생체 데이터를 이용해 수익을 내는 이들에게 사적 영역은 보존되지 않는다. 게다가 패나를 통해 분석된 정보는 다시금 소비자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경험을 차단한다.

“패나의 어원이 피난처 그리고 은신처”인 동시에 “자아를 잊고 신과 합일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248면)는 대목은 필연적인 자기상실을 예시한다. 자기 자신으로서 타인과 관계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비교대상으로 상정하고 ‘그 사람 자체’가 되고자 하는 바람은 자기의 구성을 외부에서만 찾아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다. “패나에서 내보내는 신호가 가짜라는 얘기”와 “남의 감각도 사실 가짜인데, 신호도 가짜면 뭐죠? 180도 더하기 180도는 360도. 그럼 제자리네”(247면)라는 비통한 농담이 유통되는 상황은 사회적 관계마저 은밀히 직조되는 구조에서 대상화된 채 제자리를 맴돌 뿐인 개인들의 처지를 현상한다.

그러므로 “진짜 나와 만나기”(244면)라는 치유캠프의 슬로건에 “진짜 나 같은 거에 관심”(250면) 쏟는 일을 무용하게 취급하며 “왜 진짜로 살아야 하는데요? 10퍼센트, 20퍼센트, 50퍼센트만 살아도 되잖아요”(251면)라고 반발하는 수이의 모습은 데이터로 치환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아이들을 상징한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 오래인 ‘나’ 역시도 현실에 순응하기가 무엇보다 쉬운 게 사실이다. “기적이나 극복 같은 가치를 믿지 않”는 ‘나’는 수이를 보면서 “미성년에게 중요한 건 단 두가지, 유전자와 환경”(같은 면)이라고 손쉽게 일축해버린다. 이들의 자포자기와 무력함은 자신을 잃어버린 개인들로 가득한 사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곡에 재능과 흥미를 보이는 수이에게 ‘나’가 작곡을 가르치면서 둘 사이에는 예상치 않았던 친밀함이 쌓여간다. 그렇게 감시자본의 통제를 벗어나 가까워진 둘은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내보인다. ‘나’는 자본주의가 부리는 상술을 따르는 음악을 할 때와 달리 “애쓰지 않아도 코드가 떠”(254면)오르는 경험을 한다. 수이는 “알면 알수록 괴로운데도. 제가 다치는데도”(256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어 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며 패나에 몰입해야만 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나’는 수이의 얼굴에 화장품을 발라주며 “지금 느끼는 감각이 진짜야” “이게 100퍼센트지”(256면)라고 되뇐 바로 다음 날 인사도 없이 캠프를 떠나버린다. 강도 높은 사회적 비교와 타인의 시선에 전적으로 이양되어 자기를 구축해온 인물들은 자아와 타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관계 형성의 과정에 나설 ‘진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특정한 자아를 감추게 된다.8 결말에서 ‘나’는 서로의 마음을 열어 보인 그날 나눈 단어 “100퍼센트”와 “서해”를 합쳐 “백서해”(259면)라는 이름으로 아이돌이 된 수이를 라디오에서 알게 된 뒤, 패나를 주문해 “백서해의 감각을 매달 50퍼센트까지 느”낀다. “접속을 할 수 없는 날은 내게 몸이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았다”(261면)는 ‘나’의 마지막 진술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과 내용까지 전부 강탈당해 안정된 자아감을 잃어버린 채 기계를 통해 오염된 감각을 느낄 때만 표면적으로나마 누군가와 함께일 수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패나」는 오래도록 ‘블랙박스’로 여겨진 인간 내면의 감각까지 여지없이 자본으로 환산하는 세태를 고찰하고, 자아를 구성하는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험이 얼룩져버린 현대 기술사회의 단면을 제시한다. 물론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는 일은 인간의 오랜 관습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불필요하다고까지 느끼는 인물들의 등장은 오직 자신을 다른 개체의 시선에서만 감각하도록 종용하는 감시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 관계의 어긋남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다 못해 폐기해버린 이들이 주저앉는 모습으로 묘사되기에 애석하다. 하지만 여전히 ‘진짜 감각’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감촉이 남아 있기에, 그곳에는 소멸하지 않은 어떤 반짝임이 함께 어른거린다.

 

 

3. ‘알 권리’의 상실과 미래의 재건: 정지돈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와 『브레이브 뉴 휴먼』

 

최근 정지돈의 소설들은 감시자본권력이 구성한 현실 이면의 참담한 진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미래를 잃어버린 개인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는 기업과 정부가 결탁하여 폭력적일 만큼 밝은 빛으로 개인을 발가벗기는 사회를 살아가는 ‘너’의 이야기다. 이때 기업과 정부는 공적·사적 영역 전반에서 데이터를 최대치로 수집하는 한편, 누가 얼마나 알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한까지도 쥐고 있다. 그곳에서 ‘너’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비롯한 세계의 작동방식과 의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불안에 떤다.

소설에서는 다국적기업이 개발한 ‘셀프메이커 앱’(이하 셀프)을 기반으로 개인이 스스로를 얼마나 발전시키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개인계발지수 시스템’이 국가적으로 시행 중이다. “가능한 모든 자료를 수집한 빅데이터를 토대로 매겨”(156면)지는 지수는 개인의 내·외적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실시간으로 바뀐다. 이 지수가 곧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자 사회구조의 토대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은 “오분에 한번씩 셀프에 접속”(160면)하여 일상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자발적으로 공유한다. “셀프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지수를 체크하고 최적화의 기술을 배우고 포트폴리오를 매력적으로 관리했다.”(157면)

오직 “스크린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앱을 통해 서로를 드러내고 바라”보며 “밈의 흐름으로 세상의 정서를 이해”(156면)하는 양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삶을 전방위적으로 포위한 감시권력을 이의 없이 받아들일뿐더러 환영하기까지 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로지 경제 능력만으로 등급을 매기던 시절에 비해 개인계발지수는 객관적이고 인간적”(156면)이라는 ‘너’의 진술에 주목해보자. 개인을 다면적인 정보로 평가하되 그 기준을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제도가 과거에 비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최적화’가 진정한 자신의 삶을 발굴하도록 돕는 기제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개인을 단지 행동하는 객체로 전락시켜 질서를 유지하려는 감시자들의 ‘사회 최적화’에 기여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셀프의 메인화면을 장식하는 문구로 “진짜 예술과 진짜 삶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었”(157면)던 릴케의 깨달음에서 따왔다. 애초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급진적인 질문이었던 이 문장은 이제 외부에서 형성된 알 수 없는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라는 주문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그러던 와중에 주인공인 ‘너’는 하룻밤 사이에 지수 상위 1퍼센트가 되는 경험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너’는 당황하지만, 이내 상황의 급변을 의문시하고 진실을 탐구하기보다 변화한 지수에 따라 “자아의 상태와 삶의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부수적인 풍요를 누린다. 그렇게 “너는 네가 설명하는 사람이 되어간다.”(162면)

그러나 ‘너’의 이러한 결정마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외부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조율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급작스러운 지수 변화는 사실 알고리즘의 기술적 오류에서 비롯되었는데, 기업과 국가는 시스템의 불확실성을 은폐하고 오류대상마저 “시스템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귀중한 참고 사례”(163면)로 활용하려는 야심으로 ‘너’를 감시할 합법적인 ‘통계사무관’을 파견한다. ‘너’는 감시자본주의가 설정한 최적화 기준에 따라 자신을 조정하는 도구화된 개체의 행보를 보여준다. 자신을 지켜보는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깨닫지 못한 채 무지의 영역에서 고통받는 ‘너’의 모습은 극히 비극적이다.

 

왜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너 역시 고통스럽다. 너는 진심으로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낀다. 문제는 네가 느끼는 감정과 이 감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욕구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너의 경험은 너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와 너의 외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168면)

 

이쯤에서 어떤 전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의 뒤에 시스템이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을까? 사무관은 기초생활수급권자인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사회적 평판 때문에 괴로워하는 ‘너’에게 지수 오류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시스템의 존재 여부와 오류를 파악하고 있는 사무관 역시 앎과 무지 중 무엇이 삶에 도움이 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많은 것을 안다 해도, ‘진짜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지 않는 이상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171면)

그런 의미에서 촘촘하게 얽힌 시스템에 의문을 품고 결함을 응시하며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인물들로 채워진 정지돈의 근작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은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소설의 배경은 인구 감소로 인한 국가 소멸을 막기 위해 인공자궁을 이용한 출산을 국가법으로 명시한 미래의 대한민국 사회다. 그 사회에는 정부의 철저한 주관하에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인 ‘체외인’과 신체적 생식으로 태어난 ‘일반인’이 함께 살고 있다. 체외인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16면)지만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일반인보다 열등한 계급과 권리를 할당받는다. 체외인에게는 배척과 구분의 증표인 생체 바코드가 부여되며, 만성적인 혐오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소설은 이른바 ‘체외인 DNA 게이트’ 폭로전을 축으로 전개된다. 일반인의 난자와 정자를 받아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수백만의 체외인이 법규와 달리 단 일곱명의 남성으로부터 수정되었다는 비리가 밝혀진 것이다. 한편에서는 체외인 혐오범죄를 두고 여러 사회집단 간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체외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근본적으로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사건들을 통해 정지돈은 가족 개념의 허상을 파헤치면서 한가지 질문을 꾸준히 던진다. 인간을 언제까지나 인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인간이 인간임을 보증하는 인간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배타적으로 구축된 인간의 상징 문명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가상에 불과하다. 체외인은 “생물학적으로 일반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17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성을 보증해주는 탁월한 타자로 기능한다. 그들은 불가능에 가까운 승격을 거친 경우에만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소설 속 한국은 감시자본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아 구성원들의 사회적 권리는 물론이고 생명까지도 데이터로 축적될 만큼 자유가 전적으로 부재하는 공간이다. 모든 정보를 보유하는 한편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까지 결정하는 권력자들은 불합리한 구조는 철저히 숨기면서도 “투명한 사람들”(57면)을 자처한다. 그러나 인간을 정보값으로만 이해하는 세계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삶의 존엄을 잃는다.

‘아미’는 체외인 출신 엘리뜨로, 대다수의 체외인이 누릴 수 없는 삶을 산다. 그는 고강도의 감시자본주의 사회에 표면적으로 복종하기를 택한 냉소적인 지식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탈을 즐기는 정도가 아미가 추구하는 최대의 자유다. 반면 같은 체외인으로서 아미와 함께 성장한 ‘권정현지’는 언제나 “경계를 넘”(23면)는다.

같은 체외인이지만 확연히 드러나는 둘의 간극은 계급 차이에서 발생하는 지식과 감정의 깊이에서 기인한다. 뛰어난 능력과 지식에 대한 우수한 접근성을 가진 아미는 인간들의 기만적인 상징적 체계와 그 위에 세워진 사회의 모순성을 파악하면서도 다른 체외인들의 고충에 무감하려 애쓴다. 반면에 권정현지는 사회로부터 교육받은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기에 그와 어긋나는 불합리한 사안에 저항하면서도 울분의 출처와 타도할 대상을 특정할 수 없어 혼란을 겪는다. 평탄한 삶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아미와 늘 “맹렬한 증오나 파괴 욕구”(185면)에 사로잡혀 살아온 권정현지는 계층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텅 빈 껍데기처럼 여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독자적으로 미래를 상상할 여유와 능력이 없다.

그런데 이는 비단 체외인들만의 고충이 아니다. 감시자본주의권력은 일반인과 체외인을 구분하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아미의 남자친구인 일반인 ‘철멍’은 저명한 예술가이자 문체부장관 출신 ‘반형태’의 아들이다. 겉보기에 남부럽지 않은 조건을 갖췄음에도 타인의 관점에서만 자신의 쓸모를 찾는 등 감시체제에 맞게 길러진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면 역시 체외인들과 다를 바 없이 황폐하다.

모든 것이 데이터화되어 스스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이들은 자립할 수 없다는 불안에 빠져 다른 이를 향한 “혐오와 증오를 포기하는 순간 존재할 이유 역시 사라”(135면)지고 말 거라는 오판을 반복한다. 아미가 근무하는 연구소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아 줄기세포만으로 이루어진 ‘합성인’을 개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다른 하위객체를 (재)생산하여 일반인-체외인-합성인의 위계를 조직한다면 포함적 배제를 반복하는 구조가 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각각의 인물들은 외부적 명령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 자신으로 점차 새롭게 거듭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삶을 총체적으로 틀어쥐는 감시자본주의에 대적할 모종의 희망이 싹튼다. 이들은 기술문명을 겨냥하여 과거 혹은 미래만을 좇는 맹목적인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주의, 체외인을 자의적으로 대상화하는 혐오자와 애호자의 대립 같은 이분법을 넘어서 다른 미래를 개척한다. 서로 대조되는 듯한 이 입장들은 사실 누군가를 제외하는 배타적 집단성을 다시금 형성한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을 인간성의 최후 보루로 남겨두기 위해 제정된 체외인의 출산금지법을 어기고 권정현지는 아기를 낳는다. 또한 체외인의 탄생에 엮인 비리를 폭로하자고 아미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미는 그를 도우면서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한 능력 있고 순종적인 체외인”(156면)에서 벗어나 “인간은 기술적 존재들의 주체가 아닌 도구”(136면)라는 믿음을 버린다. 특정 존재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위층 엘리트”(157면) 한명에게서 수십만의 체외인을 탄생시키고, 혐오를 또다른 차별과 폭력으로 응수하는 현실 앞에 신념은 철저히 무너진다. 이때 생겨난 “질서와 조화를 이유로 세계를 억누르는 힘을 향한 맹렬한 분노”(186면)는 “철통같은 시스템에도 여백은 있기 마련”(67면)이라는 제도의 맹점을 정확히 꿰뚫는다. 권정현지는 사실 자신 역시 모성을 지닌 일반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합리적인 도덕적 규범에 따라 아이를 비롯한 타인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누구에게도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삶과 문화 자체를 모두 무너뜨리고만 싶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합리성이나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이 불분명하고 단순히 같은 체외인으로 묶일 수 없이 다른 권정현지와 아미의 모습은 언제나 변화하는 ‘인간’ 그 자체를 현시한다. 그렇게 두 존재는 사회에 의해 분열된 자아로 살아가는 동안 각자 내면에서 잃어버린 가치와 힘을 되비추며 주체적인 힘을 회복한다.

이때 형성되는 자아는 자기동일성을 전제한 채 ‘또다른 인간성’을 형성하는 폐쇄적 주체로 회귀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언어와 시각 중심의 수치로는 환산되지 않는 온몸의 감각을 감시자본권력으로부터 되찾아 내면의 정념을 일으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데이터 값으로 정리되어 정해진 궤적만을 반복적으로 모방하는 객체로서의 운명을 거부하는 일이다. 이들은 다른 존재와 생생히 얽혀 자신을 변화시킨다.

 

어디로 갈 거야? 권정현지가 말했다.

아미가 철멍을 바라봤다. 철멍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멀리 붉게 물든 서해가 보였다. 균형을 잡은 버티컬은 산등성이를 넘어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전진했다. 아미는 벵족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벵족의 신화에서 죽은 아기들은 우르그비로 돌아간다. 원래 그들이 존재했던, 이곳과는 다른 세계로. 아미는 생각했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가 없는 게 아니라고, 다른 세계는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가 바로 그곳이라고.(195~96면)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 운동성은 미래에 대한 체념이나 방향상실의 감각을 너끈히 뛰어넘을 원동력이 된다. 이들은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그 현실은 초월적인 저 너머가 아닌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에 있다. “생명이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이라고 믿”(83면)는 ‘벵족’의 신화에서 “개체들은 제어가 불가능”(85면)하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계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도래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고유성과 더불어 불확실성을 지닌 채 함께 얽혀 무한히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현실에 우르그비 같은 장소는 없다”(같은 면)는 단호한 전제는 자연히 무너진다. 이는 사실 규율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이를 변화시키고, 이질적인 존재와 갈등하는 동시에 공존하는 방식을 찾아 자신을 거듭 바꿔온 인간의 영구한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설 속 인물들은 고정된 인간성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착오자들이 아니며, ‘휴머니즘’과 ‘휴머니티’라는 배타적 범주를 새롭게 구축하여 인간을 또다른 고정성에 몰아넣지도 않는다. 여타 존재와 자신을 데이터가 아니라 매순간 달라지는 생동감으로 경험하는 이 존재들은 다시금 일어설 용기를 가지고 미래로 나아갈 새로운 주체들이다.

 

 

4. 불가피한 미래란 없다

 

오늘날의 현실에는 존재의 구분 없이 총체적 데이터화를 위시한 감시자본주의사회의 거대한 영향력을 더는 피할 수 없으리라는 믿음이 팽배하다. 이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전지적인 자율성을 지녔으며 그러한 기술과 데이터를 독점한 감시자본가들의 움직임에 다수가 탄력적인 발전을 경험하거나 무력하게 휩쓸릴 수밖에 없다는 상반된 두 입장이 모두 공유하는 대전제다. 그러한 미래는 우리가 반민주주의적인 감시자본주의의 완력에 고개를 숙일 때 비로소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실험실에 누워 삶의 생기를 데이터로 간단없이 전환당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빼앗긴 권리에 대한 분노와 상실의 감각을 되살려 대항하는 주체로 바로 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박문영의 소설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상대와 비교적 투명하게 연결될 수 있(다고 믿)게 된 상상적 초연결의 사회에서 오히려 관계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인물들을 제시한다. 인물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절망적인 분위기를 환기하는 듯하지만, 비대면적 인간관계라는 타성에 젖은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게 만든다.

정지돈의 소설은 기업과 정부가 결탁하여 정보 지배력이 신속히 확장되는 동시에 제도화되는 국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감시 규율과 구성원들의 시선에 치우쳐 자신을 응시하는 개인들은 타인과 사회를 지독히 불신하고 미래를 구상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인간문명의 실효성과 새롭게 재건되어야 할 인간성에 대해 깊이있게 질문하면서 감시자본권력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는 『브레이브 뉴 휴먼』의 행보는 유의미하다. 인물들의 전회가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감이 있지만, 기존의 문법에 기대지 않고 인간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근본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쉽게 망각되는 것은 그러한 기술이 인간문명의 산물이며 따라서 해당 기술력 뒤에는 언제나 인간이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기술은 서로를 돕는 조력자여야 하며, 이러한 존중을 토대로 인간 역시 “우세 종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해온 지배자의 논리”를 허물어 현재 당면한 민주주의와 생태주의의 어려움을 함께 조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9 문학 역시 기술적 현실에 포섭되어 거짓된 영광을 되비추거나 유폐적인 세계로 침전하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에 걸맞은 인간의 가능성을 거듭 사유할 때, 지금 여기의 현실을 더 나은 미래로 바꿔놓는 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1. 「정부 “입법 전까지 실시간 얼굴인식 기술 도입 안 한다”」, 경향신문 2024.2.22.
  2. 「정부, 출입국 얼굴사진 1억7천만건 AI업체에 넘겼다」, 한겨레 2021.10.21.
  3. 최근 HD현대중공업이 협력회사 근로자들의 정확한 근태 관리를 위해 도입한 안면 인식기에 대해 노조는 개인정보 침해라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HD현대중 협력사 근로자 출입시스템 설치 갈등… 노조, 강제 철거에 협력사 고발 맞대응」, 문화일보 2024.4.17.
  4. 언급한 국내 사례들에서 국가와 기업 모두 구성원들이 개인정보 동의안에 명시적으로 ‘동의’했음을 근거로 제도의 법적 효력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분히 증상적이다.
  5. 쇼샤나 주보프 『감시 자본주의 시대』, 김보영 옮김, 문학사상사 2021 참조. 이 글에서는 개인의 데이터화를 둘러싼 여러 쟁점 중 기업과 정부의 결탁을 통한 감시권력의 형성 및 행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 위해 ‘데이터 자본주의’(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토마스 람게 『데이터 자본주의』, 홍경탁 옮김, 21세기북스 2018) 또는 ‘플랫폼 자본주의’(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심성보 옮김, 킹콩북 2020) 대신 쇼샤나 주보프의 명칭을 따른다.
  6. 같은 책 322~23면.
  7. 김홍중 「플랫폼의 사회이론: 플랫폼 자본주의와 알고리즘 통치성을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41집, 2022, 31~38면.
  8. ‘나’가 마지막 날 수이에게 “내 남자친구랑 비슷한데?”(257면) 하고 거짓말을 내뱉은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나’가 수이와 관계 맺기를 포기한 이유에는 퀴어성에 대한 외면이 결부되어 있다. 이 역시 다각도에서 검열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9. 이은지 「두 번째 인간」, 『쓺』 2024년 상권, 1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