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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⑩

 

나는 ‘산문’에 살아요

 

 

김중미 金重美

작가, 활동가. 소설집 『조커와 나』, 장편소설 『나의 동두천』 『모두 깜언』 『곁에 있다는 것』 『너를 위한 증언』 『느티나무 수호대』,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 『꽃섬 고양이』,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 등이 있음.

mansuk99@hanmail.net

 

 

덕정산과 진강산은 우리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며 마주 보고 있다. (…) 진강산은 봄이 가장 예쁘다. 산수유를 닮은 생강나무가 겨자색 꽃망울을 터뜨려 산언저리를 은은하게 물들이기 시작하면 계곡을 따라 물오리나무가 연둣빛 뭉게구름을 피워 낸다. 그 무렵 덕정산 언저리에서부터 한 송이 두 송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진달래가 순식간에 붉은 꽃무리를 이루어 덕정산 산마루를 붉게 물들이면 마을에는 목련과 왕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조팝나무가 하얀 꽃송이를 피워 올리고 개복숭아꽃이 화려하게 피어날 때쯤이면 이번에는 왕벚꽃이 진강산 산마루 턱밑까지 연분홍빛 뭉게구름을 피웠다가 연둣빛 구름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모두 깜언』, 창비 2015, 27~28면)

 

청소년 소설 『모두 깜언』은 내가 살고 있는 강화 양도면 삼흥리를 배경으로 쓴 농촌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앞의 글은 딱 지금 이맘때의 우리 마을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런데 지난 며칠 갑자기 날이 따뜻해지면서 진달래, 개나리, 벚꽃, 매화, 배꽃이 한꺼번에 만개하고, 개복숭아꽃과 조팝나무꽃까지 피었다. 날마다 오르내리는 마을 길가에는 웃자란 하얀 냉이꽃과 노란 꽃다지, 보랏빛 왜제비꽃과 흰 남산제비꽃, 노란 민들레, 하얀 민들레, 참개별꽃, 보랏빛 개불알꽃까지 피어 꽃잔치를 열었다. 평소보다 이르게 핀 꽃들이 많지만, 누구 하나 도드라져 튀지 않고 조화롭다. 갑자기 만개한 꽃을 보며 기후위기를 걱정하면서도 나비라도 된 것처럼 꽃이 핀 곳을 쫓아다닌다.

 

*

 

내가 사는 강화군 양도면은 강화군 서쪽 중간쯤 있다. 최근 몇년 사이 전원주택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귀촌한 이들이 늘었지만 여전히 면민이 4천명을 겨우 넘는다. 나는 1988년 인천의 오래된 빈민지역인 만석동에 ‘기차길옆공부방’을 열었다. 지역에서 만난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과 함께 좀더 지속적인 공동체를 꿈꾸기 위해 2001년 양도면으로 귀농했다. 처음 귀농했을 때만 해도 이곳은 전원주택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아침이면 양도초등학교로 걸어가는 아이들과 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에서 읍내로 가는 버스를 타는 중고등학생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우리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돌담과 오래된 농촌주택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마을에 집이 늘어나고 마을 어귀에 식당과 까페와 편의점까지 생겼지만 이제 아침에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중고등학생은 우리 공동체 아이들 둘뿐이다. 장날에 나물이나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팔러 읍내에 나가는 노인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강화 곳곳이 달라졌다. 산언덕이 깎여나가고 논이 메워져 일본이나 유럽 어디쯤에서 보았던 집을 닮은 전원주택이 늘어나고 있다. 강화읍 바로 옆 선원면에는 1300세대가 넘는 아파트까지 들어선다. 하루가 다르게 논과 산이 사라지는 강화로 가을이면 변함없이 기러기와 오리 떼들이 돌아온다. 그래서 기러기들의 끼룩끼룩 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해마다 먹이를 구하고 쉴 곳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난겨울에는 기러기들이 마을 안쪽 논까지 들어와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기러기들이 위험을 무릅쓸 만큼 생태계가 망가진 탓이다.

 

양도면은 원래 위량면과 상도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위량면의 건평, 삼흥, 인산, 상도면의 길정, 도장, 조산, 능내, 하일을 합해 양도면으로 조정했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삼흥리는 존강(存江)동, 삼문(三門)동, 흥천(興天)동 세곳을 합쳐 두개 리로 나누었다. 존강동은 ‘종갱이’와 ‘월정’ 두 마을을 묶어 삼흥1리가 되고 삼문동과 흥천동은 삼흥2리가 되었다. 종갱이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시내와 높은 산이 있다는 뜻의 ‘종강(宗江)’을 마을 사람들이 편하게 부르다보니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월정은 ‘다릿말’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에 있던 우물에 달이 비쳐 ‘月丼’이라고 불려왔다. 월정에 사는 청년 농부들이 2010년쯤 만든 팜스테이의 이름도 ‘달빛동화마을’이다.

삼흥2리 중 ‘산문’은 말 그대로 ‘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우리 마을 어귀에서 용내천을 따라 20분쯤 올라가면 진강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원래 흥천은 흥천사(興川寺)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도 ‘興川’이라고 하다가 마을에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하느님의 영이 흥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興天’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삼흥2리에는 교회가 둘 있는데, 산문에는 1901년에 지은 ‘대한성공회 삼흥리교회’가, 흥천에는 1906년에 시작한 ‘흥천교회’가 있다.

강화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명소가 강화읍과 온수리에 있는 성공회 성당이다. 두곳 모두 한옥과 서양식 교회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물이라 교회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그만큼 아름답다. 강화는 성공회 교회가 열두곳이나 되는 한국 성공회의 뿌리와 같은 곳이다. 우리 마을의 삼흥리교회도 강화의 다른 성공회 교회처럼 오랫동안 마을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삼흥리교회는 산문 한가운데에 있다. 작고 아담해 마당 한쪽에 있는 종탑을 보지 못하면 평범한 일반 주택으로 오해하기 일쑤다. 내가 이사 오던 23년 전만 해도 마을의 대소사는 삼흥리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문도 여느 농촌처럼 노인들만 남다보니 교회 공동체도 예전 같지 않다.

 

흥천교회 전경. 90년 전 돌로 지은 교회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김중미)

흥천교회 전경. 90년 전 돌로 지은 교회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김중미)

 

몇년 전, 공부방 수업에 온 아이들이 흥분해서 외쳤다.

“이모, 지금 흥천교회에 박보검이랑 송혜교가 왔대요. 우리 가서 봐요. 빨리요.”

결국 남편이 아이들을 승합차에 태우고 흥천교회까지 갔다 왔다. 흥천교회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도 남을 만큼 건물이 예쁘다. 1939년에 돌을 쌓아 지금의 건물을 지은 교회는 몇년 전 대대적인 수리를 하면서도 외벽을 그대로 보존했다. 수리비용이 재건축 비용보다 더 들었을 테고, 교회를 더 키우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텐데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 담임목사와 신자들이 존경스럽다. 흥천교회는 한국의 감리교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근대교육에서도 큰 역할을 한 곳이다.

 

삼흥리 흥천에 있는 양도초등학교는 역사가 무려 116년이 되었다. 양도초등학교는 흥천교회를 세운 유교학자 김용하와 지사 전병규가 시작한 야학이었다. 그곳에 강화 보창학교 교장이던 이동휘가 찾아와 흥천야학을 ‘보창학교 지교’ 중 하나인 ‘흥천보창학교’로 키웠다. 강화 진위대장이었던 이동휘는 1905년 진위대를 그만둔 뒤, 강화읍 동영 터에서 보창학교를 열고 교육운동과 항일운동에 투신한다. 강화읍에서 시작한 보창학교는 강화 전역과 통진군, 황해도, 개성, 충청도, 함경도로 확대됐고,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기본 교과목을 가르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후 이동휘는 일본이 강제로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전등사에서 의병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의병투쟁을 주도해 수배령이 떨어진다. 이동휘가 수배를 피해 강화를 떠나 있는 사이 흥천보창학교의 경영이 어려워졌고 교장이던 전병규가 자기 소유 땅을 학교에 기증해 초가집을 새로 지어 ‘사립흥천합일학교’로 개교한다. 합일학교는 원래 박능일이 ‘잠두의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기독교 사립학교로 강화 근대교육의 모태다. 강화읍의 제일합일학교가 흥천합일, 조산합일, 광창합일, 덕적합일, 장봉합일, 통진합일로 확대되었다. 이후 양도초등학교는 일제의 사립학교령에 의해 국립보통학교로 바뀌어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렇게 긴 역사를 가진 양도초등학교는 우리가 귀농한 뒤 계속해서 폐교 위기에 시달렸다. 그래서 신학기 때마다 양도초등학교 학부모인 남편과 성공회 신부님, 양도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양도초등학교에 보내달라고 가정방문을 하고 만석동 공부방 친구들을 양도면으로 데려와 폐교 수순인 복식 학급을 막았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농촌계절학교 덕분에 양도초등학교에 학생들이 점점 늘었다. 한때는 학교 인근으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많아져 집값이 오르기까지 했다. 그때 강화 양도면에 자리 잡은 학부모 중 일부가 계속 남아 진강산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 진강산 마을공동체는 양도초등학교, 조산초등학교, 동광중학교, 산마을고등학교 학부모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로 한달에 한번 동네 구성원들이 먹거리와 즐길 거리, 배움을 나누는 장터인 씨마켓을 열고 다양한 소모임을 운영한다. 양도면에는 진강산 마을공동체뿐 아니라 진강산 마을협동조합, 주거 공동체 ‘강화바람언덕’, 자람도서관, 발달장애인 공동체 ‘큰나무 캠프힐’, 도감뿌리 농원, 양도친환경작목반, 북스테이를 하는 책방 ‘국자와주걱’이 따로 또 같이 공동체를 도모하고 있다. 지난 주말 책방 ‘국자와주걱’에서 황사 없이 맑고 따뜻한 봄날에 딱 어울리는 북콘서트가 열렸다. 진강산 아래 사는 그래픽노블 작가 김금숙 선생님의 『풀』(창비 2024)이라는 만화를 소재로 인디 가수가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날 초대 손님으로 무대에 오른 큰나무공동체의 우쿨렐레 중창단은 능내리에 있는 자람도서관에서 우쿨렐레를 배웠다.

그러나 아직도 이주민과 선주민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특히 세련되고 번듯한 전원주택을 지어 ‘시골’로 온 이주민들은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살기보다는 자신들만의 전원생활을 유지하고 싶어하고, 그런 태도가 주민간 갈등의 원인이 된다. 은퇴한 사람들이나 인근 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도시의 번잡한 생활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 굳이 마을공동체와 가깝게 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얼마 전 마을 청소 때는 아직 얼굴을 익히지 않은 이주민들도 꽤 많이 왔다. 선주민과 이주민이 데면데면한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이주민들이 마을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신호다.

나는 삼흥리의 생태환경과 마을공동체가 더 훼손되지 않으면 좋겠다. 산문, 흥천, 종갱이, 건평리, 인산리, 도장리, 능내리, 조산리, 하일리에서 논밭을 일구는 농부들이 농사를 계속 이어가면 좋겠고, 건평 바다를 끼고 고기잡이하는 어부도 계속 생업을 이어가면 좋겠다. 양도면으로 귀촌해 협동조합을 만들고 동아리를 만들어가는 이주민들이 가라앉은 마을 분위기를 들썩이게 하면 좋겠다. 우리 마을의 환경과 마을공동체를 지키려면 선주민과 이주민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 아직은 서로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와 우리 공동체도 사부작사부작 움직여볼 생각이다.

 

*

 

강화에 들어와서 살면서부터 남편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아무래도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봐.”

해 질 무렵 붉게 물드는 서쪽 하늘과 바다를 볼 때, 봄이 와 온 산이 연둣빛, 분홍빛 꽃구름을 뭉게뭉게 피워낼 때, 논물 위로 달이 비치고 산그림자가 비칠 때, 한여름 진초록 산과 들을 바라볼 때 등등. 강화에 살다보면 감동의 순간이 수시로 찾아온다.

강연을 가서도 종종 말한다. 내가 강화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글 쓰는 사람으로 살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강화 산문으로 와 살면서야 우리의 이웃이 인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문에 이사 와 처음 만난 이웃은 눈이 녹기 시작한 마당에 내려앉는 작은 새들이었다. 40마리쯤 되는 새들이 다 참새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습이 모두 달랐다. 창문 앞에서 조류도감을 들고 며칠을 서 있고 나서야 그 새들이 박새, 진박새, 쇠딱따구리, 노랑턱멧새라는 걸 알았다. 그들처럼 작은 새들은 늦은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무리 지어 천적을 피하고 먹이를 함께 구하며 살다가 3월이 되면 무리를 떠나 짝을 이루어 다녔다. 그쯤에는 큰오색딱따구리와 청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벚꽃이 피자 소쩍새가 울고, 농부들이 논을 갈고 물을 댈 무렵 백로와 황로, 저어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숲이 연둣빛에서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으면 휘파람새와 꾀꼬리, 뻐꾸기가 차례로 오고, 후투티도 마을회관 옆 밭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집 처마에는 제비가 집을 지었다. 모내기를 마친 이른 새벽 논에서 해오라기를 만난 날, 집 아래 계곡을 날아오르는 청호반새를 보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한번은 내 방 책상에 앉아 글을 쓰다 고개를 들었는데 창밖에 있던 수꿩과 눈이 마주쳤다. 수꿩의 깃털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했다. 며칠 뒤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난 까투리는 꺼병이 아홉마리를 데리고 계곡으로 향하고 있었다. 9월이 되자 할미새와 노랑할미새가 큰 호를 그리며 오솔길 위를 날고, 10월이 되니 기러기들이 끼룩끼룩 편대를 이루어 날아왔다. 기러기가 벌판에 앉아 먹이를 구하는 동안 말똥가리가 유유히 푸른 하늘을 날았다. 겨울에는 들판과 갯벌이 기러기 떼와 여러종류의 오리 떼 차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들판에서 독수리 떼를 만났다. 안경을 끼고도 10미터 안팎에 선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시력이지만 실루엣만으로 독수리인지 눈치채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화공동체 세 식구가 산문 산골짜기에서 흥천으로 이사 온 뒤 집들이를 하던 날. (사진: 김중미)

강화공동체 세 식구가 산문 산골짜기에서 흥천으로 이사 온 뒤 집들이를 하던 날. (사진: 김중미)

 

새들만이 아니다. 강화로 오기 전에는 길을 가다가 너구리나 고라니와 마주치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집 가까이 다람쥐와 청설모가 살리라고는, 길고양이와 버려진 개들이 먼저 와서 같이 살자고 청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집 아래 냇가에는 가재와 물벼룩이 살고, 개집 옆에는 열살은 넘었을 두꺼비가 살았다. 반가운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혈목이, 살모사, 칠점사, 무당개구리, 그리고 걸핏하면 집 안까지 들어오는 지네와 온갖 벌레들, 여름이면 빛을 찾아 창문과 벽에 달라붙는 크고 작은 나방들, 현관 밖에만 나가면 달려드는 온갖 모기와 날벌레들은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적당히 피하며 함께 사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고작 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밖에 모르던 내가 봄부터 순서를 지키며 모습을 드러내는 맵시벌, 호박벌, 꿀벌, 흰나비, 노란나비, 부전나비, 모시나비, 호랑나비, 제비나비의 자태에 마음을 빼앗겨 그들이 나오는 시기를 외우게 되었다. 늦여름이면 물가에서 깜박깜박 불빛을 내며 날아오르는 반딧불이도 황홀했다.

강화에 오기 전 내가 아는 나물은 냉이, 달래, 쑥이 전부였다. 그런데 봄이 되자 우리 집 주변으로 나물이 지천으로 싹을 틔웠다. 원추리, 질경이, 꽃다지, 미역취, 곰취, 참취, 수리취, 산부추, 산마늘, 돌나물, 머위에다 엄나무순, 다래순, 우산나무순까지 셀 수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먹을 수 없는 풀에도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안 순간 이제까지와 다른 내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을 따라다니며 아무리 배워도 나물의 이름을 다 욀 수 없었다. 나는 마흔이 돼서야 가을에 떨어지는 도토리도 다 똑같은 게 아니라 여섯종류나 된다는 것을, 김유정의 ‘동백꽃’이 붉은 동백이 아니라 겨자색 생강나무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산문에 살면서 사람이 그 많은 생명과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왔는지를 하나씩 배워갔다. 남편의 농사 선생님이셨던 민지 할아버지는 콩을 언제 심느냐는 말에 “보리가 누렇게 되기 시작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보리가 언제 누렇게 되냐고 다시 물으면, 답답해하시며 말씀하셨다. “아, 꾀꼬리가 울 때지.” 처음 수확한 고구마를 크기별로 고르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면서는 한숨을 쉬셨다. “고구마는 다 고구마지. 뭐 하러 고구마를 크기별로 고르고 있시겨?” 처음 논농사를 시작하며 이것저것 묻는 남편에게 민지 할아버지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셨다. “작물도 주인 발소리를 다 알아들어. 그저 자주 들여다보고 살피면 돼.” 귀농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지식과 지혜를 나는 여기 산문에서 배웠다.

 

이제 우리 마을에도 모판을 만들 때나 못자리할 때, 모내기 때도 울력이 없다. 처음 산문에 왔을 때만 해도 남편은 농번기 때마다 흥천이며 산문이며 할 것 없이 품앗이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울력을 나갔다 와서는 자랑 삼아 말했다.

“삼흥리에서는 정한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최고야. 도장리 현규네 어머니는 그 연세에도 점심에 참까지 해 오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게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어.”

그러나 이제 어디서도 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노인들만 남은 농촌에서는 모내기할 모조차 농협에서 사다가 이앙기로 심는다. 그나마 있던 벼농사도 점점 줄고 포도, 딸기, 인삼, 버섯 등 계절노동자들을 써야만 하는 일이 늘어난다. 삼흥리에는 드물게나마 부모님의 농사를 물려받은 청년들이 있고 도시 청년들이 귀농할 수 있도록 애쓰는 어른들도 있다. 그러나 선뜻 청년들에게 귀농을 추천하기 어렵다. 여전히 농사로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도 다른 농촌처럼 농사짓는 사람은 점점 줄고 여유있는 전원생활을 누리려는 귀촌인들만 늘어난다. 나도 늙은이면서 나이 든 귀촌인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농촌을 지키고 이 생태계를 이어가려면 농사에 뜻이 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에 답답할 뿐이다. 아직은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농촌은 이제 희망이 없어”라고 무책임하게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꿈틀거리는 중이다. 벼농사를 이어가기 위해 산문, 도장 농부들과 도움을 주고받고 도시 사람인 만석동 식구들과 함께 포도 농사를 지으며 철 지난 것처럼 보이는 도농 직거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또 뜻 맞는 양도면 사람들과 같이 이런저런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예순을 넘고 보니 잘 살기 위해서는 그저 되는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서만은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 애쓰고 살자고 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 협력하는 것도, 인간과 비인간이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 생태계를 지키는 것도 모두 애를 써야 하는 일이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와 공존하려면 앞으로도 애를 써야 할 것 같다. 내가 오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과 내가 떠난 뒤 살아갈 사람들의 시간을 잇기 위해서, 인간과 비인간의 삶을 연결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