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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막다른 골목에 처한 소설의 표정

 

 

양재훈 梁宰熏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반박귀진의 하수들과 철없는 바틀비들: 「잘 살겠습니다」를 중심으로 본 장류진 소설 등장인물의 두 중심 유형」 「새해가 오게 하려면」 등이 있음.

ddalgimilk2u@naver.com

 

 

 

조금도 새롭지 않지만, ‘포스트모던’만큼 현재를 잘 나타내는 말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모순적인 용어인데, 근대가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판단과 근대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했다는 상반된 판단을 함께 내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열리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강고한 근대의 규약들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답답함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시대의 삶의 방식은 이제 그 시효를 다했으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듯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가로막힌 채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질주해보고자 해도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막막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무엇인가.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두권의 소설집은 그러한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인간의 표정을 담고 있다.

 

정태언 『시베리아, 그 거짓말』(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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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언의 소설집 『시베리아, 그 거짓말』은 자신을 가둔 현실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은 비정규직 지식인을 초점화자로 삼는다. 탈주의 환상이 특히 도드라지는 것은 ‘시베리아 연작’으로 묶을 수 있을 법한 네편의 소설 「한 뼘」 「시베리아, 그 거짓말」 「골로먄카에 대한 상상」 「아프리카」이다. 네 작품의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전공과 다른 시베리아에 대한 강의를 맡은 뒤 시베리아 연구소 등을 맴돌며 살아온 인물이다. 「한 뼘」과 「아프리카」에서 주인공은 각각 러시아의 알타이와 투바를 여행하는데, ‘카이’ 또는 ‘목노래’라 불리는 현지 전통음악을 직접 듣기 위해서다. 자신들이 이어받은 전통과 조상들이 삶을 일구었던 땅을 섬기는 그 노래는 이곳의 꽉 막힌 상황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표상한다.

「한 뼘」의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이 “한 뼘” 모자라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근소한 점수 차로 대입에 실패해 재수를 해야 했고, 지도교수의 교통사고로 학위증을 며칠 늦게 받는 바람에 교수 임용이 무산되었다. 그의 삶은 이사 후 공간이 한뼘 모자라 제대로 배치하지 못했다는 가구처럼 뒤틀려 있다. 이처럼 가능성이 가로막힌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우주공포증이다. 그에게 우주는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을 뜻한다. 그것은 그를 가두고 있는 답답한 현실의 대체물이다. 그는 숨 쉴 수 없는 우주처럼 답답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다른 삶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 삶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이것이 그가 알타이, 즉 그가 속한 세계와 구별되는 가능성을 지닌 장소로 떠나는 이유다. 그곳은 우리 존재를 단절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과의 일체감이나 전통과의 연속성을 간직한 세계다. 그가 그토록 카이를 듣고 싶어하는 것도 그것이 연속성을 상징하는 대상이어서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은 카이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에게 카이를 들려준 ‘카르쉬’는 자신의 노래가 알타이 땅에 대한 헌사이며, 알타이의 하늘에 있는 어머니를 위한 노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알타이를 넘어 저 우주로 통하는 노래”(40면)라고 말함으로써 ‘우주’를 단절이 아닌 연속의 공간으로 재해석하게 해준다. 한편 카르쉬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좁디좁은 알타이 땅에서 벗어나기를 꿈꾼 인물이기도 하다. 카르쉬는 알타이의 전통과 그것을 품은 대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그가 꿈꾸던 다른 삶의 가능성을 포기한 댓가로 얻은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애향심’에는 짙은 비애가 깃들어 있다.

「아프리카」에서 주인공은 투바의 목노래를 듣기 위해 투바 국립극장 부원장인 ‘온다르’를 만난다. 이국이 품고 있을 다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안고 만난 온다르지만, 그는 오히려 아프리카를 마음에 품은 채 살아왔다. 그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의 방에 별 쓸모도 없는 아프리카 지도가 걸려 있다는 말을 읽은 뒤 아프리카를 꿈꿨다고 한다. 온다르의 아프리카는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것과 다른 삶을 품은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태언의 소설 속 ‘시베리아’는 현실을 벗어나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이 결국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공간이다. 의미로 충만한 삶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시베리아는 실상 이곳의 답답한 현실을 뒤집어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요컨대 『시베리아, 그 거짓말』은 삶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감각을 지닌 인물이, 이 답답한 삶과는 다른 가능성을 지닌 공간을 상상하고 찾아가보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독특한 것은 이러한 상상의 공간인 시베리아가 결국 주인공의 삶을 바꿔주는 곳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베리아, 그 거짓말』의 주인공들은 시베리아로의 완전한 이주를 꿈꾸지 않으며, 단지 잠시 동안의 여행만을 원할 뿐이다. 이는 그들에게 시베리아가 단지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는 다른 삶이 어딘가에 있다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계기로서만 기능함을 뜻한다.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전통과 자연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따라서 답답하게 가로막혀 있다는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삶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들이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의 공간으로 상상했던 시베리아조차 현실과 다르지 않은 비좁은 공간이라는 점이지만 말이다.

 

 

성혜령 『버섯 농장』(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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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경우 우리는 어디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그럴 때 인간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은 연대할 대상이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과 함께함으로써 위로를 얻고 한걸음 내디딜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성혜령은 바로 그런 친밀한 연대의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버섯 농장』은 이같은 의구심을 필터로 인간관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채워진 소설집이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정할 수 있었다면 수록작 제목 중 하나인 ‘윤 소 정’을 골랐을 것이다. 작품의 내용보다는 제목 그 자체 때문이다. 「윤 소 정」은 ‘윤’ ‘소’ ‘정’ 세 친구의 이야기인데, 제목에서는 마치 한 사람의 이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학창시절부터 함께해온 친구들로, 나란히 두면 한 사람의 이름으로 보이는 그들의 이름처럼 가깝게 지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 인물의 이름 사이의 빈칸이다. 이름들 사이 저 불길한 띄어쓰기야말로 그들 관계의 진실을 보여준다. 이 제목은 인간의 관계는 가장 깊은 곳에 언제라도 폭로될 수 있는 균열과 서로에 대한 근본적인 몰이해를 품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운 관계라 해도.

『버섯 농장』의 수록작에는 가족이나 친구, 선후배 등의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별히 가까우리라 짐작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정작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관계에 내재한 균열이 가시화되는 장면들이다. 독특한 점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인물들 사이에 균열이 새롭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재해 있던 균열이 사건을 통해 가시화될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성혜령의 소설에서 사건은 단지 정해진 결말을 위해 필요한 장치일 뿐인데, 사건의 역할이 이처럼 축소되어 있는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성혜령의 독특한 시각 때문이다. 인물들은 이미 서로의 관계 밑바닥의 균열을 인지하고 있지만, 단지 지금껏 그래왔기에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부부, 가족, 친구, 동료 등 인연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성혜령의 소설에서는 사랑, 우정, 연대감 같은 것이 아니라 관성인 셈이다. 그렇기에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버섯 농장」은 한 남자의 죽음을 계기로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인 ‘진화’와 ‘기진’ 사이의 관계가 균열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실상 남자의 죽음은 두 사람에게 어떤 충격도 주지 않으며, 이후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은 단지 진화와 기진 사이의 관계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틈을 내보일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화가 “우리는 시체를 훼손”했다고 말하자 기진은 “우리가 아니라 네가 한 거”라고 선을 긋는다. 기진이 그간 감춰왔던 거리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진화 역시 숨겨왔던 진심을 말한다. “내가 억울한 빚이 생겼다고 했을 때 너는 단 한번도 나를 도와주겠다고 안 했어.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이처럼 내재해 있던 파국이 가시화되는 장면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반복된다. 「윤 소 정」의 정은 오랜 친구인 윤과 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물가」의 ‘나’ 역시 친구 ‘유안’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려다가 관계의 파국을 맞는다.

성혜령의 소설은 이처럼 인간관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균열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이 균열의 사회적 원인이다. 예컨대 「버섯 농장」의 두 인물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계층의 간극 때문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 덕에 적극적으로 직장을 구할 필요가 없는 기진은 진화가 직장과 주거공간에 품은 불만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에 대해 기진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은 이 거리감을 선명히 보여준다. 기진이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진화에게 한번도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11면)뿐이다. 기진에게 진화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뻔한 사람, 그와의 관계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타인들 중 하나에 그치는 셈이다. 진화 역시 둘 사이의 간극을 선명하게 인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기진이 자신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는 기진을 “세습의 수혜자”(한영인 해설 「친밀한 적」, 249면)로만 바라보는 뒤틀린 시각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타인과 삶을 대하는 진화의 태도에 기본적으로 배어 있다.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 뒤틀린 시각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습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성혜령에게 현재의 세계는 세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부여된 곳이다. 여기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연대는 불가능해 보인다. 가까워지려 할수록 오히려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성혜령은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나름의 방식을 찾은 듯하다. 인물들에게 어떤 결정적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사건을 배치하고 그것을 통해 이미 있었던 관계의 균열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

 

두권의 소설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길을 찾는 일이 지난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사방이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기를 멈출 수는 없다. 물론 정태언과 성혜령의 소설은 냉정하다. 그러나 가로막힌 길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을 적확하게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서늘한 비애를 담고 있는 소설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