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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비평, 또는 반복과 번복 사이의 대화

 

 

최진석 崔眞碩

문학평론가. 저서 『사건의 시학』 『사건과 형식』 『불가능성의 인문학』 『감응의 정치학』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등이 있음.

vizario@gmail.com

 

 

 

‘소통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하버마스(J. Habermas)는 ‘이상적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째, 발언 기회가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 둘째, 누구의 말이든 검증에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셋째, 참여자는 서로에게 진실해야 한다. 넷째, 소통은 대화적 규범성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이런 논리는 ‘정상적’ 의사소통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이상적 상황’을 조건 짓지만, 한편으로 계급과 성별, 인종, 성적 지향 등에 의해 차등화된 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상적’이라 비판받는다. 언어는 일종의 공유재로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듯싶지만, 실상 우리는 저마다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내뱉으며 소통 불가능의 장벽에 가로막히는 탓이다. 가령 부와 권력의 차이는 법정에서의 발화조차 비대칭적으로 만들고, 성별의 차이는 제도적 보장에도 불구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성한다. 관건은 단지 언어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원론적 가정에 있지 않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불균등하게 나뉘어 있는 현실, 동일하지 않은 언어가 맞부딪치는 불평등한 관계 자체가 문제이다. 소수자가 엄존하는 현실과 더불어 비인간 타자가 화두가 된 우리 시대에,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비평은 곧 대화라는 명제를 거부할 비평가는 없다. 모든 비평가는 글쓰기를 통해 작가와 텍스트, 세계와 만나고 소통한다. 하지만 그 대화가 언제나 공평무사한 이상적 상황 속에서 진행되지는 않는다. 대칭적인 관계에서 서로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대화는 흔치 않다. 비평적 대화는 이상을 전제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실을 두루 살피고 거듭 확인할 때 간신히 성립된다. 당연하게도 이런 과정은 결코 안온하거나 순탄하지 않다. 읽기의 반복은 쓰기의 번복을 낳고, 번복된 쓰기는 다시 읽기를 강요한다. 어쩌면 대화로서의 비평이란 그같은 쟁론의 되풀이로 정의해야 할지 모른다.

조대한의 첫 평론집 『세계의 되풀이』와 박동억의 첫 평론집 『침묵과 쟁론』은 공통적으로 비평의 반복과 번복을 거론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반복과 번복은 불가능한 대화의 악무한적 과정이 아니다. 거꾸로 이들은 지금까지의 비평적 대화가 작품에 대한 공정하고 엄정한 태도나 참여의 규범적 원칙을 과신한 나머지 현실의 비대칭성이나 불평등, 혹은 독해의 일면성을 간과했던 게 아닌지 되묻는다. 비평을 이상 혹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 위에 정초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머뭇거림과 주저 속에서 왔던 길을 되짚어보고 다시 돌아가보는 반복과 번복의 행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평적 읽기와 쓰기는 언제나 쟁론의 되풀이 가능성을 함축한다. 이 두 평론집은 그 가능성에 관한 기록이다.

 

 

조대한 『세계의 되풀이』(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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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표절’은 프랑스 비평가 삐에르 바야르(Pierre Bayard)가 제안한 흥미로운 개념이다. 후대의 작가가 전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통념과 달리, 전대의 작가가 후대를 모방한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조대한은 왜 이런 역설적인 개념을 평론집의 화두로 삼았을까? 아마도 지상에 탄생한 모든 것, 특히 문학작품이 겪어야 할 ‘운명’ 때문 아닐까? 운명이란 거창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작품이 인지되고 평가받기 위해 거쳐야 할 시간의 과정을 말한다. 읽기의 반복을 통해 언어적 구조물, 허구적 창작물의 외형을 벗어나 억압된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의 발견이 바로 그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문학을 오랫동안 동경했던 이유가 바로 그러한 되새김질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늘 늦되지만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약속처럼 되짚으며 등장하는 여러 작품들 덕분에 나는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급작스러운 사건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의사소통의 규칙들로는 환원되지 않는 읽기의 비밀, “누군가가 애써 읽지 않으면 영원히 독해되지 않는 공백의 상태”(7면)를 넘어서기 위한 반복에의 의지처럼 들린다.

반복과 읽기, 읽기와 반복의 실례를 우리는 여러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바, 예컨대 유진목의 작품들에 대한 독해를 보라. 조대한은 시인의 시 내부에서, 또는 다른 시들과의 관계에서, 나아가 또다른 시집들과의 관계에서 은밀히 반복되는 장면들을 짚어낸다. 그는 이런 장면들을 ‘문장 단위의 반복’ ‘작품 단위의 반복’ ‘시집 단위의 반복’ 등으로 재치있게 추려내는데, 여기서 초점은 단어나 구절의 동형적 되풀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조대한은 시인이 말하지 않은 것, 쓰지 않은 것,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여주면서, 그것들이 “선형적으로 긴밀하게 이어진 이야기라기보다는, 가능했던 삶의 순간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배치된 장면들”(103면)이 아닌지 반문한다. ‘예상표절’이라는 개념이 보여주었듯, 하나의 시적 언표는 또다른 시적 언표와의 공명과 연결을 통해 비로소 삶의 다면성을 입체적으로 연출한다. 그것은 “단발로 완결되지 않을 잉여의 이야기가 있을 때 또는 발화를 덧붙여야 하는 필수적인 연유가 있을 때 행해지는 수행”(105면)으로서, 한편의 텍스트로는 충분히 언명되지 못했던 또다른 텍스트들의 몸이 내뱉는 “분신들의 메아리”(150면)에 가깝다.

갈라져 나온 신체를 의미하는 “분신”은 주체로 호명받지 못하는 타자의 이미지, 그 생존의 전략을 뜻한다. 조대한은 주체든 타자든 일방의 표상 속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는 시적 윤리가 분신의 이미지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모호함은 우리 시대의 언어가 ‘자격을 갖춘 주체’ 또는 ‘대신 말해주어야 하는 타자’ 사이의 불투명성으로부터 발생하기에 빚어진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와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벌어졌던 비극은 규범과 규칙의 이상적 상황 ‘바깥’으로부터 들려온 낯선 소리였다. “내밀한 시적 주체가 외밀한 타자와 겹쳐지는 발화의 시작점”(155면)인 그곳‘들’로부터 정제되지 않은 비명을, 불확실한 소문을 청취하고 문자로 옮길 때 글 쓰는 자는 비평가가 된다. 아니, 비평가로서 자신을 의식할 것이다. 이같은 자기의식은 작가와 작품, 세계를 마음대로 규정하거나 언표 불가능한 사건에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을 이상적인 주체로 구축하는 것과 다르다. 자기를 지우면서 타자를 받아들이되 타자에 함몰된 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는 “새로운 감정을 위한 텅 빈 시간의 가능성을 획득”(209면)하는 과정에 비견된다. 비평가 역시 한명의 분신으로서 글쓰기를 통해 작가와 작품, 세계를 만나고 자신이 누구인지 되물어야 한다.

반복은 그 과정의 형식이다. “일종의 고집처럼 작동하는 힘”과 같이 늘 되풀이되는 세계를 마주하여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을 거부하며, 불화의 태도를 유지하려는 나의 모습”(331면)이 빚어진다. 이 점에서 반복은 또한 ‘재발명’이기도 한데, “전에 없던 것을 창조한다는 뜻보다는, 잊혔던 것을 재발견하고 그에 다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261면)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 반복과 읽기의 되풀이야말로 조대한 비평의 대화적 소임일 것이다.

 

 

박동억 『침묵과 쟁론』(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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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아무리 보편성을 내걸어도 판결의 언어는 대개 원고나 피고 일방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쟁론(différend)은 공평무사한 보편이 부재할 때 생겨나는 갈등으로, 애초에 불평등과 비대칭을 인지하고 시작하는 대화를 가리킨다. 평론집의 문을 여는 자리에서 박동억은 프랑스의 철학자 리오따르(J. Lyotard)의 이 개념을 빌려오며 문학의 언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묻는다. 가령 묘사대상이 발언할 수 없는 죽은 자이거나 동물이나 기계처럼 공통의 언어가 없는 비인간 존재일 때 문학은 어떻게 그들을 정당하게 언어화할 수 있나? “말은 곧 인간의 법정이다. 시인이 말할 수 없는 타자를 시에 재현한다는 것은 타자를 쟁론의 무대에 올린다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타자를 향한 시 쓰기는 말할 수 있는 시인과 말할 수 없는 타자 사이의 불평등한 대화를 입안하는 일이다.” 시인이 한명의 인간인 이상 그의 언어는 공평무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비평은 그 기울어진 대화로부터 시인이 남겨놓은 공평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분별”(11면)의 모험을 가동시킨다.

하지만 비평가는 재판관이 아니다. 시인의 실존 조건이 초래한 대화의 불균형을 교정한다거나 옳고 그름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초월적 지위에 올려두는 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인의 언어가 도달한 곳에 어떤 불가능성과 어떤 가능성이 남겨져 있는지 탐문한다. 예컨대 김혜순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문학과지성사 2019)에 관해 이야기하며 박동억은 시인이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완수 불가능한 고뇌와 대결”(65면) 중임을 밝힌다. 시인의 말을 참조하자면, 시는 ‘되기’의 여정으로서 ‘여자’ ‘짐승’ ‘아시아’라는 타자성을 경유하며 끊임없이 혼종의 비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인간적 실존 바깥으로 나설 수 없다. 말은 인간의 한계 속에 존립하는 인간의 수단인 탓이다. 인간은 동물이 되어 말할 수 없고, 동물은 인간의 언어를 가질 수 없다. 비인간 타자를 향한 그 어떤 진심 어린 발화도 타자 자체에 직접 가닿지 못한다. 따라서 시인의 글쓰기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불가피한 인간성에 대한 증언이 된다. 주체와 타자, 혹은 인간과 비인간. 문학은 이처럼 직관적인 이분법을 부정하지 않는다. 핵심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평의 과제는 시인이 길어내지 않은 텍스트의 이면마저 읽어내는 데 있다.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탈주체가 가능하다거나 인간이라는 ‘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또 다른 타협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고백하며, 인간이라는 죄악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감당해야 한다.”(66면)

일견 ‘징후적 독해’를 연상케 하는 이런 독법은 이론적 정치함이나 논리적 설득력을 지향하지 않는다. 박동억에게 비평이란 타자의 침묵을 향한 어떤 자세, 무언(無言)이 노정하는 불평등과 비대칭의 상황에 대한 개입을 뜻한다. “침묵”과 “침묵의 능력”에 대한 분별을 예시해보자.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증언할 능력도 없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침묵과 침묵의 능력을 구분해야 하며, 때로 시인들이 침묵하는 자로부터 어떤 의미를 읽어내려 할 때, 그리고 때로 시인 자신이 도리어 침묵하는 자세를 취할 때도 각 자세가 지닌 고유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하여 넓게 숭고한 타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숭고한 타자를 ‘향해서’ 말하는 것을 구분하도록 하자.”(96면) 말할 수 없음이라는 현사실성의 한계에 머무는 것과 언표되지 않는 진실을 침묵 속에 남겨두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해서”와 “향해서”의 차이는 그에 있을 터. 타자의 침묵을 향해 시인이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그로써 무엇이 드러나고 다시 침잠하는지 분별할 때 비평의 윤리가 성립한다.

물론 윤리는 도덕의 정언명령일 수 없다. 비평가는 시인의 초자아를 자처하지 않고 스스로 초월자로 나서지도 않는다. 읽기와 쓰기에서 번복은 그러한 자기부정과 성찰의 지지대를 표시한다. 분별의 책무를 떠안고 있음에도, 그것조차 언제나 번복될 가능성에 열려 있노라고. “몇 해 전의 문장을 번복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믿어왔던 신념이 깨어지기도 한다. 문장 속에서 어떤 확신을 길어올리려 하다 보면 오히려 길을 잃는 것만 같다. 어쩌면 글쓰기란 하나의 이론과 신념을 세우는 과정이라기보다 헤매는 과정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 그럼에도 왜 쓰는가. 쓴다는 행위의 본질은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일지도 모른다. (…) 그렇게 말 건넴의 행렬에 동행하는 것이다.”(6면)

 

잘 알려져 있듯, 이상적 대화에 관한 비평의 명제는 근대문학의 허상에 가깝다. 말하는 입과 듣는 귀 사이의 부조화와 불균형이 인간 실존의 근본 조건임을 떠올릴 때, 타자를 향한 공평무사한 읽기와 쓰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반복과 번복은 비평이 아직도 대화적 가능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타자를 향한 다시 듣고 다시 쓰기의 자세가 여전히 요청되고 있음을 증거한다. 조대한과 박동억의 평론집은 그 무수한 자세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