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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강명관 『이타와 시여』, 푸른역사 2024

공동자원의 한국적 기원을 찾아서

 

 

최현 崔賢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wnuni8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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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이타利他와 시여施與: 조선 후기 문학이 꿈꾼 공생의 삶』은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이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푼다는 ‘시여’ 개념으로 조선 후기 문학작품을 읽어낸 책이다.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생긴 것은 내가 10여년간 공동자원(commons)을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공동자원은 서양에서 온 개념이고 미국의 정치학자 오스트롬(E. Ostrom) 등 서양 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먼저 밝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학자가 공동자원이나 공동물 같은 역어 대신 ‘커먼즈’라는 외래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외래어는 우리가 의미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담기 위해 변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 그 원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급급하게 된다. 이래서는 우리 사례를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과 이론을 만들기는커녕 그 외래어의 의미를 넓히는 것도 어렵다.

중국에서 인도와 다른 토착적 불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 불경을 대부분 중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자어로 옮겼기 때문이다. 인도어 불경을 한문 불경으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일단 한문 불경이 간행됨에 따라 중국에서 불교가 대중화되었다. 또 중국인들은 자기 언어를 사용해 불교를 이해함으로써 중국적 불교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외래어를 자기 언어로 이해한다면 외부에서 온 개념이나 이론을 훨씬 더 토착적이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커먼즈라는 낯선 용어를 재고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오스트롬은 누군가가 사유물로 삼을 수 없을 만큼 큰 호수나 바다, 대규모 수리시설 같은 자연자원이나 인공시설이 공동자원이 된다고 보았다. 너무 규모가 커서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이 원체 불가능하거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관리했다고 생각했다. 근대 경제학적 비용/편익의 관점에서 공동자원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한번 사유화됐던 지하수나 마을 숲이 왜 다시 공동자원으로 돌아가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공동자원을 비롯해 많은 공동자원이 전근대사회 이전부터 있었고, 식민지 상황에서는 사유화됐다가 후에 공동자원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13세기 초 영국에서 작성된 ‘산림헌장’은 왕이나 귀족이 자기 영지조차 독점할 수 없게 했다. 지역 주민들은 영주의 영지에서 생계 자급을 위해 나무와 버섯 등을 채취할 수 있었다.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20세기 미국에서도 소유자가 있는 빈 주택을 홈리스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것을 법원이 허용했다. 마찬가지로 브라질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에서도 소유자가 있는 공한지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국가가 보호한다. 여기에는 보편적 논리가 내재한다. 누군가 개간하지 않은 자연자원이나 수리시설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마련한 자원은 필요한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주인이 있는 자원이라도 곤경에 빠진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하다면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여기에는 비용/편익이라는 경제학 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이런 논리와 상식에 기대어 제주에서는 근대화 이후 오랫동안 사유재였던 지하수를 1990년대 초부터 자치도가 공공 관리하도록 조례를 바꿨다. 그후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도 지하수를 독점할 수 없다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누군가가 불로소득을 얻는 것을 막고, 곤궁한 이웃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상식과 논리는 독점할 수 없는 공동자원을 곳곳에 남겨두었다.

『이타와 시여』는 공동자원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도처에, 특히 모든 것이 사유화되고 상품화된 현대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특히 이를 한국인의 오래된 심성과 가치관이라는 맥락 속에서 밝힌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책에 따르면 박지원의 『허생전』을 비롯해 조선 후기에는 타인을 위해 피해를 감수하고 은혜를 베푼 이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족출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세계적 기후문제로 조선의 민중은 생존을 위협당했다. 1695~96년의 대기근 때는 인구의 25~33%인 4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204면). 이때 다양한 계층, 신분의 남녀가 위기에 처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여 자기의 의술이나 재화 등을 나누어주는 ‘시여’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런 시여에 관한 이야기는 조선 민중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퍼졌다. 『흥부전』 『심청전』 「홍순언 이야기」 「그래야 내 아들이지」 등 시여자를 기리고 그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이타-보상담’은 인간성의 심연에 뿌리박은 것으로 초시간적·초지역적으로 존재한다(55면). 저자 강명관은 바로 그 심연에 공감과 공생에 대한 지향이 있으며, 이것이 위기에 처한 후기 조선사회를 간신히 지탱했다고 본다(249면).

이 대목에서 나는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이중적 운동’(double movements)이 떠올랐다. 이기성을 기반으로 유례없는 시장화가 진행되는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도 이타성을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을 시장화로부터 보호하려는 운동이 지속됐고 이것이 사회와 인간 생존을 떠받쳤다는 것이다. 『이타와 시여』는 조선 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의 이야기는 현대사회에도 큰 울림을 준다. 재화와 서비스가 넘쳐나지만 한편에서 누군가는 깔창을 생리대로 사용하고 많은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갑질을 당하는 이 시대에, 자연적·인공적 자원을 함께 이용·관리하여 진정한 공화국(commonwealth)을 이루려는 운동의 한국적 뿌리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스트롬은 비용/편익이라는 논리에 따라 공동자원을 설명했지만, 나는 강명관이나 폴라니의 설명이 훨씬 설득력있는 듯하다. 특히 저자의 설명은 우리나라에서 현재 벌어지는 공동자원과 공생을 향한 운동의 오래된 기원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적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초시간적·초지역적 공동관리(commoning)와 공동번영(commonwealth)을 향한 인류의 운동을 이해하고 그에 동참하며 그것을 확장하는 출발점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공동자원이라는 개념에 이 책이 말한 ‘공생’의 뜻을 담아 세계에 발화하고 ‘커먼즈’를 대신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 실마리를 이타와 시여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 강명관의 탄탄한 탐구가 훌륭한 단초가 되어준바, 앞으로 한국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 사이의 더 많은 대화와 협력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