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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수지 시히 『세상 모든 것의 물질』, 까치 2024

가속기와 실험으로부터

 

 

이관수 李寬洙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강사 ksleeyz@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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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책을 펼치기 전까지 그다지 기대가 없었다. 과학의 ‘위대한’ 성취들을 두서없이 짤막하게 늘어놓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과학은 위대해!”만 되풀이하는, 그런 길거리 설교자를 상상했다. 『세상 모든 것의 물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하다』(노승영 옮김)로 옮겨진 원제 The Matter of Everything: How Curiosity, Physics, and Improbable Experiments Changed the World(2022)에서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연상한 탓이다. ‘모든 것의 이론’의 강림이 임박했으니 흥분하시라는 소문이 지난 세기 후엽 과학계에 맴돌았지만, 그런 백일몽을 계속 꾸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다는 점을 이제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제목부터 미심쩍어할밖에.

책을 덮은 지금은 뿌듯함과 한탄이 함께 맴돈다. 책이 상징하는 과학계 안에서의 변화들이 뿌듯하지만, 그런 변화에 아무런 기여가 없는 관찰자로서는 주제넘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엇갈린 감상은 저자인 호주의 가속기 물리학자 수지 시히(Suzie Sheehy)가 입자물리학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개의 물리학사 대중 서적들이 이론적 전개를 위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 반면, 시히는 실험도구와 실험실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호기심이 이끈 과학’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자를 금속판에 충돌시켜 엑스선을 방출하는 음극선관(1장)이나, 방사선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미세한 물방울이 맺히도록 수증기를 채운 안개상자(4장)부터 둘레 27킬로미터짜리 지하터널에 설치된 대형 강입자 충돌기(12장)까지, 한세기를 약간 넘는 기간 동안 새로운 기본 입자들을 발견해온 이야기를 다양한 가속기와 검출기를 중심으로 풀었다.

일찍이 고에너지 물리학—입자물리학의 다른 이름—의 역사를 연구한 과학사학자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은 과학을 구성하는 세가지 활동인 이론, 실험, 기구가 서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 갤리슨조차 이론, 실험, 기구 순으로 그 중요성을 나열했건만 시히는 그와 반대로 기구, 실험, 발견 그리고 최소한의 이론적 개요 순으로 비중을 달리했다. 그녀가 가속기 물리학자이니 당연한 듯하다. (고에너지 상태의 입자를 연구하는 분야가 고에너지 물리학이고, 입자를 고에너지 상태로 가속시키는 장치가 가속기이다. 시히는 가속기를 개발하는 물리학자다.) 그 결과는? 물리학자들이 몸을 움직여 어떤 물체를 만들어 어떻게 사용해서 어떤 결과를 얻고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말하듯 써내려간 간결하면서도 직관적인 스케치가 나왔다.

사람들은 대부분 추상적 사고보다 구체적인 물체에 더 익숙하다. 그러니 고도의 추상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치와 실험 과정을 따라가면 길을 덜 잃는다. 이런 면에서 시히의 『세상 모든 것의 물질』은 반양성자를 발견한 에밀리오 세그레(Emilio Segrè)가 1980년에 출판한 『X-선에서 쿼크까지』에 견줄 수 있다. 다만 풍부한 도면과 사진을 포함한 세그레의 저서처럼 이 책에도 시각적 자료를 충분히 담아 구성했더라면 장치와 도구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독자들에게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시히의 책을 일독한 후 1970년대까지의 상황은 세그레의 책을, 그 이후는 이강영의 『LHC,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사이언스북스 2014)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시히의 책을 돋보이게 하는 차이는 저자가 여성 입자물리학 실험가라는 점이다. 호주의 과학저술가 마거릿 베르트하임(Margaret Wertheim)은 『피타고라스의 바지』(1997)에서 자연철학과 그 후신인 물리학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입자물리학이 과학 중의 과학으로서 사회문화적으로 일종의 종교와도 같은 역할을 자임했다고 주장했다. 입자가속기는 속인이 범접하지 못하는 성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뭇 종교의 고위 사제 집단에서 여성이 배제되듯이 다른 과학 분야보다 이들 분야에서 여성이 유독 더 소외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인과적으로만 읽으면 무리한 비약이지만, 과학사를 들여다보면서 어렴풋이 느끼던 바를 짚은 담론이었다.

세그레는 자애로운 사제로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역사서술로 승화시켰다. 반면 시히는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입장에서 자신이 입자가속기 분야에 뛰어들기 이전에 일어난 일들을 전한다. 시야가 넓어진 덕분에 독자는 입자가속기들이 지금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퍼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CT 촬영기에 들어 있는 엑스선관(1장), 대형 병원에서 방사선 동위원소를 생산하는 사이클로트론(6장),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단백질 구조를 찾아낸 싱크로트론(7장), 암 치료에 사용하는 선형 가속기(10장) 등등. 오늘날 이런 장비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은 곳은 대형 실험실이 아니라 병원 지하실이다.”(177면) 가속기 물리학은 고고한 사원에서 벗어나 이미 우리 주변에 편재하고 있었다.

시히는 세그레의 저서 이후 학계에서 재발견된 여성 실험물리학자의 활약과 좌절도 곳곳에서 소개했다. 모집단의 수 자체가 다르니 여성은 당연히 소수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시히가 그들을 과도하게 부각했을까? 그렇다고 단정하는 백래시도 있을 법한 현실이 안타깝다. 도구 개발 성과와 실험결과 및 실적 같은 물질적 증거를 보면 재발견된 여성 실험가들이 왜 더 일찍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상호 인정과 명예가 가장 큰 동기부여였던 과학계에서 놓친 재능이 얼마나 많았을까? 여성 물리학자가 적었던 현상은 물리학이 발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40여년 만에 여성 실험물리학자가 가속기 물리학을 이야기하는 대표 스피커로 주목을 끌 수 있게 된 점만큼은 무엇인가 달라지고 있다는 징조일 것이다.

이 책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연구 분야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시히도 가속기 물리학을 물리학의 대표로 여기는 태도를 은연중 드러낸다. 가속기 물리학자들이 다른 일을 찾는 것을 물리학자가 학계를 떠나는 것과 동일시하니 말이다.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이 대부분 학계를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전직 CERN〔유럽 입자물리연구소. 대형 가속기 개발과 운영이 주업무이다—인용자〕 연구자 2,700명을 조사했더니 63퍼센트는 응용기술, 금융, 정보기술 같은 분야의 민간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334면) 물리학자들이 사제의 지위에서 해방된 덕분인지 ‘호기심이 이끄는 과학’이 생존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