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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유경 『로힝야 제노사이드』, 정한책방 2024

증오와 폭력의 미얀마, 그 서글픈 현장의 생생한 기록

 

 

장준영 張准榮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연구교수 koyeyint@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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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양한 미얀마인들을 만나왔는데, 친군부이건 민주진영이건 내가 만난 이들의 로힝야에 대한 공통적 견해는 『로힝야 제노사이드: 지구상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 미얀마 로힝야의 눈물』에 서술된 것처럼 로힝야가 ‘국가안보’를 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에 따르면 중혼(重婚)과 개종으로 여카잉 지역 내 로힝야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이로 인해 원주민인 여카잉족의 삶의 터전은 위협받은 지 오래다. 이런 추세는 곧 여카잉주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할 것이며, 불교의 전통과 역사의 유지는 차치하더라도 종국에는 ‘이방인 무슬림’에 의해 미얀마가 장악되리라는 것이다. 어떻게 백만명 남짓한 사람들이 국가의 미래까지 위협할 수 있느냐고 나는 반문했지만, 로힝야의 배후에는 중동의 지원이 있다고 한다. 한발 양보하여 국가안보까지는 아니더라도 로힝야의 인구 증가로 여카잉 원주민과 충돌을 빚는 것은 불가피하며, 근본적으로 로힝야는 자국 내 무슬림과 달리 미얀마 사회에 적응 또는 동화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단언한다.

2001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중동에서 행한 군사작전을 두고 미얀마 국영 일간지는 미국을 신제국주의자로 칭했다. 무슬림은 곧 테러리스트라는 편견이 미얀마 내에서도 사회적으로 확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책의 제2부 「이슬람 학살」에도 서술되었듯이 승려를 중심으로 한 극우주의자가 등장한 시기도 이즈음이다. 승려는 사회적 지도층인 만큼 이들의 설법은 미얀마 사람들에게 진실 그 자체로 느껴졌으리라. 장기간의 군부통치로 인해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고 확보한 정보의 정확성도 담보할 수 없으니 특정 사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와 소문이 횡행하는 곳이 바로 미얀마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로힝야 문제는 반세기 이상 이어진 군부통치의 지독한 부작용이며, 그에 앞서 국민국가(nation state) 완성을 배척한 군부의 과오를 지적해야 한다는 점이다.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Ne Win) 중심의 군부는 일정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대신 소수종족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면서 국가수호를 통치 명분으로 채택했다. 그와 동시에 군부는 소수종족과 관련한 왜곡된 정보를 생산하고 이를 버마족에게 전파함으로써 구성원 간 갈등을 유도했다. 이에 군부정권은 버마족 중심의 단일민족주의와 불교라는 단일종교로 국가재편을 시도했고, 군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왕으로 세우며 신격화하는 이른바 버마족화(Burmanization), 미얀마화(Myanmarfication)를 추진했다. 2011년 이래 10년간 정전협상을 통해 평화정착 프로그램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도, 쿠데타 이후 국민통합정부(NUG)가 소수종족 무장단체를 포용하기 위한 노력이 수포가 된 것도 그 배경에는 고착화된 사회적 균열이 자리한다. 국가의 구조적 전환은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 정부 5년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웅산수찌 정부도 버마족 중심의 국정운영을 탈피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주제인 로힝야 제노사이드의 배경과 근본적인 원인도 저자 이유경이 ‘프롤로그’에서 제시한 미얀마 분쟁의 세가지 모순—민주 대 반민주(독재), 버마족 대 소수종족, 소수종족 대 소수종족 간 갈등—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근거할 때 로힝야 제노사이드는 로힝야를 포함한 무슬림이 더는 미얀마 땅에 발 디딜 수 없게 하는 군부의 집요하고도 철저한 장기기획이자 때로는 무관심이나 증오로 일관한 버마족과 극우불교도, 그리고 여카잉족 등 일부 소수종족의 동조로 가능했다는 확신이 선다.

사실 로힝야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언론을 통해 조직적 국가폭력의 현실 및 사실의 은폐, 조작, 날조 등을 이미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배경, 전개, 전망 등 로힝야에 대한 총체적 이해는 일회성 짙은 언론보도로는 부족하다.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진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해소하지 못한 지적 갈증을 풀어준다. 국제분쟁전문기자인 저자는 간헐적으로 보도되는 단편적인 기사는 뒤로하고 로힝야의 수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구조적 요인을 추적해 이를 독자 앞에 담대하게 내놓는다. 나아가 저자는 미얀마에서 발생한 반무슬림 폭동, 극우주의자들의 등장과 행보, 로힝야의 사투를 건 난민생활 등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미얀마 사회의 단면을 정확히 진단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 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제노사이드가 발생한 사회를 서로 비교해볼 수 있도록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책의 백미는 단연코 제6부 「국경의 위험한 신호」이다. 로힝야 제노사이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오로지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국경에 국한되지만, 저자는 태국과 말레이시아로 떠난 로힝야가 겪는 인신매매와 같은 반인류적 불법현장을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며 생생히 고발한다. 소명의식을 지닌 기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며, 앞으로도 저자의 취재기록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이 책에서 로힝야는 자기결정권이 완전히 부정된 핍박받는 자들로 묘사되지만 그들의 자율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점은 아쉽다. 이를테면 로힝야가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에 합병을 요청했던 이유나 미얀마 내 다른 무슬림과 달리 현지에 동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 식민시기 도시로 이주한 인도인과 달리 유독 로힝야만 유목민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계절노동을 하는 연유는 이 책에서 찾을 수 없다. 제3부 「로힝야는 ‘벵갈리’인가」에 기술한 로힝야의 미얀마 이주설 이외에 더 풍부한 가설도 존재하며, 1978년 나가밍(Naga Min) 작전 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로힝야의 수는 원래 등록주민보다 많았다. 쉐힌다(Shwe Hintha)가 아니라 지렁이(Tee Kaung) 작전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로 군부의 송환계획은 엉성했던 데 반해 로힝야의 미얀마행은 치밀하고도 조직적이었다.

저자는 로힝야 문제가 ‘봄의 혁명’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리라 전망하지만, 두 문제는 별개이다. 조금 더 매몰차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전망하면 로힝야는 미얀마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기에는 그 갈등과 대립의 간극이 예상보다 깊고 넓다. 봄의 혁명은 군부의 퇴진, 소수종족과의 대화를 통한 연방주의 모색에 방점을 둘 것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모든 구성원의 평등과 통합을 주창할 연방주의에 로힝야가 포함될 수 있을까? 국민 사이에 뿌리박힌 로힝야에 대한 고정관념을 누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로힝야라는 용어는 한국언론이 만든 정체불명의 표기이다. 전쟁이 일어난 뒤 그간 키예프로 불리던 우끄라이나 수도를 우끄라이나어에 근거하여 키이우로 바꿨던 것처럼, (미얀마인들은 부르기를 꺼린다 하더라도) 미얀마어 표기까지 존재하는 ‘로힝자’로 쓰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