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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천쓰홍 『귀신들의 땅』, 민음사 2023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가진 귀신들의 이야기

 

 

최말순 崔末順

대만 국립정치대학 대만문학연구소 교수 mschoi@nccu.edu.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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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작가 천 쓰홍(陳思宏)의 『귀신들의 땅』(鬼地方, 2019, 김태성 옮김)은 향토 소재, 동성애, 가족서사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이래 대만문학의 특징적인 면모를 고루 보여준다. 이 세가지 요소는 중국과 구별되는 대만문학의 독자성을 정립하는 데 있어 주요한 형식적, 내용적 특질로 인정받아왔다. 여기에 2000년대 초부터 대만문학에서 급부상한 귀신 모티브를 차용해 금기의 역사와 억압적인 전통, 초고속 경제성장이 초래한 부정적인 현실을 가족사 형식으로 풀어낸다.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대만 남부지역 장화현(彰化縣) 용징향(永靖鄕)에서 농가의 아홉째 아이로 태어난 천 쓰홍은 소설가이자 동시에 통역가, 배우로도 활동했고 2004년부터 지금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고향과 타향, 젠더와 몸, 생과 사에 대한 미망과 감정에 대한 구원을 다루는데, ‘터무니없는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관찰이 돋보인다.

『귀신들의 땅』은 각종 신령과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원절(中元節)에 고향에 모인 가족의 이야기다. 각지로 흩어져 있던 천씨(陳氏) 가족 구성원이 하나씩 고향인 용징으로 돌아와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과거를 회상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 모두는 저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삶의 무게와 상처로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가지고 있어 생사에 관계없이 귀신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소설 전체가 마치 하나의 강령회(降靈會) 같은데, 1부 「엄마가 안 보여」는 산산조각 난 현재를 각 인물들의 시점으로 그려내고, 2부 「톈홍이 돌아오다」는 상처 입은 가족들이 한명씩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보여주며, 마지막 3부 「울지 마」에서는 모여든 가족이 각자의 아픔을 토로하며 화해에 이르는 모습이 연출된다.

이런 과정은 인물들의 서술을 교차로 배치하여 동일한 사건에 대한 각각의 관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가족공동체 경험으로서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시공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인물간의 엇갈리면서도 겹쳐지는 이야기는 온갖 미신이 난무하고 원혼들의 귀신불이 돌아다니는 향토 전설에 그치지 않는다. 남아선호와 여성 억압, 성적 제일의 교육현장, 동성애자에 대한 금기와 멸시, 개발지상주의와 배금주의, 백색공포의 정치탄압 같은 기존 체제의 사회질서, 국가 기억과 역사로까지 확장되는 천씨 가족의 서사는 곧 대만의 현대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어떤 이는 끌려가고 어떤 이는 자살을, 또 어떤 이는 허락되지 않는 사랑에 몸부림치고 어떤 일은 기억 깊숙이 봉인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귀신이 돌아온다는 중원절에 다시 열린다.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그래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된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고향은 그야말로 ‘귀신들의 땅’이지만 동시에 가족사의 기억과 상호간의 사랑이 복잡하게 얽힌 ‘인간들의 땅’이기도 하다. 할머니, 부모, 다섯명의 딸, 두명의 아들 및 그들의 배우자와 애인, 친구와 이웃들이 펼쳐놓는 저마다의 사연은 지진으로 생긴 고향집의 큰 틈처럼 메울 수 없는 균열의 확인이기도 하지만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감정의 고리로서 대만 향촌사회의 공동경험을 구성한다.

주요 인물만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어린 나이에 방직공장 여공으로 일하다 생활력 없는 남편을 만나 평생 고생하는 첫째 딸, 여상을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으로 평범하고 무료하게 살아가는 둘째 딸, 대학을 나와 방송국 간판 앵커와 결혼했지만 가정폭력을 당하며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셋째 딸, 여동생의 남자를 빼앗았지만 동생의 자살로 시골의 호화주택에 정신이 유폐되어버린 넷째 딸, 언니와 연인에게 복수하겠다며 자살한 막내딸,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지만 이웃의 꼬임에 빠져 지방 정치인에서 범법자로 전락한 큰아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부터 멀리 타국으로 도망가지만 결국 반려자를 죽인 살인자가 된 둘째 아들, 그외에도 게이임을 숨긴 채이고 말없이 살아온 부친, 불륜을 저지르는 모친 등 천씨 가족의 비밀과 상처는 서로의 인생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으며 동시에 ‘귀신섬’이라 불리는 대만의 정치폭력 및 역사고난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특히 부친과 둘째 아들, 이웃 청년 간의 동성애 관계를 알게 된 모친과 둘째 딸은 이웃들을 사상범이라 고발하고 자신의 가족은 빠져나감으로써 그들 역시 백색공포체제의 공모자임을 드러낸다. 그 결과 이웃 청년들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부친과 둘째 아들은 더 깊은 부채감과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흔히 따스함과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가족과 고향이 이렇듯 폭력의 주체가 되고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세계, 곧 귀신들이 날뛰는 세계가 된 것이다. 소설은 천씨 가족이 전통가옥인 삼합원(三合院)을 떠나 이사한 시멘트 연립주택을 중심 무대로 대만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각자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가정과 학교, 국가 차원의 폭력은 성장제일주의에 기초한 권위주의체제의 소산이다. 여기에 더하여 여전히 완강하게 작동하는 가부장제는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초래한 원흉으로, 고속적인 압축성장을 이룬 대만 현대화의 그늘을 잘 보여준다.

이 점에서 『귀신들의 땅』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문의 성공과 아들의 출세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누나들, 일류 학교 진학과 성적 올리기로 정당화된 교사들의 무자비한 구타, 사상검열과 연좌제, 금권과 정치의 결탁, 매체의 선정성과 허영 조장, 물질만능과 금전지상의 속물근성 등 급조된 현대화가 가져온 우울한 자화상을 여전히 마주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충격적인 사건과 선명한 이미지로 ‘과거의 현존’을 서늘하게 현시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많은 사건이 한 가족을 둘러싸고 발생한다는 것과 각각의 인물들을 화자로 한 다중시점이 두서없이 교차 나열되는 서술방식으로 인해 서사의 개연성과 맥락 찾기가 다소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인물간의 관계와 사건의 전말이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금세 몰입할 수 있다. ‘귀신은 무섭지 않아. 사람이 더 잔인하지’로 요약되는 이 소설이 지닌 미덕이라면 고향 사람들이 혹은 가족이 서로에게 지옥이었던 기억조차 담담하게 원망 없이 풀어내며 사후적으로나마 이해와 화해에 이른다는 점이다. 포크너(W. Faulkner)의 말처럼 ‘과거는 결코 죽지 않고 지나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과거에만 얽매일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것, 이것이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시작이자 문학의 소임이라는 것을 천 쓰홍은 『귀신들의 땅』을 통해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