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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상순 朴賞淳
1962년 서울 출생.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Love Adagio』 『슬픈 감자 200그램』 『밤이, 밤이, 밤이』 등이 있음.
silktable@naver.com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42년 뒤
그녀는 ‘9.5에 1.5’래. 센티미터야. 한참을 내려왔대. 거기는 아주 높대. 그래도 꿀벌이 있대, 검은 꿀벌이래. 작은 꽃들이 와그르르 피어 있대. 겨울엔 춥대. 높은 곳의 빙산은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대. 그만큼 높은 곳에서 여기까지 왔대.
기찻길 너머 강가에서 나를 처음 봤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 오는 소리 기다리다가, 기찻길 건너서 강변으로 갔는데, 강가에서 나를 봤대. 아무튼 그녀가 검은 꿀 한점을 내 혀끝에 살짝 전해주었어. 너무 조금이어서, 그냥 꿀맛인가 했는데,
나는 ‘9.0에 1.2’가 되었어. 센티미터야. 그녀는 까만 센티미터, 나는 하얀 센티미터. 강가에서 나는 아홉살이었는데, 그때 그녀는 스물한살이었대. 그런데 이상하지. 내 가슴속엔 벌써 황혼이 지고 있는데, 해가 지고 있는데, 그녀는 지금 서른셋이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내 옆에 작은 꽃처럼, 하룻밤 누워 있었어. 내 가슴속엔 황혼이 지고 있는데, 그녀가 말하기를, 내 마음은 ‘9.0에 1.2’, 그녀 마음은 ‘9.5에 1.5’래. 나는 하얀 센티미터, 그녀는 까만 센티미터. 그리고 끝이야. 황혼이 지고 있거든. 그렇지?
밤에, 가을은 아름다울까?
밤에, 가을은 아름다울까?
밤 10시의 가을은
아랫배가 아프다 했지, 주저앉았지
밤 9시의 여름은 길을 떠났지
9시의 여름은 맨발이었지
별나라의 수도꼭지를 틀었지
가볍고 짧은 옷을 입었지
9시의 여름은 혼자 떠났지
한낮의 봄은 아름다웠지
아침 9시의 봄은 언덕을 올라갔지
정오의 봄은 숲에서 점심을 먹었지
그리고 비가 내렸지
오후 7시의 봄은 바닥에 누웠지
8시의 겨울이 그 봄을 찾아왔었지
눈이 내린다고 했었지
밤 10시의 가을이 수도꼭지를 틀었지
9시의 여름은
절벽 아래의 먼 곳에서 자정이 되었지
달나라의 수도꼭지를 틀었지
밤에, 가을은 고독의 국경선에 닿았지
밤에, 여름은 가볍고 짧은 옷을 입었지
밤에, 여름은 아름다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