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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모순 쪽으로 한걸음 더

 

 

권희철 權熙哲

문학평론가. 저서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정화된 밤』 등이 있음.

northpoletrain@gmail.com

 

 

한영인 『갈라지는 욕망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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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인의 비평에 넘실거리는 에너지의 정체는 대상 텍스트에서 ‘사회적인 것’을 통해 동시대적인 것을 읽어내려는 욕망인 듯하다. 이 욕망은 그것이 대상 텍스트에 대한 규범처럼 작동할 때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지만,1 그것은 규범이 되기보다 하나의 텍스트를 인접한 다른 텍스트들과 겹쳐놓거나 연결 지으면서 주어진 텍스트에 잠복/은폐된 무엇인가를 노출·전개·확장시키는 강력한 해석의 장치로 작동할 때가 더 많다. 그 때문에 한영인의 비평은 때로 계시적이 되기도 하고 때로 위태로워지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라도 그의 비평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열정적인 텍스트가 된다. 이 점에서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갈라지는 욕망들』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고, 약간 결이 다르지만 「‘뉴노멀’ 시대의 소설」이나 「우리 이웃의 문학」에도 그에 못지않게 인상적인 구석이 있다고 하겠다.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는 무수한 에세이들 가운데 특정한 텍스트를 선별해 그것의 어떤 점이 어떻게 탁월한지를 해설하는 일에 별다른 의욕을 느끼지 않는다. 한영인의 관심사는 “에세이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시대적 욕망”이며 그를 통해 “오늘날 한국의 사회성과 시대성”(211면)을 읽어내는 일이다. 한영인은 “‘문학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 기존의 사회적 분할하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사람들이 에세이를 통해 스스로 언어를 획득해내는 감동적인 광경”(212면)을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더욱 긴급하고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통찰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유튜브나 SNS를 통해 자신의 삶을 콘텐츠화하고 그것을 판매 가능한 자산으로 삼는다는 사실로부터 ‘‘자아’를 ‘자산’으로 생산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디지털화된 소셜네트워크-기계’를 읽어낼 수 있다면, 이러한 독해를 ‘에세이 열풍’에 적용해 거기서도 ‘자아-자산 생산장치’로 기능하는 ‘책-기계’를 읽어낼 수 있다. ‘에세이 열풍’에는 언제나 소통과 공감 같은 부드러운 말들이 들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만의 고유하고 구체적인 진실까지 자원화하도록 부추기고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의 진실까지 구매 가능한 것으로 왜곡하여 ‘자아-자산’으로 흡수해버리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압력이 있는 것이다. 한영인의 분석은 이런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꿔놓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이 어떻게 단독자의 ‘고유성’이 빚어지는 과정을 독려하거나 보존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다원주의적 개인주의’의 기치 아래 내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자원화 가능한 자아에 강한 애착을 느끼는 오늘날의 왜곡된 사회적 감정,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나르시시즘’이다. 유행 중인 에세이는 물론 에세이화되고 있는 최근 소설과 그에 대한 독자 및 비평의 선호 또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에 병행하는 기만적인 나르시시즘에 포섭되어버렸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다른 평문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는 오오에 겐자부로오의 「세븐틴」(1961), 윤정규의 「오욕의 강물」(1969),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랜덤하우스코리아 2009)을 겹쳐 읽는다.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해야 마땅할 테고 또 어떤 순간에는 실제로 그런 사회가 도래한 듯 보이기도 했는데, 오히려 폭력과 혐오로 가득 찬 우익 정치세력이 한국사회에서 날로 득세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촛불혁명 이후 노골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윤석열정권이 탄생하기에 이르렀으니 대체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의 구조적 원인은 무엇이고 이같은 상황을 타개할 비전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한영인의 분석의 요점은 이러하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경제·문화 모든 영역에 걸쳐 20세기 중반 이후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다. 그것이 장려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개인들이 상대방을 불가침한 존재로 여겨 서로 고립시키는 것을 개인성에 대한 정당한 옹호라고 착각하기, 그렇게 서로 관계 맺지 않는 상황에 만족하며 이를 자유라고 오해하기, 고립된 개인들이 공통으로 처하는 구조적 모순 역시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각자 자구책을 마련해 우연히 살아남거나 그렇지 못하는 것을 삶의 자연스러운 형태로 여기기, 고립되고 분열된 개인들이 교차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협상하거나 타협하면서 공통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회를 상상하지도 욕망하지도 않기.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제도나 가치의 영역에서 개인을 지원해줄 여타의 차원이 활성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언제나 고통, 불만, 불안에 시달린다. 바로 이 고통, 불만, 불안의 정서가 우파 정치세력을 배양한다. 그렇게 해서 뉴라이트 운동은 개인들을 구원해줄 강력한 존재에 대한 ‘상상’을 현실의 특정한 정치지도자에 투사해 그를 숭배하거나, 반대로 그같은 강력한 존재의 현현을 방해하는 무능력하거나 사악한 존재들에 대한 ‘상상’을 약자와 소수자에 투사해 어디서나 적을 발견하고 적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자신의 능력을 숭배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익 청년들의 성장담을 다루는 소설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비틀어진 영혼을 지닌 인생들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고 “근대 세계를 지배해온 보편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의 임계를 드러내는 서사 양식”(389면)인 것이다.

『갈라지는 욕망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배경음으로 깔고 있을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도처에서 ‘개인적인 것’에 대한 선호나 ‘나르시시즘’을 적발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적인 것’을 모색하게 되는 듯하다. 한영인의 분석과 비판은 동시대성을 이해하는 데 몹시 유익하고 또 개인의 삶과 개별적인 문학 텍스트를 고립된 파편들로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한영인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고 근래에 첫 책을 낸 또래 평론가들이 동시대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읽어내려는 경향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영인과 그의 동세대 평론가들 사이에 선명한 대립구도가 형성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2 한영인의 관점에서는 ‘나-쓰기-생성’에 주목하고 그 가능성을 적극 발굴하는 일련의 비평들이야말로 그가 경계하고 또 돌파하려는 ‘나르시시즘’ 혹은 ‘(신)자유주의’에 침윤된 것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감각 부족은 아닐까? 위태롭고 논쟁적인 글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영인이 어째서 자신과 대립적인 입장에 놓인 듯한 동세대 평론가들과 대결을 벌이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최근 번역 출간된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의 『나르시시즘의 고통』(민음사 2024)은 반(反)사회적 나르시시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영인의 논의를 연상케 한다.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개인적인 것의 바깥에 위치하는 도덕적 질서나 보편적인 법의 지원 없이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정립된 나르시시즘 주체의 자아란 완전히 텅 빈 존재일 뿐이기에 타인들의 ‘인정’을 갈구하고 그것에 자신을 의탁한다. 그러면서 나르시시즘은 더이상 나르시시즘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기 아닌 것’과 만나고 변화하는 게 아니라 타자성이 제거된 타인의 박수갈채만을 인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확신’과 ‘자기 권능’이라는 환상을 부활시키고 나르시시즘으로 되돌아온다. 이 돌파하기 어려운 고독 속의 모순과 전도, 해결 불가능한 텅 비어 있음, 그것이 ‘나르시시즘의 고통’이다. 이러한 카림의 논의를 참고하면서 한영인의 관점을 보충할 수 있을까?

사회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들의 교차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빚어지고 흔들리고 변화해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사회적인 것이 언제나 개인적인 것을 초월하거나 압도한다고 전제하는 카림의 문장들은 실상 그 근거를 별로 갖추고 있지 않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에 의한 중재 없이 함께 머물거나 그러는 가운데 관계 맺고 그 효과로 잠정적이고 유동적인 보편성을 산출할 가능성을 이졸데 카림은 탐색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보편적 구속력을 가지는 종교적 기준도, 폴리스와 좋은 시민의 표상도 없다. (…) 모범상의 부재, 규정된 이상의 부재가 오늘날 우리를 규정한다”3고 쓸 때, 이졸데 카림은 좋았던 옛 시절을 몹시 그리워하는 기색이다. 그가 나르시시즘에 대한 자신의 통찰이 의외로 전체주의와 가까워진다는 점에 유의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그런데 한영인과 이졸데 카림의 논의는 근본적인 지점에서 서로 통하는 데가 많지 않은가. 한영인의 비평에도 이졸데 카림이 빠져드는 듯 보이는 그 함정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존재할까?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사태를 왜곡하는 구도일 뿐이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대립하지도 않고 둘 중 어느 쪽을 우선할지 선택할 필요도 없다. 사회적인 것의 모든 단위가 ‘단독적인 것’이 되기를 추구하고 장려하는 방식으로 조직된 ‘사회’가 있는 반면, 표준화·일반화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조직된 탓에 개별적인 것이나 특수한 것을 무의미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 혹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가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것’이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의 사회 논리’와 ‘보편의 사회 논리’가 대별될 뿐이다.4 독일의 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Andreas Reckwitz)에 따르면 특수의 사회논리와 보편의 사회논리는 언제나 공존해왔고 그들 각각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효과를 수반하지만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특수의 사회논리가 돌이킬 수 없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특수성이 폭발하는 이 과잉된 사회에서 심화된 불평등과 극심한 경쟁구도, 여러 세력간의 갈등 조정 기능의 부재가 몹시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개인들이 더 크고 강한 존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는 느낌 속에서 강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동시대성을 사유하고 또 그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여전히 우리의 관건이라고 한다면, 잃어버린 ‘보편성’을 재구성하려 하거나5 단독성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을 반사회적 나르시시트들이라고 폄하하는 대신 특수성들의 사회적 장치들을 좀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재배치해서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효과들을 완화하는 동시에 더 많고 다양한 특수한 존재들을 옹호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단독성의 사회에 보편적인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데 있지 않고 단독성의 사회가 아직도 충분히 단독화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단독성들의 사회로의 돌이킬 수 없는 구조 변경을 충분히 관찰하지 않고, 그 안에 잠복해 있는 변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지 않고, 잃어버린 보편성을 기준으로 동시대적인 것을 규탄하는 일은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한영인의 비평에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대립적으로 보고 나르시시즘을 규탄하는 자신의 입장에 스스로 저항하는 순간들이 있다. 예컨대 「‘뉴노멀’ 시대의 소설」에서 한영인은 ‘소확행’ 같은 현상을 사회적·정치적인 비전을 잃어버린 채 파편화된 나르시시즘적 주체들의 체제순응적 행동양식으로 폄하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소확행’ 현상의 이면에는 욕망에 대한 개별 주체들의 자기이해, 혹은 기존의 욕망 구조와 협상하며 자기 욕망을 제한적으로나마 관철시키는 동시에 기존의 사회에 미세한 균열을 가하려는 자기 테크놀로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확행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문”(18면)해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한영인은 또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나 “살아 있는 상태로 나 자신이 되고 내 세상이 되는 것”(189면)의 벅찬 느낌이 반드시 고립이나 반사회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거나 “자기부정을 획책하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어떻게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것인가?”(196면)라는 나르시시즘적 질문으로부터 “긍정할 수 없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곁에 선 타인 역시 부정하지 않는 것”(201면)이라는, 보편적인 차원의 매개 없이 가장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계기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빚어낼 가능성을 예감하기도 한다. 이때 한영인은 나르시시즘에 대한 부당한 멸시로부터 빠져나오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후기근대사회의 이해를 대체하는 입장에서도 갈라져나오는 것 같다. 한영인 자신은 그다지 강조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 이웃의 문학」에서 ‘시민’에 대한 논의를 계승하는 듯하면서도 그 논점을 ‘서로 다른 개인들 간의 이웃됨’에 대한 상상과 실천으로 바꿔놓을 때, ‘시민문학론’이 포기하지 못하는 ‘보편성’ 없이 ‘시민문학론’으로서는 알아보거나 존중하고 촉진하기 어려워하는 그 ‘단독성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단독성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상상과 실천을 관찰하고 옹호한다. 이 글에서 “‘코드’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의 고유성”(42면)이나 “공화국의 시민됨 자체를 의문에 부친다”(55면)고 할 때, 한영인은 사회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의 대립항으로 이해하고 전자를 옹호하는 입장으로부터 이미 갈라져나와 있는 것 같다.

한영인의 비평에는 ‘사회적인 것’을 우선하는 입장과 ‘개인적인 것’을 우선하는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 공존하고 내부에서 갈등한다. 이 모순 혹은 비일관성은 결함이 아니라 가능성의 원천이다. 서로를 구속하는 대립으로부터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원천. ‘특수의 사회 논리’로부터 동시대성을 성찰하고 단독화 과정을 더욱더 밀고 나가면서 ‘서로 이웃’하는 사회6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가능성의 원천. 이 모순 속에서, 이 모순과 함께, 이 모순 쪽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면서 한영인의 비평은 더 많은 특수성들의 폭발을 관찰하는 동시에 보편성으로의 회귀 없이도 “이웃을 향한 열망”(35면)을 촉진하게 되지 않을까.

 

 

  1. 예컨대 그가 장강명의 소설 「공장 밖에서」(『산 자들』, 민음사 2019)를 평하며 “장강명의 세계에는 ‘사회적인 것’〔강조는 인용자, 이하 같음〕의 영역이 소거되어 있다. (…) 그렇게 포착된 현실의 단면은 끝까지 절단된 파편으로 남을 뿐 현실에 대한 종합적 인식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그 파편을 종합할 ‘사회’라는 누빔점이 장강명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75면, 이하 『갈라지는 욕망들』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이라고 하거나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을 일컬어 “인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94면)고 표현할 때가 그렇다.
  2. 동시대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읽어내려는 경향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것은 ‘나’에 관한 것이기에 무시무시한 ‘돌파력’을 갖는다” “삶(…)이 ‘나’를 통해 터져 나오는 지금이 어쩌면 새로운 문학사적 기점일 수도 있다”(노태훈 『현장비평』, 민음사 2023, 35, 42면), “자신에게 필요한 진실을 재활성화하기 위해 자기라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 “내 스스로 승인할 수 있는 나를 찾아내고, 그런 나에 대해서 쓰는 것”(김건형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 문학동네 2023, 200, 204면), “이것은 나-되기의 치열한 과정이며, 김봉곤의 소설에서 어쩌면 퀴어-되기의 도정보다 더 깊숙한 내면의 바닥을 건드리며 움직이는 추동이다”(인아영 『진창과 별』, 문학동네 2023, 100면) 같은 서술들.
  3. 이졸데 카림 『나르시시즘의 고통』, 신동화 옮김, 민음사 2024, 265~66면.
  4. 이 단락에서의 ‘개인’과 ‘사회’에 대한 논의는 안드레아스 레크비츠의 『단독성들의 사회』(윤재왕 옮김, 새물결 2023)를 참조.
  5. 안드레아스 레크비츠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커먼즈 Commons 운동’을 꼽는다. 『단독성들의 사회』 참조.
  6. ‘서로 이웃’은 “‘누구나’와 ‘아무것’의 집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집합이 서로를 연루하고 촉발하는 만남”(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30면)에 가깝지만, 한영인에게 이 만남이라는 것은 “우리가 속한 무엇을 향한 깨달음과 존중” “〔여타의—인용자〕 영역들이 가능하기 위해 먼저 있어야 하는 장(場)”(같은 글 21, 23면) 없이, 다시 말해 공통영역을 확보하고 거기서부터 보편성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요구 없이 관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