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문학에서 찾는 전환의 힘
노래가 들리는 곳
서정시의 변혁성에 대하여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1. 사는 일이 ‘문제’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북한에서 보낸다는 ‘오물 풍선’과 관련된 알림이 잦은 요즘, 우리가 사는 이곳이 전쟁과 밀착해 있다는 실감을 한다. 정부가 나서서 언제고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긴장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하려는 시도가 빈번해진 현실은 역으로 우리 사회가 분단체제의 극복 없이는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전쟁의 공포는 ‘사는 일’을 오로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일’로만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를 생존 그 자체에 가두어 삶의 다른 모든 내용을 희석하려는 배경에는 지구적 규모로 나날이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파괴적인 승자독식, 사회적 불평등, 온갖 관계의 사물화 및 소외화 등 자본주의가 낳는 여러 현상은 우리 삶이 벼랑 끝에서 탈출해야 하는 처지라고 압박한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데 전쟁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지니 ‘멸망만이 답’ ‘죽지 못해 산다’라는 푸념이 늘어나는 것도, 삶을 ‘살 만한 것’이 아닌 ‘살아남기’에 급급한 문제로 축소하는 관성이 공고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전쟁 소식은 미국의 젠더학 연구자 자스비르 푸아(Jasbir Puar)가 2015년에 발표한 글 「불구화할 ‘권리’」를 다시 읽게 만든다.1 푸아는 이 글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오랜 시간 자행해온 ‘비인간화’ 정치의 실상을 밝힌다. 이스라엘 점령군은 팔레스타인 시위대의 무릎이나 대퇴골 등을 조준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을 ‘즉사’시키지 않는 ‘덜 폭력적인’ 방식의 총격을 가하는데, 가자지구 외부에는 이것이 시위대의 생명을 보존하는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알려진다는 것이다. 상해를 가함으로써 저절로 취약해지게 하는 환경의 조성은 이스라엘 세력의 살려두는 척하면서 방치하는 통치전략인 “느리지만 동시에 집중적인 죽게 만들기”에 해당한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행사해왔던 ‘생명정치’는 이처럼 “불구화할 권리(장애로 만들 권리)”의 행사 즉, ‘취약성의 구조화’로 작동해왔다.2 오랫동안 가자지구는 ‘오로지 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역설적으로 ‘죽음’이 삶을 끌고 가도록 두는 일상이 이어지는 곳, ‘살아남는’ 일 외에 또다른 선택지를 추구할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땅이었던 셈이다.
‘생존 그 자체’의 반대항에 ‘죽음’을 설정함으로써 거기에 있어야 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이 은폐되는 가자지구의 상황은 기후변화, 불평등, 삶의 불안정성 증가 등 각종 위기에 직면해 있는 지구상의 숱한 존재들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가자에서 벌어진 취약성의 구조화란 결국 삶의 일부분으로서의 ‘취약성’이 매우 정치적인 맥락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소거시키고, ‘대안은 없다’를 이데올로기 삼아 파생된 ‘죽지 못해 산다’와 같은 말 속에 우리를 가둠으로써 더 나은 삶으로의 진전이나 변화를 거부하게 만든다. 경제, 돌봄, 생태계, 정치 전반의 위기가 일상적으로 우리 삶의 기반을 먹어치우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의 특성은 역설적으로 체제의 위기를 넘어서는 근본적 전환의 방식을 요구한다. 요컨대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에 또다른 속성이 채워져야 하고 그러려면 좋은 삶을 향한 갈망을 북돋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또한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게 만드는 거대한 전환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더 좋은 삶,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을 좀처럼 꺾지 않고 이어왔던 경험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데서 희망을 구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갑오농민전쟁부터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며 아래로부터 분투해온 역사가 있다. 우리 힘으로부터 비롯된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해 연마하는 일은 생존 그 자체에만 매이지 않은 순간이 우리 삶 국면마다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지금 이곳으로부터의 전환을 구체화할 수 있게 한다.
이 글이 ‘서정시’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0년대 이후 비평현장에서 서정은 새로운 느낌을 열어줄 여지가 없는 장르처럼 논의되곤 했다. 그러나 읽기의 맥락에 역사적 조건이 개입한다는 것을 고려해 말하자면, 지금은 오래된 문학형식으로부터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과 내용을 찾아야 하는 때다.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이 긴요해진 이제라면, 그간의 서정시가 생생한 발화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느낌들의 삶”과 “참된 자아의 각성”까지 수반한 “변혁의 비전”을3 제시해왔는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서정시는 그로부터만 들릴 수 있는 고유한 목소리로 ‘사는 일’을 ‘살아남는 일’로 납작하게 만들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서서히 죽게 내버려두는 지구적인 통치의 압박에 대항해 끈질기게 ‘삶다운 삶’을 추구하는 고민을 이어온 노래가 거기에는 깃들어 있다. 이 글의 관심은 우리가 서정으로 다뤄지는 말들과 접속할 때 “‘다음 시대로 진입하게 해줄’ 느낌”이 느낌만으로 남지 않고 “이행”의 역량을 어떻게 발휘하는지4를 살피는 데 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시, 그러므로 만인의 노래가 들리는 곳에 더 좋은 삶,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힌트가 보물처럼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2.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 신경림의 시
서정시가 ‘한 사람의 시, 그러므로 만인의 노래’에 들어맞는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경림의 시를 먼저 읽어야 한다. 지난여름 타계한 시인은 첫 시집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부터 우리 주위의 삶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는 평을 들었다. 신경림 시에서 모두의 삶은 한결같이 존중받아야 할 무언가로 드러난다.
동이 트기 전에 상암동 산동네 사람들은
타이탄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소삿벌 비닐 채마밭으로 들일을 나간다
소주 한 주발에
묽은 된장국으로 시작되는 들일은
시골살이보다 오히려 고달퍼서
때로 뽑힌 명아주 뿌리로
눈에 핏발들이 서지만
다시 타이탄 트럭에 짐짝으로 쟁여
돌아오는 상암동 산동네는
고향만큼이나 정겨운 곳
낯익은 악다구니에 귀에 밴 싸움질들
좌도 상쇠 우도 끝쇠
느린 길굿가락으로 이내 손이 맞아
호서 버꾸잡이까지 어우러져
덩더꿍이 가락에 한바탕 자지러진다
보라 판이 끝난 뒤에도 그 쇠가락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골목을 오르내리다
잠든 산동네 사람들
고단한 꿈속엘 숨어들어가
붉고 고운 열매로 맺히는 것을
소삿벌 비닐 채마밭에까지도 뿌려질
질기고 단단한 열매로 맺히는 것을
새벽이면 상암동 산동네 사람들은
그 열매를 하나씩 속에 안고
소삿벌 비닐 채마밭으로 들일을 나가고
——「상암동의 쇠가락」 전문(『가난한 사랑노래』)
1988년 나온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에 수록된 이 시를 처음 마주하는 지금의 10대, 20대 독자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읽을 대목이 몇 있다. 먼저는 “상암동 산동네 사람들”이라는 말에서부터 걸릴 테고(아파트단지며 방송국, 큰 경기장이 있는 그곳에 산동네가 있었다고?), 사람들이 몸을 실었다던 “타이탄 트럭”이나 가락을 만든다는 “버꾸”는 어떤 모양인가 싶어 궁금해할 것이다(스마트폰으로 검색해야 할까?). 시에서 말하는 자가 누군지 헷갈린다거나 말하는 방식이 난해하다는 뜻이 아니라 2020년대 청소년, 청년에겐 인용한 시의 정경을 이루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시가 품은 현실과 그것을 전달받는 독자의 현실 사이에 자본주의가 형성해온 시간만큼의 거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약 40년 동안 엄청난 속도로 변해온 한국사회의 풍경을 새삼 상기시킨다. 한 시절 사람들의 일상에 밀착된 말을 시의 자장으로 불쑥 들여옴으로써 신경림 시는 우리가 딛고 있는 삶의 토대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왔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언어의 보고가 된다.
그러나 시대별 언어의 ‘보고’로만 본다면 「상암동의 쇠가락」을 한 호흡으로 읽었을 때 마지막 구절인 “소삿벌 비닐 채마밭으로 들일을 나가고”라는 구절이 남기는 고양(高揚)감, 달리 말해 열패감도 서운함도 없이 평정(平靜)한 마음씨일 때 깃들 수 있을 스스로를 드높이는 감정 상태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시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에서 화자의 시선은 산동네 사람들이 함께 하루치의 일을 하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목을 향해 있다. 화자는 이들이 혹독한 노동현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설명하는 데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는다. 산동네 사람들이 허름한 ‘참’으로 몸을 달래면서 “눈에 핏발”이 서는 줄도 모른 채 “명아주 뿌리”를 뽑는다는 얘기를 잠깐 하면 그만이다. 산동네 사람들에게 채마밭의 노동은 그들의 일상이므로 그에 관해서는 법석을 떨며 과장할 필요가 없음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시는 그보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린 채 들일을 오가고 있지만 실상은 ‘짐짝’일 수 없는 사람들의 생기를 다루는 데 집중한다.
‘생기’라고 했거니와 트럭에 포개진 사람들은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이유로 왁자하게 자신들의 생을 드러낸다. 이들이 제 몸에 남아 있는 풍속을 따라 농기구든 젓가락이든 손에 잡히는 ‘쇠’를 딱딱 두들겨가며 나름대로 “길굿가락”을 만들기 시작하면, 거기에 북을 좀 두들길 줄 아는 이(“호서 버꾸잡이”)가 손바닥으로 거들며 이내 가락을 이어간다. 더욱이 이 가락을 만드는 산동네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서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이들이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이 앉아 있는 형태란 마치 그이들이 살고 있는 산동네의 모양새, 즉 구하기 쉬운 건축자재를 끌어다가 쌓아 만든 집들을 임시방편으로나마 좌우상하로 겹쳐둔 식과 비슷할 텐데, 시는 이처럼 정해진 바 없이 자연스럽게 덧대면서 구축되는 삶으로부터 ‘스스로’ 울려 퍼질 줄 아는 가락을 귀하게 듣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기울인다. 이 시는 상경의 고단함이나 생활의 지겨움을 뒤로 물러나게 두려는 사람들의 “쇠가락”질이 “판이 끝난 뒤에도” 잦아들지 않는 곳을 향함으로써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골목을 오르내리”는 생기를 포착하고, 상암동 산동네의 삶이 단련의 순간들로 무르익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막 시를 읽은 우리는 시인이 몸을 기울여 살핀 이들의 “쇠가락”이 “소삿벌 비닐 채마밭으로 들일을 나가”는 마지막 구절로부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내력을 전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아파트단지와 멀끔한 주상복합건물로 가득 차 있는 지금의 도시가 “쇠가락”의 역사로부터 왔다고, 우리가 그것을 딛고 있다고.
화자의 시선이 가진 힘은 시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살아 있을 산동네 사람들의 생기를 끈질기게 보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시인은 “쇠가락”이 남긴 “붉고 고운 열매”가 기어이 시를 읽을 모두의 마음에 “질기고 단단한” 불을 켜리라고 믿는 데까지 나아간다.5 이때 서정시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인간과 세계의 불변하는 진리를 말하는 대행자”와 같은 “보편”을 자처하기보다는6 지배적인 체제의 승인을 얻지 못할지라도 주관적인 시선을 진솔하게 가꾸어나가는 동시에 같은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의 편으로 다가가는 태도를 취한다. 화자는 산동네 사람들의 생기, 그이들의 자력을 내내 응시함으로써 함부로 연민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쇠가락”을 끝까지 존중했을 때에야 다루어질 수 있는 시적 현실을 구성해낸다. 신경림 시에서 서정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최후의 목소리의 결기를 발굴함으로써 발현된다.
이는 서정시가 현실인식을 배제해야만 쓰일 수 있다거나, 영향을 미치는 시간성이 제한적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에 다른 접근을 하게 만든다.7 가령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화(自我化)하는 주관성을 발현한다고 할 때, 그를 일컬어 “자립적 의의를 갖지 못하”는 “대상(세계)”을 “주관(자아)에 종속”시킨다거나 8 “타인의 타자성(…)까지 동일화하려는 관성을” 따른다고9 해석하고 말 게 아니라, ‘주관’을 지킴으로써 ‘대상’을 돌보는 관계를 성립시켜 그 세계가 본래 지니고 있던 자력을 살리고 그를 통해 다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해석의 경로를 열어준다. 「상암동의 쇠가락」의 경우, 시가 현실의 가난을 다룬다고 해서 작품 한가운데에 빈곤의 풍경이 그대로 끌려들어오지는 않는다. 시는 가난을 구성하는 여러 언어들이 다 막아서지 못하는 삶의 위엄, 그러므로 기어이 가난이라는 말이 거두어지는 자리, 그곳으로부터 생의 전망을 끌어올리는 길을 간다. 산동네 사람들의 어떤 꿈틀거림을 “쇠가락”으로 이룬 “붉고 고운 열매”로 기민하게 포착하고, 그로부터 다가올 세상에 대한 ‘살아 있는’ 느낌을 무엇으로부터 만들어가야 하는지 질문한다. 해당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에 함께 실린 여러 시편들에서 “몸속에 파편을 여덟 개나 지닌 상이용사”인 “늙은 사공”이 섬진강과 더불어 생활을 이어나가는 풍경을 내어놓는다거나(「섬진강의 뱃사공」), “빨갱이”로 내몰렸던 아들을 찾아 꼬박 “삼십년” “산을 헤매던 아낙네”가 “사랑방 실퇴에 앉아 죽었다”는 사연을 월악산 살구꽃잎들에 뒤섞어 전달할 때(「월악산의 살구꽃」), 서정시에서 발현되는 주관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뚝심있게 보살피면서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노래로 울려 퍼지도록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시가 품은 현실을 노래로 전달받은 독자는 우리 앞에 놓인 세상에 스민 ‘가락’을 전달받은 ‘나’의 입술에선 무엇이 불리어지기 시작하는지 가늠해보게 될 것이다.
3. 온몸으로 함께 나아가는가 : 김승희의 시
신경림의 시가 세계로부터 박탈당한 이들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연결에서 출발했다면, 이때 그 서정의 메커니즘은 자기를 지키면서 남과 더불어 있으려는 의지로 작동한다. 서정시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되던 두 개념도 전과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서정시를 가동시키는 ‘동일성’의 상상력. 이는 타인과 일체화를 이루는 경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모두와 평등하게 공존하는 감각을 길러냄으로써 서로 다른 처지의 존재들이 공감과 신뢰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서정의 정치성은 우리가 닿고자 하는 다음 세상의 내용을 제안하면서 발현된다. 둘째, 서정시가 본질적 시제로 삼는 ‘현재’라는 시간성. 이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끝내 사수하는 ‘연속된 현재’를 가리킨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하는 역사적 시간성이 ‘현재’를 매개로 하는 시로 표현될 때, 독자에게는 삶 자체가 쉽게 끝장나지 않으리라는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서정적 충동이 남는다.
‘누가 말하는가’라는 문제를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로 바꾸어 쓰는 시가 있다면, 그를 ‘누구와 함께 나아가는가’로 풀어내는 시도 있다. 이런 시는 모두의 힘을 모으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조력으로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다음으로 가보자고 요청한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대대적인 변화를 겪어나가는 중에 발간된 시집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세계사 1991)에서 김승희는 이렇게 쓴다. “어떻게든 세상은 쳐들어온다”고(「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커튼을 치고 이불 속에 누워봐도」). 이 시에는 ‘쳐들어오는’ 세상에 이끌린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가련한 삶이 우리 앞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전망 대신에 “어디에 가서 이 생을 구”해야 하느냐는, “피랍의 문을 어떻게 쳐부수”어나갈 것이냐는 긴장된 고뇌가 담긴다. 같은 시집의 또다른 시에서는 “지금”을 일컬어 “벽을 부수는” 때가 아니라고 나른하게 둘러대는 이들을 향해 “벽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벽장 속” “울먹임의 역사”와 떳떳하게 함께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남기기도 한다(「벽지 바꾸는 시대」). 그러니 시대와 온몸으로 맞서는 시인의 분투를 두고 “남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처럼 과격한 언어들을 거침없이 구사한다”10는 평가는 부당한 데가 있다.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냉전의 해체, 신자유주의의 가속, 동북아시아의 동요하는 정세 등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확립되어가던 시기, 시인의 문제의식은 ‘껍데기는 가라’(신동엽)던 선배 시인의 외침을 이어받아 우리 자신이 먼저 움츠러든 채 바로 그 “껍데기가 무서워/안으로 안으로 도망치는”(「이런 사람이 살고 있다」) 건 아닌지 돌아보면서 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무는 이곳이 ‘안’이라면 어딘가 ‘밖’이 있으리라는 발상, 도망칠 수 없다면 ‘안’으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제안, 탈출이나 유폐가 아닌 ‘안’으로의 적응이 곧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상에 이르는 한 방편일 수 있다는 인식. 이같은 시인의 화두는 2000년대에 상재된 시집 『냄비는 둥둥』(창비 2006)에서도 이어진다. 시는 낡은 세상의 질서에 갇히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그 ‘온몸’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자유로는 이제 호텔이 되었다.
자유로에서 자유는 이렇게도 많이 밀리고 있다.
처참한 브로콜리 같은 아침의 얼굴이여.
누가 이 아침 얼굴을 이토록 뭉개어놓았나.
자유로에서 밀리는 것은 정말 자유만이 아니다.
때묻은 얼굴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맨발로
조그만 베개를 가슴에 안고
아가야, 아가야, 젖 줄까, 베개를 토닥이며 돌아다니던
그 미친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미친 그리움을 살아본 적이 있는가,
그리움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리움이 앞으로도 뒤로도 다 막혀 있을 때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미치거나 황토 귀신이 되어서 반쯤 졸거나 반쯤 자는 길.
서울로 가는 전봉준도 그리하였으리라. 깃발은 들었고
자유는 밀리고. 황토재 떠나 황룡촌 지나
첩첩 그리움은 막혀가고. 보은 지나 금강이여.
서울로 가는 길목마다 그렇게도 어려웠으리라.
자유로에 점점 떨어진 푸른 알들이여
녹두꽃잎이여……
호텔 자유로. 인디언 담요를 몸에 두르고
스티로폼 도시락에 담긴 김밥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렇게도 싫어했던 실려가는 삶에 대해
실려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밀려 있는 자유에 대해
밀고 가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또다시 언젠가 꽃피어날 녹두꽃에 대해
피기도 전에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녹슨 녹두빛 눈동자에 대해……
——「호텔 자유로」 전문(『냄비는 둥둥』)
“앞으로도 뒤로도 다 막혀 있”는 “자유로”는 멀리까지 뻗어나가지 못하는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한편, 그렇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자리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들을 펼쳐내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시는 임진각으로 이어진 자유로에서 “처참한 브로콜리 같은 아침의 얼굴”들이 밀리고, 뭉개어지는 풍경에 “얼굴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맨발로” “조그만 베개를” “토닥이며 돌아다니”는 어느 “미친” 여자의 마음과, “깃발은 들었”지만 “서울로 가는 길목마다” “녹두꽃잎”을 떨어뜨렸을 “전봉준”의 마음을 겹쳐둔다. 자유로가 더 확장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는 화자가 떠올린 이들의 모습이 “실려갈 수밖에 없는 삶”을 짊어진 실패자의 형상으로 비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시는 그이들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밀고 가는 자유”를 수행하는 모습으로 기억한다. 삶을 향해 “미친” 간절함을 발휘해본 적 있는 이들의 이름으로 그이들을 부른다.
“스티로폼 도시락에 담긴 김밥과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삼키며 ‘막혀 있는 길’을 그냥저냥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간절함이 없을까. 우리가 ‘밀고 갈’ ‘자유’는 자유로 위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로부터 “또다시 언젠가 꽃피어날 녹두꽃”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역사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을 때 형성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를 밀고 갈’ 존재들의 한가운데에서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녹슨 녹두빛 눈”을 뜨게 하는 구절은 우리의 움직임이 의미가 있으려면 끝내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를 상기시킨다. 자유로가 놓인 이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간과한다면, 이곳과 같이 ‘가로막힌’ 길이 (혹은 벽이) 또다른 어딘가에 놓인다면 ‘녹두꽃’을 피워내는 일의 보람도 휘발되고 만다고.
막힌 길을 길이라 할 수 있을까. 길이 그 구실을 하려면 길이 나야 할 방향을 오가면서 형태를 만들 몸이 여럿 필요하다. 김승희 시에서 새로운 길을 구축하기 위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만인의 몸짓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여럿의 몸이 서로를 붙드는 장력으로도 ‘온몸의 시’(김수영)가 쓰일 수 있음을 시인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씩 금빛으로 터져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목을 갸웃 내밀고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콩나물의 물음표」 전문(『냄비는 둥둥』)
「콩나물의 물음표」에서 ‘어둠’의 역할은 복합적이다. “검은 보자기”를 일부러 덮어 형성한 어둠은 빛이 차단된 세계 특유의 암담함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어둠을 통해야만 “콩”은 “콩나물”로 거듭날 수 있다. “짚을 깐 시루” 안에 바닥없는 허방으로 수렴되는 어둠만 있는 건 아니다. “밑빠진 어둠” 근방에는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과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를 일그러뜨리면서 콩의 전환에 개입해 들어가는 어둠까지 두루 존재한다. 이 시에서 어둠은 마냥 한꺼번에 몰아낼 것도, 적극적으로 영합해야만 하는 존재도 아니며, 오히려 콩이 감당해야만 하는 행위의 배경이자 적극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행위의 조건이다. 아래로부터의 힘은 이렇게 출발한다.
시루 안에서 자라는 동안 콩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당연히 알지 못한다. “검은 보자기 천장”을 들어올리기 전까지 보자기 너머 세상은 미지에 싸여 있다. “터져나오는” “콩나물 새싹”이 “물음표”를 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이 도래할지,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단정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콩은 저 자신이 감당하는 “어둠”을 “생각”하면서, 온갖 고투가 새겨질 자신의 머리통을 가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금빛 물음표 같은 목을 갸웃”거리고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뻗는다. 아래로부터의 힘은 이렇게 확장된다.
이 시는 섣불리 어떤 ‘답’으로 남아 있지 않기를 선택한 콩의 고투가 ‘물음표 콩나물’로 솟아나 기어이 “천장을” “들어올려보는” 순간을 맞이하는 구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천지개벽”의 이행, 그러니까 조그만 “눈”들이 “꼭 감”았다가 함께 뜨면서 일으켜 세우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의 (보자기 너머로의) 도약, 복잡한 어둠이 “음악의 보름달”을 띄워내듯 새로운 질서가 열릴 때 모두의 온몸에 솟아나는 느낌의 자리다.
시루 안 어둠 속에서 태어난 “금빛 물음표”가 여러 음표 다발이 되어 전에 없던 악보를 그리고 새로운 음악을 울려내는 일이 어떤 파동을 불러일으킬지, 과거 시루 위에 보자기를 덮어두었던 사람조차 몰랐을 것이다. 미지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우리 안의 갈망을 발견하고, 다른 세상에 이르기 위해 우리 각자가 치러야 할 과제를 언어로 전하는 일은 시의 몫이다. 그러니, 여기 붙으시라. 뜨거워지시라.
4.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노래
오래된 시가 ‘삶’이라는 말을 앙상하게 두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언어를 다루는 인간이 본래 인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온 서정시의 역사를 깨닫는다. “인간은 원래 천박한 충동이나 난폭한 자극이 없이도 감동하는 능력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능력을 옹호하고 함양하는 일이야말로 시인의 빛나는 임무이며, 특히 지금처럼 과거에 없던 제반원인들이 이 능력을 파괴하고 있는 마당에서는 그 임무가 더욱 중대할 수밖에 없다.”11 최근 시의 면면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이어진다. 박소란의 시 「불행한 일」(『수옥』, 창비 2024)에서 시인은 “가늘고 불규칙한 숨소리”처럼 세상에 찾아오는 “불행”을 향해 그 속에 놓인 “누군가 무심코 응, 답할 때까지” “불행, 힘내,”라는 소리 없는 말을 꺼낸다. 조온윤의 시 「원주율」(『햇볕 쬐기』, 창비 2022)은 헌혈을 하러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위해 팔을 꺾는 사람들”이 “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을 한다고 전하고, 신미나의 시 「꼬리」(『백장미의 창백』, 문학동네 2024)는 “약한 새끼를 버리고/날아가는/기러기의 노래”는 더이상 아름답지 않다면서 우리에게 꼬리가 없는 이유를 강자만을 좇는 세상의 질서에 취소선을 그으며 살아왔던 데서 찾는다. 이들 시가 특별히 어진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시들이 증명하는 바, 인간인 우리의 뼈에는, 우리의 드러나지 않은 본성에는 이미 다른 존재를 향한 자세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세상을 위한 열망이 새겨져 있다. 서정시는 “참으로 인간적인 것을 실현하기 위해 슬기롭고 힘차게 싸우는 사람들만이 인정의 본모습을 지킬 수 있”다는12 사실을 품은 채 이행의 역량을 발휘한다.
지난해 12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으로 세상을 떠난 팔레스타인 시인 레파트 알라리어(Refaat Alareer)의 시도 곁에 두고 읽는다.
내가 죽으면
너는 살아서
내 이야기를 전해줘
내 물건을 팔아
천과 끈을 사서
(긴 끈이 달린 하얀 것으로 만들어줘)
눈에 하늘을 담은
가자 지구 어딘가에 있을 아이가
누구에게도
그의 육신에게도
그 자기 자신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못 하고
포화 속에서 사라져 버린 아빠를 기다릴 때
네가 만든 내 연이 날아다니는 걸 보면
잠시 동안 천사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아빠를 다시 데려올 천사를
내가 죽어도
희망이 되게 해줘
이야기가 되게 해줘
——「내가 죽어야 한다면」(If I Must Die) 전문(번역: 뉴스페이퍼)13
시인의 몸은 지상에 없지만, 그의 시는 여기 남아 우리의 몸을 통해 구현된다. 혼자 남겨진 아이를 홀로 두지 않으려고, 전쟁 속에서도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삶이 있음을 알리려고 저 간절한 목소리는 내내 울릴 것이다. 지금의 세상은 가망이 없다는 말만 나부낄 때, 우리에겐 시가 있다. 노래를 나눌 수 있는 몸을 가진 우리에게, 시가.
―
- 자스비르 K. 푸아 「불구화할 ‘권리’: 팔레스타인에서의 무력화(Disablement)와 비인도적 생명정치」, 김지영 옮김, 『오늘의 문예비평』 2016년 가을호, 248~82면 참조. ↩
- 같은 글 262면. ↩
- “새로운 느낌들의 삶, 참된 자아의 각성을 수반하지 않는 어떠한 변혁의 비전도 낡은 세상의 변주에 불과해진 시대라면 장편소설이 열어주는 탐구와 자기교육의 기회야말로 더없이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는 백낙청의 표현을 빌려왔다. 백낙청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창비 2020, 53면. ↩
- 올바른 정치와 예민한 윤리, 현재의 비판과 미래의 예시를 넘어서는 문학의 ‘이행’ 역량에 주목한 글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참조. 인용은 35면. ↩
- 『가난한 사랑노래』에 실린 또다른 시 「횃불」에는 ‘붉은 열매’의 이미지, 즉 제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몸에서 흐르는 피의 색채가 산동네 사람들이 들어야 할 “밝고 빛나는 횃불”로 확장되는데, 이처럼 작품들끼리 주고받는 이미지의 연관성은 신경림 시가 좀처럼 꺼지지 않는 민중의 자력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
- 『시경』을 학습교재로 삼았던 공자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서정시를 통한 ‘자기 공개’가 공동체의 중요한 자산일 수 있다고 전하는 글인 김경희·진은영 『논어는 아름답다』, 서해문집 2024 참조. 인용은 263면. ↩
- 『가난한 사랑노래』를 평하는 과정에서 ‘서정’을 현실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소거된 ‘주관’으로 가능하다고 해석한 입장은 김주연 「서정성, 그러나 객관적인」,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214~27면 참조. 신경림의 시세계가 지닌 ‘서사 충동’에 주목하면서 시간성의 예술을 소설적 개연성으로 수렴하여 해석한 입장으로는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같은 책 47~69면 참조. ↩
- 김준오 『시론』, 삼지원 1997, 36면. ↩
-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85면. ↩
- 최동호 해설 「해체된 출구를 찾아가는 길」, 김승희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131면. ↩
-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256면. ↩
- 같은 책 148면. ↩
- 「폭격에 사망한 시인과 끝내 유언이 된 시: If I Must Die」, 더스쿠프 2023.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