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강성은 姜聖恩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 『Lo-fi』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등이 있음.

mongsangs@hanmail.net

 

 

 

네 집으로 가

 

 

너는 문을 닫는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다시 아홉살이 된 기분으로

뒤돌아서 나온다

이 도시엔 내가 모르는 길이 무수히 많고

걷다보면 어딘가 도착할 것 같다

내려가는가 하면 올라가고

올라가는가 하면 내려오는 계단이 있고

밤처럼 깊은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에 빠진 발이 부어오르고

절룩이며 네 집에서 멀어지는 동안

건물들은 계속해서 자라나고

제임스 웹은 외계행성의 새로운 사진을 전송하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구멍이 나서 비가 새고

잠과 물속에 갇힌다

 

오늘 밤 이 도시에서

가출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오늘 밤 이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오늘 밤 이 도시에서

집이 없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오늘 밤에도 집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가족이 생긴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문밖에 있다 나는

 

 

 

과수원

 

 

과수원에 사과가 이렇게 많이 달렸는데 왜 과자를 사 먹냐고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사과를 먹어야 한다 과수원에 달린 사과는 모두 몇알일까 한꺼번에 다 먹어 없애버리고 싶다 할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나를 광으로 데려가 장에서 사 온 과자 꾸러미를 내민다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고 웨하스를 먹는다 벽 속에는 지네가 있고 지붕에는 쥐가 있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고 광에서 나와 다시 사과를 먹는다 사과는 맛있다 사과는 맛없다 사과는 맛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사과는 너무 많다 과수원은 넓고 온종일 따도 그대로다 사과를 다 따기도 전에 가을 태풍이 온다 무서운 소리로 비바람이 쏟아진다 마당에 물이 차고 길들이 사라지고 돼지가 떠내려간다 사과나무가 쓰러지고 사과가 다 떨어진다 할아버지는 운다 할머니도 운다 사과가 썩는다 과수원은 더럽고 악취 나는 시궁창이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과나무를 일으켜 세운다 태양이 과수원과 죽은 사람들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사과가 달린다 사과는 푸르다 매일 과수원이 넓어진다 매일 사람들이 죽는다 매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1 매일 어쩌면, 듣는가, 나는, 이 이야기, 생겨나와, 듣는가, 그후로도 아주 오래 오래 오래

 

 

  1. 김소월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