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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상희 金相希
2001년 충남 부여 출생. 202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nagi2001@naver.com
천사와의 드라이브
이것은 새 면허증이다
천사의 얼굴이 박힌
우리는 마포대교를 지나고 있다
내게 받은 가죽재킷과 흰 바지를 입고 있는 천사는
나를 위해 운전을 한다
능숙하게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하고 창문을 올리는 그는
이제 제법 인간 같다
조수석에 앉아 일기를 쓴다
덥다,라고 썼다가 지운다
인간이 지구를 떠나는 날 전부 죽거나 또는 전부 죽이러 가는 날
그런 날이 여름이라면 그날도 에어컨을 틀겠지
인간이 없는 곳에서 계속해서 돌아갈 실외기
윙, 하며 멈추지 못할 기계
개구리이거나 두꺼비이거나 맹꽁이인 것이 운다
아주 크게
사람의 울음과는 다른 소리다
천사가 손을 뻗어 내 땀을 닦아주었다
천사는 열사병에 걸릴 것이다
이번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겠다
지구의 여름은 처음일 테니까
강이 마른다 쩍쩍 갈라진다 피는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아서 닦아줄 수가 없다 강을 보며 잠깐 졸다가 옆을 보니 천사가 아직도 운전을 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묻자 천사는 집에 가고 있다고 말한다
또다시 잠에 든다
죽을 것처럼 잠이 온다
차가 덜컹거려서 깼다가
창밖으로 흰 눈이 쌓여 있는 것을 본다
폭설이구나
이제 지구에는 나와 천사뿐이다
토막 난 나무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천사는 지구에 온 지 여러 계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다
아무도 없는 도로 위에 차를 세우는 천사
밖으로 걸어나가
흰 눈을 한움큼 집어 혀를 내민다
앗 차가워, 천사가 웃는다
더이상 돌아갈 집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웃는 천사는
천사 같다
잡을 수 없는 것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우리는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혼자 걷는 광화문은 낯선 나라 같다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는 사람들
그사이 선두에서 걸어가는 친구가 보인다
서둘러도 따라잡히지 않는 친구는
골목으로 들어가고
붉은 벽돌집이 늘어서 있는 뻔한 장면이 펼쳐진다
성실하게 친구를 찾았다
똑같이 생긴 문을 여러번 열고 닫고
남의 집에 들어간다는 긴장은 공포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는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고 있고
무언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너 도대체 어디냐고 같이 걷고 있긴 한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멘 친구가
계단을 내려가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데
그러면 난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어 있다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광화문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어색하게 포함된 채로 걸으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친다
따라 하듯 중얼거리다 걸음을 멈춰도 아무것도 정지되지 않는다
나는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데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고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