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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경림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급! 고독』 등이 있음.
poemsea56@hanmail.net
한가하고 시끄러운 이야기 1
허공이 새파랗게 들여다보고 있어요
밤낮으로 호시탐탐인 저 눈을 다 어찌할까요 엄마
나는 또 오래전 돌아간 아버지의 책상 앞에서
어제 문득 한 튜브 속으로 들어간 여배우를 생각해요
—죽음은 저렇게 제 몸을 누에처럼 오므리고
검지만 한 튜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구나
그러나 엄마, 들숨 날숨이 아직 가지런한 나는 지금
늙어 삐걱삐걱 울어대는 의자를 깔고 앉아
무슨 신통한 작당이라도 하는 사기꾼처럼
감쪽같이 세상을 속여 넘길 말들이나 찾고 있어요
이상도 하죠? 엄마
언제부턴가 내가 찾는 말들은 다 정수리가 새파란 새들이
훔쳐가지 뭐예요?
그 자리 쇠파리 같은 것들만 윙윙거리는데 글쎄
새벽마다 비명을 지르며 쿵쾅거리던 8층이 오늘은 죽은 듯 고요해요. 어디가 아픈 걸까요? 혹 홍수에 잠긴 이베리아반도로 여행이라도 간 걸까요? 아님, 어디 환한 거짓말 속으로 이사라도?
그러면 엄마, 이제 8층 유리는 누가 깨나요?
유리와 함께 깨지던 그 적막은 또 누가 깨나요?
그는 자신이 깬 적막들을 갈아 끼우고나 갔을까요
깨진 유리 사이로 자꾸 목을 들이미는 허공은 또 누가 말리죠?
엄마, 어제부터 뻐꾸기들이 자꾸 울어요
이쪽 울음을 받아 저쪽에서 울어요
뻐꾹 뻐뻐꾸욱
울음이 사방에서 태어나요
울음들은 산 밑에 아파트를 짓고
8층을 낳고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낳고
끝내는 적막을 낳아요
쉿! 들어보세요
몇층인지 뭔가 또 던지기 시작했어요
던지고 던지며 누가 또 8층을 낳고 있나봐요
고즈넉한 방
유리 너머에는 비스듬히 하늘에 기댄 산이 있었네
빽빽한 소나무들 사이 측백나무 두그루가 튀통맞게 솟아 있는 비탈이었네
사실 그건 한 여자의 서재 뒤 유리의 속이었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남짓의 그 속에도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날 있었네
느닷없이 소나기 퍼붓는 날 있었네 그러고도 유리는 거짓말처럼
말간 얼굴로 뭉게구름 한떼 불러와 희희낙락이었네
그런 날은 이 산 저 산 뻐꾸기들 호들갑을 떨었네
어느 유난한 빛 한줄기가 유리 속에 들어와
철없는 아이처럼 거울 놀이나 하자 할 때
문득 유리는 말간 제 속으로 번개같이
은빛 비행기 한대 지나가는 것 보았네
그때 그녀, 7층 허공의 더러운 바닥을 닦고 있었네
손 닿지 않은 유리의 뒤를 자꾸 흘끔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