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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프레데리크 로르동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 진인진 2024

스피노자의 눈으로 바라본 자본주의와 그 너머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shkim@sw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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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 책 제목이 도발적이다. ‘자본주의’와 ‘예속’의 병치는 꽤나 고전적이지만(자본의 힘에 예속되지 않은 임노동자가 있던가?), 강조점은 물론 ‘자발적’에 있다. 자발성은 반어적 의미로 쓰이곤 하는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와는 같지 않다. 자유의지를 전제하는 자발성과 그것의 억압을 뜻하는 예속, 이 두 개념을 이어놓은 ‘자발적 예속’(servitude volontaire)은 그야말로 ‘몸 바쳐’ 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의 모순적 상황을 환기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압축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어이없는 착시로 드러난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프레데리끄 로르동(Frédéric Lordon)은 ‘자발적 예속’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율적 주체란 환상이라고 보는 스피노자(B. Spinoza)에 의거해 “자발적 예속은 존재하지 않는다”(44면)고 단언한다. 이것이 가난이나 죽음의 위협 같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만 자본에 대한 예속이 비롯된다는 말이라면 우리는 더이상 이 책을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동의의 결과도, 전적인 강요의 결과도 아닌 예속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힘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다른 힘의 지배를 받아들이는가? 로르동은 스피노자의 눈으로 임노동관계를 들여다보고 일종의 ‘자본주의 정동 이론’을 구축하면서 이 문제에 답한다. 그의 야심은 스피노자의 용어로 자본주의체제를 다시 설명하는 데서 더 나아가 공산주의를 재규정하는 데까지 이르고, 이 과정에서 가치와 잉여가치, 착취, 소외와 그 극복 등에 관한 맑스주의적 관념의 파산을 선언한다.

원제 ‘자본주의, 욕망, 예속: 맑스와 스피노자’(Capitalisme, désir et servitude: Marx et Spinoza, 2010)에 암시되었듯이,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욕망과 정념의 사회학』(현동균 옮김)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욕망의 관계, 다시 말해 욕망의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다룬다. 로르동은 욕망의 체제를 ‘에피투메’(épithumè)라고 부른다. 하나의 에피투메에는 그것 특유의 대상이 있다. 자본주의 에피투메는 돈, 상품, 노동의 삼각형을 토대로 하고 각각에 상응하는 ‘위대함’을 정점으로 하는 사면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책 속에 몇차례 등장하는 기하학적 모형은 스피노자에 대한 오마주일까?).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주체는 전형적으로 큰 재산과 자기과시와 직업적 성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경제주체들 간에는 물론 서열이 존재하고, 이는 상위 주체의 욕망 추구에 하위 주체의 힘이 동원되어 ‘예속 편입’되고 이에 따라 욕망이 한 방향으로, 즉 ‘주인의 욕망’을 따라 ‘정렬’되는 것으로 구현된다. 이때의 ‘주인’은 기업가만이 아니라 군 지휘관, 교수 등 수많은 주체를 가리킬 수 있는데, 이 점은 힘의 ‘예속 편입’이나 욕망의 ‘정렬’이 자본주의 이전이나 이후의 사회에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주인과 예속된 자의 욕망의 방향이 완벽하게 일치할 가능성은 적다. 그 편차를 줄이는 데서 자본주의체제가 주로 의존하는 정서적 수단은 생존의 불안에 따른 ‘슬픔’(이는 자본주의사회의 기본값이다)에서 모종의 ‘기쁨’으로 이행해왔다. 포드주의 단계에서 그 기쁨이 고된 노동을 보상하는 소비의 기쁨이었다면, 유례없는 총체적 동원을 추구하는 (즉 망상적으로 편차 0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에서 그것은 일 자체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에서 ‘자기실현’을 하려는 내재적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을 윤리의 차원으로 격상시킴으로써 노동자가 그야말로 온몸으로, 기쁘게 임노동에 투신하게 한다. ‘자본주의의 정신’의 변화를 적확하게 포착해낸 프랑스 사회학자 볼땅스끼(L. Boltanski)와 시아뻴로(È. Chiapello)의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Le nouvel esprit du capitalisme, 1999), 또는 자기착취를 새로운 체제적 폭력의 양상으로 제시한 한병철의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를 이미 접한 독자에게는 신자유주의 에피투메(욕망의 체제)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아주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앞선 분석들에 견주어 로르동이 욕망과 정서의 사회적 생산방식을 더 정치하게 서술한 공은 인정해줘야 한다.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 에피투메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무엇을 ‘해방’으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맑스주의에서 해방은 ‘착취’와 ‘소외’를 전제한다. ‘착취’가 잉여가치의 강탈이라면 ‘소외’는 (논의를 단순화하자면) 힘과 그 주체의 분리를 뜻한다. 로르동은 맑스의 ‘가치’나 ‘잉여가치’ 개념을 ‘실재론적’이라고 비판하고, 가치의 실재적 내용은 없으며 욕망하는 것을 선으로 바꾸는 ‘가치창조’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잉여가치 착취의 개념을 폐기하려 한다(여기에는 스피노자뿐 아니라 상징투쟁의 이론가 부르디외 P. Bourdieu의 영향이 과도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소외’와 ‘탈-소외’ 개념에 대한 비판은 더 집요하다.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로르동은 욕망이란 무한한 인과계열 안에서 생성되므로 어떤 욕망도 순수하게 ‘나의 것’이라 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소외는 보편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견 정반대의 주장도 하는데, 욕망이란 ‘코나투스’(자기 존재 안에서 지속하려는 성향)의 힘의 표현으로서 이론의 여지없이 ‘나의 것’이고, 이는 그 힘이 타자에게 ‘예속 편입’된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전통적 의미의 소외(내게 속한 힘의 상실)는 없다는 것이다(여기에는 푸꼬 M. Foucault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해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빼앗긴 것을 되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코나투스적 힘의 방향만을 바꾸는 것, 즉 자본주의적 분업체계가 부과하는 제한된 목표에 고착된 힘을 ‘탈고착화’하여 다양한 목표로 개방하는 것이다. 이는 집단적 차원의 “정서적 계급투쟁”(246면)을 요구한다.

맑스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로르동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유동적인 존재 역량으로서의 ‘실재’에 관한 스피노자의 관념은 그 나름대로 ‘실재론적인’ 가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지, 힘의 예속에 따른 실재성의 감소는 ‘소외’로 이해될 수 없는지, ‘공동결사기업’ 노동자의 노동은 부등가교환에 따른 잉여가치의 수탈에서 자유로운지 등등 논쟁거리는 적지 않다. 로르동에게 어떤 비판을 가하든, 그의 현실주의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자본주의체제의 외부는 가능하지만 거기서도 분업과 그에 따른 권력 불균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적대와 폭력, 그리고 정념적 예속의 최종적 소멸도 꿈같은 이야기임을 설파하는 것 역시 그가 스피노자로부터 배운 현실주의를 잘 드러내준다.

번역에 대한 언급으로 서평을 마무리해야겠다. 이 심오한 이론서의 역자는 원문의 뜻을 쉽게 전달하려고 많은 공을 들였다. 특이한 점은 그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주를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때로 본문 자체를 과감하게 수정해놓은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축복이지만 다른 이들, 특히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선호하는 학자들에게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