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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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하양 미래를 만나고 왔습니다

 

 

김중일 金重一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 『가슴에서 사슴까지』 『유령시인』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등이 있음.

ppooeett@naver.com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과 동시에 학과 동기들 따라 취업준비나 해야 한다는 불안이 그 어느 때보다 가득했던 2001년에 계간 『문학동네』에 등장한 안현미를 처음 만났다. 학교 중앙도서관 정기간행물 책장 앞에 서서 안현미의 등단작을 단숨에 읽고 몇차례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미 시인인 안현미의 이름 뒤에 ‘시인’이라는 호칭을 개인적으로 덧붙여주었다.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곰곰」, 『곰곰』,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개정판 걷는사람 2018)어온 또 한명의 여성 주체의 강렬한 등장과 함께 간절히 꿈꾸었으나 앞으로도 ‘마늘’만을 먹게 될 미래에 대한 직관은 한 시인의 탄생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이듬해 우연히 ‘불편’이라는 시 창작동인을 함께하며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후 줄곧 우리는 아침 일찍 그리고 밤늦게 기업체에 출퇴근하면서도 시를 끈질기게 놓지 않았다. 현실세계와 시세계에서 생존투쟁 중이라는 동병상련이랄까. 특히 안현미는 노동의 힘듦과 그 와중에 창작의 힘듦을, 즉 청춘의 불안을 두루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료이자 선배였다. 동인 여럿이 격주로 모여 서울 모처에서 밥도 먹고 시 품평도 하고 술도 마시고 축하해줄 일에 기뻐하고 속상한 일에 함께 슬퍼하며 그렇게 십수년을 보냈다. 멀리 이사를 가고 더러 결혼도 하면서 우리는 시나브로 만나지 못했다. 한 시절을 함께 가득 채웠으니 동인 모임을 그만 해체하자는 농담도 나왔지만, 지극히 사적인 모임으로 굳이 해체하고 말고 할 사안도 아니었다. 다만 ‘지극히 사적인 모임’이라는 말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당히 내밀한 시적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 시를 쓰고 있다는 최초의 조건만큼은 여전하기에 우리는 시를 통해 늘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마침 오늘 안현미의 시로 인해 광주에서 서울로 이렇게 그를 만나러 가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가난과 고독의 발명가가 만난 미래

 

“100평짜리 폐”(「여의사」)를 가진 시인이 있다. 『미래의 하양』(걷는사람 2024)이라는 시집으로 돌아온. 지구상의 이름이 안현미인 시인은 넓은 폐의 소유자이자 숨 참기, 숨 고르기, 숨 내쉬기의 달인으로 무언가를 견뎌내야 하는 시공간 속에서 발군의 생존능력을 발휘해왔다. 시인으로서 그리고 현실의 생활인으로서 두루 그렇다. 이렇듯 현실의 강자인 안현미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면서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시선은 저 멀리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있다. 무언가 기대 이상의 커다란 ‘시간’이 달려 올라올지 모른다는 두근거림과 두려움 그리고 초연함 등이 뒤섞이는 시 속 화자와 만나게 된다. ‘곰곰’이(「곰곰」) ‘거짓말을 제조’하고 ‘타전’하며(「거짓말을 제조하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화전’에 가던, 가난하여 더욱 도드라지던 “빨강 에나멜 구두를 신고”(「화전 간다」, 이상 『곰곰』) 과거와 현재 사이에 서서 다리 한쪽씩 디디고 생의 한가운데 당차게 버티던, 그러나 늘 아슬아슬해 보이던 시적 주체를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안현미 시집 속의 그녀들은 태풍은 거뜬히 견뎌도 누군가의 꺼져가는 숨에는 언제든 쓰러질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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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마시다가도 체하는 사람처럼 숨을 들이마시다가도 체할 것만 같은 생계와 생존을 위한 시간을 겨우 버텨냈을 뿐, 발군의 생존 능력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다만 시인으로 서른살에 등단했을 때, 열아홉살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뭐 하나 풀리는 것 없이 먹고사는 일에 치이며 살아온 제 인생도 꽤 근사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 근사함에 홀려 스무해 넘게 시를 붙들고 ‘현실의 강자’보다는 ‘시의 약자’로 살고 있고, 가능한 사회적 약자 편에 서는 시를 쓰려고 노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숨을 들이마시다가도 체할 것만 같은’ 그 시간을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마늘 아닌 걸/먹어본 적이”(「곰곰」) 없는 그 십여년의 동굴 같은 시간 끝에 만난 ‘시의 약자’라는 새로운 주체는 무엇일까. 통상적으로 현실에서의 약자는 강자로 올라서길 꿈꾼다면, 그 현실과 마주 놓인 거울인 ‘시’에서는 자리가 뒤바뀌기 마련이다. 기꺼이 거울 앞에 선 이가 시인이라면, 그의 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약자가 진정한 강자가 된다. 그렇게 시인은 시의 ‘강한’ 약자가 되어 현실 속 약자의 슬픔을 찾아내고 그 슬픔의 무게를 들어올리고자 했다. 동굴 같은 시간을 견딘 끝에 만난 새로운 주체가 안현미는 얼마나 근사하고 설레었을까.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미래가 있는 사람처럼 죽고 있습니다

 

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습니다

 

이 시각에도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습니다

——「노동의 미래」 부분

 

보통 정신과 육체는 쌓이는 시간의 더께만큼 침잠하기 마련이지만, 시인이어서 혹은 시인이라면 안현미처럼 미래에서부터 누군가 드리운 미늘을 지체없이 덥석 물어버리겠다는, 그리하여 기어이 미래로 살아서 달려 올라가겠다는 시적 의지가 소중하다. 미래의 누군가 중에는 앞서 시인이 언급한 사회적 약자와 희생된 망자가 있다. 미래를 현재로 낚아채든, 미래를 향해 달려 올라가든 백평짜리 폐를 가진 시인으로서는 어느 쪽이든 가당하다. 그런데 이번 시집 『미래의 하양』에 실린 「노동의 미래」에 따르면 미래는 매일 벌어지는 ‘죽음’의 기준이 된다. 과연 죽는다는 것은 미래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로 가지 않는 것일까. 아울러 시인의 일상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세번째 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 2014)를 준비하는 와중에 세월호참사를 겪으며 개인적으로 심한 내상을 입었어요.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삶을 사는 게 아닌 죽음을 사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설상가상 박근혜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세번째 시집은 ‘수리’하자고 외쳐보기도 전에 조용히 묻혔습니다.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며 살아가야 할 텐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었고, 무엇 하나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는 아수라 속에서 생계와 미래도 무의미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사업목적 계약직에서 무기 계약직으로, 무기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기를 쓰며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후회한 적 없냐고요? 한번도 없습니다. 무모하지만 무모하고 싶었어요. 중학교 시절 회수권 살 돈을 마련하려고 광장시장에서 식당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도 있으니, 식당에서 다시 설거지를 하게 되더라도 그 슬픔에 동참해야만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래를 호명하는 것은 미래 없음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겠냐고 덧붙여 시인은 말했다. 그는 유년의 가족사에서부터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현실의 생계 등 삶을 버티며 상상해온 사적인 미래를 그릴 뿐 아니라 2010년대를 경유하여 공동체의 미래로 확장해가는 걸음을 내딛기도 했다. 공동체의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몇배의 ‘숨’이 필요할까. 그것을 위해 시인은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긴 세월 현실 생계에 충실했던 것을 감안하면 전격적인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출간된 시집 『깊은 일』(아시아 2020)과 『미래의 하양』은 안현미가 시인으로서 펼쳐 보이는 두번째 장면이다. 이 새로운 장면을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안현미라는 시인의 태생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는 2000년대 출신입니다

 

세상의 모든 시인이 등장하는 국면마다 그 나름의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안현미가 등장한 2000년대는 어떠한가. 군사독재의 일단락으로 근현대사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며 겨우 얻은 한줌의 자율성만으로도 나름대로 화려한 시적 개성들이 분출했던, 아울러 금융위기와 세기말의 불안까지 안아야 했던 1990년대라는 전환기가 비로소 고도화된 첫번째 마디가 2000년대다. 자율성과 함께 불안과 공포마저 개인이 각자 떠안아야 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이자 자본주의와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도래했던 시기. 시문학장으로 초점을 좁힌다면 미래파와 신(新)서정의 시대라고 해야 할까.

첫 시집 해설에서 평론가 김진수는 안현미 시의 “환상적 경향의 시들과 서정적 경향의 시들 사이에 나 있는 거리와 긴장”을 주목하며, “환상적 자아와 서정적 자아로 분열되어 있는 근대적 주체의 관념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의 반영”이자 “분열된 주체의 영역을 새롭게 복원”하려는 시도에 대해 조명했는데, 이런 시각은 안현미가 신예시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다양한 재능에 대한 충실한 평가이다. 이 견해를 전제로 시인이 가진 한편의 특장에 주목한다면 안현미는 우선 신서정의 한 주자로 볼 수 있다. 1990년대의 장석남 문태준 박형준, 2000년대의 이병률 박성우 신용목 등 신서정의 신예들로 남성 시인들이 주로 호명되고 황병승 등과 함께 미래파의 대표주자였던 김민정이 특유의 여성 화자를 무진장 분화해낼 때 안현미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안현미는 안현미를 낳고, 그 안현미는 안현미를 낳고, 낳고 낳을 때마다 끙끙 앓고 있는 방식으로 2000년대와 자신을 기록했다. 안현미의 서정적 주체의 치열함은 우선 노동하는 주체라는 정체성에서 온다. 안현미의 서정시 속 주체는 잠시라도 뜬구름을 잡지 않는다. 끙끙대는 존재를 탐색하며, 그 존재는 늘 노동 중에 있다. ‘노동’은 지난 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으며, 새로운 세기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금융위기 이후 2000년대의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가속화된 자본주의와 양극화 문제 사이에 정확히 위치한 안현미의 서정적 주체는, 새로운 세기에 노동하는 주체로서 그 모든 기득권들과 치열하고 ‘고독’하게 분투했다.

 

생각건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비굴 레시피」 부분(『곰곰』)

 

안현미는 안현미의 고독을 알아봐주는 이들과도 연대했다. 시인이기 이전에 각각 출판편집자, 대학생, 대학 강사, 회사원 등 갖은 정체성을 가진 채, 그리고 소위 미래파에서 신서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시 동인 ‘불편’이라는 이름 아래 실로 다양한 개성으로 만났다. 당시 어린 우리가 커다란 역사인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시를 썼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회초년생이던 우리는 2000년대 초반 새로운 한 세기가 동세대에 가하는 불확실성의 압력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으며, 그것을 묵묵히 각자 나름의 시적 실험장에 어떤 ‘레시피’로 반영할지 고민할 뿐이었다.

다양한 시적 취향에서 전해지는 조언은 실제로 시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의 시를 완성해가다보면 자신만의 성에 모험 없이 갇히기 쉽다. 그때 성 밖에서 성벽을 허물고 올라오는 갖은 목소리들로 인하여 시는 한층 더 유연하고 그래서 단단해질 수 있었다. 시에도 숨결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시가 뿜어내는 숨결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껴보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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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매혹적이고 그래서 불편하기도 했죠?(웃음) 첫 시집 제목들을 금반지에 새겨서 출간을 축하하던 20여년 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시절을 잘 견디고 살아남아줘서 고맙다고.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좋은 시편들에서 안현미 특유의 호흡법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의 문장을 쉽게 갈무리하거나 분절하듯 다음 국면이나 문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꼬리를 잡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쁜 호흡은 흡사 숨을 참는 듯도 하고 울음 또는 울분 또는 생의 벅참을 참는 듯도 하다. 2000년대 초반에 대해서 잠시 회고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후반과 결이 조금 다르긴 해도 2000년대 후반에도 세상에는 우울이 가득했다. 대통령의 죽음과 용산참사는 다시금 폭력의 시간이 우리 일상에 난치병처럼 스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렸다. 이후 세월호참사와 국정농단 그리고 최근에도 이어지는 명백히 인재인 참사들과 현재의 계엄 사태에 이르기까지 일개 개인의 상상력을 넘어선 불행한 일들이 넘친다. 이 모든 일들이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을 사실상 뿌리부터 무너뜨리고 있음을 안현미는 최근의 시를 통해, 시 속에 등장시킨 무수한 ‘나’들을 통해 가장 빨리 본능적으로 감각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이는 시인이 늘 해오던 작업이기도 해서 지난 시집들을 톺아보면 인상적인 시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010년대를 경유하며 쓴 시들이 묶인 『깊은 일』에는 시집을 펼치는 순간부터 「깊은 일」 「세월호못봇」 「#YoSoy132」 「수학여행 가는 나무」 순으로 가슴 아픈 참사를 애도하는 시들이 울컥이며 쏟아질 듯 쉼 없이 이어진다.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했다고 쓴다 (…) 침몰해야만 했다고 쓴다 (…) 엄마들이 있다고 쓴다 (…) 최선을 그만두자고 쓴다 최악을 그만두라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희망 고문은 그만 닥치라고 쓴다 (…) 제발 그리운 이름 옆에서 살고 싶다고 쓴다 죽고 싶다고 쓴다 (…) 지옥까지 팔았다고 쓴다 (…) 보고 싶다는 말에 못 박혀야 한다고 쓴다 죽어도 죽을 수는 없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다시 죽을 때까지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세월호못봇」 부분

 

그 입 가만히 있으라 #YoSoy132 나는 132번째 얼굴이다 전원 다 구조했다더니 한 명도 구하지 못한 그 입 가만히 있으라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는 한 어머니의 비수처럼 박히는 말을 그 피 흘리는 말을 쏟아붓기도 아까운 그 입 가만히 있으라 우리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그 입 우리 아이들의 빼앗긴 봄을 살려낼 수 없는 그 입이야말로 가만히 있으라 (…) 그 입 가만히 있으라 맹목의 그 입이야말로 가만히 있으라 그 몰염치에 비수를 꽂기 전에 그 입 가만히 있으라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는 내 새끼가 아닌 개새끼들은 그 입 가만히 있으라

——「#YoSoy132」 부분

 

“쓴다”와 “있으라”의 숨 가쁘게 반복되고 연속되는 호흡법은 시인이 오래전부터 여러 시편들에서 보여주었던 특장이다. 이런 시적 호흡법은 그가 서울에 올라와 이방인처럼 주눅이 들었던 유년의 성장흔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에서, 약자 또는 희생자를 표현하는 언어를 부양하는 데 발군의 힘을 보여준다. 아울러 매일매일의 생계 자체가 숨 가쁘게 반복되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호흡의 연속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왔는데 모르는 사람이 한명도 없던 집성촌 시골 마을과 달리 서울은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 말조차도 사투리 대신 표준어를 쓰는 낯선 땅이었어요. 마치 고국을 떠난 이민자 같았달까. 그 이후로 죽 주눅이 들어서 자기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는 법을 모른 채 어른이 됐습니다. 숨 가쁘게 반복되고 연속되는 호흡법은 그렇게 말과 마음을 더듬거리며 살아온 유년시절의 성장흔 같기도 하네요. 한편으로는 제 시 속에서 자기 말이 곧 법이 되는 강자의 언어보다는 자신의 말조차 없는 약자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자 애쓰다보니 그렇게 쓰인 측면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시는 먹고사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됐고 어찌 보면 먹고사는 일보다 더 중요했기에 생계보다 우선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지만 그것 없이는 생계도 없고 삶도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니 무작정의 작정으로 살아볼밖에요.

 

 

미래에서 날아오는 탁구공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는데 나는 어쩌다 생계를 잃고 쑥을 뜯고 밤을 줍고 잣을 까고 은행을 모으며 밤나무의 밤은 향나무의 향은 어떻게 오는지 궁금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 저주받고 일어날 때 저주받으리라1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는데 나는 어쩌다 생계도 잃고 기꺼이 저주받더라도 생의 고통을 갈고 닦으며 우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지옥 속에 지옥을 사주하고 가난 속에 가난을 저주하는 자들은 누구인지 묻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생계」 전문

 

출근과 퇴근에서 해방된 시간을 토지문화관과 예버덩문학의집 같은 집필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시간들로 채웠고, 그 시간들은 무위에 가까웠으나 그 자체로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거돈사지의 느티나무와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나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무너져내리는 비두리 옛집과 굽이굽이 흐르고 흘러 한강까지 간다는 강림리 주천강을 바라보며 깊이 받았던 상처들도 흘려보낼 수 있었고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섞이고 화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깊은 내상을 치유할 힘을 얻었고, 이전과도 화해하고 이후와도 연대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은 시간이었어요. 『미래의 하양』은 그 시간들이 오롯이 담기기를 바라며 묶은 시집입니다.

 

시인이 먼저 시집 속으로 깊숙이 한발 내디뎌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시인은 미래에서 새로운 시작(詩作)의 리듬을 담아낼 호흡을 끌어오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출근과 퇴근이라는 노동의 호흡에서 벗어났을 뿐 사람이 살아가는 일 자체가 노동이다. 시인은 지금까지와 다른 노동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 『미래의 하양』에서도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이란 시인을 비롯한 우리들의 현재를 추락하지 않게 부양시켜주는 일상의 의식이자 나아가 미래를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반평생 유지했던 회사원 신분으로부터 스스로 퇴직한 소회와 계획, 나아가 이번 시집에서 ‘탁구’의 메타포로 그려지고 있는 새 일상과 다른 형태로 모색되는 미래의 노동, 시쓰기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탁구공은 미래로 날아가고 있었다

——「탁구」 부분

 

여행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탁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되는 노동 대신 힘이 솟는 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적 모색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탁구를 치며 흘린 땀과 시를 쓰며 흘린 눈물이 ‘미래의 시’가 될 거란 터무니없는 주문을 외치면서.(웃음)

 

탁구가 ‘미래의 시’를 위한 주문이 된다니. 그렇다면 탁구 치는 삶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탁구는 이번 시집의 핵심 모티브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고아 같았던 시절’을 완전히 떠나보내고 맞은 새 국면. 이전까지는 시 속의 주체가 과거와 현재에 한발씩 디디고 있었다면, 과거의 한발을 떼 미래로 옮겨 딛는 몸짓, 미래로 날아가는 공을 정확히 받아내기 위해 한쪽 스텝을 새롭게 옮겨 딛기가 곧 이번 시집의 탁구 치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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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이 나에게 탁구공을 던졌다

——「탁구장」 부분

 

새로 “이곳에 살기 위하여”(‘시인의 말’)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탁구」) 치는 탁구는 정직하고 단순하지만 동시에 예상을 불쑥 벗어나기도 해 받아치는 걸 번번이 실패하게 만든다는 면에서 일상을 충실히 은유한다. 그런 정직한 반복 속에서 사랑을 비롯한 예상 불가능한 감정들의 끼어듦과 그에 의한 흔들림, 그 실패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시. 그런 시를 쓰는 의지가 탁구 치기와 동일선상에 놓인다는 것은 시인의 말을 비롯한 시편들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조금 가벼운 질문을 던진다면, 그래서 시인에게 탁구란 무엇인가.

 

우선 탁구는 어린이부터 어르신들까지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이라서 제 교우의 폭이 확장됐고요.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해 예선 탈락하는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친 만큼 실력이 느는 정직한 기쁨을 주기도 해요. 체지방은…… 흘리는 땀보다 더 마시는 술 때문에 감소하지는 않았지만, 탁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예상 밖의 즐거움들이 나를 살리는 느낌입니다. 시가 우리들에게 그렇듯이.

 

 

사랑이라는 미래

 

우리에게 과거에도 지금도 시가 그러듯 탁구가 예상 밖의 즐거움을 준다니, 더구나 미래의 시의 새 호흡법의 발견이라니 여러모로 유익한 생활체육이 아닐 수 없다. 한창 미래를 이야기하던 이쯤에서 한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건넸다. 시인이 오래도록 주문처럼 외우던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거짓말을 타전하다」)는 첫 시집의 구절의 기원에 대해서 말이다. 꽤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안현미 시인의 사적인 가족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고 회고하던 시절을 비롯하여 시집마다 큰 비중은 아니지만 꾸준히 유년의 가정사적 이야기가 등장했다. 나는 그저 그 구절구절의 실마리를 통해 독자로서 엿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의 3부에는 따로 부를 구성해서 가족에 대한 작품을 모아놓았다. 최근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가족 모티브는 공히 시인들에게 각자의 시적 여정의 출발점이라고 할 만큼 시세계를 조망하는 데 중요한 조각인데, 안현미의 경우 특징적인 건 복수의 어머니라는 존재다. 두명으로 분화한 어머니들 사이에서, 시인에게 여자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여자비」 전문(『이별의 재구성』)

 

지난해 설을 앞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두번째 시집(『이별의 재구성』) ‘시인의 말’에도 적었지만 “부러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나/내 존재로 인해 고통받았던 여인들/무덤 속에 있는 엄마와 태백에 있는 엄마/내 삶과 죽음의 공양주 보살들” 중 한분이셨습니다. 제게는 엄마가 같은 언니 두명과 아빠가 같은 언니 오빠 두명이 있습니다.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기 시작한 산업화시대에 일자리를 찾아 아내와 자식들을 고향에 두고 태백 광산촌으로 온 아버지가 서른도 되기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둘을 키우던 어머니와 만나 저를 낳았습니다. 그런 가족사의 틈바구니에서 저는 여섯살 때 아버지 고향에 있는 집으로 보내졌고, 여섯살 이후부터 저를 키워준 또다른 어머니는 2001년 제가 시인이 된 것도 모르고 그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것과는 별개로 참 좋은 분이셨어요.

 

마지막 남은 어머니의 죽음과 오랜 세월을 아프게 경유하여 비로소 다다른 고아의 상태. 고아는 아니었던 상태의 미래가 완전히 저물자, 그 사라진 미래의 반작용으로 새로이 밝혀지는 미래. 시를 쓰면 흐르는 눈물, 탁구를 치면 흐르는 땀이 있는 당연한 미래. “눈물과 땀은 공히 미래에서 오는 것”이라고 시인은 덧붙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래에 대해서 한번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앞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번 시집의 가장 중요한 시어는 무엇보다 미래일 것이다. 모든 시인이 어느정도 그렇지만, 특히 안현미는 시종 ‘고백’하는 시인이다. 고백의 진솔함과 그것의 꾸준함 그 자체로 첨예함까지 획득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1940년대의 윤동주, 1960년대의 신동엽, 1980년대의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그리고 1990년대의 기형도 등 우리 시문학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들에게서 그들이 살아낸 연대를 빼고 살피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시인이 몸담고 있는 시공간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같은 세포를 나누며 그의 시와 한몸으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또 말하지만 안현미는 2000년대 출신이다. 개인에게 분담되던 고독, 가난(양극화)과 노동(고용의 불안정성), 그 모든 것들로 인한 공포와 불안 등에 대한 고백이 이전의 안현미의 시일 것이다. 그 고백은 의심할 필요 없는 과거와 현재의 산물이다. 그랬던 시인이, 그렇다고 지금껏 늘 지니고 있던 고독과 노동에 대한 현실적 불안이 사라진 것이 아님에도 바로 지금 미래를 호명한 것은 중대한 변화로 보인다. 미래를 호명하기 위해 안현미는 이전보다 더욱더 ‘나’보다는 ‘우리’ 속의 슬픔을 우선하여 탐색한다. 이러저러한 직장을 유랑하며 사업목적 계약직, 무기 계약직, 정규직 등으로 오랜 노동의 연대기를 돌고 돌아 시인으로 수렴된 안현미가 미래를 불러내기 시작한 것은 전작 『깊은 일』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미래와 사랑에 대한 의지를 다음과 같은 시에서 이미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초록색 마을버스가 지나갔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고 미래가 도착했지만 생각은 생각만큼 진흥되지 않았고 유정도 무정도 인간의 일이어서 다시 토요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광장으로 갔다 그러는 사이 재벌도 고위 공무원도 감옥에 갔다 사랑을, 인간을 잃어야 한다면 나는 나를 중단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흰」 부분

 

또한 시인은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망자에 대한 애도 그리고 기록을 위한 하얀 캔버스로서 미래라는 것을 펼쳤다. 알다시피 ‘하양’은 죽음과 여백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산물이지만 다분히 미래를 위한 것이고, 미래를 먼저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미래 위에 그려지지 않으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점이다. 지난 시절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를 절망적으로 모색했으며 번번이 상처받았고 결국 자신의 미래를 불러내는 데 실패했던 시인이, 그 절망의 끝단에서 2010년대 이후 미래를 불러내는 데 정확히 성공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그러한 미래에 대한 호출이 ‘나’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위해서고, 지금 여기 ‘미래’에 반드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제 시인만이 품고 있고, 향후 펼쳐서 그려 보이고 싶은 미래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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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아무래도 애도의 장르가 아닐까 합니다. 세월호참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던 마음을 시집 『깊은 일』로 묶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참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 거대한 슬픔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되는 일, 함께 울어주기 위해 땀 흘리고 힘내서 ‘미래의 하양’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는 일. 조심스럽지만 그런 애도의 방식도 허락된다면 오래도록 탁구를, 시를, 연대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을 생각입니다.

 

목련은 안개 속에 서 있었다 불투명과 반투명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안개는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금 막 밤과 헤어진 강물은 새벽과 몸을 섞고 있었다 목련 앞에서 웃음도 울음도 없는 얼굴이 반쯤 파묻히고 있었다 먹히느냐 먹느냐 그것만으로는 정의되지 않았다 당국은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구하여도 구할 수 없었다 괴로워도 괴로웠다 목련은 안개 속에 서 있었다 공정이냐 공정이 아니냐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중대재해도 중대처벌도 중차대하지 않은 당국은 미래가 현재와 현재가 과거와 과거가 미래와 악수하듯 아침엔 주천강 점심엔 동강 저녁엔 한강으로 이름을 바꾸며 흘러갈 것이다 목련은 안개 속에 서 있었다 불투명과 반투명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안개는 흘러나오고 있었다 삶처럼 죽음처럼 죽음처럼 죽음처럼

——「안개와 당국」 전문

 

우리는 참사가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일상 그 자체가 된 세계를 맞닥뜨리고 있다. 안개는 투명과 불투명의 경계를 지우며, 급기야 경계 자체를 지운다. 공정과 정의를 구분하는 경계가 지워진 극단의 사람들의 존재도 차가운 현실이다. 같은 시공간에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침 점심 저녁 이름을 바꾸며 한강으로 모이는 강줄기처럼 우선 흘러야 한다. 과거와 현재가 미래와 악수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흐르면서 부딪히고 뒤섞여야 한다. 공감하기, 함께 울기, 연대하기의 모든 과정, “괴로워도 괴로”워 하기 같은 것들이 안현미가 제시하는 함께 미래-하기다.

나는 안개 속에 서 있는 목련의 형상에서 미래를 발견한다. “불투명과 반투명의 모호한 경계” 자체인 안개 속에서 안개의 일부처럼 목련은 몸을 섞고 서 있다. 그런 목련의 형상에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안개 같은 목련은 결코 안개가 되지 않고 목련으로 서 있다. 그럼으로써 안개라는 실체를 사람들에게 인식하게 한다. 저기 저 안개같이 하얀 목련을 보니, 이곳에 안개가 가득하다는 걸 알게 한다. 언젠가 저 고독한 목련을 안개 속에서 꺼내줘야겠는데 그 방법은 무엇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시인은 가볍고 경쾌하게 탁구공을 올린다.

 

(더 이상)

 

새도 노래하지 않고

꽃도 피어나지 않아도

 

(끝끝내)

 

돌아와 라켓을 잡듯

사랑을 붙잡겠다고

——「(나의) 탁구론」 전문

 

무엇보다 사랑의 의지만이 미래라는 시험지의 유일한 답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이 모든 절망과 회의를 견디며 끝까지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끈기에 대해서라면 안현미는 누구보다 믿을 만한 시인이다. 20년 넘게 시를 써왔는데, 다시 하얗게 되어 무엇이든 쓸 수 있게 된 상태로 우리에게 돌아온 시인이 여기 있다. 마지막으로 요점 정리를 하자. 이 시집에서 ‘하양’은 무엇인가. 하양은 사랑의 의지로서 미래로 쳐올리면 어김없이 미래에서 날아 돌아오는 탁구공의 리듬 그 자체다. 아울러 하양은 애도의 캔버스다. 결국 하양은 무엇보다 사랑의 메타포다. 앞서 읽어본 「생각보다 흰」과 「(나의) 탁구론」 등의 시편들에서 공히 찾아볼 수 있는 ‘사랑’이라는 시어가 새삼 눈에 아리게 박힌다. 혼자 사랑의 (불)가능성을 탐색하던, 고아 같은 ‘나’였던 그 시절의 안현미가 생각나서. 이제 ‘우리’가 되어 미래로 가는 안현미가 사랑을 반복해서 부르고 붙잡으려는 이유는, 사랑과 미래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명랑하고 발랄한 할머니가 될 야심찬 계획이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 탁구,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2025.1.20. 창비서교빌딩)

 

 

  1. 피노자가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하며 들었던 저주.

김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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