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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올가 토카르추크 『기묘한 이야기들』, 민음사 2024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사람

 

 

김유태 金釉泰

매일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시인 camuslapest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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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뚜까르쭈끄에게 보내는 편지

애정하는 올가 뚜까르쭈끄(Olga Tókarczuk). 2019년 12월 스웨덴 한림원 2층에서 열린 ‘노벨 강연’에서 당신은 한장의 사진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딘가를 응시 중인, 당신 어머니의 슬픈 표정을 담아낸 흑백사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당신이 슬픈 표정의 이유에 관해 묻자,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당신은 회고했습니다.

“너를 낳기 전에 이미 난 너를 그리워하고 있었어.”

저는 당신의 무수한 문장들 사이에서 이미 그 사진을 보고야 만 것만 같은 이상한 충동을 느낍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시간관이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당신 어머니의 작은 생각이 당신의 심부에 무형의 씨앗처럼 뿌려져 훗날 당신이 쓸 모든 글의 시원(始原)으로 작동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펼쳐보는 당신의 소설집 『기묘한 이야기들』(Opowiadania bizarne, 2018, 한국어판 최성은 옮김)도 그렇습니다. 이 책에 담긴 세계의 풍경은 낯설고 생소하고 기이합니다. 그러나 그 기묘함의 감정이 우리들 자신의 표정임을 당신의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10편의 중단편을 모은 이 책의 목소리는 책장에 꽂힌 다른 책과 다릅니다. 원인에 앞서 결과부터 선행하는, 인과(因果)가 역류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체와 객체가 혼재된 채 인물과 사물이 조우하는 이상한 만남이 가능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소설 속에서 각각의 사건은 개별적으로 분절되지 않고 결국은 하나의 줄기로 통합됩니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지만 자기만의 분명한 질서를 갖고 떠도는 존재들의 모순투성이 기록이기도 합니다. 저는 뚜까르쭈끄 당신이 설계한 모순의 여정을 동행하면서 당신이 발견한 진실을 목격한 듯한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 있고, 이미 죽은 자들과 아직 오지 않은 자들이 말을 거는 소설 속 세상을 깊이 관찰하면서 저는 그 고백을 이 글로 남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첫번째 수록작 「승객」을 펼쳐봅니다. 이 소설은, 평생 한가지 악몽을 반복해 꿨던 한 남성의 이야기를 들은 ‘나’의 서술로 진행되는 초단편소설입니다. ‘나’는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남성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남성은, 서너살 무렵부터 어떤 미지의 존재 때문에 극도의 공포와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려왔다고 말합니다. 남자는 사유의 정신이 무르익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그 존재를 느끼지만 실체를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두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남자는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고 그 존재가 누구인지를 일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노인이 된 자기 자신이, 바로 오래전 그 아이가 두려워했던 존재였음을요.

한 인간의 생은 선형적인 시간으로 이어지며 역의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아이는 원인이며 노인은 결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절대성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노인이 된 미래 자신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본다는 것은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험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지평선에서 이탈될 때 그가 자리한 공간은 이상한 느낌의 공간으로 변주되어 기묘한 자장을 형성합니다. 아마도 아이가 느꼈던 두려움의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원인에 선행하는 결과를 알게 되는 순간 느끼는 무력감, 그 이탈된 질서 앞에서 인간은 강한 실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슬프기보다는 거대한 공포로 나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질서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표정을 다룬 또다른 작품은 「병조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소설은 50대 남성의 기묘한 죽음을 그립니다. 연금생활자였던 어머니가 사망하자, 남자는 (아마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가로챈) 어머니의 연금과 어머니가 수십년간 담가뒀던 병조림으로 연명합니다. 어머니 생전에는 물론이고 이제는 죽은 어머니에게마저 빌붙어 사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남성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유산처럼 남긴 병조림이 가득한 선반에서 오래된 발효식품을 하나씩 꺼내 먹기 시작합니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오이피클이나 검은 혈전처럼 엉겨붙은 절인 음식물은 그에게도 불쾌하고 또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돼지족발이 든 병조림이나 매콤한 비트절임은 훌륭한 풍미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축구경기를 보고 유유자적 소일하다가 수십년 전 어머니가 담가둔 버섯 발효식품을 먹고 급성 간부전으로 사망합니다.

제가 이 작품을 기묘하게 느끼게 되는 이유는, 소설이 갖는 수미상관의 형식 때문일 겁니다. 소설 첫머리에서 어머니의 친구들인 괴팍한 외양의 노파들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사라졌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도 노파들이 등장해 남자의 장례를 치르고 사라집니다. 망자의 행렬을 배웅하기 위한 사자(使者)인 노파들은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강력한 자장을 형성합니다.

그 사자들의 등장을 제외하면 이 작품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객체가 주체에게 개입하는 기이한 역전으로 가득합니다. 남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버섯도 질서로부터 이탈되는 힘입니다. 당신이 표현한 것처럼, 그 이상한 버섯은 마치 ‘하나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남자의 목구멍을 타고 배 속으로 (스스로) 미끄러져 들어가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까요. 병조림이 가득 놓였던 그 집의 선반은 남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질서처럼 보였지만 실은 남성은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고, 오히려 통제를 하는 쪽은 그 말없는 사물이었습니다. 숨을 거둔 어머니의 생전 의지가 개입된, 미래의 완전범죄를 위해 획책된 것만 같은 이상한 버섯들 말이지요.

통제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의 무력한 인간상을 다룬 다른 작품은 「실화(實話)」이겠지요. 학술대회 폐막을 기념하는 만찬에 참석하려던 한 교수가 대리석 바닥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친 여성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는 다친 여성에게 치명상을 입힌 가해자로 의심받으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다 파멸에 이르게 되지요. 작품의 시공간 속에서 인과의 질서는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수가 굴욕감 속에서 폭행을 당해 흐느낄 때 그의 파괴된 정체성은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기묘한 이야기들』을 읽는다는 건 갑작스럽게 사건에 연루되어 운명에 뒤쫓기는 교수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폐쇄된 공간이자 도망칠 수 없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평생 반복된 누군가의 악몽을 들어버리는 경험과 같다는 생각, 비밀스러운 의도로 가득했던 병 속의 진실에 무지하게 감염돼버린 뒤의 표정을 지어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애정하는 뚜까르쭈끄. 당신은 한국 언론사들과의 첫 인터뷰에서 “문학이라는 왕국은 무수히 많은 도로와 샛길로 이뤄진 거대한 영토이며, 길 없는 광야도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버려졌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것, 그것이 소설”」, 매일경제신문 2020.9.28). 당신의 말처럼 그 도로와 샛길과 영토와 광야를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읽는 책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당신이 그려낸 세계의 풍경을 깊이 상상할 순 있어도 그 세계를 묘사하는 도구였던 당신 고국의 언어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호기심이 일어 이 책의 한국어판 표지에 적힌 폴란드어 원제의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오뽀비아다니아(opowiadania)는 오뽀비아다찌(opowiadać)에서 왔는데 큰 틀에서 이야기를 뜻한다고 하고, 비자르네(bizarne)는 기묘함을 의미하더군요. 그런데 ‘opowiadać’를 자세히 들여다보다 ‘기묘한 이야기들’이란 이 책의 제목이 형용모순이란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이 단어에서 ‘-po’는 행위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하나의 맥락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상황을 뜻한다는데, 이는 당신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주제나 세계관과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애정하는 뚜까르쭈끄, 저는 당신을 아주 잠깐 만난 적이 있습니다. 2024년 12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상 시상식과 만찬이 끝난 직후 저는 당신이 한 지인과 함께 스톡홀름 밤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겨울 자정이 넘은 시각, 이국땅의 밤거리에서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말을 걸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당신은 빠르게 사라지더군요.

그러나 한참 길을 걷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에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놀랍게도 이번엔 당신이 저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인터뷰 요청을 짧은 답변으로만 대신하고 다시 거리로 사라졌습니다(「노벨상 만찬 참석한 기자가 남겨보는 비하인드 스토리」, 매일경제신문 2024.12.12). 저는 그 잠깐의 시간으로 모든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독자로서 고백해두자면, 당신과 나눈 몇마디 경험마저도 내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지도 모르는 기묘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날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두권의 책 가운데 한권이 바로 『기묘한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이 책을 가져갔던 저만의 그날 기묘한 사건처럼, 당신이 읽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기묘한 감정으로 지금 이 편지를 남기는 것처럼, 우리의 세계는 질서를 거스르면서도 질서 안에 위치한, 기묘한 풍경으로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