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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시적 창조와 세상 만들기

 

희망할 자유

최근 시에서 발견되는 영성과 시적 실천

 

 

최선교 崔宣敎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갱신하 는 말, 다시 쓰는 미래」 「무신경이라 는 전략」 등이 있음.

hello6250@gmail.com

 

 

1.

 

세계질서 전반의 불확실성이 날로 커지는 시점에서 영성(靈性)1의 부상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성의 반대급부 영역으로 탐색되기 시작한 정동연구의 영향을 등에 업은 영성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실재들의 경계를 질문하며 여러 실천성을 내포하는 개념이지만, 현실에서 그것의 활용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포착되기도 한다. 가령, 전세계적인 정치의 극우화 현상은 종교를 동원하여 반난민・반이민・백인우월주의라는 혐오와 분열을 가동한다. 이것이 제도화된 종교의 틀을 빌려 발생한다면, 종교적 제도화에 포섭되지 않고 발현하는 영성의 사례도 눈에 띄는데, 이런 경우는 대개 상업화를 동반한다. 무속 소재의 영화·리얼리티쇼 등 대중문화가 흥행하는 사례 외에도 영성을 기반으로 한 상담·점술·타로 등은 ‘온라인 치료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현대인의 불안을 양분 삼아 날로 성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사를 고려했을 때 영성이 자본주의적 변형을 겪는 현상 역시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 특별히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2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개인이 심리적 답보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영성을 동원하며 그 과정에서 상업화와 소비주의가 가속된다는 분석이 이 글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는 아닐 것이다. 현상 기술을 넘어 비판과 전복과 해방의 창구로서 영성의 부상을 사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영성의 세속화가 심화된 시대에 더이상 성스럽지만은 않은 영성 자체를 경유하는 시적 발화는 어떤 식으로 달라졌을까. 신자유주의라는 만능의 프레임을 갖다 대는 순간, 영성은 불안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납작하게 재현되며 오직 초월이나 도피를 위한 방편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영성으로 다가가는 시의 발화가 현실과 정치로부터 후퇴하지 않는 법도 있다. 영성이 반드시 사회적 실천 쪽으로 걸어나와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영성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 궁극적으로 정치적 행위의 역량으로도 연결될 영성이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글은 영성이 세속화·자본화되는 와중에도 그것을 넘어 미래에 대한 상상과 진실에 대한 추구 속에서 영성의 해방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이는 ‘시적 창조’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룩되는 진실의 추구이기도 할 것이다.

 

 

2.

 

개인적 감정이 어떻게 정치적 실천과 결합하는지를 연구하는 앤 츠베트코비치(Ann Cvetkovich)는 희망 없는 자포자기 상태를 신앙의 상실로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출현하는 시점은 정치 조직이 실패하거나 조직의 목표에 의심이 생겨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재무장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부질없음의 표현이 되는 정치적 위기의 순간이다.”3 다시 말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의 수사 의문문이 되는 위기의 순간에 영성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 분석을 개인적 위기의 상황에도 적용해본다면,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현하는 영성에 대한 관심과 소비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일 수 있다. 혹은 영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근대 이전의 시간 혹은 외부의 공간이 암시하는 제3의 상태로의 회피. 그러나 최근의 현실에서 영성을 찾는 동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해 보인다.

 

팔자가 싫을 때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라고 적었다

월급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때 가스가 끊겼을 때 이십육인치 캐리어 질 질 끌고 남의 집 전전했을 때

 

보세요 부의 기운을 담은 부적입니다 영민함을 상징하는 토끼 두 마리가 그려져 있지요 아 그건 한정판 순금 부적이에요 승천하는 청룡과 여의주가 길한 기운을 가져다줍니다

 

단돈 칠만 원

없어 인마

 

내가 태어난 게 대길인 줄이나 알아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길래 창문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했다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고선경 「신년 운세」 부분

 

고선경의 두번째 시집(『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2025)을 여는 이 시에서 화자는 이곳저곳에 사주를 보러 다니는 동안 “남을 돕는 팔자”라는 말을 여러번 듣는다. 그런데 “쉽게 슬퍼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거나, “힘들어도 꼭 이루어질” 거라는 조언은 알맞지 않다. “마흔 살 되면 다 해결”되니 문제없다는 친구의 말도 마찬가지다. 그가 처한 삶은 ‘지금 당장’ 바로 해결되지 않으면 곤란할 정도로 긴급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선 월급이 나오지 않고 집의 가스마저 끊겨 “이십육인치 캐리어 질질 끌고 남의 집 전전”하는 상황에서 “대기만성”을 운운하는 일은 사주팔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주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소리로 들린다. 따라서 당장 해결되지 않으면 곤란한 삶이 “대기만성보다는” “만사대길”하길 바라는 염원은 지극히 현실적인 소원이다.

막바지로 몰린 삶에서 ‘나’는 정해진 팔자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나를 슬프게 만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그러나 그가 협박하는 삶이나 팔자는 결국 자신의 것이므로 화자가 통제할 수 있는 인생의 남은 부분이란 그것을 끝내는 일뿐이라는 사실만(“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 재차 확인된다. “부의 기운”이나 “길한 기운”을 가져다준다는 약속을 돈으로 사서라도 받아내고 싶지만 그럴 돈이 없다. 자본주의체제에서 영성이 고부가가치 문화상품이 되어 소비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식의 사회적·경제적 분석은 그 소비적 주체의 다양한 형편을 보지 못한 한 힘을 잃는다. “단 돈 칠만 원/없어 인마”.

그리고 이 대목을 전후로 시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변한다. “내가 태어난 게 대길인 줄이나 알아”라며 팔자에 말을 걸 때 태어난 시간(조건)에 의해 ‘나’를 규정하던 팔자의 상징적 힘이 약화된다. 팔자가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탄생이 팔자의 존재조건이 되는 것. 그러니 팔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탄생은 ‘대길’이 아닐 수 없다. ‘삶’이나 ‘운명’이라는 말이 갖는 위엄은 고선경이 순식간에 이루어내는 이 경쾌한 뒤집기를 통해 ‘나’를 구속하던 힘을 잃어버린다. 이어지는 화자의 믿음과 행위의 조건은 더욱 흥미롭다. 화자는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창문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한다. 뒤집기를 통해 완전한 구속력을 잃어버린 의미체계로서의 운세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그러자 끝낸다는 행위의 선택지만 남아 있을 때 쓰인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가 알고 보니 다르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화자는 그 문장을 부적처럼 들고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내가 가진 물건 중”에는 하나도 없던 “행운의 색깔”인 하늘색이 온통 하늘에 퍼져 있다. ‘나’는 자신의 해석으로 완성한 행운의 색깔을 머리에 이고 “씩씩하게” 걷는다. 시의 초반에서 사주쟁이는 ‘나’에게 남을 돕는 팔자라고 했으나 ‘나’는 이제 그 팔자를 내 방식대로 써먹는다.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이 적힌 “이 시”를 부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주쟁이의 예언은 시 속에서 전복되고 다시 전유된다. 세계를 해석하고 규정하는 상징체계(팔자)가 “이 시”라는 형식을 입고 다시 태어날 때, 시는 과거에 신의 대리자와 동일시되었던 시적 발화의 영험함이나 신성함을 등에 업지 않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효능감을 유지한다. 또다른 부적이 된 이 시를 “꼭 사서 간직”하라고 권유하는 귀여운 결말은 순수나 신성의 차원을 벗어난 시에서 가능한 행운(변화)을 상상하고 또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미래를 구속하는 예언을 가뿐하게 뒤집고 씩씩하게 걷는 일에는 어느정도 비논리적인 결기가, 즉 다른 미래에 대한 믿음을 기개로 밀어붙이는 힘이 필요하다. ‘어찌 됐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결말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찌 됐든’에 해당하는 내용일 때가 많다. 비가시적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의미의 체계를 행위와 선택의 영역으로 전유하여 구속을 순식간에 뒤집어버리는 힘이 정말 가능할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원하는 미래에 아직까지 도착하지 못한 것일까?

 

 

3.

 

오산하의 「크리소카디움」(『첨벙 다음은 파도』, 창비 2025)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하루는 신점을 보러 갔어/내가 모르는 신이 너무나 많고/어쩌면 평생 그 무엇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오히려 마음이 편했지”. 신력을 통해 단 하나의 정답을 알려주는 점을 치러간 자리에서 평생 무엇도 알 수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는 고백은 불가해한 시대를 살면서 종종 빠지게 되는 체념의 정서를 닮았다. 파악할 수조차 없이 거대하며 그래서 해결의 문제가 아니라는 체념은 빠지기 쉬운 늪과 같다. 시의 제목인 ‘크리소카디움’은 벽에 매달아 거꾸로 키우는 식물의 이름이다. 이 시는 매달려 ‘사는’ 박쥐가 “목을 매고 죽은” 이미지를 통해 결국에는 “거꾸로 자라도 잘 살”수 있다는 다짐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런 다짐이 좀처럼 희망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시의 초반부에서 “창으로 들이치는 비를 맞는 신발을” 보고 “이렇게라도 비를 맞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얼른 괜찮으냐 물으며 창을 닫아야 할지 고민했”던 것처럼, 젖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 화자의 걸음이 여전히 정처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거꾸로 살아도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두고 다행이라고 할지, 괜찮으냐고 물어야 할지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만나 건배 없이 술을 들이켰다 끝없는 낮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묻는 너의 말은 흩어져버렸지 나는 그런 거 헤아려볼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잇새로 흐르는 소주를 닦았다

 

아직도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너구나

 

(…)

 

너는 여전히 기도를 하는구나 능청스럽게 신에게 일단 들어나보라고 이죽거리며 간혹 죽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여긴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아

귀신도 신이니까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듣기만 했다

 

나는 아무리 부딪쳐도 사라지지 않는 이를 만지며

이게 나의 죄책감이야

이게 나의 밤이야

—오산하 「밤 없이도 거짓말을 해」 부분

 

영성의 성격이 그렇듯, 영성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끊임없는 의심에 맞닥뜨린다. 돌연한 행위 전환의 가능성에 대하여, 합리성의 결여에 대하여, 혹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므로 현실이나 정치 차원으로의 확장이 쉽지 않다거나 애초에 영성에 관해 사유하는 일 자체가 비합리적 미신에 사로잡힌 것이라는 의심들이다. 시집의 또다른 시 「예언이 될 때까지」를 보건대, “너를 보며 사람이 아닌 것들을 떠올”리면서도 “그런데 나 귀신, 유령, 신 같은 단어는 쓰고 싶지 않은데.”라는 고백 앞에서 화자의 눈앞에 존재하는 ‘너’를 표현하기 위해 소환된 “귀신, 유령, 신 같은 단어”는 실패한다. 오산하는 파악하지 못한 일 혹은 존재의 비밀 같은 것이 너무 쉽게 환상, 신비, 초현실의 영역으로 내몰리는 일을 경계하는 한편 그런 쉬운 해결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밤 없이도 거짓말을 해」는 지독한 애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는데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을 때 잊을 만하면 “어깨 위로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은 “어떻게 잊으려고 하냐는 듯이” 반복된다. “끝없는 낮이 언제까지 지속될까”라고 묻는 ‘너’와 달리 화자는 “아직도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너구나”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너는 여전히 기도를 하는구나”라는 문장으로 이어지며, 기도를 할 수 있는 자의 조건을 말해준다.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기도를 할 수 있다. 이 상황이 끝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화자는 끝이 있다는 사실, “그런 거 헤아려볼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죄책감”을 곱씹는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끝나서도 안 될 것 같은 밤. “끝나지 않는 연극”이 곧 삶이 되는 지옥(「거기에서 만나」). 「밤 없이도 거짓말을 해」의 화자가 “아무리 부딪쳐도 사라지지 않는 이를 만지며/이게 나의 죄책감이야/이게 나의 밤이야”라고 읊조릴 때, 입을 아무리 크게 벌려도 소리 없는 “비명”만 흐를 때, 기도는 차라리 시가 되기를 선택한다. “귀신, 유령, 신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 희미한 형상으로 들러붙고 옮겨붙어서 결국에는 이곳을 지탱한다고 여겨지는 존재가 “있어줬으면 하는 거/그렇게 상상만 해보는”(「굿것」) 마음은 흐르지 않는 기도가 되어 시의 옷을 입는다. 흘러갈 수 있는 문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면 기도가 될 필요가 없다. “신에게 일단 들어나보라고 이죽거리”거나 “죽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 일조차 할 수 없을 때, 끝이 없는 자리에서 실패하는 기도는 시가 되어 삶에서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을 애도한다. 이걸 또다른 기도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오산하의 시에 상황을 단숨에 전복하는 결기가 없다 하더라도 시는 늘 같은 문장으로 암송되어야 하는 기도문이 아니므로, 어쩌면 시는 범속한 개인인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의 ‘형태 없는 기도’를 가장 많이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4.

 

대성당에 성가가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건너 건너 악수를 한다 축복을 빌어주고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한참을 줄을 서서 헌금을 하고 성체를 받아 모신다 성체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녹지 않는다

 

(…)

 

언니, 나는 울고 있어 금박으로 싸인 그 잔이 너무 탐이 났어 빛을 발하는 것 같은 숟가락은 흰 천 위에 나란히 정돈되어 있었어 언니는 그게 지긋지긋하다고 했지 예수는 나의 딸, 내가 언니의 엄마이길 바란 적 있어 언니가 손을 모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 성체를 모시고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구보다 오래 기도했어 믿음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는 것이라고, 내 사랑을 계속 증명받아야 할 것만 같아 누군가가 나를 선택하고 소원을 들어주기 전에 내 부분들을 내가 선택할 것이라는 다짐이 수도 없이 구겨지는 거야 내 피를, 내 살을 나누어주면서 어떤 구원도, 그래 나는 태어난 적 없어 누가 나를 여자로 키운 걸까 미사포를 쓴 나를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졌어 그 뒤편엔 반짝이는 것들, 선택지 그 안에서 나는 나를 고르고 있었다는 걸

 

여자인 채로 여자를 넓히고 여자를 부수고 여자를 밀고 나가 그 이후의 이 후에도

 

내 사랑에 조언은 필요 없어

더이상의 도움은 필요 없어

 

(…)

 

나는 정확하다 한가지에 집중한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대담함과 어리석음 그것을 모두 이겨내는 투지이므로

 

누가 나를 허락해? 누가 내게 동의해?

 

최선을 다할 거야

 

늘 같은 곳에서 미끄러져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정말 빛일까, 빛뿐일까

—여세실 「빗댈 수 없는 마음」 부분

 

여세실의 이 시(『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 2023)는 성당에서 시작한다. 성체를 입에 넣고 삼키는 행위로 성찬이 완성되지만 화자의 내면에서 의례가 매끄럽게 수행되지 않는(“성체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녹지 않는다”) 이유는 절대적 명령과 수행으로 절차화된 의식 속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화자는 기도를 하는 내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미사를 돕는 “아이” 앞에는 “요강같이 생긴 종”이 놓여 있다. 사제가 잔을 들어 올리고, 그것에 축성을 하고, 비로소 잔에 담긴 포도주가 예수의 피라는 의미를 부여받는 순간마다 울리는 종이다. 화자는 그 종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아이는 종을 칠 수도 있고 치지 않을 수도 있다 종을 부술 수도 있고 종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내리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 종을 치고 언제 종을 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힘”이다. 화자는 그 ‘힘’을 탐낸다. “금박으로 싸인 그 잔이 너무 탐이 났어”. 잔을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잔에 담긴 것이 누군가의 피라는 사실을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믿게 만드는 힘. 거듭되는 선언과 약속의 이행으로 완성되는 완전한 의미의 힘. 이 힘을 탐하는 진짜 이유는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것이 자기를 결정해버리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함이다. 이런 질문이 생긴다. 종을 칠 수도 있고 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나’는 기도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화자는 끝까지 의례의 자리를 뛰쳐나오지 않고 “성체를 모시고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구보다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다. 대체 왜?

화자는 스스로 그러기를 선택했다. 자유나 의지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게 되는 장소에서 이탈하지 않고 ‘나’ 스스로 이곳에 남아 기도하기를 택하는 순간, 시가 된 기도의 힘이 발생한다. 화자의 기도는 초월적 존재의 자비나 구원을 일방적으로 구하는 행위를 벗어나 내가 ‘나’를 선택하여 구성하려는 행위가 된다. “믿음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는 것”이라는 선언과 “누군가가 나를 선택하고 소원을 들어주기 전에 내 부분들을 내가 선택할 것이라는 다짐”으로 가득한 시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힘을 갖게 된다.

시집의 4부에 처음으로 배치된 이 시의 직전에 시인은 3부를 같은 제목의 시(「빗댈 수 없는 마음」)로 닫으며 “슬픔 밖의 끝장. 가뿐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한 바 있다. “살아본 적 없는 나” “모르는 나”가 “쓰러지며 춤추”고 “없는 몸으로 기어”가고 “주절거리기. 까무러치기.”를 반복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선언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궁극의 상태—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것—를 소망하는 기도의 힘은 세다. ‘나’는 자신의 삶에서 ‘나’에 의해 그런 힘이 가능하기를 구한다. 그리고 이어진 이 시에서 화자가 묻는다. “누가 나를 허락해? 누가 내게 동의해?” 그러자 ‘나’의 존재를 ‘여자’라는 이름으로 빚은 신의 몸을 삼키고 ‘나’의 딸로 품어서 기르는 어마어마한 전환의 힘이 발생한다. “나의 대담함과 어리석음 그것을 모두 이겨내는 투지”는 멈추지 않고 “최선을 다할 거”라는 결심에 가닿는다. 성체를 신의 몸으로 믿을 때 성찬이 완성되는 것처럼, 끝내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여자인 채로 여자를 넓히고 여자를 부수고 여자를 밀고 나가 그 이후의 이후”까지 치닫게 만든다.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여자라는 정체성으로 ‘나’를 옥죄는 규범을 부수고, 그러나 여전히 “여자인 채로” 본질주의의 늪을 건너, 허무의 해체주의를 지나, 끝내는 어떤 폭력 없이도(“먹히고 싶지 않아 먹고 싶지 않아”) 성취될 완전한 자유를 꿈꾸게 만든다. 때로는 시가 시인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말하게 되는 것처럼, 이 시의 화자가 올리는 기도는 가장 자유롭지 못한 곳에서 올리는 기도를 통해 가장 완전한 자유에 도착하려고 한다.

 

슬픔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주세요. 발밑에서 터지는 은행이라고. 코가 잘못 꿰인 스웨터라고. 아이가 뱉어낸 양칫물이라고. 바짝 깎은 손톱, 혓바늘, 송곳으로 구멍을 하나 더 뚫어놓은 벨트라고. 내가 겪어본 죽음만큼만 더 살게 해주세요. 크게 울고 크게 웃게 해주세요.

—여세실 「생시와 날일」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제한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던 어느 왕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기에게 주어진 최선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찾는 일. ‘나’가 ‘나’를 해석하는 일. 그 해석이 곧 ‘나’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 영성에 함의된 극한의 자유가 자기 삶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역량이 되기를 구한다. ‘더이상 슬프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기도에 비해 “슬픔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훨씬 더 많은 일을 가능하게 한다. 화자는 “내 마음이 아닌 채로, 내 얼굴이 아닌 채로” 살며 ‘나’를 소외하지 않기를, “내가 나를 때리는 나날의 연속”에서 자기를 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걸 개인적 구원으로만 축소해 부를 수는 없다. ‘나’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세상에서 ‘너’가 ‘너’로 있지 못할 방법은 없으므로. 기도의 내용이 ‘나’가 ‘나’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누군가로부터 ‘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나에게 응답하고, 비로소 내가 되기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얻는 자유를 우리는 다른 말로 종종 양심이라 부른다.

 

 

5.

 

황정은은 2024년 계엄과 이후의 나날을 기록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약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가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황정은 『작은 일기』, 창비 2025, 66면)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다면적인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모순 속에 악이 있으나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하지만 세상엔 정말 악한 게 있어.

정말 나쁜 게 있어.

사람의 다면성을 이야기하며 악을 고민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그 내용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바로 곁 여백에 연필로 부기한다.

타고나는 걸 나는 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그건 자연.

그보다는 사람이, 사람들이 어쩌다 혹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

멍청하게.

그중에 악이 있다.(66~67면)

 

때로 세상의 어떠한 상태들은 타고난 것처럼 우리를 구속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어쩌다 혹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영성은 모든 것을 눈감게 만들거나 해결하려는 노골적인 비합리가 아니다. 영성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생길 때 그것을 이해하도록 돕거나 위로하는 대신,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여 마침내 상황이 실제로 바뀌게 돕는 동력에 가깝다. 앞서 읽은 여세실의 시 「빗댈 수 없는 마음」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종을 칠 수밖에 없던 아이가 있었다. 종을 치지 않을 수도 있고, 종을 두고 그대로 밖으로 나갈 수도 있던 아이는 자리를 지킨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것처럼 “오줌을 참을 수가 없”는 것처럼, 자기가 종을 치는 순간 공간을 가득 메우던 침묵이 깨지게 될 순간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기도문을 외우는 순간에 아이는 믿음을 밀고 나간다/그것에 말을 건다”. 기도의 조건이 믿음이며, 믿음의 내용이 희망이라면, 시는 언제나 희망에서 출발하는 기도다. 말을 걸기로 선택하고 밀고 나가는, 때로는 밀고 나간 뒤에 시작되는 말이 희망이기를 선택하는 것이 시의 일이다. 침묵을 깨지 않고는 참을 수 없고, 마침내 침묵을 깨고야 마는 것이 시의 역할이다. 행운의 색깔이 하늘색이라면 하늘을 통째로 업고 씩씩하게 걷는 ‘나’처럼, 장례식장에서 끝나지 않는 죄책감을 어루만지는 ‘나’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올리는 기도처럼, 마음대로 종을 칠 자유가 없는 곳에서 끝내 만들어낸 자유처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불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때,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응답하는 시의 역할을 시적인 실천이라고 불러보고 싶다. 진정한 시적 실천은 체념과 위로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을, 그리고 그 희망을 상상할 자유를 원한다. 현실을 상징과 이미지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세계라고 부를 때, 그 상징과 이미지를 해석할 권한은 우리에게 있다. 현실을 떠나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해석할 때 제약을 뛰어넘어 희망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 아이가 집어든 종이 침묵을 깨게 될 미래처럼 이러한 시적 실천은 우리를 구속하는 현실을 넘어서는 소리를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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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영성’(spirituality)이 그리스도교 신학을 중심으로 한 정의에서 출발했으나, 현대사회에서 기성종교의 틀을 벗어나 비체계화된 개인적・사회적 영적 체험, 탐색, 개발을 일컫는 현상 전반으로 확장되었다고 본다. 나아가 본래의 영성이란 ‘나’와 세계의 연결감, 오늘과 미래에 대한 사유를 포함하고 있는바 그러한 진리로서의 영성 추구라는 차원도 살펴볼 것이다.
  2. 예를 들어 베트남전쟁, 시민권운동, 케네디 암살사건 등으로 미국이 불안에 떨던 1960년대 이후부터 전통 개신교의 권력이 쇠퇴하고 대안적 종교집단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도교나 불교 등의 동양사상이나 점성술, 요가 같은 문화가 반문화운동의 흐름에 힘입어 서구사회에 유입되었으며 뉴에이지라는 복합적 의미의 영성운동으로 통합된다. 이후 개인주의, 소비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으로 설명되는 백인 중산층 영성을 대표하게 된 뉴에이지 ‘문화’ 중에서 웰니스와 결합한 문화상품은 금전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 의해 빠르게 성장하는 사업의 일환이 되었다. 어맨다 몬텔 『컬티시』, 김다봄・이민경 옮김, 아르테 2023 참조. 한국의 대형교회 사례는 말할 것도 없고, 무속신앙 역시 시장경제의 산물로 기능하는 양상이 주목된다. 무당이 점집을 가장 많이 차리는 곳은 “‘강남불패’라는 부동산 신화를 등에 업고 무당조차 고소득 직종이 된” 논현동이다. 이성원·손영하·이서현 『방치된 믿음』, 바다출판사 2025, 199면.
  3. 앤 츠베트코비치 『우울: 공적 감정』, 박미선・오수원 옮김, 마티 2025, 2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