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김 현 金炫

1980년 강원 철원 출생.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호시절』 『낮의 해변에서 혼자』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장송행진곡』 등이 있음.

juda777@nate.com

 

 

똠과 Living In Korea32와 KJ

 

 

18년 만에 가장 낮은 보름달이 떴다. 틴더로 만난 태국인 이 어학비자로 안마업소 야간종업원으로 일하다 경찰단속에 걸려 도망친 날이다(무서워요, 잡히면 무서워요, 태국에 오거든 꼭 저를 찾아주세요). 형에게 불고기를 대접하고 싶어요. 성북동에서 을 만나 저녁을 먹은 지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날 우리는 밥 먹고 천 따라 걷다 오리 가족을 보았고 태국에 있는 가족과 철원에 있는 가족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의 아버지는 1976년 10월에 죽었다. 후에 알았다. 태국 군경과 극우파 청년들은 탐마삿대학을 포위한 뒤,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대를 때리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이미 숨진 학생을 나무에 매달고 철제 의자로 내리치는 사진은 탐마삿 학살을 상징한다. 은 나를 형이라 부르고 나는 을 이나 떰으로 불렀다. 원래 이름 대신 집에서 불리는 이름이라 했다. 그런 이름은 보통 오래 살라는 이름. 은 치앙마이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영어로 학생들에게 생물을 가르쳤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어려움을 겪었다.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언어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태국어, 영어,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 때문에 은 한국어를 배워 전문 자막번역가가 되고자 했다. “제 꿈은 세계적인 스트리밍 서비스 선도 기업인 넷플릭스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꿈꾸는 사람 의 나이는…… 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그런 걸 물어보려면 사랑이 필요하니까, 한국을 떠나며 은 내게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알려주었으나 나는 그를 팔로우하지 않았다. 또다른 남자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Living In Korea32는 풍산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덴마크 태생의 백인으로 회색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는데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종아. 오빠가 길러지고 싶어. 서툰 한국말로 몇날 며칠 애정이 어린 말을 했고 종국에는 오빠 외로와. 오빠 물 만아. 키워볼까 싶었다. 기왕 키운다면 사람을 키워보자고. 왜냐하면 지난겨울 나는 같이 살던 사람과 헤어져 서울 떠나 파주에 터 잡고 혼자 살기엔 너무 넓은 아파트 공원 녹음들 노부부 GTX 복합쇼핑몰 먹고살 만해 동생이든 형이든 오빠든 자식이든 다 키울 수 있고(부모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의 내면 말한다. 야, 너를 키워 너를. 그래서 그들을 키우는 대신 나는 의 한국인 형이 되고 Living In Korea32의 한국인 오빠 되어 겸손한 달을 생각했다. 경기도에 살며 서울로 출근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저 달은 손 내밀면 닿을 수 있는 예쁜 달일까? 무릎 꿇고 앉아 달의 발가락을 핥으니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저를 개 취급해주세요, KJ를 떠올렸다. 자기 혼자 개집을 드나들고 자기 꼬리를 자기가 물려고 뱅글뱅글 도는 우리 강아지 덕분에 나는 지배하는 재미를 알았다. 밤마다 카톡으로 KJ에게 별별 걸 다 지시하다가 깨달았다. 아, 복종하고 싶어. 지배할수록 지배당하고 싶어지는 재미. 너와 헤어지고 내가 만난 남자들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을 빌미로 삼으면 달도 뜨고 개도 짖고 학살 속에 민주화 본 적 없는 오리 만난 적 없는 남자들 이야기를 막 쓸 수 있고 그걸 혹시라도 네가 본다면,

 

찢어진 우산은 버려, 감기 걸려.

 

 

 

COOL25

 

 

택시에 우산을 두고 내렸다 그럴 줄 알고 산 육천원짜리 비닐우산 너와 헤어질 줄은 몰랐지만 혁명세력 되어 윤석열 탄핵집회에서 잭디를 켜고 185/80 지금 짧머 끼 없습니다 민주청년을 만나 막창에 소주를 마시며 먹고사는 얘길 했지 의미는 심장에 아쿠아리움 야간청소 노동으로 돈을 벌지만 본래는 사진을 찍는다는 그가 보여준 건 흰 돌고래의 머리도 몸통도 아닌 꼬리 꼬리란 건 거룩하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그에겐 앞날 있고 희망 있기에(어려서 인생은 아직 모르겠지 늙은 나도 그게 알고 싶어서) 깊은 밤 아쿠아리움에서 도구함이라는 막다른 곳에서 섹스했다 야간노동 하는 민주게이 좆은 처음이었는데 이런 게 혁명의 향취인가 실감나더라 광장에 성소수자도 있다

 

이런 우산

잃어버린 우산

누구든 가져갔을까

누구도 가져가지 않는 비닐우산(금방 찢어질 걸 아니까 너무 투명해서 속이 다 보이니까 눈물로 숨을 수 없고 웃음으로 속일 수 없으니까 나니까 나는 너뿐이니까)

 

막다른 골목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장면 클리셰지만 삽입.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마음속에서 우리는 진실해지려 애쓰니까 불 밝혀 주소서 터벅터벅 길 끝에서 낯선 스윗드림이 다가와 속삭이네 곧 다 끝날 거야 인생 이런 거라 나이든 부모들은 사흘에 한번씩 자식(며느리)에게 전화해 했던 말을 또 하고 견딜 수가 없는 건 그것이 우리의 미래라는 사실 부모 됨이 아니라 아무도 안 볼 때 혼자 죽어야지 중얼거리면서 쿨한 척 못 본 척 바쁜 척 아는 척 예쁜 척 척척척 연애혁명 탄핵집회에서 너 봤어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새나라 만들기 중요하지 거짓 없이 나를 대하기란 어렵지만 지금은 새벽 한시 반 텅 빈 아쿠아리움을 돌면서 그댄 수족관 유리를 닦고 나는 악어 개구리 가오리 상어 수달 해마 말미잘 해파리 지나 흰 돌고래를

 

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와

우산을 찾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적막은 말없이 목적지를 향해 갈 뿐 오장육부의 창을 내리고 깨어난 정신으로 쿨하게 (경)2024헌나8 인용기념 2025.4.4(축)

 

찢어진 사랑은 버려, 감기 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