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손월언 孫越言
1962년 전남 여수 출생. 198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오늘도 길에서 날이 저물었다』 『주머니를 비우다』 『마르세유에서 기다린다』 등이 있음.
godo4416@naver.com
마르쎄유
미스트랄이 불어닥치면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삼일, 도시는 납짝 엎드려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사람들은 거리를 비우고, 덧문을 닫아걸고,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저녁 어스름, 빈 바다는 저 혼자 들끓고, 바람은 인적 없는 거리 집집을 난폭하게 후려친다. 공원에서 방긋거리던 노란 데이지를 말려 죽이고 육중한 철문들을 틀어쥐고 흔들어댄다. 부두에 가득 정박한 배들은 웅성거린다. 더이상 어떤 대책도 없다며 징징거리고 앵앵대며 주문을 왼다. 최후의 하소연인 양 돛줄을 동시에 맹렬히 털어댄다. 창밖에는 온통 방망이 휘두르는 소리가 춤을 추고, 먼지가 떠도는 방 안에 시계 초침도 긴장하여 뒤돌아본다. 사람들은 덜컹거리는 덧문을 걱정스레 만져보며 바람멀미를 앓는다, 잠 못 이루고 밤새 방 안을 서성거린다.
미스트랄은 도시 구석구석에 박힌 검은 밤을 모두 다 씻어내고, 새벽이 되어서야 바다를 건너갔다. 나는 고문에 시달리다가 석방된 피의자처럼, 오랜 병상을 털고 일어난 환자처럼, 낯설어진 길을 더듬거리며 말갛고 조용한 햇볕을 따라 바닷가로 나서서, 미스트랄이 넘어갔다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새하얀 구름 한점이 가볍게 하늘 끝에 떠올라 시치미를 떼고 있다.
금오도 3
가겟집이 내놓은 모노륨 깔린 평상에는, 고양이도, 새도, 중늙은이도 쉬어가지만, 점심때가 지나면 대여섯 집 건너, 양달 집 노파(老婆)가 지팡이도 없이,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고 슬로우비디오로 걸어나와서 평상에 앉는다. 초점을 버린 지 오래된 눈을 하늘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하늘로 천천히 왕복시키다가 졸음에 겨워 눕는다. 평상에 쓰러졌다거나 던져졌다는 표정으로 짐짝이 돌아눕는다. 짐짝이 부풀었다 쪼그라졌다를 반복하며 잠들어 있는 동안, 길에는 꿈도 사람도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 짐짝은 육지로 날아간 새끼들도 모두 잊었다. 이미 다 깎고 파내어 바다에 내어준 껍질뿐인 몸통 위로, 풍화에 맡겨진 남은 숨이 가루로 날리고 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동백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