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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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安美玉

1984년 경기 안성 출생.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온』 『힌트 없음』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등이 있음.

cilbas@naver.com

 

 

겨울 체험

 

 

새 바지를 입고 걸었습니다

 

물에 빠진 바다

 

갯바위까지 걸었습니다

 

움직이는 돌은 밟지 마

 

앞서 걷는 사람이 말해줘서

조심하며 걸었습니다

 

돌을 들추면 천천히

움직이는 고동과 참게

 

숨어 있던 것을 보려고 하면

흙탕물이 일어요

 

내 고백도 흙탕물 속에 있어요

 

나는 넘어졌어요

 

크고 무거운 돌은

움직이지 않을 줄 알았죠

 

겨울엔 꿰맨 자국이 훤히 보입니다

바다엔 더 많고요

 

돌아갈 길이 멉니다

 

돌을 의심하는 것을

멈추지 못해요

 

얼마나 다행인가요

 

녹슨 돌은 본 적 없어요

예외는 있지만요

 

걷고 있습니다

걷고 있어요

 

잠잠해지는

질기고 연한

 

무릎의 멍

 

건너뛰는 시간 없죠

지금까진 그래왔어요

 

 

 

영원의 말

 

 

흰 사과를 깎는다

끊어지지 않는 껍질을 쌓는다

 

꿈이 무언가의 예감이라면

슬프고 아픈 일을 미리 알려준다면

 

좋았을 텐데

 

돌이킬 수 없는 다정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된 뾰족함에까지

 

정말로 좋았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꿈을 거기에 두었다

 

사과의 색은 빛이 만든다는데

흰 사과는 없는 빛이 만든 사과

 

여전히 얼음 속을 걷고 있어?

얼음을 부수며 길을 만들고

 

겨울 위에 지핀 불

손바닥을 펴 불을 쬐며 곁에 오는

추운 동물들과 보고 있는 거

 

잠도 꿈도 없이 보고 있는 거

 

나는 믿어지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어

믿지 않은 것으로만 이루어진 피와 살

 

돌고 돌아

 

아직도 전하지 못한 말이 많아

알려주지 않고 걷는 너에게

 

눈으로 만든 집 안에 또 길을 만들어

가방도 신발도 없이 걷고 있을 너에게

 

오래전 편지가 사라져서 나는 매일 찾고 있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든 것 같아

 

너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친구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너무 긴 시간이 흐른다

 

하지 못한 말에도 힘이 있잖아

듣지 못한 말에도 들을 수 없는 말에도

 

흰 밥 냄새

 

사과를 깎는다

끝까지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