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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은경 吳恩京
1992년 전남 광주 출생. 201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 『산책 소설』 『둘이 거리로 나와』 등이 있음.
eptb2@naver.com
벌레 이야기
음식물을 버려야 한다.
어제도 외출을 나가지 않았다. 문밖으로는
한발짝도. 내가 또 잠이 들었던 탓이고
먹을 것을 사러 나간
너를 말리지 못한 까닭인데
(나는 계속 변명해왔다. 너를 탓하며)
네가 나를 원망했다.
나를 원망했다. 잠깐 언성이 높아졌지만
잠깐이었을 뿐이다. 며칠째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사료를 나눠주던 녀석인데
나는 이것을 내 탓이라거나 잘못이라고만 여기지 않는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고양이가 오지 않았겠지. 새도.
새도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나빴다면
네가 여름의 한가운데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엄지부터 차례대로 접어가며
수를 셌을 것이다. 수는 무한히 늘어날 수 있으므로
너는 접었던 손가락을 편다. 접혔다 펴지는 손가락들. 따라서
움직이는 손의 물결. 나는
영원을 모르지만 바로 그 이유로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바늘에 꿰이는 기분. 나는 벌어지고
벌어져 봉합되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구멍처럼
단추가 놓여 있다. 떨어진 단추. 단추가 굴러떨어진 책상. 책상에는 뾰족함이 있고 책상에는 책을 펴고 앉아 서로를 가리던
너와 내가 있다. 나는 너를 책으로 생각하고(믿고) 너를 읽는다. 너에게는
무엇을 줄까? (줄 수 있을까?) 내가 바라 마지않던
육체. 너에게 건넬 수는 없더라도.
괜찮다. 나는 몸을 갖게 되었으니까. 벌써 이만큼
건너왔다. 나는 창가에 부딪히던 작고 오래된 종이었는데. 종이었는데
몸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고는 날개를 더는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가까워질수록 또 한번 변형되는 조명 가구와 식탁…… 나와 함께 있었던 벌레.
나는 벌레를 잡으려고 (쫓아내려고) 기다란 막대를 들었다. 대걸레였다.
벌레는 전등과 바닥을 넘나들었다. 나는 벌레를 쫓아내기 위해 창문을 열었지만 벌레는 창문 안팎의 경계를 돌다가 사라졌다.
벌레를 따라가면 어디든 길이 있을 것이고 그곳은 공간일 것이며 나는 시간을 (너에게서 벗어나)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자유로워질까?
지금은 불편하지만. 먼지 한톨 없이 밝고 적막한 오후에.
지름길은 왜 항상 폐허일까
너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네가 회신을 줄 수도,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지. 너와의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마지막을 목격한 적 없지만. 몇번의 헤어짐이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마지막에 꼭 자리에 없었다. 키우던 햄스터는 더이상 나의 반려동물이 아니었다.
너는 죽은 토끼를 나 대신 묻어주었다. 병아리가 죽었을 때도. 땅굴을 파내어 이것이 우리의 최선이라고 여기며. 아니, 내가 땅을 파던 화단을 지나오면서.
너는 땅을 팠다. 나무가 있었다. 여름의 푸른 나무였다. 나뭇잎이 휘날렸다. 너의 옷자락 같았다. 나는 네가 죽은 동물을 묻는 동안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너에게 죽음이 처음이 아니듯이. 내가 기다리던 사람도 너만은 아니었다. 네가 다가와도. 우리는 함께 숲을 걸었으니까. 지름길이었는데. 나에게만 알려주었다.
잊고 싶은 것들의 목록—원한과 두려움—너는 그들이 될 수 없다. 죽은 금붕어가 수면 위에 둥둥 떠 있을 때도.
유유히 헤엄치는 금붕어. 네가 미워하던.
너는 나를 자주 잊어버렸다. 너 아닌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여러번. 처음에는 나무가 없었다. 나무를 심었던 것은 누군가. 네가 아니라. 너와 알기도 전부터. 긴 시간을.
밑동만 남아 잘려나가고. 벼락에 맞아 갈라지고. 손 닿을 때마다 손자국이 남아 무늬를 이루고. 숲은 멀리 달아났다. 나를
피해서. 내가 헤매도록. 너에게 가는 길은 늘 혼자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나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걸었다. 감자탕집 뒤편과 비닐하우스 몇채, 비가 내린 뒤 진흙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시간을 단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끝나는 것은 없다. 구름, 오가는 가운데 한 사람분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축축하지만 아늑하기도 했다. 동시에 벗어나고 싶었다. 길이 아닌 곳으로. 울타리 너머로. 밟으면 안 되는 넝쿨식물과 새의 발자국이 찍힌 시멘트 바닥으로.
네가 나를 대신해 달려가기를 바랐다. 그러면 나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