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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함민복 咸敏復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이 있음.
hminbok@hanmail.net
모시조개
동네에 큰일이 있고 조개가 눈을 뜨지 않는 물때라
조개잡이꾼들이 없어 뻘길 십리를 홀로 걸어들어왔다
연백댁은 극성스럽다는 말을 들으며
뻘 속에 발목을 묻고
조개를 잡아온 지 육십여년
발바닥으로 뻘을 꾹꾹 눌러
조개눈1을 띄우며 잡아도
서너됫박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숟가락 머리만 한 조개를 잡아
천평 밭과 열마지기 논을 장만하는 사이
밀물, 썰물, 조금, 사리 긴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래도 그중 말랑한 뻘을 쑤시며 살아왔는데
손가락 끝이 휘고 마디가 뭉툭뭉툭
개구리손이 되었다
감물 때 지나 물이 돌아서 발로 뻘을 누르지 않아도
조개 구멍이 좀 보인다 싶었는데
갈매기 소리 요란하여 덜컥 눈을 들어보니
물에 에워싸여 사방이 넘실거린다
멀리 건너온 갯골을 지나서까지
물이 벙벙하게 들어차 있다
언제 물이 이리 치밀었단 말인가
이제는 서둘러도 갯골을 건널 수 없다
사리 발이라 물이 쭉쭉 치달린다
벌써 흥왕리 뻘에 솟아 있는 주거여2 근처까지
당도한 물자락이 반짝인다
다행히 숭어그물 맸던 묵은 말뚝이 눈에 들어온다
쐐애액 따개비떼들이 짧게 운다
물에 포위되는 것도 느낄 수 없었던
지대가 높은 뻘밭으로 물이 넘어 들어온다
말뚝에 매여 있던 줄로 몸을 묶다가 푼다
고무함지박에 잡아놓은 모시조개를
사방에 흩뿌린다
한평생 따라다니던 미안한 마음이 쏟아진다
함지박 끌개 줄까지 풀어
덜덜 떨리는 호미처럼 마른 손으로
늙었지만 바지가 벗겨지지 않게
가슴께가 흘러내리지 않게
몸을 옭아맨다
스스로 하는 염습, 수직의 염습
쇠파이프 말뚝을 칠성판 삼아
꼬부랑 허리를 펴며 몸을 칭칭 감는다
쇠파이프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따개비가 등 뒤에서 부서지며
거칠게 밧줄을 잡아주어 탄탄하게 묶인다
혹시 초물3에 들어오는 배가 있으면 손을 흔들어볼까 싶어
장봉도 쪽을 바라다보며 몸을 묶을까 하다가
돌아서 집이 있는 마니산 아래 마을을 향했다
객지에 나간 자식새끼들이 시신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게……
평소의 다짐을 실천에 옮겼다
아주 어려서, 어머니에게, 열쇠 구멍 닮은,
길게 쪽 째진, 모시조개 구멍을 배우고
첫 조개를 잡아 검지와 중지로 치켜들며
잡았다고 소리치던 소녀의 얼굴이 웃는다
물이 가슴을 넘어 목까지 차오른다
출렁 눈을 가린다 모시조개처럼 까슬까슬
머리카락이 얼굴을 쓸어준다
마니산 너머 고향 연백뻘이 펼쳐진다
꼬르륵!
모시조개처럼 숨을 쉬어본다
또 봄
앵두꽃 지고
복숭아꽃이 피었다
편지는 아직 쓰지도 못했는데
답장이 먼저 도착했다
할 수 없이 봄을 앓는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아 봄은 또 아름답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지랑이가
철든 말로 희망은 늘 답장이 먼저란다
마음속 ( )를 이렇게 풀어보라고
노랑나비가 날갯짓 처방전을 낸다
사방에 여린 선생님들의 말씀 가득한 봄날
가벼워진 귀로 소리 신발 한켤레를 만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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