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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평면화된 윤리를 교란하기

 

 

송현지 宋炫知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수행하는 시인과 행위하는 시」 등이 있음.

hyunji0122@hotmail.com

 

 

1. 전시되는 윤리

 

김수영의 시 「죄와 벌」(1963)은 문제작이다. 화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아내를 때리기 때문만도, 집에 돌아온 뒤에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보다 누가 그 장면을 보았는지 걱정하고 두고 온 우산을 아까워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화자의 행동이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그의 자기고백에 주목해 이 시를 “자기처벌의 서사”로 읽는 견해가 맞서면서 표면적 행위에 대한 논의는 다소 뒤로 물러났다. 그보다 최근의 쟁점은 그의 ‘공개적인’ 반성이 어떤 윤리적 함의를 가지는가의 문제로 옮겨간 듯하다. 다시 말해, 화자의 고백을 “자신의 윤리적 타락에 대한 자기폭로”1로 보며 그가 스스로를, 사실상 얼굴을 가려줄 우산도 없이 시의 거리 한가운데 세워두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가해질 비판을 감내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라고 평가되는가 하면 “그러한 반성문을 공적으로 발표하는 것”에 주목해 온전히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반문도 제기된 것이다. 후자의 입장은 그의 공개적 자기비판 속에 “자신의 악행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있을 가능성과 그것이 “어떤 심리적 만족을 구하”2는 행위일 수 있음을 의심한다.

요컨대 김수영의 이 시는 표면과 이면의 의미적 간극에 더해, 이면에 있다고 여겨졌던 윤리의 참됨을 따지는 새로운 시선이 더해지며 더욱 복잡한 논의의 장으로 들어섰다. 이 시를 지금 다시 문제작으로 소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이러한 다층적인 문제제기가 불러온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최근 시에 두드러지는 윤리적 경향을 검토하는 데에도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자신의 윤리적 행동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윤리적인가. 누군가의 윤리적 수행이 ‘보여주는 일’처럼 작동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리고 그러한 ‘전시’는 어떤 이유로 필요해지는가.

세월호를 비롯한 사회적 참사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은 적극적으로 윤리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 과정에서 윤리의 문제는 퀴어·비인간 등으로 범위를 넓히며 점차 문학장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추세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올바름을 행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드러내는 “착한 화자”의 등장은 최근 시의 주요 경향으로 자주 언급될 만큼 두드러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시가 “선하고 옳은 소리만 되풀이되는 양상”3을 보인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최근 시의 윤리적 경향을 ‘옳음의 표명’ 정도로 인식되게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이 2020년대 들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박상수는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에서 2010년대 시 속 윤리적 주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 그의 글은 발표 이후 여러 논란을 촉발했지만, 그가 제시한 ‘입체적 개인’의 개념은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거나 오해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2010년대의 시들이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에” “길항”하거나 “반역”하기보다 “기능적이고 정합적으로 복무하”(290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2000년대 시적 화자와의 비교를 감행한다. 이때 그는 “마냥 착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2000년대의 입체적 화자가 “정상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제도가 부여한 정상성의 범위를 의심하면서 확장시키는 효과”를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한다(282~83면).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비교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단순히 이들 화자가 “내면의 균열과” “욕망의 드라마를” 지녔다는 사실이 아니라 2000년대의 시들이 이러한 화자를 매개로 윤리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 “윤리적 모험”(282면)을 수행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이후 2010년대 시가 이미 합의된 옳음을 재현하고 있음을 문제삼으며, 윤리적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 방법론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글에서 그가 제기한 ‘입체-평면’ 구도는 최근 시들의 윤리적 수행방식이 하나의 정형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참조할 만하다. 특히 기후위기와 맞물리며 비인간과의 공생이 우리 문학장에서 주요한 윤리적 쟁점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2019년 이후, 인간과 비인간이 산책하거나 동거하는 장면들이 비인간의 생기와 공생의 윤리를 확인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반복되어왔다. 이러한 장면들이 더이상 새로운 사유나 행위를 촉발하지 못하는 밋밋한 재현으로 굳어졌음에도, 여전히 그러한 재현을 곧 윤리적 실천으로 확인하는 작품과 비평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황정아가 ‘문학의 정치’를 논하며 강조했듯 “의미있는 문학적 질문은 재현 여부만이 아니라 어떤 재현인가에까지 이”4르는 것이라면, 이미 확인된 윤리적 당위를 유사한 시적 재현으로 되풀이하는 일은 옳음을 표명하는 일에 그치고 말며, 그 결과 윤리를 전시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비인간의 문제를 다루려는 시인들은 반복의 관성을 넘어 새로운 윤리적 형식을 발명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고 있는 셈이다. 이 글에서는 이미 합의된 ‘옳음’을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윤리를 새롭게 감각하고 갱신하려는 시적 시도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윤리적 수행의 복잡한 셈법: 김복희 『보조 영혼』

 

첫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을 낸 이후 김복희는 새 인간, 귀신 등 어느 누구보다 비인간들을 적극적으로 시에 데려오는 시인으로 주목받아왔다. 특히 비인간 담론이 우리 문학장에 본격화되기 전 발표된 「새 인간」은 담론을 선취한 문제적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네번째 시집 『보조 영혼』(문학과지성사 2025)을 출간하며 시인은 그간의 윤리담론과 얼마간 그에 기대어 진행된 비평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서쪽에서 온 나무를 광화문광장에 심으려고 했어.

사람들이 그 나무 그늘 아래서 쉴 수 있다는 계시를 받았거든.

하지만 그 나무를 심으러 가는 길

너무 멀었어.

(…)

다시 갔지. 화단을 더듬고 있는데 경찰이 다가왔어.

미친년 아니에요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했거든.

다시 갔지. 나무를 빼앗길 뻔했거든.

화단 빈자리를 더듬고 있는데 사복 경찰이 다가왔어.

이 야밤에도 경찰이 오다니

이 나라 제법 안전하구나 싶었는데 취한 남자였지.

(…)

나무를 심어버렸지.

(…)

사람들이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어. 그건 꼭 원숭이나 표범처럼

빠르고 정확했어. 나는 나무가

너무 빨리 자랐다고 생각했어.

나무는 표범이나 원숭이 같은 것들이 하나도 없는

광장에서

어느 날

광장에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매달고

갑자기 부러질 것이었지.

나는 그늘에서 쉬었어.

—「서쪽에서 온 나무」 부분

 

시는 “광화문광장”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마련해주기 위해 “서쪽에서 온 나무”를 가져와 광장에 심는 화자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린다. 경찰에게 신문당하고, 공권력을 가장한 듯 보이는 이들(“취한 남자였지”)에게 겁박을 당하면서도 끝내 나무를 심는 그의 모습은 정의감에 충만할 뿐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윤리적 주체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런데 “계시”에 바탕을 둔 그의 나무 심기가 맹목적일 만큼 헌신적으로 이루어진 데 비해, 나무를 심고 난 뒤의 태도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화자의 바람과는 달리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서 쉬지 않고 그 “위로 기어올라가”지만, 그는 그것을 보면서도 혼자 나무 아래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광화문광장’의 상징성과 그의 행위의 비현실성에 기대어 이를 윤리적 수행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다면, 그의 모습은 새로운 담론을 힘겹게 들여놓는 과정에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듯 만족했던 우리 문학장의 몇몇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이 떨어지고, 그들이 나무 아래에 있는 화자를 덮칠 가까운 미래는, 그러한 불충분한 윤리적 수행이 또다른 위험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듯 읽히기도 한다. 이를테면 김복희는 ‘옳음’을 실천하는 일이 결코 완결될 수 없으며, 윤리적 주체로 사는 일이 얼마나 복합적인 수행을 요구하는가에 대해 집요하게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시인의 ‘윤리적’ 문제작으로 손꼽히는 「새 인간」(『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역시 다시 살펴보게 한다.

기존 비평에서 「새 인간」은 새 인간과 오래 함께 살기 위한 화자의 구체적 노력을 근거로 비인간과의 공생을 다루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5 그러나 이러한 상찬이 지워버린 것은 애초에 그들의 동거가 새 인간을 ‘사 오는 행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며, 이를 강조하려는 듯 시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새 인간을 하나 사 왔다’는 문장이 변주되며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화자와 그의 “친구”가 생명을 사고판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불법” “범법자” “자수”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그 합법적 기준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문제적으로 보인다. 가령 “죽어 버린 인어를 하수구에 흘려보”낸 일을 떠올리면서도 음식물 처리를 잘못한 곤욕에 대해서면 언급하고, 새 인간의 “날개 밑 근육을 절제”하는 불법업소와 엮일 위험만을 염려하는 장면이 그러하다.6 그런 점에서 「새 인간」은 다른 종과의 공생을 추구하는 화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윤리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새와 인간을 중첩시킨 ‘새 인간’이라는 시적 대상을 통해 생명 판매와 착취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이 공생과 공존을 실현한다고 믿으며 그 실천을 오직 법의 범위 안에서만 사고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윤리적이라 하겠다.

이처럼 김복희 시의 화자들은 ‘윤리적 화자’라 부르기엔 어딘가 불충분하게 여겨진다. 시인은 그들의 행동이 미심쩍어지는 지점을 남겨둠으로써 우리가 왜 그들에 동조할 수 없는지를 자문하게 하고, 그를 통해 무엇이 윤리적인가라는 물음을 새롭게 부각시킨다. 그런데 『보조 영혼』에서 시인은 이 불충분함을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로 보기보다 윤리적 수행의 작동조건이 본질적으로 복잡함을 드러낸다. 삐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영상설치작을 소재로 삼은 「비스듬한 시선」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시에는 “원숭이가 여자 얼굴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을 “저해상도 흑백 화면”을 통해 바라보는 화자가 등장한다. 원숭이를 소녀로 착각하던 그는 점차 진실을 깨닫고 호칭을 “저 여자”에서 “원숭이”로, 다시 “가면”으로 바꾸는데, 이 변화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움직임이 나와/크게 다르지 않지만/다르다”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종의 차이는 뚜렷하기에 그는 비인간과의 경계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가로질러야 하는 이중의 조건에 놓인다. 이때 화자는 그들과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당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여자와 소녀와 아기와 원숭이를/섞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원숭이 얼굴 위에 겹쳐두는 것을 선택한다. 이 겹침의 순간에 시인은 그가 “비스듬히 앉았다 일어선다”는 것, 즉 “화면” 바깥에서 비인간을 보고 있다는 설정을 통해 비인간과 관계맺는 윤리적 수행의 복잡함을 다시 드러낸다. 비인간의 바깥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해도 그와 완전히 섞일 수도, 또 섞인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비인간과의 문제를 다루는 인간의 방식, 나아가 윤리의 형식은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김복희는 보여준다. 그의 시는 윤리적 주체를 불충분함의 조건에 놓음으로써 윤리를 ‘전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언제나 미심쩍고 완결되지 않는 ‘이면’ 혹은 ‘조건’을 향해 독자의 심문적 시선을 이끌어낸다.

 

 

3. ‘몸짓 언어’로 접면을 일깨우기: 안태운 『기억 몸짓』

 

이처럼 윤리적인 행동이 불완전하고 복잡한 셈법 위에서 이루어진다면, 시인은 어떠한 방식으로 시를 통해 윤리적인 수행을 실천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비인간과의 경계를 허무는 일의 어려움과 어떻게 해도 불충분하게 여겨지는 실천에 대해 오래 탐색해온 안태운은 세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 그 고민을 한층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가령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타고 가는」에는 수변을 걷는 화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빠르게 걷다가 어느새 그들의 속도와 흐름에 포섭되는 장면이 그려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타고 간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통해 다뤄지는 이 상황은 언뜻 화자가 주변 존재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일상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을 타고 “돌고 돌고 돌”던 화자가 문득 “수변 풍경” 속 “물과 물의 생물들”과 “이어져서 여하튼 살아가고 있는 삶을 엿본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한 이후부터 이 시는 비인간과 맺은 피상적 관계를 되돌아보며 그 실패의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으로 탈바꿈되어 읽힌다. 이후 그는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수변에 남아, 자신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이곳을 걷던 이와 함께 그들만의 속도를 연습하며 동행의 미래를 약속한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저물었다고 생각하며 떠나는(“저물녘이 되었습니다. 이제 가야 할 때라서 다들 가고.”) 비인간의 문제를 여전히 붙잡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찬찬히 살펴보겠다는 화자의 다짐은 그들과 관계맺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로 이어진다.

 

접면. 수어 통역이 있었던 연극에서는 무대가 둘. 전면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시대극. 길어올린 목소리. 한 명당 한 배역. 크고 넓은 동작. 그 옆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수어로 연기하는 배우들이 있었고. 동시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최대 넷. 한 명당 여러 배역. 비좁은 공간이니 다만 추상하는 동작. 얼굴 표정만은 크고 넓게. 그 모습을 넋 잃은 채 바라보며 앉아 있었고. 타인의 삶이라니. 이어져왔던 그 삶의 시간을 네가 앞서거나 뒤서서 가고 있나. 마주쳤을 리 없는 누군가의 흔적을 느낀다면 문득 하늘을 바라볼 테고. 접면을 품고. 연결감은 무엇에 좋은가. 혹은 눈앞의 것을 흐르는 게 아니라 절연되었다고 감각하는 건 무엇에 좋은가. 순간마다 섬이라는 것. 그 섬을 딛다가 발로 찬다는 것.

극장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는 공간이 여럿. 흐르는 시간과 함께 무언가를 찍는 동안 사람은 살았고 죽었고. 살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나왔는데 영상에서 수십 분 후 죽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는 것. 조개 캐는 꿈을 꾼다는 것. 그레를 끈다. 그레를 살린다. 갯벌을 메워서 땅으로 만들려 하다니. 거기 사는 생이 다 죽게 된다니.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주문을 외고 기도하고 그것은 내내 인간이 해왔던 창작과 수행. 양식 삼으려 조개를 캐는 것과 갯벌을 콘크리트로 메워 서식하는 조개를 말살하는 건 다른 일. 그때 어민은 죽어나갈 조개를 염려한다. 접면을 일깨운다. 땅에 새가 드나든다. 새의 몸짓. 새는 그 형태가 아니라 몸짓으로도 식별될 수 있다. 어떤 새인지. 인간도 새들처럼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접면.

—「접면」 전문

 

“수어 통역이 있었던 연극”과 “극장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라는 서로 다른 두 매체에 대한 경험을 이어놓은 이 시는 비인간의 문제를 시라는 장르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모색하는 다분히 메타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두 매체에서 화자는 타자와 “접면”되는 순간을 각각 경험하는데, 이는 이 시집의 전체적인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당겨 말하자면, 그는 수어 통역이 있던 연극을 보며 발견한 이질적 언어 사이의 연결감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체험한 시·공간의 병치를 시적 방식으로 변환해 비인간과의 공존을 드러내는 형식적 방법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 중 후자의 전략이 주로 주목받아왔다면7 전자의 방법은 아직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8

먼저, 시는 말로 연기하는 배우들이 선 “전면의 무대”와 그것을 수어로 통역하는 배우들이 선 “그 옆에 마련된 무대”를 화자가 동시에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수어로 연기하는 배우들”은 무대가 좁기에 “얼굴 표정만은 크고 넓게” 사용하며 “추상하는 동작”으로 “한 명당 여러 배역”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제약은 흔히 수어가 음성언어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한다거나 시차로 인한 재현의 한계를 확인하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안태운은 이러한 한계 속에서 오히려 “절연”의 감각만이 아닌 “연결감”을 느끼는 화자의 모습을 그린다. 화자는 음성언어를 수화와 같은 시각언어로, 즉 전혀 다른 표현체계로 변환하는 작업을 지켜보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언어 바깥에도 또다른 언어가 존재함을 깨닫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타자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수어라는 ‘몸짓 언어’를 통해 “타인의 삶”을 떠올리던 그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새의 몸짓”으로 이어지며, 타자의 언어와 세계가 감각적으로 일깨워지는 순간을 드러낸다.

이번 시집이 텍스트로서의 시를 중간에 두고 본문의 시작과 끝에 각각 4면과 19면이라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미지를 배치한 것은 그러한 방법론이 적용된 예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법론이 의도한 효과를 담보하는지는 장담하기 어려우며, 이질적인 감각의 순간이 독자에게 실제로 타자의 존재를 떠올리는 윤리적 순간으로 전환되는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다만 이미지 역시 의미와 감각을 전달하는 또다른 언어라고 한다면, 그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낯선 세계와의 ‘접면’을 일깨우려 한 것은 새로운 실천으로 보인다. 외국어 통역이 동일한 발화체계 안에서의 전환이라면, 「접면」에서 제시한 수어 통역은 ‘몸짓 언어’로서 다른 방식의 언어로의 변환을 보여주는 그의 시작(詩作) 방법을 탁월하게 설명하는 은유이다. 시가 새로운 방식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장르인 한, 그는 “쁑과 꼉과 쨩과 뚕”(「아이와」) 같은 단어나 “휘양숭휘양숭/루이햐/”ß”傘굅? 같은 “의태어”를 “만들어내며”(「의태어 만들어내며」) ‘몸짓’에 가까운 언어들을 사용함으로써 비인간을 포함한 타자와의 접속을 시도한다. 말하자면 안태운에게 언어실험은 단순한 미학적 시도만이 아니라, 경계가 맞닿는 접면을 감각하고 이를 독자에게 체험시키려는 윤리적 수행인 것이다.

「기러기보자기 연습」은 이 수행을 통해 비인간과 접속하는 순간을 재현한다. 시인은 본래 기러기를 감싸는 용도로 사용되는 “기러기보자기”를 사람마다 제각각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장면을 시점을 바꾸어가며 보여준다. 누군가는 보자기를 풀어 “목각 기러기”만을 챙기기도 하고, 그것으로 손목을 묶거나 물건이나 얼굴을 감싸는 이들도 있다. 그러다 시의 말미에서 보자기를 가지고 놀던 누군가는 마치 기러기를 불러낸 듯한 순간에 도달한다. 사물을 감싼다는 점에서 보자기가 언어를 은유한다면, 그것을 “구겼다가 폈다”가 “던졌다가 도로 회수”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다보면 언어가 대상을 지시하는 도구에만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는 보여준다.

 

 

4. 나가며

 

김복희가 윤리적 수행의 이면을 드러내며 윤리담론이 포착하지 못한 복잡한 셈법을 드러낸다면, 안태운은 시 언어의 가능성을 활용해 윤리가 작동할 새로운 형식을 실험한다. 그들은 윤리가 어떤 결과의 증명이나 미덕의 전시가 아니라, 끊임없이 실패하고 다시 시도되는 과정, 혹은 그 과정을 견디는 여정임을 보여준다.

오늘날과 같은 SNS 시대에 윤리적 수행은 점점 더 즉각적인 증명과 반응의 양식으로 축소되었다. 우리는 윤리적인 존재임을 증명하기를 요구받으며, 이를 즉각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사진을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며 이미 준비된 문구를 공유하거나 서명을 채운다. 이렇게 미리 정해진 단순화된 수행 속에서 윤리적 행위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은 자주 건너뛰어진다.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는 이러한 조급한 리듬에 저항한다. 그들은 윤리가 수행되는 방식을 다시 물음으로써 경직된 틀을 흔들고,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연습한다. 그들이 평면화된 윤리를 교란하는 방식은, 윤리적 주체로서의 ‘나’를 전시하기보다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유와 감각의 과정’을 관찰하고 체험하도록 독자를 초대하는 데 있다. 결국 그들의 시가 보여주는 것은 완성된 윤리적 수행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연습의 과정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러한 느림과 연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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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희 「페미니즘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396면.
  2. 조연정 「‘무능한 남성’과 ‘불온한 예술가’, 그리고 ‘여성혐오’」, 『한국시학연구』 제57호, 2019, 263~64면.
  3. 오형엽·김언·안지영·양순모 「지금-여기의 한국 현대시」, 『현대시』 2023년 10월호 124면. 인용은 김언의 발언. 단, 이 좌담에서 ‘착한 화자’는 2000년대의 ‘못된 화자’와 대별되는 개념으로 제시되기도 하는 등 윤리적인 관점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니며, 명확한 개념어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4. 황정아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19면.
  5. 김복희에 대한 기존 비평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최다영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488~90면.
  6. 「새 인간」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새 소식」(『희망은 사랑을 한다』, 문학동네 2020)에서도 화자는 “새 인간과의 생활을 신고할 기관”이나 “계약서”의 문제에 집중하는 등 법과 규정에 대해서만 과도한 민감성을 드러낸다.
  7. 비인간의 문제에 집중한 것은 아니지만 인아영은 안태운의 시 속 “움직임들의 연쇄와 파장”에 주목한 바 있다. 황유지는 안태운의 시를 ‘되기’가 아닌 ‘하기’의 수행성으로 해석하며 그가 “인간과 비인간동물, 비인간사물까지 아우르는 행위라는 몸짓을 연쇄하고 가로지르기를 택한다”고 설명한다. 인아영 「기억하기, 잊기, 다시 기억하기」, 『문학동네』 2025년 여름호 25면; 황유지 「하는 시, 하지 않는 시」, 『현대시』 2024년 9월호 184면.
  8. 이희우는 문학이 다루는 비인간의 문제를 “재현적 관점에서 번역의 관점으로 옮겨” 살펴볼 필요를 주장하며 『기억 몸짓』을 예시로 삼은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개념을 안태운의 구체적인 시작 방법과 연결 짓기 위해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희우 「문학의 비인간」, 『비평포럼』, 문학과지성사 2025, 3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