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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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여름] 통권 212호
촌평

 

신경림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창비 2026

노래로 피어나 꽃이 된 시인

 

 

함민복 咸敏復

시인

hminbok@hanmail.net

 

 

 

신경림 시인의 유고 산문집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를 읽으며 그의 차분한 목소리와 소탈한 미소가 먼저 떠올랐다. 신경림(1936~2024)은 충주시 노은면 연화동에서 태어났고 연꽃처럼 펼쳐진 보련산 자락에 잠들었다. 연꽃. 내게 박힌 시인의 이미지는 연꽃향 같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시인으로서 신경림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는 1부는 「「농무」에서 「낙타」까지」라는 글로 출발한다. 시인은 1956년 약관(20세)에 시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한다. 등단작 「갈대」는 순수 서정시 계열의 시였고 주위의 칭찬을 받았으나,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그는 무언가 석연치 않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시 전국토에 전란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서울의 “거리와 골목은 온통 거지와 도둑과 상이군인으로 들끓었”(24면)다. 독재자 이승만은 수시로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부패한 경찰은 그의 편에 섰다. 언론은 통제되고 정부를 비판하면 모두 ‘빨갱이’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맑고 깨끗한 서정시를 쓰는 일이, 남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나 혼자만 제멋에 취해 살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25면) 시인은 자괴감이 들고 신명이 나지 않아 더이상의 시 쓰기를 멈췄다고 고백한다. 이하 진행되는 글에서도 시인은 솔직하여, 자신과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냉철하게 삶을 되짚어보는 모습이 더러 반복된다. 이 반복이 화두나 신조로, 때로는 다짐 같은 마음결로 읽히기도 한다.

그 무렵, 국론이었던 북진통일에 반(反)하여 평화통일을 주장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이 진보당 사건(1959)으로 처형당했는데, 시인은 등록금 사정마저 어려워진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충격에 결단을 내리고 낙향했다. 전쟁으로 황폐한 시골의 삶도 만만치 않기는 도시나 매한가지였다. 시인은 십년 가까이 방황하며 곳곳을 떠돌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일을 겪으며 수많은 사연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의 정서와 생각이 배어 있는 이야기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은 시를 쓰겠다는 각오를 했다. 이웃과 함께 기쁨과 슬픔의 공동체를 이루자 농촌의 현실이 직시되었고 다시 시가 쓰이기 시작했다.

1부의 여러편 글 중 거지반을 차지하는 네편의 글이 ‘우리 시는 우리 현대사를 어떻게 수용했는가’라는 부제로 묶이는데, 탄복할 수밖에 없는 참 정갈한 글들이다. 광복과 한국전쟁부터 광주항쟁과 유월항쟁까지, 거진 반세기 동안의 우리나라 시사(詩史)를 북두칠성처럼 명징하게 요약정리해준다. 이렇게 우리 시의 흐름을 쉽고 깊게 정리한 글이 있었던가, 읽으며 통쾌함까지 느껴졌다.

그중 광복 직후 시단에 대해 기록한 「광복과 동족상잔의 격동 속에서」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광복이 되자 좌파는 조선문학가동맹을, 우파는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한다. 우파가 친일문학을 수용하는 가운데,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그대로 계승하기보다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오장환 등 비카프파도 포용하면서 우리 문학에 대한 정통성과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우파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서정주 유치환이 보여준 아름다운 우리말과 세련된 이미지에 비하면 좌파의 시는 조악함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시인은 특히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시의 기형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북쪽에서는 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시가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남쪽에서는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상상력이 모티브가 되는 시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2부의 첫 글은 시인의 성장배경을 엿볼 수 있는 시 「폐광」으로 물꼬를 튼다. 시인의 고향 후배인 필자에게도 익숙한 버력더미(잡돌 무더기) 지까다비(광부들이 신던 신발) 덕대(광산 현장의 소사장·도급업자) 소리개차(광석을 나르는 일종의 공중 케이블카) 복대기(금광석을 빻아 금을 골라내고 남은 고운 돌가루), 이런 금광촌 말들이 반갑게 다가오며 시인과 조금이나마 연결되는 것 같아 글에 더 애착이 갔다. 필자는 시인이 청년시절 작사한 노은중학교 교가를 부르고 자랐으니, 그가 쓴 글의 배경에 당연히 관심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강을 닮고, 강은 사람을 닮고」에서 시인이 풀어놓은, 학교 소풍날 이십여리를 걸어가 처음 만난 강 이야기 또한 아름다웠다. “고개에 올라서니 새파란 강물이 발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강 언덕에는 희뿌연 살구꽃이 줄지어 만발해 있고, 나룻배가 꽃그늘 속을 미끄러지듯 가고 있었다.”(150면) 아, 그날이 후에 시인이 쓸 시 「목계장터」가 잉태되는 순간이었으리라. “이를테면 나는 강으로부터 세상을 배우고 강으로부터 문학을 공부했다. 강을 통해서 세상에 나가고 강을 통해서 사람을 만났다. 강이 내게는 길이요 학교였던 것이다. (…) 강은 사람과 마을을 막거나 가르지 않고 이어주고 안아준다는 사실도 강을 보고 다니면서 알았다.”(154~55면) 이 대목을 읽으며 강은 정말 시인들의 학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끊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이 시 아닌가. 메타포 아닌가. 시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일지라도 인간의 마음에 흐르는 은유의 강임을 그의 글이 일깨워주며 뗏목처럼 철썩철썩 지나갔다.

2부의 꽃이라 할 글은 「시는 왜 존재하는가」 같다. 그는 왜 순수시로 시작해 민중적 서정성을 품은 시로 나아가게 되었나. 민요를 차용해 쓰다가 멀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시에서 사회적 성격과 개인적 성격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탐구해나갈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고, 소외된 사람에게 꿈이 되고 별이 되는 것. 이런 것이 있어 시는 아름답고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에 대한 시인의 일생일대의 답이 들어 있는 글이라 보아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3부에서 시인은 사회에 대하여 대담한 발언을 던지기도 한다. 가령 「친일 규명은 미래지향적이 되어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민감한 언급을 한다. 증거가 확실하지 않고 “시와 실천을 통해서 이승만정권에 저항한 몇 안 되는 시인의 하나”인 유치환을 “단죄대에 세운다는 것은 슬픈 일”(219면)이라 말하는가 하면, 서정주는 “분명한 친일작품을 남겼고, 그 질이나 양에 있어 쉽게 용납이 안 된다. 그렇지만 그가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등 적극적 친일행위자와 동급으로 취급된다는 것은 말도 안”(220면) 되는 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피치 못한 행위와 확신범은 구분해 규명하자는 뜻이며, 이때도 그 규명은 미래에 보탬이 되는 일이어야지 “부정적·자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221면)는 이야기이다. 한편 시인의 제안이 현실로 옮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글도 있었는데, 서울에 요란한 관광자원을 개발할 게 아니라 북한산을 빙 두르는 도보길이나 한강 자전거길을 만들자 했던 그의 예지력이 놀랍기도 하다(「북한산과 한강, 그리고 4대강 정비」).

산봉우리가 연꽃잎처럼 이어진 보련산 품 안의 마을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시인은 평생 끝없이 함께 어우러져 피어나길 소원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과 경제성장을 위해 희생된 이들은 물론 마주 보기만 해도 흥겨운 못난 얼굴들(「나는 왜 시를 쓰는가?」)과, 마구잡이 개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체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들(「오체투지와 소통의 문제」)과, 이 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주노동자(「새해엔 우리 땅이 좀더 따뜻했으면」)와…… 이들 모두와 얼싸안아 노래로 피어나고 싶어했다. 피워냈다. 꽃이 되었다.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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