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은희경 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이 있음.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1960년 2월생

사람들은 모두 내가 6월에 태어날 줄로만 알았다. 나의 부모가 결혼식을 올리기 두달 전 이미 나를 가졌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계산에 따르면 나는 4월에 태어나야 옳았다. 내가 태어나면 나의 부모님은 내가 팔삭둥이라고 우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의 기대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세상에 나온 것은 2월이었다. 진짜 팔삭둥이였던 것이다. 며칠째 계속해서 눈이 퍼붓던 윤년 2월의 마지막날, 탯줄에 매달려 우는 붉고 작은 나를 문틈으로 흘끗 들여다본 아버지는 ‘요량 없고 성질 급한 놈’이라고 마땅찮은 첫인사를 던졌다고 한다.

장남인 나는 항렬자인 ‘준’자를 가운데에 넣어 준영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나에게 그것은 좋은 이름이 아니었다. ‘준’자나 ‘영’자는 처음 입에서 발음이 되어 나올 때 무척 힘이 들어갔다. 성까지 붙여서 ‘윤준영’이라고 발음하려면 더욱이나 목구멍에서부터 소리가 막혔다. 하긴 내 이름을 지은 것은 내가 말을 시작하기 이전이었으니 아버지도 내가 말더듬이란 걸 알았을 리가 없다. 달변이고 유식한 아버지에 따르면 말더듬이에는 같은 음절을 반복하는 연발성, 잡아끄는 신발성, 첫 발음이 나오지 않는 난발성 등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그 모든 것을 고루 갖춘 복합성 완결판이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지적을 받기 전에 먼저 제 입으로 털어놓으면 덜 창피하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도 손님들에게 그 말을 자주 했다.

나에게는 다른 이름도 있었다. 베드로, 영세명이었다. 베드로는 언젠가 도래할 ‘신의 날’에 예수의 오른편에 앉을 수제자이자 교회의 반석이다. 내가 그 이름을 영세명으로 선택한 것은 단지 요셉, 로사리오, 라자로, 스테파노, 라파엘, 그런 이름들보다 발음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짐작하다시피 나는 무섭게도 말수가 적은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것까지 말수 적은 데 해당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누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다 못해 무시하려 했지만 이름을 묻는 어른에게까지 거만하게 굴 만큼 눈치없이 매를 버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쨌든 ‘윤준영’보다는 ‘베드로’라고 대답하는 쪽이 나았으므로 나는 학교보다 성당에 있을 때 더 마음이 편했고 또한 착한 표정까지 지을 수 있었다. 젊은 보좌신부님은 다른 아이들이 나를 놀리지 못하도록 엄히 주의를 주었다. 유명한 사람 가운데도 말더듬이가 많다며 써머씻 모옴이라든지 처칠이라든지 하는 이름을 들먹이기도 했는데 모두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다. 다만 나는 그 훌륭한 사람들이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보좌신부님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쉽게 확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나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낸 신부님을 마음 깊이 따르기로 결심했다. 보좌신부님은 어머니에게도 친절하여 어머니의 영세명을 특별히 지어주었다. 그것은 파비올라였다. 먼 나라 왕녀였다는 파비올라라는 이름이 어머니에게 썩 어울리는 건 아니었지만 마리아나 요한나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우리 집 식모였던 순덕이 누나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갖고 싶어 교리공부를 시작했는데, 몇주일도 채우지 못하고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도시로 떠났다. 그해에는 도청소재지 근교에 제지공장과 코카콜라 공장이 세워져서 우리 동네의 많은 처녀들이 도시로 갔다.

또한 그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해였다. 녹슨 난로 속에서 조개탄이 탁, 탁, 튀며 타고 있는 교실 창문을 통해, 뿌옇게 성에가 덮인 아버지 제재소 사무실의 유리문을 통해 언제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 즈음엔 아버지가 계속 집을 비웠기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이불 속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았다. 그것이 싫증나면 마루에 나와 앉아서 눈을 바라보았다. 장독 하나하나를 서서히 덮어가는 눈,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어느 쪽으로 내려갈까 궁리하는 눈, 이웃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위에 질세라 날아와서 내려앉는 눈. 내리는 눈을 그렇게 한참 동안 보고 있자면 점점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이내 가물가물 졸음이 찾아왔다. 불현듯 바람이 처마밑까지 들이칠 때 이마에 닿는 차가운 눈송이 아니면 언제 마루로 나왔는지 옆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긴 한숨소리가 나를 깨우곤 했다.

그해 겨울 하면 생각나는 것으로 어머니의 기도도 빼놓을 수 없다. 어머니는 전에 없이 기도에 열심이었고 저녁미사 때마다 나를 데리고 성당에 갔다. 성당은 불빛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당산나무 마을에서도 더 들어가는 외진 동네에 있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갈 때는 뒷골목으로 해서 갔지만 돌아올 때는 밤이 깊었으므로 사거리 한길로 돌아서 오곤 했다. 초저녁 골목에는 덧창마다 노랗게 불이 밝혀져 있었고 청국장 고린내나 갈치 졸이는 단내, 김 굽는 냄새가 났다. 어쩌다 나무쪽문이 열리고 눈발 사이로 두부를 사러 나오는 바느질집 아주머니와 마주치기도 했다. 곰보인 아주머니는 언제나 똑같은 나일론 한복 치마의 허리를 동여매고 팔꿈치에 보풀이 많은 낡은 스웨터를 걸친 차림이었다. 사모님, 성당 가세요?라고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넨 뒤, 준영이 공부 잘하지?라고 내게도 말을 붙였다. 갑자기 용을 쓰며 입술을 덜덜 떨기 시작하는 나를 대신해서 어머니는 내가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키가 부쩍 자라 코트가 작아졌다고 대답해주었다. 고동색 모직에 진한 밤색 체크무늬가 있고 목깃에 인조털이 붙은 그 코트를 나는 4년째 입고 있었지만, 어머니 말과 달리 그다지 작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었다. 어딘가를 마구 달리다가 날아오르려는 순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꿈을 가장 많이 꾸었다. 낭떠러지에 닿을 때마다 꿈속의 나는 중얼거리곤 했다. 언젠가 날아본 적이 있었어. 분명 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그 꿈이 키가 크기 위해 꾸는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키 크는 꿈을 그렇게 많이 꾸는데도 내 키는 아주 조금씩밖에 자라지 않았다.

한 며칠 눈이 오지 않는 날도 있기는 했다. 포장이 된 한길의 눈은 하루면 다 녹아서 차 바큇자국을 따라 검은 길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응달에 쌓인 눈은 녹지 않은 채 먼지가 그을음처럼 내려앉아 지저분했다. 더러운 표면이 버석버석하게 얼어붙어서 눈이라기보다는 모랫더미 같았다. 며칠 동안 낮이면 녹고 밤이면 얼기를 반복하다보니 제법 단단해져서 쓰레기를 던져도 그 위에 가볍게 얹히고 말았다. 골목에 쌓인 눈이 가장 지저분했다. 연탄재나 흙 따위가 뒤섞이면서 진흙이 되어 질척거렸는데 저녁이면 흙이 달라붙어 구둣굽이 무거워진 처녀들과 날씬하게 줄이 선 바짓단을 더럽힌 멋쟁이 청년들이 투덜거리며 그 골목이 끝나는 곳에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깊게 팬 자전거 바큇자국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길이 울퉁불퉁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다시 새하얗게 바뀌어 있었다.

방학식날 담임선생님은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 고장이 중앙신문에 났다고 전했다. 우리 고장은 기차역이 있는 도시까지 버스로 두 시간이 걸리는 외진 읍이었으므로 신문에 날 만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거 참 신문에 날 일이네’ 하는 말은 하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을 때나 쓰는, 별로 쓸 일이 없는 농담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강설량을 보인 지역으로 지명만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그 사실만으로 청년애향단장이기도 한 담임선생님은 감격한 듯했다.

12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하긴 내가 태어나던 12년 전의 눈도 굉장했던 모양이었다. 특히나 그해에는 2월에 눈이 많았다고 하는데 제재소 주인인 아버지는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 때문에 방학식은 운동장 대신 교실 안에서 치러졌다. 너희들이 중학생으로서 처음 맞는 겨울방학이다. 선생님이 길게 훈시를 늘어놓았다. 방학도 엄연한 학교생활의 연장이며, 학생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면학에 정진하는 일뿐이란 걸 명심하도록. 선생님은 사거리 기름집의 둘째아들이었다. 기름집은 사거리의 예각에 있는 아주 조그만 가게였는데 수리조합장이 사거리의 하꼬방 같은 옛집 몇채를 사들여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3층 건물을 지으려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집을 팔 마음이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집을 사지 못하면 수리조합장의 새 건물은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모양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옆방에 갈 때도 바로 건너가지 못하고 신발을 신고 일단 한길로 나가서 돌아들어가야 한다. 선생님은 늘 바닥에 검은 기름이 번들거리는 어둠침침한 기름집과 그 집의 처지와 꼭 닮은 자기 아버지의 존재가 고장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으므로 부자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그 소문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소문 같은 걸 곧이곧대로 믿는 경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아들 이야기라면 대체로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그쳤던 눈이 선생님의 훈시 도중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교단 위에 버티고 선 선생님의 눈길이 느껴지자 재빨리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홍두깨만한 지휘봉으로 교실바닥을 쿵쿵 내리치며 ‘주목!’을 크게 외쳤을 선생님도 이번만은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고장의 명예를 빛낸 하얀 눈발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생활통지표를 나눠줄 때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윤준영, 요새 아버지 집에 계시냐? 내가 고개를 젓자 선생님은 이맛살을 모으고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몇번 끄덕이더니 통지표를 내려다본 뒤, 이럴 때일수록 공부 더 열심히 해야지,라며 기어코 꾸중을 했다.

그해 방학식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성탄미사가 아니라 초저녁에 펼쳐질 성탄축하 행사였다. 중등부 대표로 아녜스가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리조합장 집 셋째딸인 아녜스 오민희는 6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다. 나는 한번도 아녜스에게 말을 붙여보지 못했다. 말문을 열려면 다른 아이의 열 배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는데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고 무용대회와 백일장에서 상을 받느라 바쁜 아녜스에게서 감히 시간을 뺏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미사 때 아녜스는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 미사가 끝난 뒤 아녜스가 먼저 내게 말을 붙였다. 윤준영, 너 성가 참 잘 부르더라. 그러더니 웃음을 참으려고 입꼬리를 어색하게 오물거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노래할 때는 하나도 안 더듬던데. 나는 여자애에게 그 정도 칭찬쯤 들은 걸 갖고 썩 기뻐하지는 않는다는 듯이 간단하게 ‘고마워’라고 적절한 예의만 차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눈을 내리깔고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떨기 시작했는데 가까스로 소리가 나왔을 때 눈을 떠보니 아녜스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녜스가 아무 대꾸 없는 나를 거만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닌지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성탄축하 행사 가운데에는 선물교환 순서도 있었다. 나는 추석빔을 사러 어머니를 따라 양품점에 갔을 때 진분홍 테두리가 둘려 있고 자잘한 꽃무늬가 박힌 손수건을 눈여겨 봐두었다. 그리고 돈이 생기자 바로 양품점을 찾아가 그 손수건을 두 장 샀다. 물론 한장은 아녜스를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한장은 어머니한테 선물을 해서 칭찬을 들을 수도 있었으나 그냥 내가 갖기로 했다. 나는 소년에게 첫사랑이란 어떤 비밀인지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멋지게 간직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학교가 파한 뒤 나는 눈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적게 다니는 골목길을 택한 것은 선물교환 순서 때 아녜스에게 할말을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아녜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 흰 입김을 내뿜으며 들뜬 걸음으로 골목 안을 달려가는 내 목소리는 크고 맑았다. 혼자 있을 때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말만이라도 더듬지 않고 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어머니는 안방에 있었다. 그런데 성당에 가기 위한 차림이 아니었다. 어머니 말은, 이제 곧 밤이 되면 어머니와 내가 성당에 가지 않고 도시로 이사를 간다는 거였다. 그리고 아무와도 작별인사를 하면 안 되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어머니는 저녁 지을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도 켜지 못하게 했다. 제재소의 박총무 아저씨가 소리없이 트럭을 몰고 와서 어머니와 함께 대충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트럭에 싣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와 어머니가 타자 트럭이 출발했다.

깊은 밤 트럭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달빛 아래서 희게 빛나는 눈길 위를 달렸다. 기름집 사거리를 지나고 군청 앞을 지나고 학교 앞을 지나고 중국집인 중앙관을 지나고 은혜서림을 지나고 서울양행을 지나고 대성약국을 지났다. 중앙관 앞을 지날 때를 빼고는 그다지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성당 앞을 지날 때 나는 성당 지붕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커다란 별을 보았다. 성모상의 머리장식에 붙은 꼬마전구들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아마 그 시각 성당의 제단은 꽃으로 장식되고 감실 옆에는 아기예수의 구유 앞에 무릎을 꿇은 네 동방박사의 모습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아녜스가 나비처럼 춤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 점점 작아져가는 성당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내 어머니 파비올라는 얼어버린 거울처럼 시선을 앞유리에 고정시키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눈발을 뚫고 우리는 그렇게 고향을 등졌다.

우리는 새벽에 도착했다. 나는 방이 너무 작은 데에 깜짝 놀랐고 그런 방을 딱 한개만 쓰도록 되어 있다는 걸 알자 약간은 어이가 없었다. 그 집을 찾느라고 우리는 무척 고생을 했다. 달포 전에 제 손으로 계약을 해놓은 집이라지만 박총무 아저씨는 쉽게 찾지 못했다. 소읍에서만 살아온 아저씨가 도시 변두리의 골목에다 집장사가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놓은 열 채 가까운 집을 한눈에 구별하는 건 무리였다. 박총무 아저씨는 단지 우리의 행방에 대해 시침을 떼기 위해 아무 할일 없는 제재소에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안되는 짐을 부려놓자마자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런 다음 어머니가 곧바로 앓아누웠다. 어머니는 꽤 오랫동안 앓았다. 나는 낯모르는 도시 변두리에 나를 데려다놓고 무책임하게 앓아누워버린 어머니가 못마땅했을 뿐 아니라 간혹은 너무 이기적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새해가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열네살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하던 도시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넓은 길이라든지 기차라든지 빌딩 따위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장롱 두 짝만 들여놓았는데도 겨우 누울 자리밖에 남지 않은 방과 마루, 부엌만 하루 종일 오갔고 주인집과 함께 쓰는 변소에 가기 위해 시멘트를 바른 조그만 마당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대문 밖으로 나가서 골목 앞에 쭈그리고 있는 것까지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골목 마지막 집인 우리 집 뒤편은 공터였는데 연탄재와 음식 쓰레기와 강아지똥이 지천이라서 구경거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옆집이나 앞집에 혹시 내 또래 아이라도 살지 않는지 기웃거려보았지만 다른 집 대문들은 보통 굳게 닫혀 있었으며 어쩌다 집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말 한마디 건네기는커녕 얼른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오히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게까지 되었다. 벙어리보다는 말더듬이로 사는 게 그래도 조금 더 낫지 않은가 싶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우리가 어디에서 이사왔는지 말하지 말라고 다짐을 두었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으며 잠도 깊이 자지 못했다. 어머니는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딱 한번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가보았다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집을 찾지 못해 혼쭐이 난 뒤로 나는 혼자서 골목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골목 안을 종일 왔다갔다하면서 지붕 위의 텔레비전 안테나가 모두 몇개인지 세어보고 문패와 초인종들을 만져보기도 하고 담벼락 위의 내 그림자가 겨울해의 움직임에 따라 짧아졌다 길어졌다 하는 것을 관찰하기도 했지만 시간은 무섭게도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이불 속을 더듬어 늘 누워만 있는 어머니의 발치 어디께에서 양은밥통을 찾아내어 김치를 얹어 먹기도 진력이 나 있었다. 어머니는 곧 토모꼬 아줌마가 와서 도시구경을 시켜줄 거라며 기운없이 나를 달랬다.

며칠 후 진한 화장을 한 토모꼬라는 아줌마가 정말로 우리를 찾아왔다. 아줌마는 어머니의 소학교 친구였는데 소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도시로 식모살이를 와서 무엇엔지는 모르지만 ‘성공’을 했다. 어머니와 아줌마는 어린시절 헤어질 당시에 부르던 대로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토모꼬 아줌마는 어머니를 후미꼬라고 불렀다. 토모꼬와 후미꼬의 상봉장면을 피해 방 밖으로 나오던 나는 마루 끝에 앉아 있는 소년을 보았다. 구부정한 어깨에 검정 비닐점퍼를 한껏 젖혀 입은 키가 큰 여드름투성이 소년은 나를 보자마자 이 사이로 침을 찍 올리더니 그것을 마루 밑에 벗어놓은 내 신발 옆에다 , 하고 뱉었다. 토모꼬 아줌마의 아들 성국이는 나와 같은 학년이었지만 나이는 두살 더 많았다. 그애는 처음부터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토모꼬 아줌마는 약국에 가서 어머니 약을 지어왔다. 뻣뻣하게 언 꽁치 다섯 마리와 물미역도 사들고 들어왔다.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그날 저녁은 모처럼 여럿이 둘러앉아 허연 돼지비계와 두부가 둥둥 뜨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에 따뜻한 밥을 비벼 노릇하게 구워진 꽁칫살을 얹어 먹을 수가 있었다. 달고 새콤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물미역도 맛이 시원했다. 나는 도시에는 왜 이렇게 오래도록 눈이 내리지 않는가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용도로 입을 사용할 틈이 없었다. 오랜만에 몸을 일으킨 어머니는 손에 힘을 주어 간신히 숟가락을 잡았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남자 둘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뜨거운 밥이 편안히 목구멍으로 넘어가냐고 빈정거리더니 돌연 사납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토모꼬 아줌마가, 우선 앉으세요, 앉아서 천천히 말씀하세요,라고 권하자 한 남자는 밥상다리를 발로 차 엎는 것으로 보답을 했다. 김치찌개의 붉은 국물이 비닐장판 위로 넘쳐흘렀고 남김없이 살이 발린 앙상한 꽁치뼈가 기운없이 나동그라졌다. 부도내고 한밤중에 내뺀 것들이 아랫목에서 뜨뜻한 밥을 먹어? 니 남편 어딨어, 어디다 숨겼어, 앙? 그들은 옷장 속까지 뒤지면서 계속 어머니를 다그쳤다. 어머니의 얼굴은 무섭게 창백했는데 나를 향해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만을 계속했다. 방을 나온 나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어머니가 지닌 마지막 재산인 결혼반지와 자존심을 빼앗은 뒤 곧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들이 떠나는 데는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었다. 구두가 없어진 것이다. 한참 만에 대문 밖 공터의 쓰레기더미에 버려져 있는 걸 발견했지만 안에 개똥이 들어 있는 걸 모르고 신은 까닭에 그 추운 날 양말을 버리고 맨발로 먼길을 가야 했다. 어머니는 그 일 때문에 더욱 쩔쩔맸다. 성국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들이 간 다음 토모꼬 아줌마는 성국이를 노려보며 깡패새끼라고 욕을 했다. 성국이는 못 들은 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시멘트 담에 가볍게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밤새 똑같은 꿈을 꾸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는 꿈이었다. 놀라서 깨어날 때마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거나 한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는 한잠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나쁜 꿈을 꿀까 두려워 잠을 자지 않기로 한 사람치고는 이상하게도 먼길 떠나는 것처럼 외출옷 차림으로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리고 새벽 무렵에는 먼길 떠났다가 지쳐 돌아온 사람처럼 이불 위에 쓰러지듯 드러눕는 것이었다.

토모꼬 아줌마는 거의 매일 왔다. 어머니는 토모꼬 아줌마와 함께 외출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점점 달라졌다. 토모꼬 아줌마처럼 화장이 진해졌고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주로 성국이와 시간을 보냈다.

 

장래희망

내가 잠들지 못하는 것은 바람소리 때문이다.

바람소리가 혹독하다. 우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갈퀴처럼 얼굴을 할퀴고 눈알을 도려갈 것만 같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속에 빨래 펄럭거리는 소리, 고함소리, 밤거리에서 쫓기는 발소리 따위가 섞여 들리는 것 같다. 이런 바람소리를 들으면 휴짓조각이 빗자루에 쓸려가듯 이 세상이 모조리 바람에 쓸려가버리는 기분이 든다.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진다. 바람소리는 언제나 나를 밖으로 꾀어내고 땅을 박차며 달려보고 싶도록 부추긴다.

내 자리는 107호실 왼쪽 침상 창문 쪽이다. 구치소에서 감별소로 옮겨지던 첫날 호송버스에서 내린 소년수들은 마당에 부려지자마자 ‘앉아번호’를 시작했다. 교도관은 한차례 순서가 돌아가면 다시 일어서게 해서 ‘앉아번호’를 반복하게 했다. 그 일은 교도관의 마음에 들 만큼 복창소리가 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밤 아홉시 일석점호를 마치고 이 침상에 누웠을 때 처음으로 나를 반겨준 것이 바로 바람소리였다.

반대편 오른쪽 침상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만하다. 두 녀석이 한 애를 가운데 눕혀놓고 있다. 그 둘은 소년원을 한두 차례 거쳐온 애들이지만 가운데 녀석은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못하는 모자란 놈이다. 한번은 앉은자리에서 오줌을 싸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단체기합을 받은 적도 있다. 저런 녀석이 감별소에 있다는 것은 경찰서에 돼지가 잡혀온 거나 다를 바 없다. 저 바보놈은 제 형이 꼬여서 시키는 대로 도둑질을 했다는데 당연히 잡혔다. 지금도 밤에 화장실 데려다주는 대가로 저 짓을 하고 있다. 두 녀석은 먼저 그 얼간이한테 딸딸이를 치게 해놓고 그것을 구경한 다음, 그 사이 잔뜩 부풀어오른 제 물건을 저놈의 뒤에다 밀어넣는 것이다. 맨 처음 야릇한 기척을 느꼈을 때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지금은 괜찮다. 어디에나 있는 구역질나는 비역질이 이곳이라고 없을 리 없다. 그냥 창문을 흔들며 울부짖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으면 된다.

감별소에 들어오면 먼저 ‘지나온 나의 생활’이란 제목의 설문지를 받는다. 나는 그것을 세 번이나 다시 썼다. 숱하게 써온 반성문도 그렇고, 말로 해도 되는 거짓말을 반드시 글로 쓰게 하는 데는 신물이 난다. 어쨌든 내가 쓴 답안에서 감별소 교사는 나를 지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1. 나의 지난날/태어나서 오늘까지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였으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써봅시다.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음.

2. 나의 가족/나의 집은 어떠한가, 집안의 생활 모습을 써봅시다.

─어머니와 나는 각자 바쁘다. 아버지는 여러 명 있었지만 함께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거기까지는 정말로 생각하기가 싫어서 그렇게 간단히 쓴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할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 감별소에서 털어놓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뉘우치게 하려는 것이다.

3. 사회에 대하여/지금까지 학교나 직장, 사회에서 각계각층의 어른들과 만났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사회에 대하여 느낀 것을 써봅시다.

─나는 어른들에 대해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반대로 어른들은 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 이곳에서는 지겹고 뻔한 잔소리를 안 듣기 바란다.

나는 ‘배차장파’였다. 남들 눈에는 버스 배차장에서 어슬렁거리는 중학생 양아치들이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써클활동이었다. 문예반이나 독서클럽처럼 취미가 비슷한 아이들끼리 주기적으로 만나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언제나 인생이 답답한 아이들이 모였으므로 유대감은 훨씬 강했다. 그렇다고 서로들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몇명씩 몰려다녔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욕과 잔소리만 듣는 존재들이었으므로 비슷한 무리가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 역시 맛을 안다기보다 어른들에게 반항하고 약 올리는 기분이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하는 일은 대부분 라면이나 빵을 사먹고 노가리를 푸는 것이었다. 우리가 문예반이나 독서클럽과 다른 점은 그것이었다. 우리는 생산이 아닌 소비를 위해 모인 것이었다. 함께 모여 먹을 것과 놀 것을 찾아다녔다.

그럼 돈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그 돈은 어디서 나는데? 그 녀석이 물었다. 얼마 전에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 친구 집에 갔다가 알게 된 애였다. 그야 삥 뜯어야지. 내가 대답했다. 삥을 뜯으려면 겁을 잘 줘야 해.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가방을 옆구리에 껴야지. 교복도 좀 찢고. 얌전한 애들이 하지 못하는 짓을 보여줘야 걔들이 겁을 먹거든. 깡패들은 다 싸움 잘하는 거 아니야? 아니. 어깨에 힘주는 애들은 다 공갈빵이고, 힘은 어깨가 부드럽고 목이 짧은 애들이 쓰지.

그 녀석의 집은 모래내에 있었다. 모래내를 따라 뚝방을 걸어가면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모래톱이 끝나는 곳쯤에 라디오방송국이 있었고 그 너머에 배차장이 있었던 것이다. 뚝방에는 늘 바람이 많았다. 키가 작은 그 녀석은 종종걸음을 치며 나를 따라왔다. 그 녀석처럼 알고 싶은 게 많은 애는 처음이었다. 나 같은 놈에게 뭘 물어본다는 것도 그렇지만 내 대답을 그렇게 주의깊게 듣는 것도 그 녀석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 녀석의 더듬는 말에 금세 익숙해졌다. 그 녀석이 물었다. 깡패들끼리도 싸워? 응. 구역을 침범했을 때나 뭐 그럴 때.

내가 다니는 학교는 동쪽에 있는 중학교였다. 서쪽 중학교 아이들은 오거리의 롤러스케이트장 주변을 맡았고 남쪽 중학교 아이들은 주로 호반(湖畔)에 있는 공원 주변에서 어슬렁거렸지만 둘 다 우리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배차장파’에는 전통이 강한 동쪽 중학교 씨름부원이 기수별로 두어 명씩 섞여 있었다. 북쪽에도 중학교가 있었지만 그곳은 명문고 진학률이 높은 학교였다. 힘이라고는 연필 쥐고 안경 쓸 힘 두 가지밖에 없는 아이들이라서 애초부터 제외되었다. 3월이 되면 그 녀석도 그중 한 학교로 전학을 할 것이다. 그 녀석은 나와 함께 ‘똥중’이라고 불리는 동중에 다니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녀석을 배차장에 데리고 나갔다. 그 녀석이 또 물었다. 배차장은 좋은 구역이야?

우리들이 몰려다니는 장소는 몇가지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삥 뜯기 좋게 만만한 아이들의 왕래가 빈번해야 하고 우리한테 찍힌 놈을 끌고 갈 만한 으슥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또 노점이나 라면집이 있어 배를 채우기가 쉬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배차장은 요지였다. 더 좋은 곳으로는 극장이 몰려 있는 시내의 튀김집 골목이 있었지만 그곳은 고등학생과 퇴학생들의 활동무대였다. 그들 중에는 진짜 깡패조직에서 심부름하는 형들도 있었는데 중학생 양아치들의 우상이었다. 기름으로 얼룩진 더러운 배차장 담벼락에 기대어 노점에서 50원에 세 개 주는 길쭉한 옥수수빵인 ‘좆빵’을 나눠 씹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그들처럼 조직에 끼는 것만을 장래희망으로 삼아야 하는 재미없는 인생들도 적지 않았다.

배차장의 내 친구들은 3학년이라 다들 코밑이 거무스름했다. 건들거리고 다녀도 될 만큼 다리가 길거나 등이 구부정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그 녀석을 소개했다. 그 녀석은 고개만 끄덕하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그 녀석이 말더듬이란 걸 금방 눈치챘다. 그 녀석이 땅꼬마란 데에 벌써부터 코웃음을 치던 친구들은 이것저것 일부러 말을 시켜보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웃어젖혔다. 그 녀석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끝까지 우리 뒤를 따라다녔다. 내게 그렇듯이 친구들에게도 형 소리는 절대 하지 않은 걸 보면 그 녀석은 고집이 좀 있었다.

마침 그날은 삥뜯기에서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좆빵 대신 튀김기름 냄새가 끝내주는 핫도그를 사먹기 위해 모두 버스를 타고 시청 앞으로 진출했다. 고소한 기름냄새는 제과점 문앞까지 솔솔 풍겨나왔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밀가루옷에서 아직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 따뜻한 핫도그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 나왔다. 그 녀석은 눈을 반짝이며 흥분했다.

그 며칠 전 야간고등학교 다니는 야순이들과 만나기로 했을 때도 그 녀석은 나와 함께 있었다. 여자애들 세 명이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한 명밖에 오지 않아 기분을 잡친 날이었다. 여자애는 껌을 딱딱 씹으면서 나타났다. 얼굴이 가무잡잡한 그 여자애는 우리가 중학생인 걸 뒤늦게 알고 욕을 하면서 갔다. 그 녀석이 물었다. 도시 여자애들은 다 저렇게 큰 브라자를 하고 다녀? 그날이 아마 그 녀석에게 처음 소주를 먹인 날일 것이다.

4. 가출 경험/생활해오면서 가출을 한 경험이 있습니까? 가출한 경험이 있다면 그 기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써봅시다.

─세 번 가출했음. 한 번은 친구의 자췻집에서 보냈고 한 번은 간판집에서 일했지만 한푼도 못 받았다. 한 번은 오래 전 일이라 기억 안 남.

가출은 짜릿하다. 바람 속을 걷는 것처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다. 그러나 돌아올 때의 기분은 죽을 맛이다. 다섯번째 가출에서 돌아오며 다짐했다. 영원히 안 돌아올 수 있다면 몰라도 다시는 가출을 하지 말자고 말이다.

그 녀석이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에도 우리는 뚝방을 걷고 있었다. 추운 날이었다. 귓불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는 일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무 말 없이 언제까지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녀석이 불현듯 침묵을 깼다. 이 뚝방을 계속 따라가면 끝에 뭐가 있어? 동물원. 정말? 응,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산이 있는데 공동묘지야. 그럼 반대편으로 가면? 왕릉. 어릴 때 거기로 소풍 많이 갔지. 그러면 말야, 이 하천을 계속 따라가면 뭐가 나올까? 넌 정말 별걸 다 궁금해하는구나. 나도 몰라, 안 가봐서. 하천을 죽 따라가면…… 아마 강이 나오겠지. 그렇구나. 그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너는 앞으로 네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생각 안해봤어. 왜? 어차피 내 생각대로는 안될 테니까. 그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어른이 된 뒤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그 녀석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는데 표정이 몹시 우울했다. 늙는다는 거 생각해본 적 있어? 한참 만에 그 녀석이 다시 물었다. 늙으면 죽겠지 뭐. 나는 즉시 대답했다가 약간 후회하는 마음이 되어 윗집에 사는 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생인 그 형은 늘 기타를 치며 팝송을 불렀다. 여름이면 마당에 등받이가 없는 조그만 나무의자를 내다놓고 앉아서 기타를 치며 부르는 그 형의 노랫소리를 거의 밤마다 들을 수 있었다. 노래는 그 집 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난 뒤에야 끊기곤 했다. 그 형이 기타를 치다 말고 내게 이렇게 말했어. 야야, 한심하다 한심해. 우리 할아버지는 술 취하면 점잖게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부르는데 말야. 우리는 다 늙어갖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해가면서 촐싹거려야 하지 않겠냐. 그래서 내가 대꾸했지. 우리도 늙으면 아마 두만강 푸른 물을 부를 거라고.

나는 늙은 뒤의 인생이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나 똑같이 공평하게 늙어간다고, 죽을 때는 더욱이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이다. 현실이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을 때 미래는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길한 조짐만을 던지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출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내 주변에 흔했다. 가출은 그런 애들 모두가 거쳐가는 순서이자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5. 이번의 나의 실수/이번 비행사건에 대하여 생각나는 것을 써봅시다. 원인 등 여러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공소사실에 적힌 대로임.

그날 우리는 술을 먹었다. 그리고 술김에 객기가 나서 소주를 사갖고 극장 뒷골목으로 튀김을 먹으러 갔다. 골목 구석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기대서 담배를 빨던 남자 하나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쳐다본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우리 같은 아이들의 생리다. 뭘 봐요? 좀 보면 안돼? 뻔한 시비가 시작되었다. 어린것들이 취해갖고 겁없이 돌아다니는데 말야. 뭐라구? 형씨가 뭔데 사람을 함부로 무시해. 이런 대화는 주먹질의 시작을 예고하는 관례적인 신호로 통한다. 그러고 나서 여기저기서 패거리들이 몰려나와 합세를 하고 그 바람에 우리는 몇대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죽어라 도망치는 게 순서였다. 그러나 그날 밤 우리는 취해 있었으므로 사정이 약간 달라졌다. 우리는 피를 보고야 말았다. 잠깐 사이에 그 남자를 실컷 두들겨패주었다. 도망쳐나온 뒤에야 술과 흥분에서 깨어난 우리는 우리가 상위구역을 침범했고 조직이 있는 진짜 깡패들을 귀찮게 한 엄청난 죄를 저질렀음을 알았다. 아무리 조무래기 중학생 따위라고 해도 그런 일을 했다면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도둑질은 그런 데서부터 시작된다. 당분간 숨어다니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우리가 아는 돈 구하는 방법이란 한 가지뿐이었다.

담을 넘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노부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막상 훔칠 게 별로 없었다.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어둠속에서 금고를 발견하고 그걸 들었다. 그런데 금고 안에다 동전까지 넣어둔 모양이었다. 짤그랑 소리가 나자 노인이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나는 들고 있던 주머니칼로 노인의 등을 찍어눌렀다. 거의 동시에 그 녀석이 들고 있던 금고를 떨어뜨렸다. 튀자, 누군가의 입에서 바람소리처럼 날카로운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 녀석은 금고를 다시 들어올리려고 애를 썼다. 잠든 척하고 있던 노파가 그 녀석의 허리를 붙잡았다. 나는 칼을 들고 노파를 향해 다가갔다. 노파는 그 녀석을 놓고 다시 내 다리를 붙잡았는데 물귀신같이 질겼다. 노파의 얼굴을 향해 칼을 치켜들었지만 다음 순간 그 팔을 그냥 천천히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나는 속으로, 이번엔 잡히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했다.

6. 마지막으로 지금 마음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빈칸에 그려봅시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제 감별소에서는 나를 불량으로 감별할 것이고 가정법원은 망설임없이 소년원으로 보낼 것이다. 칼에 찔린 노인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내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호적상 나의 아버지로 되어 있는 남자를 찾아가 가퇴원 각서를 써달라고 사정해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내가 갇힌 것이 자기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를 꺼내줄 마음이 전혀 없는 그 남자는 절대로 각서 따위는 써주지 않을 것이다. 보호자의 각서가 없는 나는 꼼짝없이 15개월을 다 채워야 한다. 그 다음은 알 수 없다. 불안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미래란 어차피 닥쳐올 것이고 버러지처럼 살든 해장국집 걸레처럼 살든 어쨌든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동전 하나까지 금고 안에 넣어 지키려 했던 노인과는 정반대로, 가진 것이 없어 집착없이 늙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동물원, 공동묘지, 왕릉, 강, 닥쳐올 미래. 그 녀석은 이 세상과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궁금해했다. 처음 정액이 주머니에 차서 배설을 기다리는 시기에는 다 그렇다. 그러나 그 녀석은 어떤 인생에게는 그 일이 딸딸이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걸 곧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지는 그 녀석이나 내가 알 바 아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녀석의 모습이다.  아마 1월의 바람 속에 말더듬이의 입김을 허옇게 날리며 혼자 뚝방을 걷고 있을 것이다.

 

태양은 가득히

성국이가 잡혀간 뒤 나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주의깊게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말을 중간중간 가로막으며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이 이게 아니냐고 제 쪽에서 말을 대신 다 해버리는 사람이나 이해심있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내게 천천히, 천천히,라고 주문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가 더듬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였지 내가 하는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국이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마다 손바닥으로 입을 때리곤 했는데 한창 입술을 떠느라 눈을 꾹 감고 있던 나에게는 참으로 날벼락이었다.

2월이 되었는데도 아버지한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 소식을 기다리는 날이 오다니, 내 인생에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한번 외출하면 밤늦게야 들어왔다. 군데군데 화장이 지워진 어머니에게서는 술냄새가 났다. 비틀비틀 내게 다가와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우리 준영이 언제 크나, 우리 아들이 어서 커야 엄마가 호강할 텐데, 하고 풀린 눈으로 뇌까릴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사나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기만 할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엄마 없어도 살 수 있지? 아무래도 엄마는 멀리 아주 멀리 가야 되겠다,라는 놀라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했다. 그것은 내가 어머니의 말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꿈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나는 어머니보다 더 늦게 집에 들어오기 위해 성국이와 붙어다녔지만 제아무리 늦는다 해도 늘 어머니보다는 먼저였다. 언제나 방의 불은 꺼져 있었고 나는 들어오자마자 옷장을 열어 어머니의 옷이 다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뭔가 모르게 화가 나고 치사한 기분이 들어서 그만 이불 위에 엎드려버리곤 했다. 그때까지도 아녜스에게 줄 꽃무늬 손수건을 잘 간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어린애처럼 생각되었다.

기정이라는 여자애는 야간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가슴이 아주 커서 마치 자랑할 게 그것밖에 없어 앞으로 불쑥 내밀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말끝마다 ‘어쭈’와 ‘씨발’을 붙이는 건 좀 그랬지만 딱 달라붙은 스웨터 속에서 출렁거리는 기정이의 가슴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날 기정이의 껌 씹는 소리가 사라지자 내 심장 박동소리도 사라지고 갑자기 사방이 허전했다. 다음날 새벽에는 이상한 느낌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기정이를 본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발가벗은 기정이를 보았는데 아랫도리가 축축해져 있는 것이었다. 몽정이 시작되자 나는 매일 밤 속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게 되었다. 나 역시 더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그날부터 꽃무늬 손수건이 유용해졌다. 손수건은 속옷에 얼룩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고 얼마 안 가서 대문 밖 쓰레기더미 속에 버려졌다.

성국이와 친구들은 소주를 마시고 이따금 뚝방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성국이가 좋아하는 곡은 ‘그건 너’였다.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을 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그것은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는 아니었다. 신나는 노래는 따로 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그러나 성국이는 누군가 그 노래를 시작하면, 개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면서 병나발을 불었다. 빈병을 뚝방 아래로 휙 집어던지며, 야, 집어치우고 누구 두만강 푸른 물이나 불러봐라,라고 내뱉는 거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성국이가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사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성국이는 알고는 싶지만 다가갈수록 점점 알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지는 이 세상이라는 존재와 비슷했다. 성국이네와 함께 오거리 롤러스케이트장 근처로 원정 나갔다가 카바레 앞에서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취한 어머니를 보았을 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때 내가 놀란 것은 어머니의 높은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걸음을 헛디뎌 고꾸라질 듯 비틀거리는 어머니에게 남자가, 조심하라구 후미꼬,라고 말했다. 그 며칠 후 어머니가 앓아누운 적이 있다. 나는 어머니가 하느님께 죄를 받았다고 자책하며 기도라도 하지 않나 지켜보기 위해 밖에도 나가지 않고 어머니 옆에 붙어 있다. 죄를 받은 게 아니었던지 어머니는 이내 다시 화장을 하고 나갔다. 소파수술이란 게 원래 며칠 누워 있기만 하면 될 뿐 아무 표시도 나지 않는다는 건 나중에 성국이에게 전해들은 말이었다.

어느날 박총무 아저씨가 찾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화장을 안해 부석부석한 얼굴의 어머니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신문지에 싸인 그 돈을 멍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박총무 아저씨는 또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아녜스의 편지였다. 나는 대문 밖 골목으로 나가서 햇볕이 드는 담벼락에 기대 혼자 그것을 읽었다. 보좌신부님이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 성당 중등반에 풍금이 생겼다는 소식이 있었고, 그 풍금으로 창미사곡을 치면서 언젠가 들었던 나의 맑은 노랫소리를 떠올린다고 적혀 있었다. 또 내가 떠난 뒤로도 많은 눈이 내려 성모상 옆에 언제나 눈사람이 서 있다고도 썼다. 보좌신부님께서 네 소식을 알 수가 없다고 걱정하시면서 내게 편지를 써보라고 했어. 지난 주일에는 중등반 모두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단다. 네가 고향에 돌아와 다시 우리와 함께 성당에 다닐 날이 있겠지? 그날을 기다리며 그럼 안녕. 아녜스가 베드로에게.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돈을 바라볼 때처럼 멍하니 그 편지를 읽었다. 고향을 떠난 이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심했다. 어머니한테 버림받기 전에 내가 어머니를 버리는 편이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 같았다. 성국이는 나의 가출에 대해 짧게 대꾸했다. 독서실 같은 데 가서 한 이틀 자고 들어온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 너희 엄마가 너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시험해볼 마음이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나는 성국이마저 내 편이 아니구나, 서운함을 느꼈지만 그런 불신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흥분상태에서 품게 되는 가벼운 오해임을 곧 깨달았다. 누군가를 믿어야 하는 것 역시 절망에 빠진 사람으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 성국이는 내 편이라는 확신을 준 적이 한번도 없다. 성국이가 잡혀간 지금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성국이가 나를 위해 끝까지 입을 다물어주지 않는다면 성국이 대신 내가 소년원에 잡혀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날 신나게 싸움을 하고 도망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잡히기는 성국이가 잡혔지만 노인을 금고로 쳐서 쓰러뜨린 것은 바로 나였다. 노파에게 다가서는 성국이의 손에서 칼을 보았을 때 모든 잘못을 성국이가 뒤집어쓰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한 나는 혼자서 도망쳤다.

나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달렸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노인의 집에서 되도록 멀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 깊은 밤도 아니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간혹 행인이 있었지만 나를 붙들고 왜 그렇게 뛰어가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도망자를 이롭게 만드는 도시의 좋은 점이었다. 나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돌아나오기도 하고 같은 길을 반복해서 뛰기도 하며 어두운 길을 골라 온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뛰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빛이 환한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나지막한 철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헤어질 인사를 하는 듯했는데 모두 두 손을 모으거나 허리를 숙인 공손하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인사를 마친 뒤에는 문밖으로 나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을 향해 인사를 하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 너머 어둠 뒤편에 서 있는 둥근 지붕과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 순간 비로소 나는 그곳이 성당이라는 걸 알았다. 내 뺨에 닿은 밝고 부드러운 빛은 성당의 불빛이었다. 나는 번개라도 맞은 듯 소스라치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혼절한 사람처럼 쓰러져 자고 오후에야 일어나니 어머니가 성국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며칠 동안 방에서 잠만 잤다. 그동안 스무 개 가까이 되는 라면을 먹었고 어머니가 지어온 약도 먹었으며 갈증을 달래기 위해 이따금 머리맡 약봉지 옆에 놓인 사과를 씹어먹기도 했다. 그 사이 눈이 한번 왔다. 열을 식히려고 창문을 열었을 때 눈이 오는 것을 본 나는 현기증이 일어 손바닥으로 창턱을 짚었다. 그날 어머니가 낮에 들어오더니 다음날 전학수속을 하러 교육청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달력을 보고 나는 2월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날짜를 확인한 뒤로도 나는 한참 동안 달력을 쳐다보았다. 올해 2월은 28일에서 끝나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더욱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곧 새학기가 시작되어 새로운 선생님과 아이들이 내 이름을 묻고 말을 걸어오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나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선생님이 출석부를 펴는 순간 내 심장은 몸밖으로 튀어나갈 듯이 마구 뛰곤 했다. ‘예’ 하는 대답소리를 내기 위해서 입술을 격렬하게 떨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도시에서는 그 고통이 더할 것이다.

교육청에 나간 나는 동쪽 중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성당에 갈 때나 입던 한복 두루마기를 오랜만에 꺼내 입은 어머니는 말이 없고 조금 수척해 보였다. 서류를 작성하는 교육청 직원이 질문을 던져도 딴데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바로바로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단 하루 내렸던 눈이 녹아 길거리는 질척거렸다. 아침에 깨끗이 닦아 신고 온 어머니의 흰 고무신은 먹물로 붓질을 한 것처럼 되어 코의 모양조차 보이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고무신에 치마가 닿아 치맛단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는데도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어머니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나를 중국집으로 데려가 자장면을 먹였다. 그 중국집은 극장과 맞붙어 있었다. 중국집에서 나온 뒤 무심코 극장 앞을 지나치던 어머니는 간판을 보자 뜻밖에도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서 있는 극장 간판에는 하얗고 작은 배의 키를 잡은 금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붉은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멋졌다. 벗은 어깨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듯했고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에 날리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태양은 가득히’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 어머니와 둘이서 영화를 보았다. 가난뱅이 남자가 친구의 돈과 애인을 가로채기 위해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푸른 바다 위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스토리에 어머니가 흐느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흐느낌은 언젠가 카바레 앞에서 들은 적 있는 후미꼬의 웃음소리처럼 낯설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화면 가득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점점 나를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물을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어머니 곁을 떠났다.

거리로 나왔지만 그곳 역시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겨울은 아직 가지 않았지만 봄이 온 것도 아니었다. 길 안쪽으로는 녹지 않은 눈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었고 행길은 여전히 질척거렸다. 그 사이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러 학교에서 졸업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졸업장이나 상장 비슷한 종이를 말아쥔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무리지어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길바닥 여기저기에는 조화가 버려져 흙발에 밟히고 있었다. 몇명씩 짝을 지어 중국집 앞이나 극장 근처를 돌아다니는 그들은 나만 모르는 뭔가를 공모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인의 집단 같았다. 불현듯 이제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 휩쓸려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성국이가 돌아와서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히기 전에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곳은 왕릉과 동물원 너머 먼 강보다 더 먼 곳이 될 것이다. 바람이 차가워 나는 코트 자락을 여몄다. 작년 생일에 어머니는 새 코트를 사주려고 했는데 내 키가 자라지 않아서 내년에 사주기로 약속했었다. 나는 2월에 태어났지만 그러나 올해 2월에는 생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