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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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김선우 金宣佑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이 있음.

 

 

 

유령난초

 

 

향기도 빛깔도 거두고 땅밑을 흐르는 바람을 홀로 매만져주고 있을 당신 가끔 햇빛이 톰방거리며 물 건너오는 소리 그리워지는 걸 보면 땅밑에서 잎 틔우는 당신의 아름다운 독, 내 속으로 흘러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젯밤 내 꿈 밖을 서성이다 돌아간 당신 당신 삶은 땅밑으로 오고 내 삶은 땅 위로 오기에 뛰어나가 당신을 맞지 못했습니다 죽은 네 오빠가 흙을 헤치고 다시 나올 것만 같구나, 당신의 안부를 영영 잃을까 경계에서 피고 저무는 어머니는 올해 더욱 야위었습니다 땅밑 깊은 꽃대궁 속으로 어머니가 긴 숨을 몰아쉴 때 세계가 슬픔으로 멈칫하였습니다 몇년 만에 한번씩 당신은 땅밑에서 꽃을 피운다지요 어머니 젖무덤에서 부화하던 바람은 언제쯤 당신의 어두운 방 앞에서 문 두드렸을까 애써 모르는 척 당신은 방문을 닫아걸고 아직 피지 않은 꽃잎 속 실핏줄을 후후 불어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태양을 등진 식물인 당신 햇빛과 물을 향해 나아가지 않도록 당신이 꿈 밖에서 어머니 맨발에 입맞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햇빛을 가리며 물밥을 던지고 나는 문 안쪽에서 숨죽였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독을 지녔으니 내 영혼의 음지로 흘러든 독을 모아 등잔을 띄웁니다 긴 독백을 이기고 환한 등 하나 당신의 기약 없는 꽃대궁에 가 맺힐 수 있을까요 당신이 두고 간 발자국 하나 하나 따뜻한 흙으로 덮어가는 어머니의 새벽 염불소리 멈추지 않습니다

 

 

 

불꽃 지느러미

 

 

하릴없이 형광등 갓을 갈다가

미라처럼 말라죽은 나방 한 마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묵은 꽃들을 깡통에 담아 태우네

언제부터 이 창백한 형광빛 속에

나를 내려놓았을까

 

별똥처럼 불꽃 속으로 사라지던 나방이들

마당귀에 쑥불 지펴놓은 여름밤이

휙, 내 곁을 지나쳐가고

아름다웠던 탐미주의자의 단단한 더듬이를 생각하네

흉한 몸 아랑곳없이 타닥거리며

아름다운 불꽃 지느러미를 세우던,

 

차갑고 딱딱한 세상의 중심에

불씨를 물레질하는 바람개비 돌고 있었네

외롭고 누추하지만 아름다움에 가까운 것

나 오래도록 불꽃의 지느러미에 홀려 있었네

 

나방 한 마리에 갇혀 사랑을 탐하네

미라처럼 헐거워진 내 속의 더듬이

쓰레기통을 뒤져 젖은 불씨를 찾네

사납고 아름다운 혀를 지닌 불구덩이 속에

언제부터 이 창백한 형광빛이 놓여 있었을까

 

묵은 꽃술 위에 불꽃 지느러미 올려놓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