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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한민족의 문자생활과 20세기 국한문체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 글은 우리가 방금 통과한 20세기를 문자생활의 측면에서 회상한 것이다. 주제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기에 위로 소급해서 논의를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지난 2000년 동안 내내 한자에 의존한 문자생활을 해왔다. 그러다가 20세기로 와서 한글이 ‘국문’이란 칭호와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한자를 떨쳐버리지 못해 국한문체가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때문에 ‘한글전용론’과 ‘한자혼용론’이 대립하여 일대 문화적 쟁점이 되면서 논전이 끊이지 않았다. 이 모두 20세기의 역사적 과제인 국민(민족)국가의 수립과 무관하지 않은, 곧 ‘국어’의 형성상에서 야기된 문제들이다.

나의 전공에 비추어 주제넘은 일이란 느낌도 없지 않지만, 이 주제는 ‘글쓰기’라는 넓은 차원에서 글쓰는 사람이면 응당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인데다 한자는 나의 전공과 인연이 긴밀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우리 문자생활의 실제 정황을 해명하기에 힘쓸 터이요, 연관해서 약간의 소견을 붙이는 데 그치고자 한다. 나 자신 주장을 세울 고명한 이론이 없기도 하지만, 나름으로는 뜻이 있다. 문자가 인간다움의, 문화창조의 기초요건인만큼 반성적으로 사고할 재료를 세상에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

 

우리의 지난 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들라면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한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실 우리의 옛 문물 가운데서 한글만큼 지금껏 두루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또 있을까. 아니, 세종이 「훈민정음서(訓民正音序)」에서 표명한 바 “사람마다 쉽게 배워 일상에 편히 쓰도록 한다”는 그 뜻이 5백년을 뛰어넘어 비로소 현실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당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의도는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우리 말에 적합한 문자가 필요해서 만든 것이라는 지당한 말만 가지고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이 물음에 대해 학계에 보고된 두 가지 상이한 설이 있다. 하나는 한자음의 정리 내지 한어 학습의 수단으로 개발했다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훈민정책과 관련해서 설명한 논리다. 동일한 사실을 두고 상이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A가 맞으면 B는 틀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측면을 보고 있는데, 그 입각점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마땅히 여러 측면을 아울러 전체를 보아야 할 터이요, 그래야 훈민정음을 창제한 의미의 해석도 진전될 수 있으리라.

 

(1)이것(훈민정음—인용자)으로 글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2)이것으로 청송(聽訟, 소송판결—인용자)을 하면 그 실정을 파악할 수 있으며, (3)자운(字韻)에 있어서는 청탁(淸濁)을 분간할 수 있고, (4)악가(樂歌)에 있어서는 율려(律呂)를 고르게 할 수 있다. 쓰는 바에 구비되지 않음이 없고 가는 바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바람소리, 학 울음, 닭 울음, 개 짖는 소리까지도 다 포착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번호는 인용자)

 

정인지(鄭麟趾)가 붙인 훈민정음의 서문으로 그 효용가치를 밝힌 대목이다. 인용문의 뒤에서는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因聲制字) 만물의 정황에 통한다”는 문자의 고전적 원리가 신문자에서 십분 발휘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그 증거로 하필 바람소리, 학 울음 등을 든 것은 중국의 학자 정초(鄭樵)가 “학 울음, 바람소리,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나 우레가 귀를 뚫고 모기가 눈앞에 스쳐가는 것까지 모두 포착해서 쓸 수 있다”(「七音略序」)고 한 바 있기 때문이다. 문자의 음성주의적 이상은 한자를 가지고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일이었고, 새로 제정한 훈민정음에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을 정인지는 자랑스럽게 내세운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신문자의 용도를 넷으로 구분지어 명시하고 있다. 문자의 용도가 꼭 한정될 이치는 없겠으니 신문자를 제정한 입장에서 염두에 둔 중요한 용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1)과 (2)의 용도는 종래 이두(吏讀) 혹은 구결(口訣)로 처리되던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정인지가 「훈민정음서」에서 먼저 언급한 바 있다.

 

우리 동방은 예악문물이 중화를 본받고 있거니와 다만 방언이어(方言俚語)가 더불어 같지 않기로 글을 배우는 자들은 글의 의미를 깨치기 어려움으로 고생하고 옥사를 다스리는 자들은 사건의 곡절을 통하기 어려움으로 곤란해한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쓰이고 있다. 그러나 차자(借字)를 해서 쓰니 혹은 난삽하고 혹은 불통이 되어 비루(鄙陋)·무계(無稽)할 뿐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 이르러는 만에 하나도 통할 수 없는 형편이다.

 

‘방언이어’란 우리 말을 지칭하는 그때의 관용적 표현이다. 우리 말과 공용문어(한문)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과의 문화적 접촉이 시작되면서부터 부딪힌 난관이었다. 유교 및 불교의 경전들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직접 입으로 가르칠 수야 물론 있겠으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전수하기는 불가능하다. 또한 한문 자체가 문학어로 발달한 것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실제적 정확성을 요하는 문서들은 이문(吏文)이라는 별도의 문체로 써야 했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고안된 것이 이두·구결이었다. 이른바 차용표기인데, 향가 또한 이 표기법으로 씌어진 것이다.1 하지만 이 차자의 방식은 워낙 불편하고 난삽해서 난관을 극복하는 묘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 신문자의 창제로 들어갔다고 하겠다.

 

훈민정음이 이미 만들어지자 천하의 소리를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에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역훈(譯訓)하여 중화음을 바로잡고, 또 한편 『직해동자습 역훈평화(直解童子習譯訓評話)』는 곧 중화어 학습의 입문서라 하여 (…) 정음으로 한훈(漢訓)을 번역해서 글자마다 그 아래 잘게 쓰고 또 방언으로 그 뜻을 풀이하도록 했다. (…) 〔한어를—인용자〕 학습하는 사람들은 먼저 정음의 글자를 얼마간 배운 다음 여기에 접근하면 열흘 동안에 한어를 통할 수 있고 운학(韻學)에 밝아져서 사대(事大, 중국에 대한 외교—인용자)의 일을 능히 수행할 수 있을 터이다.

 

성삼문(成三問)이 쓴 『직해동자습』이란 책의 서문이다. 『직해동자습』은 한어 학습서로 『홍무정운역훈』과 함께 단종 때 간행되었다고 한다(현재 원본이 전하지 않음). 외국어 학습이란, 달리 음과 뜻을 나타내는 방도가 없는 상황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성삼문은 “중원의 학자가 옆에 서서 바로잡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노숙한 통역관이라도 고루함을 면할 수 없다”(「直解童自習序」)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신문자를 활용하여 한어 학습서로 『직해동자습』 그리고 한자 음운의 정통한 이해를 위해서 『홍무정운역훈』을 편찬한 것이다. 그보다 앞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때를 같이하여 편찬된 것이 『동국정운(東國正韻)』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동기가 한자음 정리에 있다는 주장은 이 『동국정운』을 중시해서 나온 것이다.

먼저 인용한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 열거된 신문자의 용도 (3)“자운(字韻)에 있어서는 청탁을 분간할 수 있다” 함은 한자의 음운 및 중국어 학습에 관련한 언급이다. 다음 (4)“‘악가(樂歌)’에 있어서는 율려를 고르게 할 수 있다” 함은 음악과 결부된 노래의 측면이다. 신라 때부터 벌써 “시는 당사(唐辭, 한문)로 쓰고 노래는 향어(鄕語, 방언 즉 국어)로 엮는”(「均如傳序」) 것이 문화적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랫말을 짓고 전하는 데 신문자가 요긴하게 쓰였으니, 신문자의 쓰임 네 가지 (1)경전 등 한문 학습을 위한 언해(諺解) (2)송사 등의 문서 작성 (3)한자음 표시와 중국어 학습 (4)노래 가사는 중요도로 순위가 정해질 성질이 아니고 기능을 각기 달리하면서 하나하나 중요한 몫임이 물론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어제(御制)’라고 일컫듯 국왕 세종의 작품이다. 신문자 제정은 최고 통치자의 개인적 열성이 바쳐진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는 사실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말을 하고 싶어도 뜻을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의 안타까운 사정을 생각해서 새로 28자모를 만든다. 이런 세종의 발언에 비추어 ‘나라 글자’의 필요성을 ‘어리석은 백성’과 관련해서 절감하게 된 것이라는 견해가 타당하게 들린다.

이때 ‘어리석은 백성〔愚民〕’이란 어떤 부류인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는 훈민서를 언해하여 민간에 반포하면서 세종은 “우부우부(愚夫愚婦)들도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우부우부’가 곧 ‘어리석은 백성’이니 문맹을 가리키는 것이다. 문맹은 한문의 문맹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당시 ‘민’ 일반의 실상이었다. 최고 통치권자로서는 ‘민’을 훈도해서 체제 속에 통합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훈민정책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나라 글자’를 마련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나라 글자’로 상정, ‘백성을 위한 글자’로 제정되었다. 이것이 훈민정음의 기본성격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하나는 ‘나라 글자’란 ‘보편적 문자’(한자)에 대립적·부정적 관계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중국 중심의 세계 속에서 주변부의 한 나라이니, ‘나라 글자’는 한자가 보편적 문자로 통행하는 가운데 보조적 기능을 하는 일종의 발음기호일 뿐이었다. 신문자 용도의 (1)과 (3)은 보조적 기능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백성을 위한 글자’란 사대부의 문자는 아니라는 말도 된다는 사실이다. 당초에 한글은 문맹인 ‘우부우부’들의 뜻을 펴는 수단으로 만들었지, 그 시대 사회의 주도층인 사대부 남성들이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훈민정음은 공용문자로 되기에는 태생적 제약이 있었다고 보겠다.

훈민정음의 제한적 성격은 공간적 한계이고 또 시대성이었다. 그러므로 제한을 넘어 비약할 가능성은 고유하게 잠재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삼문은 “천하의 소리를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신숙주(申叔舟)는 “만고의 한 소리도 털끝만큼의 오차가 없으니 실로 음을 전하는 연결고리이다”(「東國正韻序」)라고 신문자를 자랑한 터였다. 말하자면 만국 발음기호처럼 보편적 부호로 의식한 것이다. 실제로 ‘보편적 문자’의 발음기호로 적용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서 그친 일이었다. 한자의 본고장 중국에서는 음을 표시할 좋은 방안이 개발되지 않아서 예로부터 곤란을 겪었다. 20세기에 이르자 주음(注音)부호란 것을 만들어 쓰기도 했으나, 현재는 로마자를 빌려서 쓰는 형편이다. 이웃에 마침 알맞은 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등잔 밑이 어두웠고 부뚜막의 소금을 집어넣을 줄 몰랐던 격이다.

‘나라 글자’의 제정을 조선왕조의 훈민정책과 관련해서 설명한 이우성(李佑成) 선생은 “왕조 자체의 지향과 왕조의 정치에 참여하고 집행하는 사대부=지주층 요구의 상호모순─조선왕조의 구조적 모순은 초기부터 훈민정책의 적극적 추진을 곤란하게 하였음”(「조선왕조의 훈민정책과 정음의 기능」, 『한국의 역사상』, 창작과비평사 1982)을 지적하였다. ‘백성의 문자’로서의 구실이나마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백성의 문자’는 백성이 주인 노릇 하는 세상이 오면 곧 ‘국문’으로 되지 않겠는가.

훈민정음은 장차 전신(轉身)하여 국민 일반의 문자로 자리잡을 수 있는 그 자체였고, 뿐 아니라 보편적 표음문자로서 세계적 지향이 있었다.

 

 

박제가의 언문일치 논리

 

그렇다면 훈민정음이 나오고 나서 우리 조상들의 문자생활은 실질적으로 어떻게 달라졌을까? 결론부터 말해 표기법상의 구도변형이 일어났다. 전까지 한자문화권의 공용문어인 한문체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쓴 차용체의 2원구도로부터 이제 국문체와 국한문체가 추가된 4원구도로 바뀌었다. 국한문체는 앞에서 검토한 바 신문자의 네 가지 용도에서 (1)경전 학습을 위한 언해와 (4)노래 가사로 성립된 문체다. 국문체는 한문을 모르는 ‘어리석은 지아비 지어미’들에 관련된 것이므로 훈민의 뜻이 반영된 부분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2)송사 등 공문서는 종전처럼 이두로 써서 차용체가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창제 당초의 의도가 대체로 실현된 듯하지만, 이 항목은 신문자가 접수하지 못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다.

특히 국문체가 성립, 발전한 현상은 눈이 끌리는 대목이다. 그런데 한글을 천시했다, 언문이라 하여 사대부들은 쓰지 않고 부녀자들이나 썼다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다.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가? 먼저 언문(諺文)의 말뜻을 잠깐 살펴보자. 홍대용(洪大容)이 중국여행을 하고 남긴 『연기(燕記)』를 보면 중국 지식인으로부터 “귀국에 별도의 글자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홍대용은 “언문이 있다. 만서(滿書, 만주어 문자)와 글자는 다르지만 뜻은 마찬가지다”라고 답변한다. 또 “부인들도 글을 읽느냐”란 물음에 “부인들은 글을 모르고 단지 언문만 안다”고 했다(「吳彭問答」). 한편으로 북경의 천문대를 일부러 찾아가서 서양의 관측기구를 관람하고 거기 근무하는 서양인 선교사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홍대용의 “서양인 역시 한서(漢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유송령(劉松齡, A. von Hallerstein, 독일인)이란 신부는 “우리나라는 단지 언자(諺字)만 있다. (…) 자기 말이 있는데 자기 글이 없겠는가”라고 답변한다. 그리고 “책 한권을 꺼내 보이는데 서양 언자로 자획이 공교하고 정제된 모양이 인본(印本) 같았다”고 씌어 있다.(「劉鮑問答」)

이 홍대용의 증언을 통해 언문·언자의 의미는 분명해졌다. 중국 문자=한자에 대해 다른 여러 글자들을 지칭하여 언문 혹은 언자라 한 것이다. 서양인도 스스로 자기네 글자를 언자라 일컫고 있다. 서양인을 대면한 자리에서 홍대용은 변별하기 위해 ‘한서(漢書)’라는 표현을 썼지만 한자를 지칭할 때 으레 ‘문자’라고 했다. 세계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한 용어다. 그러므로 한글을 가리켜 ‘언문’이라 했다 해서 꼭 비하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느 특정한 문자를 세계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한 데 있다. 그 관념 자체가 문제이다.

위의 중국 지식인의 호기심 어린 물음에 대한 홍대용의 답변에서 보듯 언문은 부인들이 주로 썼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해서 사대부 남성들이 한글을 모르쇠하고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對)여성용으로, 또 노래를 지을 경우 한글을 애용한 것이다. 저명한 학자·문인들, 위로 국왕까지 자기의 어머니 또는 딸에게 보낸 언문간찰(簡札)이 허다히 전하고 있거니와, 정철(鄭澈)의 가사, 윤선도(尹善道)의 시조는 좋은 사례이다. 옛날 선비들이 한글을 천시해서 쓰지 않았다 함은 전혀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 말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홍대용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한 이론을 개발한 것으로 학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 그가 언문이란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쓰다니 의아스런 느낌을 가질 수 있겠다. 단순한 관습적 어투로 넘길 수도 물론 있겠으나 과연 그의 머릿속에 보편적 표기수단으로서의 한문체를 거부하는 사고가 입력되어 있었을까? 나는 그에게 그런 의식이 어렴풋이 떠올랐을지는 몰라도 뚜렷이 형성되지는 못했다고 본다. 그 자신의 글쓰기가 스스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우리 국문시가의 가치를 인식하여 『대동풍요(大東風謠)』를 편찬하고 그 서문에서 “나무꾼 노래, 농부의 소리가 참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라면, 사대부들의 다듬고 고치고 하여 표현은 세련되어 보이지만 천기(天機)를 상실하기 알맞게 된 것(한문학의 시문—인용자)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사대부적 한문학과 민중적 국문학을 거꾸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 관점을 자신의 글쓰기로 이동시킬 줄은 몰랐다.

우리의 중세사에서 개명적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홍대용의 경우가 이러했다. 보편적 표기법으로서의 한문체의 위상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거의 흔들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문체 주류의 구도하에서 국문체는 기능적 분할의 한 구역으로, 국한문체는 특수한 용도로 존속했을 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동양적·한문적 문명의 개념이 받쳐준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중화와 가까워서 음성이 대략 비슷하니 온 나라 사람들을 움직여 자국의 언어를 폐기하도록 한다고 안될 이치가 없다. 그런 연후에라야 이(夷)라는 한 글자를 면하여 동국의 땅 수천리에 주·한·당·송(周漢唐宋)의 풍기가 저절로 열릴 것이다. 어찌 대단히 쾌활치 않으랴! (『北學議』, 「漢語」)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발언이다. 우리의 민족어를 포기하고 한어를 쓰자고 한 것이다. 그는 자기 제안이 실현가능성이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한어를 널리 교습하여 벼슬아치들은 조정에서 한어로 말하도록 하고 백성들은 송사할 때 한어를 쓰도록 하면 되리라고 하면서도 “오호라, 지금 사람들이 한어를 괴상하게 지저귀는 소리로 여기지 않는 자 얼마나 되는가”라고 탄식한 것이다. 박제가는 어느 누구보다 사상적 진보성, 문학적 참신성으로 평가받는 존재다. 한문을 대단히 숭상하던 그 세상이었지만 아무도 우리 말을 버리고 한어를 통용하자고 감히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박제가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에게 『북학의』의 이 대목은 퍽이나 곤혹스런 내용이기에 덮어두고 쉬쉬했을 것이다. 그렇듯 ‘반민족적’ 소지가 농후한 결론에 도달한 박제가의 논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한어’는 ‘문자’의 근본이 되고 있다. 예컨대 天은 바로 ‘티엔’이라 말하며 한번 ‘언해’를 거쳐야 하는 간격이 없다. (같은 글)

 

위에서 ‘한어’와 ‘문자’ 그리고 ‘언해’는 원문 그대로인데 당시의 일반적인 용어이다. 중국의 글자는 ‘문자’라 칭하고 중국 말은 구분지어 ‘한어’라 한 것이다. 이는 문자의 보편성을 수용하면서 그 언어는 보편적 수단으로 접수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문자로 씌어진 글을 풀이한 것을 ‘언해’라고 하였다. 입으로 하는 말과 머리를 가다듬어 쓰는 글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다. 언어와 문자 사이의 괴리를 어떤 방식으로 합치하도록 할 것인가? 요컨대 박제가는 이 점을 심각하게 고민한 나머지 해결책을 (순수 이론으로) 제시해본 것이다.

고려말엽의 문인 최해(崔瀣)는 중국인은 “말이 입에서 나와 글을 이루게 되는” 데 비해 “우리 동인(東人)은 언어가 달라서 타고난 자질이 참으로 총명해도 천백배의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그 배움에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고 자못 안타까움을 호소한 바 있다(「東人之文序」). 최해는 자기 문집에다 ‘졸고천백(拙稿千百)’이란 제목을 붙였다. 백배나 천배나 공들인 결과라는 뜻이리라. 아니 글쓰기에 중국인보다 우리 동인은 백배나 천배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종이었으리라. 박제가 또한 이르기를 “외국에서는 아무리 문학을 숭상하고 독서를 좋아해서 거의 중국처럼 된다하더라도 끝내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언어와 문자의 괴리는 노력에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으나 궁극적 한계를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세계 정상의 수준에 가까이 다가선 자만이 느끼는 외로운 고뇌가 아닌가 싶다. 마침내 박제가는 언어라는 큰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직 ‘문(文)’과 ‘화(話)’를 일치시켜야만 이땅에도 손색이 없는 문명의 건설이 가능하리라고 그는 믿었다. 위 인용문의 “이(夷)라는 한 글자를 면하여 동국의 땅 수천리에 주·한·당·송의 풍기가 저절로 열릴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 의미다.

 

우리는 냄새나는 가죽부대 속에 얼마간 문자를 담고 있는 것이 남보다 조금 나은 정도입니다. 저 매미가 나무에서 노래하고 지렁이가 땅속에서 우는 것 또한 시를 외우고 글을 읽는 소리가 아닌지 어찌 알겠소! (朴趾源, 「與楚」)

 

박지원(朴趾源)이 어떤 문인에게 보낸 짧은 편지의 한 토막이다. 오늘날에도 버릇처럼 남아 있긴 하지만 숭문주의(崇文主義) 시대에는 문자지식의 유무가 사람을 논평하는 데 거의 절대적 기준으로 되었다. 박지원은 그 자신 문자의 신묘한 경지를 터득했음에도 문자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원천적인 반성을 제기한 것이다. 홍대용은 문인지식인들의 출세 수단이며 잘난 척하는 글쓰기가 나무꾼이나 농부들의 노랫가락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거꾸로보기를 했는데, 박지원은 아래로 더 내려가서 자연의 미물에 마음이 미친 것이다. 독선적 인간관을 탈피하고 매미의 노래는 물론 지렁이의 들리지 않는 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임으로써 창조적 문학의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다. 박지원의 창조적 문학 또한 한문학의 범주였다. 박지원의 충실한 제자는 다름아닌 박제가다. 박제가는 이르기를 “세상에 물을 떠나서는 고기가 없고 문자를 떠나서는 도(道)가 없다”(「六書策」)고 하였다. 동양적인 문명의 개념은 도를 핵심으로 형성되었던바, 도를 이탈해서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박제가에게 문자의 포기는 문명의 포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박제가의 언문일치의 논리는 ‘언’을 ‘문’에 일치시키는 방향이었다. 그런데 당시 문자생활의 현실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었던 듯하다. 이규상(李奎象, 1727〜99)이란 문인은 “동방의 한 지역을 두고 매일 그 소장(消長)의 형세를 관찰해보건대, 오래지 않아 언문이 이 지역 내에서 공행(公行)문자로 될 것 같다”는 예언을 남긴다. ‘문’이 ‘언’에 일치되는 방향으로의 변화 조짐을 간파한 것이다.

 

 

근대계몽기 국문의 탄생과 국한문체

 

‘언문’이 공행문자로 될 것이라는 이규상의 예언은 1세기를 지나서 마침내 적중하였다. 1894년 경장(更張) 정국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음의 칙령이 반포된 것이다.

 

제14조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 (고종 31년, 1894. 11. 21)

 

이 한 조항은 우리 문자생활의 역사에서 상징적·현실적 의미가 더없이 큰 것이었다. 위 문면에서 국문이란 개념, 그리고 한문이란 단어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우리 문헌에서 ‘한문’이란 말의 첫 용례가 아닌가 한다. 보편적 문자로부터의 격하를 뜻하는바, 그 원적을 표시해서 ‘한문’으로 지칭한 것이다. 국문의 개념은 문자주권의 회복이란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 상황을 두고 황현(黃玹)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예로부터 중국 문자를 진서(眞書)라 하고 훈민정음을 언문이라 하여 이에 통칭 ‘진언(眞諺)’으로 일컬었다. 갑오년 이후로 시무를 좇는 자들은 언문을 대단히 받들어 ‘국문’이라고 불러 진서와 구분하며, 진서를 외국 것으로 취급하여 ‘한문’이라 지칭했다. 이에 ‘국한문’ 세 글자가 우리말이 되었고 진서나 언문이란 말은 드디어 없어지게 되었다. (『梅泉野錄』, 1894년 11월의 기록)

 

‘문자’와 ‘언문’의 관계가 참과 거짓으로 가려질 성질은 결코 아닐 터이다. 그러나 ‘언문’은 잘해봤자 아무 수도 나지 않지만 ‘문자’는 “책 가운데 저절로 만종 녹이 있다(書中自有萬種祿)”고 이르지 않았던가. ‘진서’란 말에는 조선조 사회를 살았던 언중(言衆)의 실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서’가 한문으로, ‘언문’이 국문으로 바뀐 것은 명칭상의 문제에 그치는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문자생활의 커다란 변모를 개념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진서’가 오로지 교양의 원천이 되고 출세의 수단이 되고 교육·학문 그 자체였던 체제의 와해, 세계의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문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기도 하였다. 이런 유사 이래 미증유의 대변화가 문자생활에 반영된 터이니, 곧 국문의 근대적 기원의 시점이었다.

그런데 ‘진서’와 ‘언문’이 함께 제명된 그 자리를 국문이 아닌 국한문이 차지한 것으로 황현은 증언하고 있다. 고종의 칙령에는 “국문으로 본을 삼”는다고 원칙을 분명히한 다음, 단서로서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고 달아놓은 것이다. 한참 뒤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또 동 사안이 법률로 규정되는바,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표기법에 대한 법적 규정의 내용·형식이 54년의 시차를 넘어서 동일하다.

2천년 동안이나 아무런 의심 없이 한자를 쓰다가 그 국적을 따지는 의식이 들어오자 곧 ‘우리 것’이 아니라고 제외를 시킨 것이다. 원칙에 철저한 듯 보인다. 하지만 실행론으로 가서는 편의주의를 취해 스스로 세운 원칙을 파기한 것이다. 이 문제점의 소산물이 20세기의 국한문인데, 이는 후일 논쟁의 불씨가 된 것이다.

국문이 공행문자로 규정되자 곧장 퇴출을 당한 것은 차용체의 이두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당초에도 이두는 폐기대상에 들어 있었는데, 본래 의도대로 되지 못했다. 아마도 이두가 담당한 공용문을 신문자로 대체하는 것이 중난(重難)한 일로 번지기 때문이었으리라. 한문체의 경우 과거의 지위를 거의 상실하고 문화적 관성으로 존속하였다. 그래도 여세가 만만치 않았는데, 역시 역사적으로는 운명이 다해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로 진입하면서 표기법의 체계는 4원구도에서 국문체와 국한문체의 2원구도로 조정되는 국면이다. 이때의 국문체와 국한문체는 성격이며 의미를 전단계와 아주 달리하는 것이었다.

『독립신문』의 국문체는 ‘최초의 본격적 신문’이라는 자체의 위상과 함께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 국문체는 한문체 중심의 체제에서 성적(性的) 분할의 한계에 위치한 그런 ‘언문’이 아니었다. 첫호의 창간 논설에서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이어서 국문체의 당위성을 밝히는 논설을 싣고 있다. 문체 문제는 따로 또 해명할 필요를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다. 또 국문을 이렇게 구절을 띄어 쓴즉 아무라도 이 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함이라. 각국에서는 사람들이 남녀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먼저 배워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우는 법인데 조선서는 조선 국문은 아니 배우더라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묾이라. 조선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조선 국문이 얼마가 나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첫째는 배우기가 쉬우니 좋은 글이요 둘째는 이 글이 조선 글이니 조선 인민들이 알아서 백사를 한문 대신 국문으로 써야 상하·귀천이 모두 보고 알아보기가 쉬울 터이다.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먼저, ‘언문’이란 단어가 여기서는 ‘국문’으로 바뀌어 있다. 맞춤법만 지금 형태로 손질하여 인용했는데 글이 부자연스럽고 서툴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대로 『독립신문』이 국문체를 채택한 입장만은 아주 선명하다. 한문에 배타적인 입장으로 국문우월론을 수립하고 있는바, 첫째 ‘배우기 쉽다’는 편이성이요, 둘째 ‘조선 글’이라는 주장이다. 편이성의 강조는 상하·귀천을 아우르는 국민적 통합의 논리에 닿아 있고, ‘조선 글’이란 인식은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주의 논리에 닿아 있다고 보겠다.

『독립신문』이 나온 2년 뒤에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된다. 『황성신문』은 후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함께 한국의 근대계몽기를 대변하는 양대 신문이었다. 『황성신문』은 “문법은 국한문을 교용(交用)하고 사의(辭意)는 개명진보에 유조(有助)한 논설”을 표방한다. 즉 표현형식은 국한문체로 하되, 개명진보에 유익한 내용을 담겠다는 것이다. 이 『황성신문』은 창간호에서 ‘사설’이란 표제로 국한문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오직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갑오년 중흥지회(中興之會, 1894년의 개혁—인용자)에 즈음하여 자주독립하시는 기초를 확정하시고 일신경장(一新更張)하시는 정령을 반포하실새 특히 기성(箕聖)의 유전(遺傳)하신 문자와 선왕(先王, 세종—인용자)의 창조하신 문자로 병행코자 하사 공사문첩을 국한문으로 혼용하라신 칙령을 내리시니 (…) 본사에서도 신문을 확장하는 데 먼저 국한문을 교용(交用)하는 것이 전혀 대황제 폐하의 성칙(聖勅)을 준수하는 본의요, 그 다음은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을 병전(竝傳)코자 함이요, 그 다음은 여러 군자의 보시는 데 편이함을 취함이로다. (『皇城新聞』 1898년 9월 5일)

 

국한문체를 채택한 『황성신문』의 입장은 국한문을 사용하라는 대황제 폐하의 칙령을 준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취지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고문과 금문을 아울러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한다는 두 가지를 덧붙였다. 그 기본취지는 황제에 대한 숭배처럼 들리는데 자주독립을 향한 대한제국의 근대적 전환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지지하는 자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민족주의가 의식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국문체의 『독립신문』도 마찬가지다. 『독립신문』의 국문체와 『황성신문』의 국한문체는 ‘국문’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념적인 공분모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전환의 방향과 방법론으로 들어가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다.

앞의 『황성신문』의 논리는 “국문으로 본을 삼”는다고 한 법조문의 원칙 부분은 덮어두고 단서로 들어간 “혹 국한문을 혼용함”을 치켜든 것이다. 법해석을 아전인수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어쨌건 국한문을 중시하는 『황성신문』의 논리는 그대로 해석을 요하는 것이다. 국문은 의당 세종으로 귀속되겠거니와, 한문은 기자(箕子)에 귀속시키고 있다. 기자는 오늘의 한국인에겐 까맣게 잊혀진 존재이다. 하지만 20세기초 계몽지식인들조차도 기자가 동국으로 들어와서 문명을 열었다는 학설을 신빙하고 있었다. 국조로서는 단군에다 문명의 개창자로서 기자를 세운 민족사의 체계는 고려말 문인지식층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나는 ‘동인의식’과 ‘문명의식’에 의해 구도된 것으로 본다. 훈민정음을 이 논리로 해명하자면 ‘동인의식’과 ‘문명의식’이 낳은 대표작이다. 근대적 전환의 시점에서 『황성신문』은 민족사를 단군→기자의 구도에 자주적 민족문화의 개창자로서 세종이 보충되는 체계를 잡은 것이다. 국한문체는 이런 민족사의 체계를 대변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언급된 “고문과 국문을 아울러 전하고자 한다”는 글의 뜻이 분명치 않다. 대개 한문의 전통을 ‘개명진보’의 혁신에 접목시키려는 의도로 이해되는바, 실제로 국한문체는 한문의 기반에서 성립한 것이었다. 국문체의 『독립신문』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부분이다. 『독립신문』은, 한문책이란 대부분 옛날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때는 저들에게 유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 조선사람들뿐 아니라 저들에게도 유해한 것이라고 지탄한다. 그 증거는 중국의 현실을 보라고 하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잘 아는 사람이 조선보다 많이 있고 토지와 인민이 조선보다 커 그러하되”(『독립신문』 1896년 4월 25일) 국세가 형편없이 쇠약하지 않은가라고 일깨운다. 유해 품목의 사례로 하필 사서삼경을 든 것이다. 지금껏 국교이고 정신적 지주였던 유교를 그 근원에서 부정하고 있다. 『독립신문』은 유교를 부정하고 한문폐기를 주장하였으니 말하자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라고 하겠다. 그것은 한자문명권으로부터의 이탈이요, 정신적 개종을 의미한다.

당시 『독립신문』의 국문체와 『황성신문』의 국한문체 중 어느 쪽이 더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금 독자들의 눈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독립신문』은 “국문으로 쓴 건 조선인민이 도리어 잘 알아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어찌 한심치 아니하리오”(창간호 논설)라고 몹시 안타까워한다. 당시 우리의 문자생활의 실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독립신문』의 국문체에서 또하나 특기할 사실은 띄어쓰기를 시도한 점이다. 이 역시 독자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표방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얻은 효과는 의문시되니 『황성신문』의 국한문체가 “여러 군자의 보시는 데 편이함을 취함”이란 『독립신문』의 국문체를 의식하고 한 발언으로 생각된다.

이 상황에 대해 “『독립신문』이 선도했던 국문체로의 급진적 전환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일반의 호응을 받지 못해서 국한문체에 주류적 위치를 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근대계몽기 국한문체의 발전과 한문의 위상」, 『민족문학사연구』 14호)는 견해를 필자는 제시한 바 있다. 정부가 개혁적으로 실시한 근대교육의 교재류들은 으레 국한문으로 편찬되었으며, 당시 ‘국어’에 해당하는 교과가 ‘독본’과 ‘작문’인데 모두 “국문과 근이한 한문과 교(交)한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대한제국이 국한문체를 채택한 것이다. 민간 차원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속속 발간된 신학문·신지식의 출판물을 비롯하여 신문·잡지들 대부분이 국한문체를 채용하는 추세였다. 그런 가운데 『제국신문』이 『황성신문』과 남매간처럼 국문체로 간행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는 국문판을 별도로 간행한 것이다. 이 시기 문학사에서 신소설이 대서특필되고 있지만, 기실 구소설의 국문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여기에 나의 관련 논술이 있으므로 붙여둔다.

“19세기말 20세기초─근대계몽기를 문체적으로 주도한 것은 국한문이었다. 국한문체는 한문체의 기나긴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경과적인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구국과 계몽이 절대절명의 과제로 되고 있었던 시대 사정과의 관련성이 깊다. 계몽주의는 정론적 내용을 요구하였으며, 전환기의 민족 위기상황은 역사적 관심을 환기하고 새로운 세계로 향한 각성·지식을 확장하는 보고·기록류에 비상한 관심을 유발하였다. 국한문체는 계몽적 시대상, 계몽주의를 담기에 알맞은 도구였던 셈이다. 따라서 정론체의 산문, 역사전기 문학, 계몽가사가 자연스럽게 이 문학사의 단계를 대변하는 장르로 올라섰다.”(「근대계몽기 국한문체의 발전과 한문의 위상」)

 

 

20세기적 과제의 하나—한자로부터의 해방

 

중국에서 한자는 만리장성에 비유될 만한 것이었다. 인류의 문자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상형·표의 방식에 의한 문자체계의 위대한 완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성(長城)이다. ‘보이는 장성’은 밖으로 ‘중화(中華)’를 지키는 방벽의 구실을 한 데 그쳤지만, ‘보이지 않는 장성’은 ‘중화’를 안으로 통일하고 밖으로 확장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른바 한자문명권은 그래서 형성된 것이다. 중국 주변의 여러 국가들은 각기 한자를 매체로 한 문화적 축적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곧 문화적 질곡이 되기도 하였다.

방금 우리가 작별한 20세기는 국민(민족)국가의 형태가 전지구적으로 보편화된 시대라 할 것이다. 한자문명권의 동아시아지역 역시 매우 착잡하고 험난한 도정을 거쳐서 국민국가의 형태를 각기 갖추게 되었다. 그 과정 또한 우여곡절이 있어 바로 가기도 했고 식민지 단계를 거쳐 가기도 했으며, 그 형태 또한 자본주의체제로 혹은 사회주의체제로 되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두 체제로 나뉘어 분단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국민국가로서의 통합은 미완의 과제로 남은 것이다. 중국 또한 유사하다고 보겠다. 이러한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필수품목의 하나가 ‘국어’(national language)인데 거기서 문자 문제가 난제로 제기된 것이다. 한자의 문화적 질곡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되느냐는 데 문제의 초점이 있었다.

참고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자생활의 과거와 현재를 간략히 언급해둔다. 중국에 인접한 여러 지역에서 옛날 옛적부터 한자를 가져다 쓴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한문이 공용문어로 된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그런데 공용문어와 자기들이 일상으로 하는 말이 일치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었다. 언어가 생리적으로 다른 까닭에 발생한 문제점이니 정인지의 「훈민정음서」에서 “각목을 원통에 박아 넣듯 서로 어긋난다” 함은 바로 이 점을 비유한 말이었다. 이 난제의 해결책을 찾아서 한자를 이용한 표기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일본의 카나(假名)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자이며, 베트남의 쯔·놈이란 문자도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위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한자를 차용한 표기법을 사용했으나 그 방식을 중간에 치우고 독자적인 문자를 제정하였다. 몽골자나 만주자는 우리와 같은 경우다.

문자생활의 이런 과거가 20세기를 경유하면서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면 한자도 자국 문자도 다 버리고 서구문자를 수용한 경우(베트남과 몽골), 한자와 자국문자를 혼용한 경우(일본), 한자와 자국문자를 혼용하다가 자국문자 전용으로 이행한 경우(남·북한)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저마다 국민국가로 가는 과정과 결과가 달랐던 데 상응하는 것 같다.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은 사정이 어떠했을까? 구문명의 중심부로서 한자를 매체로 한 문화적 축적이 거대했던만큼 그 질곡 또한 가장 심대했으며, 거기서 벗어나는 일 또한 가장 거창하고 어려운 짐이었다. 언문일치의 과제는 5·4운동을 전후해서 고문(古文)을 부정하고 백화문(白話文)을 통용하는 방향으로 틀이 잡혔다. 그러나 여전히 한자 자체가 민주화·근대화의 치명적 장애물로 버티고 있었다. 때문에 루쉰(魯迅)은 “문자의 어려움, 문장의 어려움 이는 본래적인 것”이라 지적하고 글쓰기의 ‘라틴화’를 필수의 과업으로 주장했다(「門外文談」, 『且介亭 雜文』). 사회주의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뚱(毛澤東) 역시 “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 세계문자의 공동인 병음(拼音, 표음) 방향으로 가는 것이 필요하다”(1951)고 교시한 것이다. 이런 혁명적 문자개혁의 이상은 현실과 절충하는 과정에서 한자의 간화(簡化)로 가닥이 잡혔는데, 지금은 이마저 신중론에 밀려 답보상태다. 중국의 20세기는 문자개혁의 실험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주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근대계몽기 국한문체는 한자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되 한자의 문화적 축적을 적절히 계승하겠다는 표정이다. 그것은 근대적 세계에 대응하여 자주적 국가와 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전략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따라서 1910년의 주권상실은 계몽기 국한문체 사상의 파산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국한문체의 주류적 형세는 1910년 이후 식민지시기로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시기로 와서 국한문체는 ‘박제된 천재’ 그런 모습이었다.

이 대목에서 일본어 표기법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오직 일본만이 한자를 자국문자와 혼용한 표기법으로 문자생활의 안정을 취한 것이다.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같은 지일적(知日的)인 서양학자는 “일본 글은 비할 데 없이 어렵고 복잡한 것이 되어버렸고 현대 일본의 지적·기술적 발전에 큰 지장이 되었다”(『日本史』, 탐구당 1989)고 일본어에 자못 딱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한자권의 다른 나라들은 한자를 폐기했는데, 근대의 선진국 일본은 어찌해서 한자를 자기들의 국어·국문에 혼거하도록 방치하여 일본어의 복잡성을 자초했을까? 라이샤워는 한자를 일본어에 수용함으로써 근대 일본이 지적·기술적 발전에 지장이 된 측면만 바라보는데, 근대 일본의 확대에 기여한 측면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한가지 예로 근대 일본은 서구의 학술·문화의 개념들을 모두 한자로 번역하여 한국은 물론 중국에까지 그 개념이 그대로 통용되지 않았던가. 이 하나의 사실도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헤게모니를 잡는 데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 글에서 “일본이 오늘날까지 한자를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들의 문자로 접수하고 한문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는데 어떤 국가적 문화전략이 있었던가 한번 알아볼 일이다”(「한국문화에 대한 역사적 논리」, 『창작과비평』 1998년 가을호)라고 의문을 던져본 바 있다. 이 의문의 소상한 답을 찾지는 못했으나 하나의 단서를 얻었다. 미야께 세쯔레이(三宅雪嶺)란 논객의 “한자의 이로움은, 동아 사상을 습득, 동아 공략(攻略), 동아 상략(商略)을 돕는 데 있으며, 따라서 한자를 쓰고 익히는 한편, 한문을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漢字利導說」, 1895)는 발언이다. 한자와 한문을 동아시아로의 진출, 군사적·경제적 책략에 이로운 수단이 된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메이지(明治)시대에 한편에서 한자폐기론이 제기되었던바, 이에 대한 일종의 수정제의였다. 그의 수정제의가 먹혀들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그 근본취지가 일본의 ‘근대 국어’의 정신에 담겨진 점만은 분명하다.

‘근대 국어’의 수립에 초석이 되는 언문일치의 과업이 일본의 경우 20세기 초두에 국가적으로 진행되는데, “국어의 독립·보급·발달은 국가의 통일을 견고하게 하여, 국세의 신장을 돕고 국운의 진보를 빠르게 하는 제일의 방법”이라 규정하고 이 목적을 위해서 언문일치를 강조한 것이다. ‘국어’를 ‘국세의 신장’ ‘국운의 진보’를 위한 날카로운 무기로 개발하려는 전략이다. 일본국가의 ‘국어정책’은 초장부터 제국주의적 세확장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이후 식민지 조선은 이 ‘국어정책’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어를 ‘국어’란 이름으로 배워야 했으며, 조선어 및 한문이 교과목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국어’의 보조교과에 지나지 못한 것이었다. 피식민지에 일본어를 ‘국어’로 교육한 것은 피식민지의 사람들을 동화시키고 피식민지의 자주적 문화를 그 뿌리에서 말리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막판에 군국주의 일본은 이땅의 사람들에게 ‘국어 상용’을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응해 우리의 민족어를 지키고 민족문화를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들이 다양하고 끈질기게 바쳐졌다. 몇가지 관련사항을 들어보면 1920년대에는 신문학운동을 통한 언문일치의 진전, 1930년대에는 조선학운동을 통한 학술어의 정착이 그런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근대문학, 근대학문의 언어적 기초가 잡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시되는 일로서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공표, 1936년 ‘표준어 사정’이 손꼽힌다. 드디어 우리 말이 근대언어로 가다듬어져서 문자생활의 통일을 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 민간적 차원에서 민족운동의 형태로 성사되었으니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하겠다.

이 역사단계에서 ‘한자로부터의 해방’이라는 20세기적 과제의 하나는 거의 망각상태에 놓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의 화한혼합문(和漢混合文)이 당연시되고 보니 국한문체는 전혀 바람을 타지 않았으며, 한자 또한 온존되었다. 그런데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은 표제에서부터 한자를 배제하고 있으니 국한문체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의 밖이었다. 곧 다가올 한자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도 같다.

1945년의 해방은 ‘언어주권’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말과 글, 되찾은 ‘국어’를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써서 민족문화를 창건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한자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해묵은 난제를 풀어갈 좋은 기회를 맞은 것이다. 한글은 ‘조선어 말살’로까지 치달은 탄압을 견뎌낸 영광의 과거가 있기에, 한글로 문자생활을 통일하자는 주장이 명분과 형세를 얻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한자의 기반과 관행이 따라서 금방 무너지고 바뀔 이치는 없는 것이다. 국문체를 지지하는 한글전용론과 국한문체를 지지하는 한자혼용론의 다툼은 ‘언어주권’을 회복한 그 시점에서 막이 올라 20세기를 마감한 지금까지도 막이 내리지 않았다.

남의 대한민국과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어’를 공유하여 난제 또한 공유하게 되었다. 그 난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체제를 달리하는 만큼이나 달랐다. 북은 1949년 초부터 한글전용을 실시하여 한자를 문자생활에서 축출한 것이다. 남쪽 역시 정부수립과 함께 한글을 공식문자로 인정하였는데, 오히려 전용론과 혼용론의 싸움만 불러일으켜, 혼전을 거듭하게 되고 어문교육의 난맥상이 빚어진 것이다.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북은 한자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한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정부의 이랬다저랬다 한 어문정책에 요인이 있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한다. 나는 각도를 약간 달리해서 본다. 정부의 어문정책이 일관성 없이 동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글전용의 원칙을 바꾼 적은 없다. 더구나 이승만은 그 자신 한글전용론자로서 엉뚱하게 ‘한글파동’2을 일으키고 한글전용을 위해 길거리의 한자 간판을 강제 철거하도록 한 일도 있으며, 박정희 역시 국수적 집념으로 ‘한글전용 5개년계획’을 추진한 바도 있다. 문제는 한글전용책이 문자생활의 현실과 조율되지 않은 데 있었다. 구체적인 실사(實事)를 찬찬히 살펴서 적절한 방도를 찾는 것이 아니고 원칙론을 관념적으로 강요하는 자세다. 그런 때문에 사태가 어떻게 발전했는가 하면, (1)문자생활의 여러 주체(신문·잡지·학자·지식인)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풍파를 일으킨 꼴이 되고 부질없이 전용론 대 혼용론의 논쟁만 부채질했으며, (2)관의 직접적 통제하에 있는 교육부문(그것도 초·중·고등학교)에만 정부의 시책이 통하는 터이므로 전용론과 혼용론은 교과서에 한자를 넣고 빼는 것으로 승패를 삼아 마침내 교육현장은 양파(兩派)의 결전장처럼 변하고 학생들이 싸움의 희생양으로 되었으며, (3)논쟁에 정신이 쏠린 나머지 한자로부터 진정한 해방에 꼭 요망되는 제반 대책(우리말의 능력 키우기, 한문 교육, 고전 번역)은 소홀히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한자는 어느덧 사라지고 있다. 전용론과 혼용론의 장기전에서 전용론이 승리한 결과일까? 아니다. 양진영의 논쟁은 여전히 가열되고 있는데 현실에서 한자가 퇴출당한 것이다. 나는 한자를 밀어낸 대세가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바 대미의존적 경제·문화의 구조와 상업주의적 대중추수의 논리가 그것인데, 최근 일반화된 컴퓨터로 글쓰기도 이에 일조하는 것 같다.

20세기초에 등장한 국한문체는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퇴장했다. 2천년 동안 우리의 문자생활에 이용했던 한자와 결별할 날이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20세기 국한문체는 한자로부터의 해방에 경과적인 의미를 띠었던 셈이다. 그런데 ‘해방’의 참뜻이 한자를 안 쓰면 그만인, 물리적 숙청이 아님은 물론이다. 한글전용의 어문정책을 일사불란하게 밀고 나갔던 북한의 경우 한글전용이 초래하는 문제점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나름으로 노력하여 한문 교육에까지 크게 배려하였다. 그러나 과연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한글전용이 성공을 거두었는지 적이 의심스럽다.

 

 

맺음말

 

한국어의 국한문체는 20세기적인 것으로 임종을 맞을 날도 멀지 않게 된 반면, 일본어의 경우 우리의 국한문체에 해당하는 표기법이 흔들리지 않고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양국의 이런 편차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본의 평론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훈독(訓讀)방식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한자·한문을 뜻[訓]으로 읽는 일본 특유의 방식인바, 훈독은 ‘외래적인 한자를 내면화한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한자를 ‘외부적인 것’으로 내내 남도록 한다고 본다. 이 훈독에 의해서 카나와 한자를 혼합한 일본어 표기법이 일찍 정착할 수 있었다는 논지다. 실은 한국에서도 훈독에 준하는 방식이 없지 않았다. 경전의 언해는 훈독에 해당하는 형태이며, 한자를 뜻으로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컨대 지명으로 충청도 大田, 전라도 裡里, 서울의 新門은 이렇듯 한자로 써놓고도 말할 땐 으레 한밭, 솜리, 새문이라고 발음하였다. 그런데 어느덧 ‘대전’ ‘이리’ ‘신문’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근대적 현상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도 일본처럼 훈독법이 있었던 사실을 들추어내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한자를 뜻으로 읽는 방식이 죽어버린 요인은 근대식 행정의 결과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은 것이다.

국한문체가 일본과 달리 계속 논란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단명하게 된 것은 그 생존기인 20세기의 문제이다. 다만, 역사적 요인이 현실에 결합하여 작동한 것이다. 앞에서 현실적 요인을 규명하는 논의를 전개했던바, 식민지 상태로부터 냉전체제하의 분단국가로 20세기를 통과한, 일본과 다른 한반도의 상황이 그렇게 밀어간 것으로 진단하였다. 요컨대 한국적 상황이 일으킨 민족주의의 국수적 과열, 서구중심주의로의 편향(북한은 사회주의적 급진성과 민족주의적 경직성)이 한자를 거부하는 주요인으로 되었다. ‘민족주의의 국수적 과열’과 ‘서구중심주의로의 편향’은 정반대지만 극의 양면이어서 항시 서로 교차하여 작용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지만 오직 한가지, 주장을 하지 말자고 주장하려 한다. ‘한글전용론’과 ‘한자혼용론’은 이제 그만 화해하고 앞으로의 문자생활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 시작된 ‘언어환경’은 너무도 달라져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할 틈조차 주지 않고 있다.

국민국가로서의 통합은 미완의 상태이기에 과제 자체를 포기하고 떠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과제라 하더라도 차원을 달리해서 생각해야 할 노릇이다. 국민국가를 단위로 한 ‘국어’란 개념은 빛이 바랜 지 오래다. 국민국가의 틀에서 벗어나 세계 속에서 행동하고 사고해야 하는 판에 배타적인 ‘국어’를 고수하기는 어려운 여건 아닌가. 불가피한 대세로 펼쳐진 ‘세계화’는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고 동아시아 연대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한편 영상매체가 놀랍게 부상하면서 종래의 활자매체는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이런저런 ‘언어환경’의 큰 변화 속에서 남북을 아우를 문자생활의 통일을 어떻게 속히 성취할 것이며, 세계적 담론과 어울릴 창조적 글쓰기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한민족의 입장에서 고금을 관통하고 동서를 화합하는 21세기형 신문명의 문자적 기반을 어떻게 확충할 것인가. 그러자면 한글의 중심 위에서 한자의 활용방안은 물론, 외래어 문제 및 영어와의 관계까지 폭넓게 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과제 둘을 덧붙여둔다. 하나는 진정한 ‘언어주권’을 획득하는 문제다. ‘언어주권’의 회복을 외형적으로는 이룬 셈이지만 ‘나’의 것으로 살리는 데 부실했으며, 최근에 말과 글의 범람으로 그나마 자아를 망실한 느낌이다. 참다운 인간의 언어, 참다운 나의 언어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다른 하나는 자연의 언어를 회복하는 문제다. 근대의 언어는 기실 발전의 논리를 대변한 지배의 언어이며, 그런 뜻에서 인조의 언어요, 파괴의 언어이다. 천지자연의 생명감을 해독하는 글로 되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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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용표기의 방법으로는 역사적으로 향찰(鄕札) 및 이두·구결이 있었다.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서 우리 말을 표기한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인데, 향찰은 전면적으로 쓰고, 이두는 부분적으로 특수용어나 어미에 쓰며, 구결은 한문에 붙이는 토이니, 각각 쓰임새로 구분지은 것이다. 향찰은 향가 이후 용례를 찾을 수 없으므로 고려시대로 들어와서 이미 소멸한 표기법이다. 참고로 이두와 구결의 예를 들어본다. 가령 ‘짐짓’은 이두로 故只, ‘다짐’은 이두로 侤音이라고 썼던 것이다. 가령 또 이두의 是如爲乃는 ‘─이다 하나’란 말이다. 구결은 ‘國之語音異乎中國’이란 한문을 해독하기 위해 편의상 토를 붙여 ‘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하야’라고 하는 따위다. 구결은 한글이 나오기 전에는 한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한자가 약호화되기에 이르렀다. 위의 ‘이’는 伊→イ, ‘하야’는 爲也→ソツ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결은 일종의 발음기호의 성격을 띠었는데 그 형태가 일본 글자의 카따까나와 일치하고 있다. 일본은 이 방식을 자기들의 문자로 확대·발전시킨 것이다.
  2. 제1공화국 대통령 이승만은 통용하는 한글맞춤법이 복잡하고 불편하여 ‘문명발전’의 장애요인이라고 판단, 맞춤법의 간소화를 대통령 특별담화의 형식으로 엄명하였다. 이승만이 이상적 표기법으로 생각한 것은 구한말에 번역된 성경의 문체였다. 이승만의 담화문이 바로 그런 국문체로 씌어 있었다. 당시 문교부장관은 대통령의 엄명을 시행하기 위해 앞장섰는데, 학계·언론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승만은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재차 담화문을 내는 데 이르렀으나, 결국 반발을 잠재우지 못해 물러서고 말았다. 1954〜55년의 일로, 해프닝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글파동’으로 일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