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최원식 崔賢植
문학평론가
뿌리의 기억, 기억의 뿌리
정복여 시집 『먼지는 무슨 힘으로 뭉쳐지나』, 창작과비평사 2000
정복여(鄭福如) 시의 첫인상은 찰랑거리는 수면에 가볍게 부서지는 햇살처럼 명랑하고 경쾌하며, 때로는 현란하기까지 하다. 이런 느낌은 제목에서부터 벌써 그 자체가 생생한 즉물적 감각의 보고이기 쉬운 음악·식물·보석의 이름이 심심찮게 눈에 띄기 때문에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그렇게 가볍지도, 얕지도 않다. 오히려 그 표면적 경량감을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풍성한 이미지의 발굴을 통해 ‘깊이의 무게’로 절묘하게 반전시킨다.
정복여 시에서 시선의 깊이와 무게를 일궈내는 동력은 단연 향지성(向地性)의 상상력이다. 만약 이 시집의 얼개를 이루는 의식과 이미지의 열쇠말을 찾아 어떤 도형을 그린다면, 분명 ‘깊이─뿌리─기억’을 꼭지점으로 한 삼각형이 될 것이다. 이것은 “나무는 더욱 깊어지는 바닥을 간다”(「나무연못」), “몸 기울여 연잎의 깊은 뿌리를 들여다보았을 때/그곳에 나 이전의 어떤 빛이 나를 보고 있었다”(「깊은 방」), “내 노트는 뜯으면 뜯을수록 많아지는/푸른 속지를 갖고 있다”(「기억은 스프링 노트 속에서」)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세 낱말들은 서로의 이미지와 의미를 구속하며 닮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요컨대 서로가 서로의 “다리를 휘감”음으로써 “새로운 꽃잎을 만들어”(「벚나무박각시나방」)낸다는, 바꿔 말해 “더 오래된 깊이”(「깊은 방」)란 ‘풍부한 근원’을 파고드는 프랙탈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향지성의 상상력은 속도와 높이만을 숭배하고 칭송하는 현대적 삶의 광포함에 대한 반성과 회의의 산물이다. 그 광포함은 특히 감금과 추방을 양날로 하는 배제의 원리로 현실화된다. 가령 그의 ‘꿈’들은 그 실현이 계속 유예됨으로써 “집나온 꿈들”이 되어 “출구를 찾지 못”(「꿈의 출구가 있는 내 방은」)하고, 그의 삶(집)을 공유하는 사물들과 미물들은 위생과 질서의 규율 아래 늘 “내팽개쳐진다”(「내 거미」). 삶의 효율을 목적으로 하는 배제의 일상화가, “엄마 내 거미는 어디 있어요 내 집은!”이란 공포스런 절규가 확인하듯이, 오히려 ‘나’와 ‘세계’의 박탈과 고립을 촉진·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시인이 “우리는 별의 식구/함께, 별이었던”(「먼지는 무슨 힘으로 뭉쳐지나」) 근원세계를 새로운 미래로 삼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무릇 내남없이 “붉게 달궈져 순간 한몸이 되는 그 무엇”(「구름패랭이」)을 여전히 허락하는 세계이므로.
하지만 그는 ‘오래된 깊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턱없는 시원의 상상력에 매달리거나 현실감 없는 「귀거래사(歸去來詞)」를 읊조림으로써 성급히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안이한 정신이 곧잘 범하는 신비화된 정서로의 함몰을 경계하면서, 대상세계를 자기관찰의 상관물로 돋을새김하는 균형감각을 날카롭게 벼른다. “카드 속 눈 덮인 상수리나무숲”의 한해살이를 상상적으로 점묘하는 과정을 통해 피로한 도시생활을 “차갑지만은 않은 세월”로 역전시키는 「광화문, 그 숲의 끝에 서서」나, “내나무개미”가 나무를 올랐다 떨어졌다 하는 행위를 자아의 직수굿한 반성과 새로운 생성으로 교묘히 겹쳐놓은 「내나무개미」는 그 표본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시들은 정복여의 상상력이 근원세계와 조우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요구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말하자면 ‘오래된 깊이’의 ‘순간’을 현재와 미래를 구성하고 통치하는 영원한 원리로 세우고 싶다는 욕망. 이것은 “날마다 내 열쇠(시일 것이다─인용자) 하나로/어떻게 이 연못을 잠가두고 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깊은 방」)란 구절은 물론,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오래된 시간’의 성격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정복여에게 ‘오래된 시간’은 영원히 고여 있는 시간, 곧 “수많은 ‘지금’”(「얼굴」)이다. ‘영원한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두꺼워지고 깊어지는 무엇이며, 현재와 미래란 퇴적된 시간들을 그러담는 아직 차지 않은 그릇이 된다. 이런 시간인식은 시간의 자식들인 ‘나’와 ‘세계’의 실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다. 그들의 실체는 이제 이성의 책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때 함께 키운 우리 둥근 나이테”가 지금도 “당신 몸 속에 그대로 소용돌이로 있는지”(「갈참나무의자」)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이 때문일까. ‘영원한 현재’를 채집하는 시들은 대개 ‘향지성의 상상력’ 가동과 원초적 세계의 발견, 그것의 현재화/영원화란 극적 구성원리를 취한다. “모든 형태의 내장된 어둠은/어딘가에서는 빛이 된다고,/비로소 온통 나무인 나무가/한그루 서 있다”(「모든 상징은 어둠이다」)는 구절은 그 가치증여 과정을 대변한다.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 시인의 ‘영원한 현재’로의 몸던짐이 원초적 세계의 회복과 타자성 실현을 위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기원과 역사를 더듬음으로써, 개별이자 전체이고 순간이자 지속인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고 거기서 진정한 자기완성과 영원한 삶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는 것이다.
정복여의 좋은 시 대부분은 잃어버렸던 “옛 지금들의 화석층”(「얼굴」)을 영원한 “황금빛 덩어리”(「동충하초」)로 제련하는 연금술의 과정에서 태어나고 있다. 이 과정은 깊어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란 평범한 진리와 함께, 사물의 깊이란 이미지의 깊이라는 시의 고전적 원리를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그러나 ‘오래된 깊이’에 대한 외곬스런 응시는 한편으로는 그의 시세계를 좁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에 관련된 시들이 대개 ‘발견과 가치증여’의 극적 구성을 취한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했다. 이런 방법은 자연스럽게 그 원리에 알맞은 소재들을 선호하도록 만든다. 그에 따른 비슷한 소재의 반복과 나열은 이미지의 실감을 약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주체/세계의 재구성 욕망을 도드라지게 부각시킨다. 개별 이미지의 호소력이 시 자체의 강렬한 체험으로까지 부풀어오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복여의 향후 과제 중 하나는 이미 결정된 깊이를 지니지 않은 대상들을 통해서도 ‘오래된 시간’의 무게를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번 시집에서 그 작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상과 내면의 즉물적 풍경을 통해 그 풍요로운 시간을 구가하는 「빛의 나라로 가는 자전거」 「낙하사 가는 길」 「변주해서〜바리아찌오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나치게 조작된 이미지에 갇혀 있다는 약점을 피하지 못한다. 자의성의 함정을 피하면서 어떻게 대상세계를 살찌우는 그늘 깊은 이미지를 발굴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요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