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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박흥식 朴興植
1956년 충북 옥천 출생.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아흐레 민박집』이 있음.
집
방문을 열면 푸른 파밭이 다 펼쳐져 있어
흰 빨래와 마른 햇살이 꼭 어울려 있고
나흘 전 읍내 나갔다 온 자전거가 삐딱하게 기운 집
그랑 밭이랑은 저편 참깨 담뱃잎 사이서 구불거리고
감나무 꼭대기엔 덩굴손처럼 산을 오르는 사람들
저 수문 망초밭께로는 까맣게 노는 염소떼
누이와 큰조카는 그 방죽 위를 빛나게 걷고
건너 밭귀에선 경운기 뜯어고치는 맑은 쇳소리
시시때때로의 옹시루와
삼대를 건넜다는 크작은 장독들이 쨍쨍거리고
두엄더미는 새 풀내로 덮여 잔뜩 땀 흘리는 집
등뒤 학교 쪽 뒤란의 탱자울 가득
시끌박짝 둥그러니 새소리는 안팎으로 뭉켜 놀아서
납작한 집매를 건넌 어린 노래의 자매는
길 아래 흰 돌짝마다 졸졸 흘러서 올라오는데
파릇한 줄기파 속에서
밀어올린 우체부의 모자가 흔들흔들 나타나는 집
그대로 있다가 있는 대로 사라질 그 먼 집
고모 생각
저 먼 곳에 이런 고모가 있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아침마다 씻기고 밥 먹여 학교 보내주고
기죽지 말라고 놀이동산에 데려가고
휴가철이면 절 구경 바다 구경
길을 가다가도 예쁜 것들만 보면 사 오던 고모
때마다 담임선생님도 찾아뵙고
나중엔 컴퓨터에 대학까지 보내주며
엄마처럼 키워준 회초리고모가 있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모질던 한겨울 훈련병 시절에도 애면글면
첩첩산중 민통선까지 찾아왔다 못 보고 돌아가야 했던
그런 고모가 있었다고 지금은 생각을 해보자
엄마 대신 결혼식에 와서 많이 울던 그 고모
아무도 없이 살다 이제는 혼자서 허옇게 늙어
지금도 그대로 저편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창문을 조금만 열어놓고 그냥 한번 생각을 해보자
다시 못 볼지도 모를
그때 그 고모가 지금도 저쪽에 있다는 생각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