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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공교육의 위기와 사교육

 

김창수 金昌洙

인천문화정책연구소장. 문학평론가. 인천한샘·서울경일학원 논술 강사 역임.

 

 

대화하는 작은 교실을

 

 

1. 지난 2월 초순, 논술학원에서 만난 A군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교육대학의 특차전형에 합격한 학생이었다. 특차전형에는 논술시험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내 강의는 그 학생의 합격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합격통지를 받고 난 이후에도 강의에 빠지지 않던 학생이었다. 그의 합격소식은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그저 설 인사를 하는 것이려니 여기면서 의례적 인사말로 전화를 끝내려는데, 그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나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여행중이라고 했더니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저녁 그 학생이 다시 전화를 하여 다른 3명의 학생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날 사회 교사 지망생인 A군과는 논술시간에 다룬 적이 있는 교육문제 해결방안 가운데 특히 교사의 역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문과대에 입학하여 철학도가 되려는 B군은 개학 이전에 읽어야 될 책을 물어와서 철학사와 현대철학의 조류를 쉽게 풀어 쓴 책을 두어 권 소개해주었다. 농과대 임학과에 합격한 C군, 그리고 공과대 생명공학부에 입학한 D양과는 전공과 진로보다는 한달 남짓 같이한 논술공부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들 논술이 처음에는 어려웠고 나중에는 더 하고 싶었다고 했다. 문제는 하나지만 관점에 따라 입장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알게 된 것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도 성과라고 했다. 문득 A군과 B군은 내가 일하고 있는 문화단체의 쎄미나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전에도 그렇게 말한 학생이 더러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관심과 존중의 표시이다. 좋은 생각이지만 당분간은 학교생활에 충실하고, 학교를 1〜2년 다닌 뒤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 와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D양은 논술반 동창회를 만들자고 했다. 나는 당분간 대학별로 만날 것을 권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뒷날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서울 시내의 어느 대입학원(사진은 이 글의 특정사실과 관계 없음)

서울 시내의 어느 대입학원(사진은 이 글의 특정사실과 관계 없음)

 

2. 지금 논술반 수강생들과의 사적인 만남을 떠올리는 것은, 학원의 논술반 강의 모형이 오늘의 ‘학교 위기’ 사태를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다. 학원강의가 끝나고, 시험이 끝난 지도 한참 지났는데 논술반의 학생들이 서로를 만나고 싶어하고, 강사를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답은 강의실의 규모와 과목의 특성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 같다.

학교수업과 실전 논술반은 규모와 방법이 판이하게 다르다. 논술강의는 고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6개월 이상 진행되는 기초 논술반과 시험을 앞두고 개설되는 실전 논술반이 있는데, 실전 논술반은 보통 15명 내외의 고3학생들로 편성되어 주 2〜3일, 전체적으로는 6주 가량의 강의가 진행된다. 단일 과목의 단기간 집중강의이다. 학생들의 개별적 특성은 상담기록과 수능 예상성적, 그리고 첫날의 간단한 실습을 통해 대부분 파악된다. 주 1〜2회 치르는 모의 논술고사의 원고 첨삭과정에서 글쓰기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인생관, 독서량과 교양수준, 지망학과와 장래희망 등의 내용을 꽤 소상하게 알 수 있다. 또 학생의 원고를 놓고 강사와 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첨삭하는 일대일 면담 자리에서 강사는 한 학생을 ‘제대로’ 만날 수 있게 된다. 강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양서적이나 다양한 논제를 매개로 한 토론과정이나 학생의 글과 주장에 대한 논평을 하는 과정에서 강사의 교양이나 삶에 대한 태도도 다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서 대화는 시작될 수 있다.

소형학원의 경우 논술반은 적으면 한두 반, 많아야 네댓 반이다. 한 강사가 맡은 몫은 많아야 두세 반이다. 실전논술반이 운영되는 시기는 고3 종합반이 끝나서 학원도 강사들도 여유가 있을 때이다. 학생들 또한 지망대학과 전공학과 선택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갈등이 적지 않지만, 학교 수업의 부담이 없어서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있다. 이러한 조건들로 인해 강사들은 학생들과 밀착된 대화를 할 수 있다. 거기에다 논술강의 시간에는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하는 수능 교과목 강의나 학교 수업에서 느끼는 강박관념에서 어느정도 해방된다.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논증만 된다면 남과 다른 주장일수록 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강사는 권장한다.

처음에 학생들은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것을 무척 쑥스러워한다. 글의 결함을 지적하면 얼굴을 붉히고, 지적을 덜 받은 학생의 원고를 보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쓴 글의 구성과 논리전개, 문장의 결함을 지적하고 더 효과적인 짜임이나 문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강사가 최소한 30분 이상 자신의 원고와 씨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어색함과 부끄러움은 이내 고마움으로 바뀐다. 비난과 비판의 차이를 깨닫는 과정이다. 그런 다음에는 스스로 쓴 글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기도 한다.

논술강의에서 다루는 주제의 범위는 대체로 포괄적이어서 다양한 독서와 교양체험을 요구한다. 또 다양한 교과목이나 학문의 분과를 통합하여 사고하게 하고 실천적 사유를 유도한다. 최근 대학에서 출제되는 논술문제 유형(‘고전 논술’이라고 부르는)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제시된 지문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통해 논점을 예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문 읽기의 성패는 평소에 쌓은 학생의 교양의 폭이나 깊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현재의 교과목이나 수업 진행방식에만 의존한다면 학생들은 대학이 요구하는 논술문을 제대로 쓰기 어렵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도 현대과학을 생각하거나, 불교철학의 지혜를,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중심적 삶의 방식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며, 문제해결을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려는 적극적인 고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3. 논술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성적은 대체로 중상위권이고, 학교생활도 무난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적대감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다. 학생들과 상담하면서 싫어하는 교사의 여러 유형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납득이 가는 경우도 많았다. 학생을 편애하는 교사, 성적이 나쁘면 인간도 나쁘다고 여기는 교사, 학생들을 어린애로 취급하면서 도적적 설교를 자주 하는 교사, 자신과 취향이 다르다고 성격이나 도덕적인 문제로 비약하는 교사, 모욕적인 말과 감정적 체벌을 하는 교사를 들었다. 학생들의 대화중에 나온 교사들의 별명 가운데 상당수가 입에 올리기 민망스러운 상말이었는데 학생들의 노골적 적대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적대감은 현재의 학교체제와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 해소는 어려울 것이다. 교사가 교실의 ‘권력’으로 기능하는 한 교사와 학생의 대화는 쉽지 않다. 일부 교사들은 신세대의 사고와 문화를 공공연히 멸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안타까운 노릇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문화갈등은 학생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격심한 변동을 겪은 우리 사회,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압축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기인한 바 크다. 지금의 학생이 성장한 환경은 기성세대들의 성장환경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활자매체보다는 시각매체를, 집단보다는 개인을, 질서보다는 자유를, 의무보다는 권리를, 일보다는 놀이를 우선 생각하는 세대이다. 그들은 그렇게 길러졌고 또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래는 어차피 그런 세대가 살아가는 사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세대가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매체와 기계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아이들의 능력만 보아도 그것은 자명하다. 또 현장의 많은 교사들이 체감하듯이 교사에 대한 사회와 학생들의 시각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사들이 교직이라는 말에 ‘부착’되어 있는 ‘신성성’을 스스로 내버리지 않는다면 학생과의 소통은 어려울 것이다. 교직에 신성성이 부여된 것은 지식이 곧 계급이고 권력이던 왕조시대의 신분관념에서 비롯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과 보급에 민족의 명운을 걸었던 계몽기나 일제 강점기가 아니며, 학력으로 신분상승이 일정하게 가능했던 해방기나 전후의 사정과도 다르다. 개발독재가 산업화에 필요한 그만그만한 ‘인력’을 대량 주문하는 시기도 아닌 것이다.

한편에서는 정보통신의 혁명이 교사의 역할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정보와 지식의 제공을 인터넷의 몫으로 덜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교사 자신을 위해서나 학생들을 위해서나 교사의 역할은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니까. 컴퓨터나 인터넷이 할 몫은 버리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몫을 맡아 나서야 한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지만, 어떤 정보를 찾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컴퓨터는 결코 사유하지 못한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답하지 못한다. 컴퓨터의 연산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지만, 왜 수학(數學)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바로 그것이 영원히 인간의 몫이고, 따라서 교사의 몫도 거기에서 찾아야 할 것 아닌가.

교사의 역할과 의식 변화는 학교 운영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공허한 주문이 되고 만다. 학원에서 교육문제 토론을 하는 도중, 재치있는 한 학생은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교육은 ‘백년 났는데도 그로인 획’을 뜻한다며 미온적 교육정책을 꼬집은 적이 있다. 인간을 ‘인력’으로 보는 낡은 교육의 틀을 해체해야 한다. 학급당 학생수와 강의실의 크기를 줄이지 않고서 ‘인성교육’이나 ‘창의력 배양’을 말하는 것은 백년하청격이다. 문과·이과라는 기준으로 50명 단위로 편성된 교실은 어쨌거나 통제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끊임없이 긴장시키지 않고서는 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폭력이나 위협이 아니면 코미디를 하든가 방치해야 한다. 어느 경우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최근 교육개혁안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일선 교사들의 행정부담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시간에 쫓기는 교사들이 어떻게 창의적 수업을 준비하고 인간적 교육 분위기를 만들어내겠는가? 교사들을 ‘한가롭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과 대화할 수 있다.

아울러 학생들에게는 필수과목을 최소화하고, 선택과목을 대폭 늘려야 한다. 또 학생들이 선택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과·이과로 성급히 나누어 공부시키는 것도 문제거니와 지나치게 세분화된 과목도 문제이다. 분화된 과목들을 아우를 수 있는 과목을 개설하고 이를 강화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스며 있는 공장의 분업주의와 근대학문의 분과주의로 인한 폐단을 교정하는 일도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학생들은 논술과 독서토론 과목을 통해, 분리해서 공부하고 생각해왔던 인간과 자연, 과학과 문학을 건너지르고 통합하여 사고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이때 늘어나는 선택과목들과 교실을 대학원에서 배출한 석·박사학위 이수자들에게 맡겨 중등교육의 문제와 고등교육의 문제 일부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을 도모해봄직하다.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작은 교실, 여유있는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를 만드는 일, 곧 교실을 학생이나 교사가 가고 싶은 ‘장소’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교육개혁의 알맹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