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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김명환 金明煥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영문학.
새로운 연대를 위한 비평의 열정
정과리·방민호·고미숙·신승엽의 최근 평론집을 중심으로
평단에서 제각기 고유한 영역을 개척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가다듬어온 평론가들 여럿이 최근에 평론집을 묶어냈다. 이 글은 그중에서 정과리, 방민호, 고미숙, 신승엽, 네 사람의 평론집을 검토하고자 한다. 지난 90년대에는 문학평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문학정세의 어지러움에 끌려다니거나 오히려 일조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제 새로운 연대를 맞이하여 우리의 문학이 변화하는 현실에 합당한 응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비평이 자기 임무를 다하는 일이 필수적일 것이다.
여기서 검토하려는 비평가 중에서 정과리는 80년대에 이어 90년대에도 변함없이 꾸준한 활동을 통해 자기 세계를 확장해나간 평론가이며, 방민호는 등단 이래 90년대 후반기의 평론계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다. 고미숙과 신승엽은 한국문학 연구자로서 자신들의 학문적 연구와 오늘의 우리 문학에 대한 실천적·비평적 관심을 연결짓는 데 공을 들인 귀중한 사례이다. 마침 정과리는 10년을 넘겨 본격적인 문학평론집을 새로 낸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번 책이 첫 평론집인 까닭에 더더욱 비평의 당면과제에 대해 남달리 치열하고 신선한 문제의식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1. 문학의 위기에 대한 성찰
시장르에 집중하여 씌어진 정과리의 평론집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에 개진된 문학의 죽음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대 시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80년대 우리 시에 대한 정과리의 평가는 뒤에 다룰 고미숙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훨씬 극단적이며, 그 배후에 깔린 시대관·문학관은 매우 특이하다. 그는 머리말에서 90년대 시가 “문화산업의 양양한 침범 속에서 활황을 구가한 소설과 달리, 혹은 소설을 대신해서 문학에 닥친 죽음의 위기를 몽땅 홀몸으로 떠맡고 체현해야” 했고, “게다가 바로 전시대에 시가 누렸던 ‘권력’ 때문에 90년대 시가 겪은 몰락은 급전직하의 형세”였다고 말한다(6면). 그에게 있어서 80년대 시의 활기는 민중시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소비사회의 문화산업이 본격적으로 대중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벌어진 어떤 것이다. 거대소비사회와 ‘탈(脫)문자 문화’의 조합이 낳은 “집 없는 기호”들이 80년대 내내 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잠정적으로 문자에 기생해 육체적 생명을 확대시켰고, 그때 시는 그것들이 그것을 낡은 외투처럼 벗어버리게 될 때까지 아주 맞춤한 숙주”가 되었다(19면). 80년대 시에서 “똑같은 형태, 똑같은 내용의 말들이 표현만 바꾸어 지칠 줄 모르고 재생산”되었고, “질리는 법 없이 그것들에 열광하면서 끊임없이 시인을 갈아치우는 독자들”의 존재나 “시인은 세상을 발견하는 대신 규정하기를 즐기며, 독자는 시에서 무엇을 깨우치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채롭게 확인하기를 원하는 사회심리학적 현상”이 그 점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19〜20면). 80년대의 몇몇 베스트쎌러 시집 및 당대의 민중시에서 양산된 상투적 가락을 염두에 두고 이런 발언이 나온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이 거대소비문화의 숙주였다는 주장은 기발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소비사회의 ‘탈문자 문화’가 여건이 성숙할 때까지 시를 숙주로 삼았다는 논리는 어느 면 문학 위주의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영화예술의 경우 유신체제 이래 외적 규제 때문에 오랜 기간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력을 크게 제약당했다. 그러나 70년대 말 이래 소비문화 정착을 배경으로 영화나 텔레비전 영상물, 대중음악이나 공연물의 수요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 배후에는 일반적인 제3세계 국가들과 달리 한국이 고도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있으며, 80년대에 이미 여러가지 문화산업이 무시 못할 규모로 흥성했던 것이다.
정과리의 입장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으며, 결국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을 경시하는 시 중심의 협소한 관점이라고 비판당하기 십상이다. 한걸음 나아가 이러한 관점이 소비문화의 실질적 선도자인 상업주의 거대언론매체가 문학에 끼치는 막대한 폐해에 대해서는 정작 실천적 문제의식을 포기하는 패배주의로 갈 염려는 없는지 의문이 든다.
80년대 시의 번창이 사실은 시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제 90년대의 새로운 현실에서 시는 본질적인 위기에 처한다. 정과리는 이 평론집의 촛점이 “시의 몰락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가 죽음으로써 사는 방식, 즉 저의 본성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본성을 지켜가는 방식”(7면)이라고 말한다. 90년대 시가 겪는 위기는 “문학의 형질 변경을 강요받고 있다는 뜻에서의 위기”(6면)라는 것이다.
개성과 인권의 이름으로 획일화와 인종주의를 만연시킨 이 근대에서 시적 자아는 개인의 순수형이자, 동시에, 개인들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격리된 ‘저주받은’ 존재로서 태어난다. 그 저주받음은 천형이자, 동시에 천품이었다. 근대가 성장의 선을 순행하고 있을 때만 해도 문학의 상상적 자아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 담론으로서의 기능을 당차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의 힘이 바로 근대의 표상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다움, 자유, 모든 시민들의 권리, 개인의 윤리학, 돈 끼호떼적 편력과 크루소적 모험, 기타 등등. 문학은 근대의 내적 모순이었다. 중세에서의 예술의 기능이 성화였던 데 비해, 근대에서의 문학의 기능이 반성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반성, 다시 말해, 되비추는 기능은 동일자들에게 속한 것이어서, 언제나 ‘너’의 이름으로 ‘나’를 비춘다. (…) 반성의 치명적인 약점은 대상이 무너지면, 자신도 덩달아 무너진다는 데 있다. 독재정권이 사라지고 이념 대립이 와해되었을 때 당황한 것은 혁명가들만이 아니었다. (346〜47면)
여기서 개진되는 문학의 본성도 논란거리지만, 그보다 앞서서 이런 방식으로 문학에 위기가 닥친다면 그것은 굳이 80년대 말 이후 한국만이 아니라 정치적 격변을 겪은 사회 다수에 해당될 일이다. 그런데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이념 대립이 와해되면 문학이 혼란과 위기를 겪는다는 인과관계가 과연 간단히 성립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상식적으로 볼 때 90년대 시의 운명에 대한 저자의 굳건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시대관은 특정한 시기의 한국에만 적용될 듯한데, 실제의 서술은 거의 일반론이다. 저자가 외국문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외국의 사례는 설득력있게 제시되지 않고, 어느 정도 일반화할 수 있는 논의인지 불분명한 까닭에 그가 누누이 강조하는 위기의 위상에 대해 감을 잡기 어렵다.
전반적으로 『무덤 속의 마젤란』에서 언급되는 시작품들은 시를 읽고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론가 자신의 논리를 펴기 위한 도구나 소재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긴 글인 「죽음, 혹은 순수 텍스트로서의 시」의 경우, 기형도가 집착한 죽음과 소외의 어두운 세계를 곧장 죽음을 사는 시의 모습이라는 차원으로 뒤바꾸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지 궁금하다. 기형도 시로 인하여 탄생한 새로운 시적 공간이 “궁극적으로 자율성과 자족성(합목적성)이라는 문학의 고유한 자질이 붕괴되는 문학공간”(91면)이라는 판단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정과리가 비판하는) 남진우의 기형도론이 추상적인 논의를 펴기 이전에 구체적인 시작품의 문면을 꼼꼼히 읽어낸다는 점에서 시를 시로서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된다.1
그러나 중견평론가가 자신의 책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문학의 위기, 시의 죽음이라는 명제를 접하다보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진지한 작가나 좋은 문학이 생존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첨단문명의 이기인 컴퓨터와 그것을 이용한 문학활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저자가 좀더 균형잡힌 현실감각을 발휘한다면 문학에 대한 그의 강렬한 소명의식은 진정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정과리가 컴퓨터문학의 가능성을 논하면서, 한국의 통신망이 허용하는 신원 비공개가 통신망 내의 민주주의를 오히려 거스를 수 있음을 지적할 때의 상식에 근거하면서도 명석한 논리를 더욱 기대하고 싶다.2
2. 상업주의의 극복과 리얼리즘
새로 나온 작품이나 변화하는 문학정세를 제때 짚어주는 시의성이 부족할 때 비평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시의적절하게 작품의 옥석을 가리고 문학의 향방을 가늠하려는 노력은 상업주의가 횡행하는 혼탁한 시류에서 진지한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런 점에서 방민호(方珉昊)는 모범적이고 부지런한 평론가이다. 첫 평론집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창작과비평사 2000)에 묶인 글들이 보여주듯이 그는 열심히 우리 문학의 오늘에 참여해왔다. 장정일에 대한 자상한 관심을 바탕으로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한 글이라든가, 활발한 창작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던 최인석에 대한 평론 등을 뚜렷한 성과로 들 수 있다.
“상업 성공에의 욕망이 내면화된 지 오래여서 그것이 해당 작가의 문학 행위 전반에 걸쳐 검열권을 행사하는 것이 현금의 문학적 상황”(123면)이라는 구절에서처럼 방민호는 상업주의의 위협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의 작품 평가는 때로 불만스럽다. 상업주의의 핵심이 작품의 질적 차이를 가벼이 여기는 까닭에 그 폐단을 경계하는 평론은 작품의 공과에 대해 세심하고 정확해야 하는데, 방민호의 비평은 동일한 작가의 작품들 사이에 존재하는 크고작은 차이들을 종종 무시한다. 이런 허점은 은희경, 신경숙, 공지영을 다룬 「성장, 죽음, 사랑, 그리고 통속의 경계」에서 두드러진다.
신경숙의 문학적 성과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방민호는 이 소설가의 작품 중 뛰어난 성과와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약점을 드러낸다. 물론 성공작이든 태작이든 양자 모두에 흐르는 공통점을 찾아 작가의 개성을 밝혀내는 것은 가능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깊은 슬픔』과 『외딴방』이라는 두 장편의 성과에 관한 전체적 평가를 생략한 채, 각각의 등장인물인 은서와 희재 언니의 죽음이 모두 통속적이며 작가의 계산된 결말이라고 본다. 짐작컨대 ‘문학의 미학주의화’라는 자신의 개념 규정에 미리 얽매여 구체적인 작품을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공지영·은희경의 개별 작품의 성취를 변별하는 대목에 대해서도 반론을 달 수 있으니, 한가지 예로 방민호는 은희경의 「멍」을 좋은 작품으로 보지만 이 경우는 고미숙의 매서운 비판이 더 적중하며, 이 작품은 유사한 상황을 다룬 (신승엽이 자세히 분석한) 김인숙의 「당신」보다 분명히 떨어지는 소설이다.
방민호는 리얼리즘 개념의 유효성에 대한 신념을 가진 평론가에 속한다. 김소진 문학을 높이 평가하는 가운데 “개인주의나 미학주의, 상업주의 등에 의해 부정된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구현했다”(207면)는 발언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리얼리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리얼리즘론의 비판적 재인식」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작품 읽기를 살펴볼 때 좀더 정리되어야 할 쟁점들이 눈에 띈다.
먼저 김소진론을 보자. 방민호는 김소진이 흔히 소박하고 따뜻한 민중의 삶을 펼쳐 보인 작가로 이해되지만 실상 그의 “강렬한 역사의식·현실의식”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김소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위해서 타당하고 긴요한 발언이다. 그러나 김소진은 (그의 아까운 요절을 생각할 때 더더욱) 가능성이 컸던 작가이지만, 냉정히 말할 때 그의 소설적 성과가 깊이있는 역사의식에 근거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작품에 구현된 김소진의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은 방민호 자신이 최인석 문학의 약점으로 꼬집었던 도덕적 당위성에 대한 강한 집념에 의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운동권 출신의 훼절이 소재가 되는 작품들의 경우, 해당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도덕적 지조라는 기준이 승하여 평면적인 현실인식으로 종종 귀결되는 것이다. 역사의 냉엄한 흐름을 배경으로 특정한 인물이 펼치는 생각과 행동을 작가의 주관적인 윤리적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금기사항이다. 방민호는 최인석을 호평하는 가운데 바로 그런 위험성을 적절하게 경계했던 것인데, 김소진 평가에서도 동일한 관점을 일관되게 적용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방민호는 공지영을 “지난 시대의 이상주의의 수혜자”(124면)로 보면서 그것이 통속의 위험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다른 한편 완전히 통속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고 평가한다. 즉 공지영의 작품에는 “이미 다른 작가들이 외면해버린 시대와 사회의 문제”가 담겨 있다고 보는 반면, 은희경·신경숙은 (시대와 결코 무관하지는 않지만) “채 사상으로 성숙하지 못한 태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126면). 요약하자면 공지영에 비할 때 나머지 두 여성작가에게는 사상이 부족하다는, 듣기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비판이다. 이 문맥에서 ‘사상’이 과연 어떤 내용이며, 그의 리얼리즘에서 정확히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 것인지도 더 해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낡은 소재주의의 혐의가 당장 걸릴 것이다.
「리얼리즘론의 비판적 재인식」에 개진된 리얼리즘론은 결과적으로 리얼리즘의 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3 신경숙의 『외딴방』이 “리얼리즘의 승리라기보다는 내향적 개인주의와 미학적 형식주의가 교직”되어 이루어진 예외적 성과이고, “오히려 리얼리즘의 우월성에 관한 믿음을 상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90면) 것이라는 주장은 반대되는 입장을 설복할 논거가 부족하다. 또 진정한 평가의 척도가 “작품이 현실 전체를 얼마나 전체적으로 통찰했는가에 있어서는 안되며” 현실에서 “비의적인 무엇을 얼마나 깊이있게 찾아냈고 제시했는가”에 있다(99면)는 주장에서, (루카치가 강조한) 자연주의가 목표하는 총체성과 다른 리얼리즘의 총체성은 진지한 고려의 대상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구나 ‘비의적인 무엇’이라는 구절에 이르면 인상주의 비평의 냄새마저 난다. 그렇기 때문에 “리얼리즘을 방법적 자유 속에서 획득하는 것, 이것은 작가의 창조성을 옹호하는 일이자 오늘의 리얼리즘을 가능케 하는 일”(101면)이라는 결론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다.
3. 여성론과 근대극복의 열정
고미숙(高美淑)의 『비평기계』(소명출판 2000)에 실린 글들은 전체적으로 날렵하다. 문학계 일각의 빗나간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에서부터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 관한 평론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한 관찰과 분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문열, 이인화, 김탁환 등의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과 기만적인 문학논의에 대한 쾌도난마의 비판은 가히 속시원하다고 말해 좋을 것이다. 또 여성론과 근대극복 등 굵직한 문제들을 포함한 오늘의 문학적 쟁점을 다루는 가운데 “사설시조와 잡가에 빠져 있던” 한국문학 연구자다운 시각이 곳곳에서 신선한 지적 자극을 제공한다.
고미숙은 여성론적 관점에서 성애(sexuality)의 문제를 추구하는 집요함을 보인다. 그것은 그 자신이 보기에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으로 성애의 문제를 도외시해온 민족문학, 민중문학을 포함한 모든 근대문학의 결함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까이로는 90년대 이전의 문학이 전반적으로 성애의 문제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고, 새로운 담론과 쟁점들이 형성되는 가운데 바야흐로 이 주제는 하나의 유행이 되기까지 했다. 그만큼 우리 문학사 연구에서 다져진 소양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시대적 조건을 살피며 성애의 문제를 탐구하는 일은 의의가 크다.
그런데 세부 논의에 들어가면 성애가 인간 삶에서 차지하는 풍부하고 복잡한 관계를 본의아니게 단순화할 위험이 좀 느껴진다. 『춘향전』이나 『변강쇠전』에 그려진 꾸밈없는 성의 세계나 사설시조에 드러난 여성의 강렬한 성적 욕망을 거론하는 일 자체는 의미있는 논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성애의 표현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이 특정 시대의 사회적 관계의 총화로서 인간 삶의 실상을 어떻게 집약해서 보여주느냐가 예술적 성취 여부의 판별에 결정적이다. 고미숙의 어법을 빌리자면, 남녀관계의 문학적 탐구에 담긴 ‘다양한 선분들과 탈주선들, 상이한 지층들’을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삶의 참모습에 육박하려는 강렬한 지향이 존재하는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성애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한 세대 이전의 작품이지만 박완서의 처녀작 『나목』에서 주인공이 미군장교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려다 실패하는 대목의 박진감은 전면적인 묘사는 없다 하더라도 성애의 깊은 진실을 외면하거나 은폐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고미숙 평론은 성적 억압이 더 심해진 근대 이후에 문학이 성애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명제를 뒷받침해줄, 성애의 형상화와 작품의 예술적 성취 사이의 간단치 않은 관계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더 보강되어야 할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 한가지는, 성애의 문제를 중심으로 공지영, 은희경 등 현역 여성작가들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공선옥이 꾸준히 다루어온 ‘술 먹고 담배 피는 어미들’의 형상이 논의에 도입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론과 직결된 몇몇 글에서 공선옥에 대한 본격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은 뜻밖이다. 특히 피억압집단으로서 여성과 민중의 성애에 대한 문학적 탐구의 필요성이 역설되고 있기에 앞으로 더 깊이있는 논의가 기대된다.
구체적인 작품 분석과 연관하여 불만스러운 점은 고미숙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과정에서 해당 작가의 태작들을 주로 취급하는 경향이다. 은희경의 최근 소설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에서 「멍」이나 「인 마이 라이프」를 비판하지만, 실상 이 단편들은 수록된 작품집에서 완성도가 처지는 편이다. 근대 이후 성적인 억압이 가중되었다는 지론을 생각하면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을 택하는 편이 성애나 가족관계 등에 관한 논의를 훨씬 풍부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공지영의 경우도 고미숙은 『봉순이 언니』를 비판하면서 작품 내용이 “‘그래도 지금은 살만하다’고 역설하는 멜로적 흐름과 긴밀하게 접속한다”(145면)고 평가한다. 이 작품이 “여성주의의 어떤 문제의식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144면)고 할 만한 실패작임은 분명하지만, 자기연민의 멜로물로 단정짓는 것은 지나친 폄하가 아닐까 한다. 문제의 소재는 민중의 생활상에 대한 이해 부족이고,4 그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주인공 봉순이 언니가 민중이자 여성으로서 가진 성애에 대한 상상력의 무능인 것이다.
한층 이론적인 문제로서 근대와 근대성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있다. 저자는 ‘근대의 완성과 극복’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설정하는 구도 자체가 이미 근대성에 포획된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역사의 외상을 입지 않은 민족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지도 미지수고, 완성된 근대라는 표준적 코스가 과연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미완의 근대’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이미 체제와 개개인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근대적 가치와 규범들을─전근대적인 것들과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채─근원적으로 회의하면서, 탈근대를 향한 출구들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지. (244면)
여기서 문제는 ‘미완의 근대’ ‘완성된 근대’ 등의 표현이 상대방의 입장을 단순화한다는 점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미완의 근대를 완성하는 일이 유일무이한 당면과제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중적 과제에 대한 백낙청·최원식의 평문을 확인해보면 ‘근대의 완성’이라는 표현은 없으며, 대신에 ‘근대성의 쟁취’ ‘근대에의 적응’이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이 사용된다. 이 점을 세심하게 분별하지 않으면 비판의 대상을 너무 손쉬운 표적으로 바꾸게 되며, “전근대와 탈근대의 횡단”이라는 특유의 문제의식이 내실을 얻기도 힘들 듯하다.
1980년대 문학에 대해 고미숙은 「90년대 시의 지형도」에서 80년대가 “푸꼬식으로 말하면, 말(시)과 사물(세계) 사이에 ‘르네상스적’ 일체감이 가능했던 시절”이라고 말하면서, 이는 이른바 ‘혁명적 저항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황지우나 기형도의 시세계에서도 “시적 언어와 세계 사이에는 긴밀한(또는 은밀한) 상호침투가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본다(184면). 그러나 이는 저항시에 대해서든 다른 경향의 시에 대해서든 지나친 평가이다. 80년대 ‘혁명적 저항시’만 두고 보더라도 타성에 젖은 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 민족문학진영 안팎에서 있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말과 사물의 일체감이 항상 달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가능성이 풍부했던 시대라는 의미로 새겨야 옳겠지만, 그런 뜻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80년대 이후가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처럼 다소 거친 논리전개는 평론집 안에서 때로 혼란을 낳는다. 앞의 글에서 저자는 백무산, 박노해, 안도현, 함민복, 최영미, 김혜순, 김정란 등 90년대 시를 살핀 후, “소재나 경향의 차이란 것은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시가 이토록 고분고분하고 얌전해졌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시의 뚜렷한 징후”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미적 소극성’이 시의 운명을 어둡게 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197면). 이 글의 앞부분에서 백무산에게 (박노해와 비교해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긴 하지만, 이처럼 단정적인 진술이 백무산 시집 『인간의 시간』의 탁월한 성취를 논한 「전복과 생성의 시적 도정」과 어떻게 양립하는지 의아하다. 표현의 과감함이 뜻하지 않게 논리의 모순을 가져오는 사례인 듯하다.
4. 민족문학론 극복에 따르는 쟁점들
신승엽의 평론집 『민족문학을 넘어서』(소명출판 2000)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은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이다. 임화의 이식문학론에 대한 그간의 통념을 불식하는 명쾌한 해명은 사실 나같은 외국문학도에게는 부러울 뿐인 성과이다. 그외에도 차분한 논리로 전개되는 문학사 관련 논문들과 다양한 작품론들은 우리 문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또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이라는 상호연관된 주제는 이 책을 관통하는 화두이다.
개별 작가와 작품 논의의 치밀함에는 나름의 탄탄한 리얼리즘관이 뒷받침되고 있다. 김하기의 첫 소설집 『완전한 만남』에 대한 평가에서 낭만화와 상징화를 경계하면서 미전향 장기수 외에도 전향한 장기수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담긴 추상적 민족주의의 관념적 이분법이 작품을 어떻게 훼손하는지에 대해 분석한다. 또 민중의 위엄을 그려낸 현기영 소설의 시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엄정한 서사적 분석을 요구한다거나, 이호철 연작소설집 『남녘 사람 북녁 사람』의 생생한 인물창조를 상찬하면서도 한국전쟁기 남북체제를 비교하는 화자의 시각에 개재된 문제점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이 모두는 우리 시대에 합당한 리얼리즘론의 내용을 채우는 일관되고 소중한 노력이다.
이처럼 나름의 확고한 리얼리즘관을 바탕으로 신승엽은 배수아 소설을 적극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민족문학의 틀을 넘어서려고 한다. 비록 여러가지 비판이 가해졌지만, 나는 배수아의 작품에 대한 그의 자세한 분석은 온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신승엽이 자신의 비평적 실천에 담긴 리얼리즘의 문제의식을 좀더 밀고 나간다면, 다른 작가들과 달리 ‘개인의 단자화’를 냉철하게 그렸다는 배수아에 대해 더 구체적인 동시에 유보적인 평가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가 분석하듯이 배수아 작품의 정조는 “철저하게 절망적·허무주의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30년대의 이상(李箱)이나 50년대의 손창섭에서 발견되는 허무보다 더 나아간 것으로 보면서, “다른 삶과의 유대를 온통 상실한 데서 오는, 삶 그 자체에서 오는 허무감, 권태이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편만해진 이 시대에 와서야”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322면)은 지나치다. 바로 신승엽 자신이 비판하듯이 배수아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야성적 힘에 대한 맹목적 갈구는 위험한 것이며, 이상이나 손창섭에게 남아 있다고 그가 주장한 ‘지적 포즈로서의 허무’라고 볼 소지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배수아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남김없이 해부하는 리얼리즘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저자가 지적하듯이 『랩소디 인 블루』의 가난한 청년 신이의 삶에 대해 더 구체적이고 진전된 탐구는 아직 없으며, 그런 탐구야말로 미래의 과제로 신승엽이 내세운 ‘민중현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천착’이 될 것이다. 또 미호가 작품 마지막에 신이에 대해 품는 희망은 허무의 철저함을 마지막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 동시에, 그렇게 철두철미 허무로 가기 힘든 것이 우리의 삶임을 환기하기도 한다.
신승엽은 배수아처럼 “민족이 더이상 주체 형성의 중요 참조틀이 되지 못하는 문학을 들어 민족문학 개념의 현실적합성에 문제를 제기하는”(320면)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이미 어느정도 구축된 독자적인 소설세계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는 장편문학을 시도할 때, 신승엽이 기대하듯이 민중의 현실을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면서 민중이 처한 현실의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인 민족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부각되리라고 본다.
이 점과 관련하여 평론집에 실리지 않은 최근 평문인 「잃어버린 시간과 자아를 찾아서」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5 90년대에 나온 자전적 성장소설을 분석한 이 글에서 신승엽은 박정요의 장편소설 『어른도 길을 잃는다』를 현기영, 김형경, 신경숙의 작품들과 함께 다룬다. 평단과 독자로부터 크게 주목받지 못한 박정요의 소설을 비중있게 거론한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며, 평론가로서 가진 안목과 성실성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행남이가 결말부에 얻게 되는 인식과 통찰이 작가의 현재적 시각이 개입한 작위적인 것이라는 비판은 설득력이 없는 듯하다. 아버지가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불행한 삶을 마치는 충격적인 비극을 겪은 주인공이 작위적인 ‘허무주의적’ 태도를 보인다거나, 그런 태도를 상경 직전에 극복하는 것이 현실성을 잃었다는 판단은 오독이다. 작품에는 결말부의 주인공을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 충분하다. 우선 사춘기에 도달한 주인공이 남학생이 보낸 연애편지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남의 돈과 물건을 훔치는 행동 등이 그녀의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 고향의 “들을 지키고 가꾸는 주인”으로 자신을 대접한 노인에 대한 외경심과 자의식, 어린 소녀로서 벅찬 주변현실에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조카딸 나대의 탄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한 시대를 그리면서도 그것을 단지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과 깊이 이어진 살아있는 역사로 받아들이게 하는 만만찮은 성과를 떠받치고 있다. 요컨대 신승엽은 “포스트모던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잃어버린 시간과 자아를 찾아서」) 근대의 압도성을 강조하면서 민족문학의 문제의식을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을 견지하려는 나머지 구체적인 작품 읽기에서 무리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5. 마무리를 대신하여
네 사람의 평론집을 읽고 나서 우리 문학의 창조력을 위해 비평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작업은 역시 리얼리즘론의 갱신이라는 생각이다. 리얼리즘론의 한 차원 높은 도약이 있어야만 민족문학론은 새시대에 부응할 내실을 얻을 수 있다. 신승엽의 경우 민족문학을 포기하는 입장을 확고히 세운 듯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의 평론에 일관되게 흐르는 리얼리즘의 문제의식을 더 밀고 나간다면 민족문학론과 한층 폭넓은 접점을 마련하게 되리라 본다. 방민호는 리얼리즘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상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민족문학은 거론하지 않으며 민족문학의 구호가 시효를 다했다는 견해에 기울어 있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민족문학론의 당면과제에 대한 소홀함이 그의 리얼리즘론의 취약점과 동요에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고미숙은 성애가 “계급이나 지위로 환원되지 않는 풍부한 성층들을 환기해내는바, 이 저변을 탐사하지 않고서는”(213면) 문학의 빈곤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리얼리즘이나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민족주의 담론의 성억압적 측면을 주로 공격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성애의 중요성은 그 어떤 설익은 관념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리얼리즘의 본령에 들어맞는다. 단, 고미숙이 근대인들을 묶어놓은 “국가·전통·가족·지연 등 온갖 종류의 코드들을 거침없이 분쇄”(214면)할 ‘욕망의 혁명적 생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리얼리즘은 그러한 욕망의 새로움과 가능성을 깊이 의식하되 인간현실의 엄중함을 잊지 않으며, ‘유목민’이나 ‘탈주’ 같은 용어가 조장할 가능성이 있는 비현실성에 대해 가장 민감하고 예리한 것이다.
정과리는 리얼리즘이나 민족문학에 대해 확고한 비판적 입장을 지닌 평론가이다. 상당한 과장과 이론적 허점이 있다고 믿지만, 그가 강조하는 문학의 위기가 아예 근거없는 빈소리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좀 엉뚱한 비약일지 모르지만, 만약 민족문학론의 전망대로 분단체제 극복의 과정에서 우리 문학이 북한을 비롯하여 해외 각지의 한민족이 보유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제대로 소화한다면 뜻밖에도 문학이 ‘죽음’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과 활력을 찾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 과정을 살아가는 (더불어 그 과정에 기여하는) 시적 자아가 ‘근대의 획일화와 인종주의’의 저주를 받은 존재가 아닌, 미처 상상하지 못한 ‘탈근대적인’ 아름다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미리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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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진우 「숲으로 된 푸른 성벽」, 『숲으로 된 성벽』, 문학동네 1999.↩
- 정과리 『문명의 배꼽』, 문학과지성사 1998, 212면.↩
- 이 글에 대한 나의 비판으로 「사실성, 민중성, 리얼리즘」, 『작가』 1998년 가을호, 25〜29면 참조.↩
- 4) 『봉순이 언니』에서 봉순이 언니 다음으로 화자의 집에 식모로 온 미경이 언니는 교복만 있으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교복을 훔쳐 고향집으로 달아나는 일을 저질러 쫓겨난다. 이후 공장에 들어간 그녀가 울면서 전화하여 공장일이 너무 힘드니 다시 식모로 오고 싶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수기를 포함한 당대 여성노동자들의 육성을 실제로 살펴보면 대부분 식모살이보다는 힘들어도 공장생활을 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화자의 집이 남달리 인정이 있어서 미경이 언니가 그렇게 말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70년대의 가난한 처녀에게 ‘여공’과 ‘식모’라는 일자리가 각각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작가의 깊은 이해가 보이지 않음은 숨기기 어렵다.↩
- 신승엽 「잃어버린 시간과 자아를 찾아서」, 『문학동네』 200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