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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유성호 柳成浩

문학평론가. 서남대 국문과 교수.

 

 

주객분리와 맞서는 젊은 시인들의 미학

박형준·이윤학·이정록·장철문의 근작을 중심으로

 

 

1. 생태학적 상상력과 탈(脫)자연적 상상력

 

일찍이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낡은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예민하게 경계한 시인은 기형도였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나는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자연을 등지고 문명의 한복판인 도심의 거리를 헤매는 자의 남루함을 고백했다. 그만큼 그의 시는, 상상력의 수원(水源)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체험적 긍정과 의식적 경계의 접점에서 생성되고 씌어지고 완성되었다. 특히 그의 「물 속의 사막」은 문명의 중심지에 서 있는 주체가 밤빗물이 밀어붙이는 추억의 공간으로 잠입하여, 자신의 혈류를 타고 흐르는 유년과 자연의 숨결을 ‘실체’가 아닌 ‘흔적’으로 느끼고 있는 풍경을 실물감각적 아이러니를 통해 드러낸 명편이다. 한편으로 근대문명의 제도적 세례를 줄곧 받은 도회의 아들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락없는 자연의 적자(嫡子)이기도 했던 자신의 이중적 정체성을 그는 혼돈과 부정의 역동성으로 잘 보여주었다.

두루 알다시피,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더없이 중요한 시적 상상력의 원천이자 “비유의 아버지”(정현종 「초록 기쁨」)이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최근 우리 시에는 자연에 관련하여 상반된 시적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하나가 이른바 생태학적 상상력의 평균적 범속화에 따른 일종의 ‘자연 과잉’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연을 자신의 체험적 영역에서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자연 배제’의 미적 전략에서 나타난다. 자연의 비유를 미학적으로 경계하면서도 궁극적인 긍정을 부여했던 기형도적인 긴장과 매개의 시학은 이같은 양편향의 분위기 속에서 분리되고 사물화되고 느슨해진다.

먼저 최근 우리 문학의 대안적 사유양식으로 혹은 이 시대의 첨예한 윤리적·실천적 과제로 부상하여 일종의 주류 미학적 권역을 형성한 생태학적 상상력은, 뛰어난 형상과 안목으로 생명시학의 정수를 열어 보이는 깊이있는 시편들을 축적해왔다. 그런데 최근 그것은 주류화를 넘어서 무반성적 소재주의를 양산하기 시작한 감이 없지 않은데, 풍요로운 외연에 비해서 질적으로 평준화된 범용한 시편들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생태학적 상상력은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몰고온 인간 안팎의 황폐함을 극복하고, 생명성을 복원하려는 탈근대적 기획의 상관물로 대안공간인 자연을 적극 부활시켰다. 그것은 이를테면, 문명비판을 통한 환경론적 경향, 자연 스스로 말을 걸고 생애를 사는 물활론의 경향, 자연을 시원(始原)으로 보고 거기에 신성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경향 등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목소리는 일종의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랄까, 공리성과 심미성을 넘어서는 신성의 화음으로 자연에 유토피아적 속성을 부여하였다. 그럼으로써 회의하고 질문하는 정신 대신 기투(企投)와 몰입의 양상이 전면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최근 나타나는 관성화된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속화가 일종의 주객분리적 관점을 낳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작품들 속에서 자연은 심미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아니면 물아일체라는 양상으로 인간과 조화되는데, ‘대상화’는 물론 ‘물아일체’를 통한 주체의 해소조차 ‘주객분리’를 인준하는 시각에서 나온 하나의 반어적 양상이다.

또한 생태학적 상상력의 반대편에서 자연은 시의 표면에서 적극 배제되면서 철저히 배면으로 숨고 탈의미화된다. 물론 도시적 감각이라는 것이 자연을 체험적으로 등지면서 이루어진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시가 물질적 근거를 지닌 자연을 생략(은폐)하고 그 안에서 대안적 가치를 찾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혹여 자연의 일부분인 동식물이 형상화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상의 「꽃나무」나 김춘수의 「꽃」이 ‘꽃(자연)’에 관한 시가 아니듯이, 그들의 시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은 생태적 환경도 신성의 거소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라고 자연의 체험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미적 전략의 선차성 때문에 체험을 통한 세계와 자아의 복합적 인식에 이르지 못하고, 시의 표면에 가공된 이미지들을 축적해가는 환유지향적 경향을 짙게 드러낼 뿐이다. 이렇듯 일정하게 자연과 적대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전개되는 시 경향은 이른바 동일성의 시학을 넘어서려는 미학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유토피아적 에너지의 급격하고도 철저한 고갈로 인해 우리 시단에서의 입법적 권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맑은 시냇물이나 밤하늘의 빛나는 별보다는, 희뿌연 분말이 되어버린 도회의 탁한 공기와 네온싸인에 더 체험적 직접성을 가지는 도시 세대들에게서 나타나는 이같은 탈(脫)자연의 경향 역시 자본주의시대를 사는 주체들의 주객분리의 또하나의 극적인 양상일 것이다.

자연을 둘러싼 이같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편향 사이에서, 탐닉과 몰입이 아닌, 그렇다고 배제와 탈의미화도 아닌, 다만 자연을 바라봄(관찰)으로써 주체의 내면과 대상의 접점을 갈등적으로 모색하는 시인들의 작업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젊은 시인들에게 ‘주류’로 나타나지 않고 연면한 ‘저류(底流)’ 혹은 ‘복류(伏流)’로 존재하는 이같은 경향은, 전통적인 시적 보고였던 자연을 시의 육체로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내면의 심층으로 빨아들이는 이중적 작업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제의 폭과 깊이가 저마다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동일화의 대상도 아니고, 분석적 묘사를 필요로 하는 사물도 아니고, 신성화된 초월적 공간도 아닌 점에서 공통점을 띤다. 그것은 내면 속에서 재구성된 묘사를 거쳐 재생된 살아있는 자연이자 주체의 기억 속에 스며 있는 체험적인 자연이다.

이러한 균형감각으로 주체와 대상의 복합적 연관을 묘사하고 투시하는 시인들 중 이 글에서는 박형준, 이윤학, 이정록, 장철문을 다룬다. 물론 이들의 시가 이러한 경향의 전범이나 완성형이라는 판단보다는, 가장 활력있는 창작활동으로 우리 시대의 가능성의 한 지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물을 것도 없이, 이들을 선택한 이면에는 최종적 가치평가보다는,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핵심적 과제와 그 긍정적 징후를 드러내려는 비평적 의도가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람과 탈자연적 상상력의 전략적 극대화라는 양극 사이에서 시를 쓰는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유년시절에(지금까지도) 자연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다는 것인데, 그들의 이같은 자연의 재의미화 작업은 그래서 주체를 탐(探/貪)하면서도 대상을 섬세하게 재현하는, 곧 주객분리와 맞서는 상상력의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사물화에 맞서는 우리 시의 항체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2. ‘기억’ 속에서 통합되는 시선(주체)과 사물(객체)─박형준·이윤학

 

이처럼 내면과 대상의 상호조응을 전제로 하는 이들의 시에서 바라봄(관찰/응시)의 대상은 결국 바라보는 사람을 닮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선에는 주객을 분리하는 ‘원근법’에 기초한 대상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바라봄’은 공간적 의미이고 시각의 우위성을 드러내는 행위양식이지만,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들어가는 ‘추억’의 힘이 되면서 시간적 행위가 되기도 한다. 이때 기억을 통해 재생되는 사물들은 한결같이 ‘바라보는’ 주체를 닮은 표정으로 인화되어 나오고, 거기서 자연은 생태적·물질적 모습보다는 주체의 체험에 의해 매개적인 표정과 형상을 얻는다. 시가 씌어지는 과정은, ‘나’가 먼저이고 ‘사물’의 풍경이 그것을 닮기도 하고, ‘사물’이 먼저 있어 ‘나’가 거기에 투영되기도 한다. 순서는 아무래도 좋다. 이처럼 기억의 끝없는 반추를 통해 우리 시대의 빼어난 비극적 음화를 그려내는 시인들이 박형준과 이윤학이다.

박형준(朴瑩浚)은 풍경의 묘사 속에 등가의 몫으로 담긴 내면의 물질성을 집요하고도 환상적으로 그려내는 시인이다. 그 물질성은 유년의 체험과 현재의 폐허 사이를 매개하는 접점에서 피워올려지는 기억의 육체성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유년적 경험의 틈입을 최대한 허용하면서, ‘기억’ 자체에 대한 자의식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의 시는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이자 그것을 풀어놓는 선착장이다.

 

우물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물 위에 코스모스가 한가롭게 떠 있다.

우물은 평지와 높이가 같다.

빠져죽기에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다만, 실족이 어울린다.

 

예전엔 이곳이 금광으로 내려가는 입구였다.

지금은 갈대가 사방을 조여오고

채굴은 끝나버렸다, 이미 수장된 지 오래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재빨리 우물에 침을 뱉고 떠난다.

─「금광」(『실천문학』 1999년 겨울호) 부분

 

폐광이 된 지점에 있는 죽은 우물, 그것은 “코스모스가 한가롭게 떠 있”는 풍경과는 대조되는 죽음과 마모 그리고 폐허의 현장이다. “모두가 죽지 않는 유년의 王國”(『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사 1994, 뒤표지 글)을 꿈꾸는, 그리고 “적어도 모든 상상은 기억의 변용에 불과하다. (…) 또한 사물과 첫 대면이 이루어지는 어린시절에 이미 시의 모습이 존재했다고 믿는”(「후기」,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7) 박형준의 시에서 이러한 죽음(또는 소멸)의 이미지는 언제나 지배적인 자질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이러한 소멸의 모티프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와 대조하여 과거를 미화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의 힘을 통해 근대적 시간의 잔혹함과 맞서는 데 있다. 누추하고 남루한 현재를 과거와 과장되게 대비시키면서 유년을 미화하는 시인들과 그의 시가 근본적으로 갈리는 지점이 여기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시간은 선형적으로 펼쳐지는 근대적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간은 유년적 기억의 현재화를 통해 현재를 괄호쳐버리고, 어느새 늙음과 죽음에 가 닿는다. 그래서 “절정에 도달한 순간 재빨리 늙어버”(「얘야, 밖에 눈이 온단다」, 『실천문학』 1999년 겨울호)리는 것이 그의 몸에 밴 비분절적 시간이다. 유년의 기억이 현재라는 거울에 역상으로 비춰진 것이 노년의 기억(?)인 셈인데, 박형준의 시에 나타나는 온갖 늙음 혹은 죽음의 형상들은 그의 이러한 반(탈)근대적 시간의식을 드러내주는 가장 확실하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일 것이다.

그래서 기억과 현재의 폐허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거니는(날렵하게 질주하거나 가볍게 유영하지 않는다) 그의 시의 표정은,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는 열망”(「후기」,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의 반영이기도 하겠지만, 시간을 풍부하게 여러번 삶으로써 주체를 상상 속에서 소멸해가는 과정의 반영이기도 하다. 결국 소멸이란 완성이 없는, 끝없는 과정이 아닌가(그래서 그에게 성년은 끝없이 유예된다). 시인은 그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행복한 일”(「창문」,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이라고 반어적으로 쓴다. “家具란 추억의 힘”이라고 등단작(「家具의 힘」)에 썼을 때부터, 그의 시는 기억 속에서 자신의 현재적 삶을 ‘바라보’면서 ‘행복’해하고는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자연의 체험은 그의 내면을 닮아 퇴색하고 결핍되고 침잠되어 있다. 아니 그 결핍이 그의 내면의 어둠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박형준은 현재에나 이곳에나 온통 부재한 것들만 시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싸안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억의 주체이자 대상이고, 동시적으로 한몸을 이룬 육체이다. 그가 “허름한 가슴의 세간을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다 떠나 보내련다”(「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고 노래할 때도, 그것은 바로 ‘가슴’과 ‘강물’ 곧 시선과 대상의 비분리상태를 욕망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윤학(李允學)의 시 역시 부재와 다름없는 현실과 바닥 없는 유년의 기억들 속에서 생성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유년의 비밀스런 둔덕과 둑방, 무덤 등은 그의 시간을 이끈 우연한 계기들에 대한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다. 인과율이라는 것이 철저한 근대적 산물이라면, 그는 오히려 우연한 계기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철저히 천착하는 일종의 탈근대적 작업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상처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것을 내면화하고 타자화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원인과 자국을 끝없이 바라볼 수 있는 상태에서만 치유가 가능한 것이라면, 이윤학은 상처의 치유를 망각이 아니라 혹독한 기억과 그 기억의 피부화(皮膚化) 속에서 치러낸다.

 

뱃속을 가득 채운 씨앗들이

너의 전철을 밟더라도

너의 고통을 답습하더라도

 

너는 평생 동안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먼 곳에

통증을 모셔놓고 살았으니

─「해바라기」(『시와시학』 2000년 봄호) 부분

 

일생을 자신의 몸속에 ‘고통(통증)’을 모셔놓고 산 해바라기는 이 시의 시적 대상이자 곧 시적 주체이다. 더불어 그 ‘고통’은 기억이자 곧 현재적 삶의 징후이다. ‘기억(과거)’과 ‘징후(현재의 흔적)’는 그래서 그 사이에 심연을 형성하지 않고 언어의 교량을 통해 한 육체 안에서 소통한다. 이처럼 그의 시에 나타나는 온갖 폐허의 목록들은 죽음의 공포 자체를 묵시록적으로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과 현재의 심연을 메우는 가장 구체적인 시적 대상이자 주체의 내면인 것이다.

이른바 ‘자연의 쇄말주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정도의 마이크로니즘은 그의 중요한 시적 특성인데, 그의 시는 그렇게 작은 것에서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산·비약을 감행하지 않는다. 다만 내면과 사물 사이의 접면(interface)에서 그 사물의 기억을 육체화하고 거기에 자신의 현재적 시간을 갖다 매달 뿐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회귀의 미학도 아니고 위안이나 향수의 미학도 아닌, “견딤의 미학”(박형준)이 되는 것이다. 이윤학의 시가 폐허를 노래하면서도 과장된 자학에까지 이르지 않는 까닭 또한 바로 이 ‘견딤’의 체질화 그리고 그것의 숙명적 승인에서 나온다. 그래서 “追憶은, 廢墟를 건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한낮의 풀밭」,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문학과지성사 1995).

이렇듯 폐허를 건너는 시적 기억을 통해 현실의 산문성과 대결하는 이윤학의 시는, 비애와 환멸 사이의 긴장에서, 그리고 유년의 상실감(유년 역시 그에겐 폐허였다)과 기억을 통한 끊임없는 폐허의 재생산 사이에서, “추억을 파먹는 데 꼬박/천년이 흘렀다”(「경주」,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학과지성사 2000)는 고백처럼, 시간이 공간화되면서 구축된 시의 집(무덤)이다. 그러나 ‘추억’ 자체는 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피가 되고 눈길이 되고 몸짓이 되고 이름 없는 것이 되어 우리 자신과 더이상 구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릴케), 추억은 심연과 혼돈을 건너며 시가 된다. 이윤학에게는 ‘추억’이 바로 그러한 시적 원리이다.

삶의 폐허됨을 세밀 묘사하는 방법을 취하면서, 삶의 풍부한 구체와 멀어져 내면의 유적지로 스스로를 유폐하는 박형준과 이윤학의 언어를 가리켜, 우리는 상상력의 미시적 차원에서 태어나는 ‘정물적 역동성’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작업에 공통점만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유형화의 맹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닮은 표정이 시선과 대상의 동시묘사에서 온 것임을 말하였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들은 서로의 시집에 발문을 쓰고 있으며(『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비유컨대 서로를 비춰주는 상처난 거울 같은 존재들이다. 이러한 시작(詩作)이 존재의 밑바닥까지 굴착하려는 예민하고 소심한 시적 주체의 심언(尋言, 말을 찾는 것) 과정이자, 자연과 내면을 부즉불리(不卽不離)의 상응관계에 세우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을 지켜볼 만하다.

 

 

3. 생명의 생애화, 일상과 초월의 변증법─이정록·장철문

 

내면과 사물의 동시묘사적 시화를 기억이라는 집요한 매개를 통해 형상화하는 작법과는 달리, 사소하고 평범한 사물로부터 정신적 의미를 유추해내는 정통 작법에 충실한 시인들도  있다. 이들의 시는 까다로운 유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소통지향의 투명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더불어 그들은 세계의 폐허됨을 감각적으로 증언하거나 육체화하지 않고, 폐허를 건너 생의 원초적 긍정에 이르려 하는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 역시 체험적 자연을 바라보고 의미화함으로써 주체의 내면과 그것의 접점을 갈등적으로 모색하면서 자연을 시의 육체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시인으로 우리는 이정록과 장철문을 들 수 있다.

이정록(李楨綠)은 농촌을 구성하는 동식물의 움직임과 생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토대 위에서, 세계가 유기성과 생명의 역동성을 보인다는 것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농촌적 풍경들은 그의 체험적 세목이자 곧 그의 시가 펼쳐지는 내적 삶의 등가물이기도 하다. 이정록의 가능성은 여기서 오는데, 곧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자연을 온전한 농촌적 안목으로 재현하고 거기서 현대인의 내면의 조응을 읽는 태도이다.

그래서 이정록은 “자연을 지키는 사제라기보다는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온 자연의 부분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섬세한 눈을 가진”(문혜원)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는 자연 속에서 사방팔방으로 역동하는 활달성과 무관하고 선적(禪的) 포즈로 무장한 정신주의적 초월과도 애초에 무관한 ‘바라봄’의 시학이다. 자연에 대한 미시적 관찰을 통해, 보다 넓고 고일한 정신적 지평으로 확산되는 상상력이 그의 작법 원리이자 국량이다.

 

탯줄 떨어진 자리, 넓은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끝내 합장을 풀지 않은 쥐밤나무의 믿음과

뾰족한 뿔과 그 뿔 쪽으로 힘줄을 당기고 있는

알밤의 식식거림을 본다

첫 걸음마부터 추락을 해야 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눈초리와 눈싸움을 한다

밤송이의 안마당으로 내 여린 뿔을 디밀어

말라빠진 젖내를 맡는다

─「알밤」(『현대시학』 1999년 12월호) 부분

 

알밤의 자연적 모습과 시인의 정신적 가치가 주체와 객체의 몫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시의 내용을 결속하고 있다. “새파랄 때부터 갇혀서 자라면/닫힌 문 쪽으로 뿔 하나쯤” 선다는 생각은 고스란히 밤의 생리이자 인생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다고 이정록이 이른바 ‘감정이입’을 방법적으로 취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이 경우 주체와 객체는 분리된다). 오히려 시적 대상과 시적 주체를 분간할 수 없는 화법의 교차를 통해, 자연과 삶이 하나됨을 말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이정록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물소리를 꿈꾸다」,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99)이라는 자연적 상상력은 자연의 체험이라는 매개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눈사람의 상처」, 같은 책)이라는 인식의 육체성이나, “삼십여 년이면 족하다고/재채기도 없이, 삼촌의 방에 불이 켜진다/고추를 가르던 손으로는 눈물을 훔칠 수 없다/눈길도 없이, 나와 할머니의 눈에 붉은 등이 켜진다”(「고추의 방」, 같은 책) 같은 표현 역시 이정록의 ‘바라봄’의 심층을 증명해준다. “생이란,/자신의 상처에서 자신의 버팀목을/꺼내는 것”(「희망의 거처」, 『다층』 1999년 겨울호)이라는 잠언적 효과도 같은 맥락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결국 이정록은 자연을 관조하거나 거기에 몰입하는 대신, 그것을 “생애화”(김주연)하는 시인이다. 그가 “불과 만나 누룽지가 되는 보리쌀과/푸른 불꽃과 거름을 남기는 왕겨”(「木枕」,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의 “뜨거운 생”을 희구하는 것이나, “주름살이란 것/內部로 가는 길이구나/鳶살처럼, 內面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풋사과의 주름살」, 『풋사과의 주름살』, 문학과지성사 1996)하는 은유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자연을 실물로 복원하면서도 그것을 관조하거나 신성시하는 자기분리 과정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근대적 이성이 분리해놓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심연을 그는 관찰의 미더움과 따뜻한 상상력으로 메우고 있다.

장철문(張喆文) 시에 줄곧 등장하는 자연 표상 역시 가장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체험적 요소에서 온다. 그는 근대가 이룩한 사나운 표정들을 비켜서서,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근원적 준거들을 찾아나서는 고전적 상상력을 보인다. 그런데 그 준거의 표상이 자연으로 곧잘 나타나는 것은, 그가 주체의 내면과 사물을 시의 심층에서 결합시키면서 삶에 새로운 정체성과 가치를 부여하는 작법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시선과 대상을 분리하여 대상에 인위를 가하려는 도구적 이성의 무반성적 확산과 과잉을 경계하고, 언어의 육체 안에서 그것을 애써 통합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래서 “저 매운 가지 끝에서/어느 허공이/다른 허공과 남일 수 있으랴”(「겨울 가지」, 『바람의 서쪽』, 창작과비평사 1998)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것이 요설의 수사학이 아닌, 낮은 목소리로 구축된 세계가 그의 시집 『바람의 서쪽』의 세계이고, 최근에 집중적으로 씌어지는 그의 시편의 일관된 표정이다.

 

天宮,

푸르름으로 우묵한 하늘은

멀어지듯 내려와

투명한 살 속으로 들어간다

햇살은

길고 굽은 손을 뻗어

봉긋한 데를,

깊숙한 데를 어루만진다

─「서울-포항간」(『문학사상』 2000년 2월호) 부분

 

봉우리들과 골짜기들, 움푹 패인 둠벙들의 숨가쁜 육체적 교호가 시인이 바라보는 자연의 무궁한 생명성의 모습이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것을 묘사하는 일, 그리고 우리가 “산다는 것은,/이 무궁한 에로티시즘에 한 복무이기도 한 것”, 그래서 시적 대상과 주체는 자신들의 몸을 안팎으로 하나의 지평 위에 세우게 된다.

그런데 장철문은 근자에 와서 일상성 혹은 주위 사람들의 삶의 구체성에 점점 더 애정을 쏟고 있다. 이처럼 실재에 대한 관심과 형이상적 초월의지의 균형을 이루려는 그의 의욕은, 자연을 시적 매개로 삼아 세상살이의 혼곤함과 그 역설적 풍요를 동시에 엿보는 견자의 모습으로 줄곧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평정과 여유 그리고 관조와 중용의 지혜가 그 목소리의 원질(原質)이 됨은 물론이다. 그가 꽉 막힌 도로에서 달리는 자전거를 보고, “기억의 小路가 하나 뻥 뚫린다”(「자전거가 있는 풍경」, 『바람의 서쪽』)고 노래할 때, 그것은 그가 꿈꾸는 시원의 표정의 현재화이고 평정과 중용의 지혜를 드러내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장철문은 잠언적 효과를 최대한 배제하면서, 자연스러운 시상의 흐름으로 구축하는 역량을 갖춘 시인이다.

장철문의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몇천만년 검은 통 속을 흘러온 것 같은/이 축축하고 면면한 바람을/이 밤에 나는/도무지 손쓸 수 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이 바람」,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처럼, 삶의 번쇄를 명징하게 ‘바라보는’ 밝은 눈을 통해서 발현되며, 미물의 움직임을 우주의 율동으로까지 확산시키며 그 유기성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에서 온다. 그것을 개체성의 깊이에서 우려낸 보편적 지평의 암시라고 할까. 이 대목에서 그는 “버려둔 생의 변경지대, 켜켜이 쌓인 기억의 산천을 도보 횡단”(손경목)하면서, 드물게 사유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시인임을 드러낸다. 그 동안 그가 선보인 독자적인 음색의 행보가 그러한 기대를 갖게 하거니와, 이는 그가 추구하는 일상과 초월과 변증법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같이 체험의 직접성을 통해, 그리고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생명과 삶에 대한 궁극적 믿음을 노래하는 이정록과 장철문이 자연을 자연 그대로 노래하면서 그 안에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정신적 가치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의미있는 작업을 기대해볼 만하다. 이정록이 행하는 삶의 핵심에 직접 다가서는 유추의 힘, 그리고 장철문이 갖는 일상의 섬세한 관찰과 그것의 초월의지, 그것이 그러한 가능성의 원천이다.

 

 

4. 주객분리와 맞서는 서정시의 미학

 

물론 외관적인 빈도에 있어서, 특히 소재적인 양상에 있어서 우리 시단의 우세종을 점하는 것은 생태학적 상상력, 여성주의, 죽음의식, 선적(禪的) 포즈, 복합장르적 성격 등이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산술적 우세종은 비평적 유형학이 낳은 일종의 권력지도일 뿐, 그 자체가 온전한 지형도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살아있는 전체로 파악하면서 그것과 주체의 내면(시선)을 잇는 시인들의 작업은, 기억 혹은 체험의 등가물로서 나타나는 자연의 물질성이라는 구체성과 자신의 내면의 시적 표상이라는 그들 나름의 자기완결성을 아울러 견지하면서 이 시대 시적 방법의 유력한 시사가 되고 있다.

이 글에서 살핀 시인들은 그러한 가능성의 지평 위에 완성형이 아닌 ‘과정’으로 서 있다. 박형준의 환상적·동화적·음화적 상상력이 가지는 불가피한 퇴행적 요소, 이윤학의 ‘견딤’이라는 자세가 불러오는 동일한 기율과 안목의 집요한 축적, 이정록이 행하는 사물의 인격화 작법이 투박한 인생론적 알레고리의 차원으로 떨어질 가능성, 장철문 시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농익은 견자의 선미적(禪味的) 감각 등은 여전히 그들의 다음 작업을 기다리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러나 장점이 곧바로 단점이 되고 마는 이러한 논리적 순환이, 아직은 형성중에 있는 이들의 시세계에 대한 때이른 비판이 되기보다는 앞으로의 자기갱신의 폭과 깊이를 지켜보자는 뜻으로 제출된 것임은 물론이다.

세계는 시선에 따라, 세계를 보는 일련의 전제에 따라, 분리되기도 하고 통합되기도 한다. 분리의 시선에서 보면 현재의 환멸이 과거의 미화를 가져오는 시각도 가능하고, 일방적으로 자연의 신성을 예찬하는 시각 또한 자연스럽게 나타나지만, 세계를 통합적으로 읽는 이들에게 사물은, 주체의 해석과 체험이 개입하면서 안팎의 육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가 잘 알듯이,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은 그 자체가 대상을 사물화하는 일종의 주객분리 과정이다. 그래서 객체를 사물화(혹은 물신화)하고 주체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분열시킨다.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미적 저항의 양식으로 채택된 ‘주객 변증법’이나 ‘물아일체’라는 주체의 순간적 망각 역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분리의 전제에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나 외적 현실 전유의 강박을 드러내는 편향을 모두 극복하고, 주객분리를 전제로 하는 문학에서 벗어나 주객분리와 맞서는 미학을 탐색해야 하는 책무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정남영 「새로운 문학을 위하여」, 『작가』 2000년 봄호 참조).

이러한 작업, 곧 주체와 대상을 동시묘사하면서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일구는 젊은 시인들로 우리는 장석남·나희덕·조용미·이선영·김수영 등을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인들은 앞의 네 시인과는 또다른 지점에서 자신만의 미적 개성을 드러내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포함한 우리 시대의 일군의 젊은 시인들(그들은 1990년대 초반을 전후해 등단하여 이제 30대 중반에 이른 공통점을 지닌다)이 이른바 자본주의의 사물화가 가져온 주객분리라는 시선의 양극화에 맞서는 우리 시대의 미학적 과제의 긍정적 편모(片貌)와 가능성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동일성의 시학 안에서 주체와 대상이 행복하게 합일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원초적으로 사물의 어두움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근대예술의 운명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시인들이다. 상상적 자아가 체험적 자아를 감싸안으면서 사물과의 혼교(魂交)를 힘겹게 행하는 이들의 작업을 믿음과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