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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이면우 李冕雨
1951년 대전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술병 빗돌」 등 발표. 시집 『저 석양』이 있음.
골짜기의 포장도로
생은 하나씩 왕국이다 모든 왕국의 아름다움을 나는 믿는다
언젠가 여름 풀숲 고슴도치가 한껏 자신을 즐기는 걸 보았다
눈 맞추자 갑자기 밤송이 되며 놈은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버스 정류장 가까이, 장난기 서린 첫 만남 뒤
이슬과 애기똥풀, 칡덩굴 무성한 왕국의 주인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안개 자욱한 구월 아침 놈은 왜 서둘러
왕국을 떠나야 했던 것일까.
등에 지거나 가슴 또는 망막에 모두를 담아
생은 때때로 더 먼 곳을 꿈꾸며 서늘한 난간에 선다 바로 그때
놈은 일찍이 맞닥뜨린 적 없는 거대한 적과 마주쳤다
풀숲과 포장도로를 가르는 나지막한 경계석을 넘자마자
놈은 붉은 맨드라미처럼 짓이겨졌다 무수한 가시로 무장된
빛나던 왕국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깨져버렸다 바로 그 순간
전 생애의 가시를 꼿꼿이 세워 우주의 저 캄캄한 무게를
놈은 외롭게 견뎌내야 했던 거다.
안개 속에선 사람, 포장도로, 죽은 고슴도치도 축축이 숨쉰다
고집처럼 여전히 날카로운 가시 끝으로
놈을 무겁게 들어올려 작은 구덩이 속에 넣는다
붉은빛 공포와 열망을 몇줌 풀잎으로 덮는다 그때
가시 끝을 타고 무언가 건너왔던가 나는 갑자기 추워져
으스스 진저리쳤다 구월 이른 아침, 첫 버스를 기다리며
검은 바퀴들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곳
살아서 고슴도치 아름다웠던 골짜기를 일별하며.
오늘, 쉰이 되었다
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리고 만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도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가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소리 내어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