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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발제: 우리는 과연 통일과정에 들어가 있는가

통일담론의 거품 빼기와 새 집 짓기로서 통일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당대비평』 편집위원

 

 

체제붕괴의 변증법

(단지 ‘독일’이 아니라) 베를린 유학 시절, 당시 살던 집 앞의 ‘베를린’장벽이 붕괴하고(1989.11.9) 나서 채 1년도 안되어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지는(1990.10.1) 그 숨가쁘던 과정을 목격하면서 과연 우리 민족도 이런 식의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몇번씩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독일과 우리는 참으로 다르다는 것만 확인하고 통일에 대한 생각을 접는 것이 나의 학문적 인생에 이로울 것 같았다. 나는 통일문제 전문가가 되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냉전’이라는 말은 수많은 변이양상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각 국가의 행위방식을 설명하는 유효한 패러다임이었다(쌔뮤얼 헌팅턴, 이희재 옮김, 『문명의 충돌』, 김영사 1997, 30면). 그러나 이 체제의 붕괴과정에서, 그동안 ‘냉전체제적’이라고 불려온 현상들의 밑바탕에 그 체제의 운동방식과 판이한 체제저항적 요인들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이런 체제저항적 요인들이 냉전체제를 결정적으로 붕괴시켰다고 할 수는 없다. 냉전체제 붕괴의 결정적 요인은 그 한쪽 기축이었던 국가독점적 사회주의체제의 내적 결함에 있었다. 그러나 체제저항적 요인들은 붕괴 국면에 들어간 냉전체제의 해체를 가속화했으며, 어느 면에서는 냉전체제 안에서나마 역사적으로 축적된 성과들을 냉전 이전으로 크게 역행시키면서 대규모 혼란상을 야기하기도 했다. ‘체제붕괴’라는 현상은 체제를 둘러싸고 작용하는 여러 요인들의 역동적 합주의 결과였다. 우리의 경우 문제는, 북한이 동유럽사태에서 드러난 이런 체제붕괴의 변증법을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체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의식된 변증법은 반복되지 않는다.

 

한반도 분단의 경우: 분단체제와 분단체질

한반도 분단의 양상이 독일, 베트남 또는 중국의 경우와 상당히, 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더이상 전문가들만의 지식이 아니다. 그런데 한반도의 분단 또는 통일을 둘러싼 담론들은 한국전쟁 때 곧 다시 보겠지 하면서 사립문 밖을 잠시 나섰다가 생이별을 당했던 피란민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전문가·비전문가를 막론하고, 우리는 바로 어제 집을 떠났고, 지금까지 ‘잠시’ 집을 비웠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분단과 통일을 생각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현대사 50년의 시간은 1950년에서 단 1년도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통일담론에는 근본적으로─선의든 악의든─분단시간에 대한 자기환상이 들어 있다. 바로 어제 떠난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애절함이 지금까지 통일담론을 지속시켜온 심성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이제는 안다. 옛집은 더이상 없으며, 돌아가더라도 집은 새로 지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과연 제대로 분단시대를 살았을까? 남북한 공히 관념적으로는, 분단시대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이미 통일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북한 공히, 통일을 국가존립 근거로 격상시키는 순간마다 분단은 더욱 심화되었다. 분단을 지속시킨 것은 관념적인 통일의 극단적 과잉과 실질적인 분단의 극단적 경시라는 정신병리적 심성구조이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정신병리적 전도현상이다. 그리고 양쪽 국가의 정당성이 반세기 이상 이런 정신병리적 구조에 근거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단지 분단시대가 아니라 ‘분단체제’를 살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런 점에서 백낙청 선생의 입론은 정확하다. “한반도의 분단은 엄연한 현실”이며, “우리가 ‘분단시대’라는 것을 당연시할 정도로 이 분단현실은 상당한 지속성을 띤 것”으로서 “한반도 남북 전체를 망라하는 이 현실은 ‘체제’로서”(백낙청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비평사 1994, 15면) “일정한 지속성 즉 자기재생산 능력”(같은 글 19면)을 보였다.

독일과 베트남도 분단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단은 민족 또는 국가 내부의 체제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었다. 독일은 2차대전의 패전국가였으며, 무엇보다 전범국가였다. 이미 1차대전 패배의 결과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은 2차대전 패전국이자 범죄적 가해자로서 분단을 배상금에 갈음하는 응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국가분단은 되었지만 민족분단은 되지 않았다. 그 분단은 유럽현대사에 흔히 있었던 국경선의 변동 정도로 간주될 수 있었다. 유럽적 맥락에서 민족의 통합력을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국가의 정치적 분할만 확고하면 민족 단위의 활동력은 강한 제약을 받는다. 따라서 국가조직만 분리되어 있으면, 민족간 교통은 주변국가에 그리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차대전 후 국가 단위로 이루어진 사회주의혁명의 열기가 급속히 냉각된 70년대 이래 유럽에서 민족간 교류가 사실상 개방될 수 있었던 것도 국가와 민족에 각기 다른 비중을 두는 이런 현대적 시각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경우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한 국토의 분할은 전적으로 제국주의 열강간의 세력재편성 결과였다. 당시 제국주의 운영의 미숙아였던 미국은 처음부터 사회주의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을 동일시하는 착각을 범하였다. 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련은 분단의 한 요인으로 표면에 나설 직접적 동기가 없었으며, 사실 그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가질 계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베트남의 국토분단을 민족분단으로 고착시킬 쌍방향 압력은 있을 수 없었다.

한반도의 경우 분단은 ① 당시 지배적인 위세를 띠어가던 냉전적 요인에다 ② 제3세계적 반제투쟁에 대한 관심말고도, 외세의 분단정책이 민족내 분단체제로 굳어질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우선 일제강점체제가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아주 철저하게 관철되어 반일투쟁 과정에서 향후 독립국가 건설의 주도권을 행사할 뚜렷한 구심세력이 형성되지 못했다. (이 점이 베트남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며, 분단의 제1차적 책임이 일본에 있는 근거이다.) 이 과정에서 한민족은 현대국가 수립을 위한 논의과정을 자주적으로 진행시킬 시간적·심리적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다. 구한말 당시 이런 논의는 내외적으로 모두 억압당하였으며, 우리 민족은 현대화된 국민국가 체험 없이 바로 국가소멸에 봉착했다. 거의 반세기의 공백 뒤 간신히 확보된 민족국가 건립을 위한 담론공간은 곧바로 건국주도 투쟁으로 돌변하였다. 분단시대를 예비한 해방공간에서의 모든 분쟁과 투쟁은 한국전쟁을 결정적인 매개로 하여 실질적으로 현대국가의 성격을 각기 달리 이해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경쟁으로 귀결되었다. 다시 말해 국토분단은 하나의 동일민족이면서 두 현대국가가 성립하기 위해 거쳐간 건국의 기초였다.

한국전쟁을 통해 한민족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고 양쪽은 그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상실했다. 북한은 남한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던─남농북공(南農北工)으로 요약되던─현대 경제의 기반을 상실했고, 남한은 그렇게 유지하고자 했던 반(半)봉건 지주체제가 붕괴되었다. 그렇지만 양쪽 국가의 지배세력은 건국세력으로서 국가통치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지배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결국 남북한간의 잔인한 학살은 바로 국가건설기의 진통”이었고, “국가건설은 전쟁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국가의 역사는 곧 학살의 역사”였다(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285면). 유혈투쟁을 배경으로 양쪽 지배권력은 ‘분단체질’을 국민의 정치체질로 내면화시켰다. 분단체질은 한반도에서 처음 성립한 두 개의 현대적 국민국가의 건국정신 그 자체였다.

 

분단권력의 담론으로서의 통일담론과 그 거품

식민지반봉건사회를 배경으로 외세의 일정한 지원을 받는 가운데 남북 공히 준(準)사회주의 혁명과정을 거쳐 자기 나름의 현대국가를 건국했다. 북한은 영도자의 봉건적 온정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독점 사회주의체제를, 그리고 남한은 국가주도의 자본주의체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 준사회주의적 혁명으로 시도된 전쟁의 결과를 역사적으로 계산해보면 남한사회에 더 유리하게 나타났다. 전쟁을 통해 가장 큰 권력기반을 조성한 군부는 그 어떤 사회세력도 계급으로 성숙되어 있지 않던 전후 사회를 산업화 총동원체제로 편성하였다. 분단과정에서 획득된 그 모든 퇴행적 가치들은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사회화되었다.

이런 분단체질이 양쪽 국가체제 유지의 원동력이었다고 한다면, 분단체제의 변혁은 사실상 두 국가의 존립기초의 와해 및 그에 이어지는 두 국가의 붕괴까지 내다볼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일 것이다. 지금까지 입으로는 통일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분단을 더욱 심화시켜온 역설적 과정은 정치운영·경제구조·사회생활·국민교육 등 국가구조의 각 결절점이 바로 이런 분단체질의 발현체로 구조지어져왔다는 데 기인한다. 통일담론은 사실상 분단권력의 권력담론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바로 ‘과정 속의 통일’로 연결되리라는 낙관적 기대는 어떤 경우에도 할 수 없다. 과정에 대한 분석은 오직 과거를 상대로 해서만 일정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통일을 가불하는 어떤 발상도 위험하며, 과정 속에서는 모든 지향점이 가능하다. 우리는 남북정상이 실리적 입장에서 서로를 대변한 것에 안도하지만, 거기에서 또다른 통일담론이 나타나는 것에 불안해한다. 우리는 21세기가 되어 모든 것이 변해가면서도 ‘우리 안의 20세기’가 여러 모습으로 잔존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분단체제 안에서 적대적 공존을 통해 생존해오던 두 국가의 기본체제가 이제야말로 전면적인 시험대 위에 올라섰을 뿐이다. 6·15선언의 의미를 통일담론에서 거품을 걷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안도할 약간의 여지를 발견하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이 엄연한 별개의 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관계를 국제관계의 통념에 비추어 우리 주변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만큼 정상화시키는 것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통일담론을 넘어서야 비로소 두 독립국가에 나누어져 있는 우리 민족이 통일국가를, 그것도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국가를 민족통일의 형태로 다시 건국할 수 있을지 속속들이 자기검증할 수 있는 탐색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본격적 통일과정이 아니라 단지 분단체제 이완기 또는 ‘때늦은 데땅뜨’에 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양쪽 민중이나 인민에게 탐색기를 가지게 하라. 그리고 통일은 제발 전쟁이나 병합이 아니라 충분한 탐색과 모색이 끝난 뒤 우리 민족 전체의 이성적 합의를 통해 결정되도록 하자. 이것이 ‘남북 두 국가의 평화능력에 토대를 둔 민족합의통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