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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장철문 張喆文
1966년 전북 장수 출생.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바람의 서쪽』이 있음.
이 바람
바람도 이런 바람은
바람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저 안드로메다 성운 너머
몇천만 광년 전에 죽은 별에서 오는
별빛 같은 것이다
허리케인이나 타이푼 같은 것들은
지붕을 날리고 나무뿌리를 뽑아올려도
하룻밤이면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이 밤에 와서 태어나는 것들은
고봉산 신갈나무 가지 끝에서
막 고치를 벗은 나방의
첫 날갯짓이
벵골만쯤에나 가서 일으키는 돌개바람 같은 것이다
서북풍이나 남동풍 같은 것들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으로나 알고
바다에서 오는 해일 같은 것들은
동구에서 일렁이는 파도로나 알지만,
바람도 이런 바람은
어느 나뭇가지를 흔들고 와서
무슨 물살을 일렁이고 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 밤낮없이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어서
움켜쥔 젖은 손만이 남는 것이고,
이 한밤과 같은 것이어서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밀어도
다알리아 구근만한 구멍이나 허락하는 것이다
몇천만년 검은 통 속을 흘러온 것 같은
이 축축하고 면면한 바람을
이 밤에 나는
도무지 손쓸 수 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 여자가 저쪽을 흘끗흘끗 돌아보며
셔터 내려진 상가 기둥 옆에
얼굴을 묻고 앉아 운다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운다
한 남자가 길 가운데서
자기 여자의 뺨과 귓불과 입술에
연신 입을 갖다댄다
여자의 영혼이 뺨과 귓불과 입술에서
지금 휘발하는 중일까
여자는 다소곳이 그걸 받으며 서 있다
단호하게 팔짱을 끼고 선 아내 뒤에서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누가 올 것 같지도 않은데
자꾸 돌아보는 여자와
연방 들이쉬듯 입술을 갖다대는 남자와
버스 오는 쪽만 바라보고 선 아내를 번갈아 본다
남자는 다시 가만히 여자의 머리카락을 젖히고
스치듯 이마에 입을 갖다댄다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여자는 다시 저쪽을 바라보다 운다
아내는 팔짱을 풀고 버스 쪽으로 걸어가고
나도 지갑을 꺼내들고 따라간다
머리카락이 젖은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오르다가
또 한번 뒤를 돌아본다
여자의 허리를 안은 남자는 버스에 오르기가 불편하다
버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부르릉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