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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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인숙 金仁淑

1963년 서울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으로 『칼날과 사랑』 『유리 구두』, 장편소설로 『먼길』 등이 있음.

 

 

 

칼에 찔린 자국

 

 

그날 아침, 그는 출근길의 차 안에서, 경부고속도로에서 일어났다는 12중 연쇄추돌사고에 대한 뉴스를 들었다. 교통정보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그런 뉴스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다. 여자리포터의 보도에 이어 남자아나운서의 과장된 탄식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안전운전하십시오. 나 하나만의 생명이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곧 그의 귀에 익숙한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는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시간이 오래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런 뉴스를 태연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얼굴에 미열이 오르고 뒷머리가 띵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전, 그에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시간강사 노릇으로 일주일에 세번씩 고속도로를 타야만 하던 무렵이었다. 그 일주일 중의 하루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전주로, 다시 전주에서 서울로 정신없이 액쎌을 밟아대야만 하는 형편이었는데, 그 한학기 동안 그가 뗀 범칙금 딱지만 해도 다섯 장이 넘었다. 에어컨을 아무리 세게 틀어도 차창의 전면으로 쏟아져들어오는 햇살의 열기를 이길 수가 없던 오후 한시쯤으로 기억된다. 깜빡 졸았는가 싶었는데 경찰차가 쫓아오는 것이 룸미러로 보였고, 그는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암행경찰의 속도단속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똥줄이 타게 바빴지만 그는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경찰은 그에게 뺑소니의 혐의까지 씌워가며 뒷돈의 액수를 높이려 들었다.

그가 암행단속에 걸려준 덕분으로, 도로는 이제 정상속도 아래로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과의 실랑이에 짜증이 난 그가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낡은 은색 프라이드의 운전자 하나가 그를 바라보며 빙글거리는 것이 언뜻 보였다. 그와 경찰에게 보란 듯이, 프라이드는 도저히 고속도로의 주행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게 기어가듯 꽁무니를 보였다.

대여섯 대의 차량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쭈그러들고 뒤틀려 있는 연쇄추돌의 현장을 그가 목격한 것은 그로부터 10킬로쯤을 진행한 뒤였다. 고속도로 한복판이 까닭없이 정체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사고구나,라는 직감은 쉽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정작 그 현장을 지나치게 되었을 때, 그는 느리게 진행하는 다른 차들의 운전자들처럼 그 현장을 향해 길게 목을 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급적 그 현장을 빨리 지나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경찰차와 견인차 앰뷸런스가 둘러싼 사고차량들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낡은 은색 프라이드를 목격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은색 프라이드는 완전히 박살이 나다시피 했는데, 우그러들어 열리지 않는 운전석 문의 깨진 유리창 바깥으로 팔 하나가 덜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햇살은 여전히 이글거렸고, 덜렁거리는 팔목 위에서 은빛 시계가 쨍, 하고 빛났다.

그날,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거른 채 진행한 오후 강의 도중, 그는 메슥거림을 참지 못하고 휴지로 입을 틀어막은 채 거품 같은 위액을 조금 토해냈다. 그가 퀭하게 눈물 고인 눈을 창가로 돌렸을 때,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던 해가 막 떨어져내리며 피같이 붉은 노을빛을 번져놓고 있었다. 생은, 무상했다. 그후 오래도록, 그는 그날 강의실에서 보았던 붉은 노을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그 일’이 벌어졌을 때, 그러고 나서 그가, 자신은 생에 대해서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느닷없이 떠올린 것 역시 그 붉은 노을빛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라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는 더이상 그 노을빛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치거나 병적인 메슥거림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 노을빛을 떠올렸고, 다만 바라보았다.

 

경부고속도로에서 12중 추돌사고가 일어났다는 뉴스를 듣던 날 저녁, 그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술집에서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 동료교수들과의 회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다가 문득 들어가기 좋은 술집이 보여 혼자서나마 맥주 한잔만 더 할 생각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학장이 회식자리에 함께 있는 바람에 양껏 마시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아내와 냉전중이라 집에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분도 있었고, 무엇보다 화장실이 급했다.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맥주 두 병을 먼저 시켜놓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형사들은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그는 경찰서로 끌려갔고, 그곳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살인미수용의자로 연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여자, 알아? 몰라요?”

반말도 아니고 경어체도 아닌 형사의 물음 앞에서 말보다 입이 먼저 막혀 뭐라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그의 앞에 사진이 한장 놓였는데, 그 낯선 얼굴을 그는 차마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정황만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안다고…… 분명히 안다고. 그러나 모르겠다고,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고…… 그러나 잠시 후 그가 한 대꾸는 고작 이러했다.

“난 교숩니다. 국립대학의 현직 교수예요.”

어쩌자고 그런 대꾸가 나왔을까. 난 이 여자를 모른다든가,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살인은커녕 그 여자의 몸에 손끝 하나 댄 적이 없다고 항변을 했어야 옳았겠으나, 그는 자신이 교수신분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무혐의를 주장하려 들었다.

그가 그 직함을 얻은 것은 고작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교수라는, 그 직함을 얻기 전까지 그는 자그마치 8년이란 세월을 보따리장수라 불리는 시간강사로 보냈으며, 그 이전의 몇년은 오로지 학위 따는 데에만 바쳤다. 그의 동기와 후배들이 차례로 교수직에 입성하고, 혹은 차장 부장이 되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지방의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했다. 그의 삶이 온갖 도로 위에서 기름과 함께 쏟아부어지는 동안, 그의 청춘도 그가 가졌던 첫번째 차처럼 폐차되어갔다. 그러니 이제와서는 그렇게 하여 얻은 교수직함이 그의 인생에 대한 항변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는 거듭 말했고, 그의 신분증을 종류대로 차례로 제시했으나 형사는 그의 항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가 들렀던 술집의 마담이 일주일 전에 바로 자기 술집 앞에서 칼에 찔렸다고 했다. 대로변에 위치한 술집이었음에도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담은 일주일째 사경을 헤매는 중이고, 그를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은 그 술집의 여종업원이라고 했다. 사건이 있던 당일,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그가 마담에게 욕심을 부리다가, 심하게 행패를 부리는 것을 여종업원이 보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그가 화장실이 급해 술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술집 종업원이 그를 알아보았고, 마침 종업원의 보충진술을 듣기 위해 그 술집에 들어서던 참인 형사들에게 연행된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에게는 주장할 만한 알리바이가 전혀 없었다. 형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는 사건이 있던 날 자신이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피해자의 사진이 낯이 익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날도 아마 그는 집에 일찍 들어가기가 싫었을 것이고, 그래서 내켜하지 않는 동료교수를 술자리로 끌어내 만취했을 것이고, 동료교수와 헤어진 뒤에는 혼자라도 더 마실 만한 데를 찾다가 우연히 그 술집에 들어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마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설마 자신이 범인일 수도 있다고야 손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마담에게 어떻게 욕심을 부렸는지, 혹은 어떻게 집적거렸는지, 그리고 협박을 했는지, 그런 것에 관해서는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이튿날 아침 자신의 집 침대 위에서 몸을 돌려 물컵을 찾던 순간까지 완벽하게 삭제되어 있었다. 그는 형사의 어떤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첫마디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현직 국립대학의 교수라는 것, 한 여자의 남편이며 두 아이의 아비이고, 아직 생존해 있는 노부모에게는 여전히 천금 같은 장남이라는 것, 그런 것들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중의 어떤 것도 범죄와 관련된 사항은 아니었다.

 

그가 오래 전에 운명 같은 우연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비켜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날 일도 운명 같은 불운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그 일로 인해 경찰서에 머문 시간은 대여섯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무혐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경찰에게도 그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 같은 것은 없었다. 실제로 형사의 협박성 어투를 대충 제거하고 듣는다면,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거나 연행되었다기보다는 참고인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사흘 뒤, 그는 진범이 붙잡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에게 사과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삭제된 기억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에게 남겨졌을 뿐이었다.

그는 그날 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진범이 검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까지의 사흘 동안,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무혐의를 입증해야 했으나, 그럴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학장이나 동료교수에게 그가 얼마나 비폭력적인 사람인지를 증언해달라고 하거나, 냉전중인 아내와 늙어가는 부모에게 그가 얼마나 괜찮은 남편이며, 올곧은 자식인가를 확인해달라고 하는 것뿐일 터였다. 물론 누구든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확실히 폭력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며, 잠시 연애에 빠졌던 것과 너무 오랜 세월을 무능한 남편으로 살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내에게도 증언을 거부당할 정도로 나쁜 남편은 아니었고, 늙어갈수록 서운한 것들이 새록새록 많아져가는 노부모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그가 천금 같은 자식일 터이다. 그러나 그러한 증언들이 과연 효과가 있기나 한 것일까. 게다가 그들은 증언에 앞서 그의 삭제된 기억을 차근차근 추궁하려 들 것이고, 때때로 자신의 기억을 놓아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의 무능에 대해서도 탄식할 것이 틀림없었다.

진범이 검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그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불운한 일은 가급적이면 잊어버리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러자면 입밖에 꺼내 확인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일’이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입을 여는 순간 그는, 그리고 그의 삭제된 기억은 다만 비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될 뿐일 터였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색 프라이드가 완전히 짜부라져버린 연쇄추돌사고에도 불구하고 도로가 끊기지는 않았던 것처럼, 지독히 불운했던 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 역시 여전히 천천히 흘러갈 것이다. 그는 여전히 현직 국립대학의 교수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으며, 두 아이의 아비였다.

마찬가지로 문제가 될 만한 것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은 그 불운했던 기억이 악몽 속으로 스며들어 어린아이의 경기(驚氣)처럼 존재하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옅어지고 무심해지기도 할 것이었다. 또한 당분간은 뉴스를 듣다가 채널을 돌려야 할 순간들이 많아지기도 하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그에게 남겨진 것이 경찰서에서의 대여섯 시간 남짓이 아니라 그후의 사흘간이라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삭제된 기억을 복원해내기 위해 기를 쓰던 사흘 동안, 그는 잊혀진 순간을 기억해내는 대신, 그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 일이 있던 바로 그 주말에, 그는 조부의 기제사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위경련 때문이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의자에 앉아서만 보내야 했던 오랜 세월 동안, 가장 많이 나빠진 구석이 위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급작스럽고 고통스러운 위경련은 처음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떠나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던 텅 빈 집에서였다. 그는 러닝과 팬티 바람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주먹 쥔 손에 손톱자국이 피멍처럼 새겨졌지만, 그의 신음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로 끊어내는 듯한 첫번째의 길고 호된 고통이 잠깐 누그러들었을 때, 그는 겨우 옷을 걸치고 벽을 짚어가며 집을 나섰다. 그가 택시를 타고 간 곳은 그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본가가 아니라 동네 병원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링거를 맞으며, 그리고 링거를 빼고 나서도 자그마치 아홉 시간이나 긴 잠을 잤다.

그의 생애중에서 가장 길고도 달콤한 잠이었을 것이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고,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는 잠이었다. 새벽이 훤하게 밝아올 때에야 잠에서 깨어난 그는, 비로소 자신이 아무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기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게 도무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느닷없이 종적이 사라져버린 그 때문에 노부모와 아내가 치렀을 걱정 같은 것도 전혀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어떻든 그도 죽도록 아팠던 것이다.

그해 여름 내내 그는 위의 통증과 함께 살았다.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호된 통증은 아니었지만, 자잘한 통증과 거북함은 늘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만취하도록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그가 술을 지나치게 마신다는 것으로 시작된 아내와의 냉전도 끝을 냈고, 그러고는 의사의 권유대로 규칙적인 운동을 결심하기도 했다.

아내가 처남집에서 짐짝 취급을 받고 있던 낡은 러닝머신을 가져온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다. 방학중이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실에 출퇴근을 하던 그가 어느날 저녁 퇴근해 돌아왔을 때, 그의 아파트 거실 베란다 앞에 그것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그가 물었고, 아내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배 나온 여자 싫다며? 나도 그래.”

냉전은 끝났지만, 아내는 여전히 그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주저앉은 채로 아내가 잘 닦아서 윤을 내놓은 러닝머신을 오래 바라보았다. 퉁명스럽게 내뱉던 아내의 말이 귓가에서 좀체로 지워지지를 않았다. 아내는 왜 화가 난 것이고, 왜 그 화가 풀리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자신의 술버릇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다. 아내는 아마도 지쳐버린 것일 테고, 어느날 갑자기 그런 자신을 발견해버렸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오래 한가지 일에만 매달려 살아왔다. 그는 교수가 되는 일에, 그리고 아내는 교수가 되어야 하는 남편이 비워버린 자리를 메우는, 오직 자기 수입만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일에……

─당신은 교수가 되고, 난 교수의 마누라가 되는 거야. 저속하고 끔찍하지 않아? 당신이나 내 꿈이라는 게.

오래 전의 냉전중에 아내는 그에게 말했었다.

─그렇지만 그것말고 다른 게 뭐가 있어? 사는 게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렸는데. 다른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랬다. 그들은 너무 오래 한가지 일에만 매달려 살아왔다. 그것말고는 다른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그리고 그런 삶속에 가라앉은, 그들의 무거운 추. 그런데, 왜 그래야 했을까. 왜 그것말고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걸까. 노부모의 기대, 자식들에게 주고 싶은 아비의 상, 곁에서 오래 지켜본 지인들의 시선…… 오직, 그런 것들이었을까. 그와, 그의 아내에게 주어진 약속이란 건 그것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그는 러닝머신을 오래 바라보며, 아내의 쌀쌀맞던 대꾸를 곱씹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는 배가 나오기 시작했고, 아내의 배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바지지퍼를 올리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는 허리께에서 한줌씩 잡히는 뱃살의 부피를 매일매일 새삼스럽게 느꼈다. 아내가 했던 말처럼, 그들의 삶이 그들을 별볼일 없게 만들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몸이, 그들의 저항을 포기해버린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다. 너무 오래 한가지 일에만 매달려오는 동안, 그들의 머리는 점점 좁아지고, 대신 그들의 몸은 탄력 없이 비대해져갔다. 그들은 배설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는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고, 서로의 몸에 손을 가져다대지도 않았다.

문득 간절히 술이 그리웠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어금니를 깨물고 그 욕구를 참았다. 비로소 모두가 잠들었을 때, 그는 미등만 밝혀진 거실에서 러닝머신 위로 올라섰다. 서서히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다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그의 숨도 가빠지기 시작했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그의 숨도 점점 가빠지고, 폐 쪽에서 단단한 통증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숨을 헉헉거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렸다. 러닝머신의 전면으로는 베란다 바깥이 내다보였다. 자정이 넘었음에도, 도로에 접한 베란다 바깥은 아직 환했다. 오렌지빛 전조등을 밝힌 차들이 쉼없이 전진하고, 그 차들의 지붕 위에서는 대형멀티비전의 화면이 쉼없이 점멸했다. 밤은 그 눈부신 불빛 사이로 스며들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탁탁 끊기는 그의 호흡소리처럼 빠르게 다가왔다가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백미터 달리기 선수의 속도를 빠르게 지나치는 트랙 옆의 소나무처럼, 생각은 무섭게 빠르게 다가왔다가 무섭게 빠르게 지나갔다. 지난 여름 내내 그가 몰두했던 생각들…… 그러니까, 번번이 3층 계단을 올라가 두번의 커브를 돌아 도달해야 하는 자기 연구실까지의 거리에서 느껴지던 그 까닭모를 깊이, 또는 그 까닭모를 ‘아무것도 아님’에 대해 적어도 러닝머신의 벨트 위에서는 그는 몰두하지 않았다. 12층 아파트까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의 양쪽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불빛에서 떠오르던 모든 생각들…… 어쨌든 내 연구실만 생기면,이라고 했던 것에 얽혀 있던 그 오랜 세월의 모든 생각들 역시, 아무것도 아니게 스쳐지나갔다.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늙어가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고, 한때 목숨을 걸고 싶었던 불륜의 애인에 관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래 달렸고, 가슴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었고, 그러고 나서야 멈추었다. 이마에 축축 달라붙은 머리카락에서 땀이 방울이 아니라 물줄기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그대로 베란다로 나가 차가운 타일바닥 위에 몸을 뉘었다. 푹 젖은 몸 위에 밤바람이 한줄기 스며들었다.

 

그를 살인미수용의자로 만들었던, 그리고 본인은 하마터면 살해된 시체가 될 뻔했던 문제의 그 술집 마담을 다시 만나게 된 것 역시 그 여름의 끝무렵이었다. 그가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있는 동안, 그의 휴대폰에 동창의 음성메씨지가 녹음되어 있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 술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 술집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는 동창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다시 걸어 약속장소를 바꾸자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 시간이나 걸려서 애써 찾아놓은 자료들이 순서없이 그의 눈앞에서 흩어졌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그는 삼십분 정도만 연구실에 앉아 있다가 학교를 나섰다. 그가 술집에 들어섰을 때, 동창은 바로 그 마담과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를 용의자로 지목했던 여종업원은 보이지 않았고, 마담은 바로 몇달 전에 칼에 찔려 생사를 오고 갔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게 멀쩡한 것 같았다.

“아하, 교수님이시군요?”

테이블로 다가선 그를 마담이 먼저 아는 체했다. 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되었다.

“날 알아요?”

그가, 저 혼자만이 느껴지는 떨림으로 입을 열었으나 마담은 태연하게 웃음을 띠어 보였다.

“이 오빠가 자기 친구 중에 교수도 있다고, 현직 국립대학의 교수도 있다고, 자랑이 보통이 아니던걸요.”

마담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느정도 취기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를 향해서는 무구하게 빛나는 마담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의 가슴은 이해할 수 없게 무거웠다. 그는 마담이 따라주는 좁은 잔의 양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몇달 전의 초여름밤에 그는 살인미수용의자였다. 그 얼마 전, 그는 바로 이 술집에서 기억이 끊겨나가도록 술을 마셨고, 그 끝에 한 여자에게 구차한 욕심을 부렸고, 그 욕심이 채워지지 못하자 난폭하게 행패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것이 그의 진술인지, 아니면 타인들의 진술인지는 이제와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 그가 있었고,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 그를 살인미수용의자로 만들었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래도 이 친구가 내 친구 중에서는 제일 큰 놈이야. 제일 잘 나가는 놈이라구.”

낮술에 취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취한 티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한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는 또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온 친구의 용건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친구가 선이 닿는 모든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은행의 빚보증을 서주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다른 친구에게서 들은 바 있었던 것이다. 만일 친구가 휴대폰에 남겨놓은 메씨지의 약속장소가 이 술집만 아니었다면 그 역시, 그 친구의 일방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너, 그걸 알아야 한다. 내 친구 중에 별별 사장놈들이 다 있고, 정치하는 놈도 있고, 부동산으로 알짜배기 부자인 놈도 있지만 그래도 난 너를 제일로 친다. 왜냐? 너 그거 왠지 아니? 내 친구 중에서 네가 제일 공부를 잘한 놈이었단 말이야.”

친구의 말은 들을 게 못되었다. 친구는, 만나는 모든 지인들에게 같은 말을 했을 게 뻔하니까. 그러나 어쩐지 친구의 말은 가시가 돋쳐서 그에게 날아오고, 그 친구의 말끝에 다시 교태스럽게 웃는 마담의 웃음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교수님은 밤일도 학문적으로 하시는 거 아닌가요?

순간, 겨드랑이 밑, 발바닥의 중간, 혹은 사타구니 어느 께에서, 밑도 끝도 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좁은 잔의 양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나 목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진다. 그는 비로소 기억했다. 그가 아내와 벌써 반년째 잠자리를 한번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했을 때, 마담이 한 대꾸였다. 지난 초여름의 어느날 밤에.

─네가 나 좀 유혹해볼래?

목소리는 이제 거침이 없다. 게다가 그 목소리에 색깔과 냄새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날 마담이 입고 있던 옷…… 목이 깊게 파인 와인빛의 원피스, 그 옷에 묻어 있던 시큼한 술냄새와 담배냄새…… 그리고 촉감. 그의 손이 깊게 파인 원피스 목덜미 속으로 들어가 마담의 젖꼭지에 이르렀을 때의 그 격렬하고도 고통스럽던 느낌…… 그리고 마담의 비명소리.

─너, 나랑 같이 자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다시 말한다.

─댓가로 뭘 줄건데요?

마담이 묻고, 목소리는 대꾸한다.

─사랑…… 목숨 건 사랑, 그런 거.

마담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녀의 원피스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그의 손, 넘어지는 양주병, 마담의 비명소리…… 그리고 색깔, 색깔들…… 양주의 노란 빛과, 생수의 물빛과, 온갖 여름과일들의 참혹할 정도의 싱싱한 빛들과, 마담의 진한 와인빛 원피스……

“우리 집에 한번 오셨었지요?”

마담이 문득, 그에게 묻고 그는 정신을 차려 마담을 돌아보았다. 마담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얼마 전에 사고가 있었거든요. 그 사고 다음부터 건망증이 생겼어요. 의사 말로는 쇼크 때문이라던데……”

“사고? 무슨 사고?”

친구가 대신 묻자, 마담이 자신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였다. 그저 손가락뿐이었는데,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의 입에서, 칼에 찔린 듯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불빛에 빛나는 선연한 칼의 푸른빛을 보았고, 그 칼에 묻어나는 검붉은 피의 빛깔을 보았다. 그는 토해져나오는 신음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양주잔을 들었던 자신의 두 손바닥을 펼쳐보았을 때, 손바닥은 피투성이였다. 손바닥에 고인 피가 손가락 틈 사이로 툭툭 떨어져내려 그의 허벅지를 적시고 그의 종아리를 적시고, 그의 발등을 적셨다. 그러나 마담과 친구는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가 깨어 일어났을 때 그의 곁에는 알몸의 마담이 누워 있었다. 여관방의 두터운 커튼 사이를 힘겹게 뚫고 들어온 햇살이 마담의 벗은 어깨를 지나, 벗은 가슴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칼에 찔린 자국은 흉한 정도가 아니라 끔찍했다.

그는 가만히 누운 채로 지난밤의 일을 더듬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 이외에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빚보증을 원하던 친구의 부탁은 어찌했는지, 그 친구는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마담과는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벗은 몸으로 나란히 누워 있게 된 것인지…… 또다시 모든 기억이 분실된 모양이었다. 만일 지금, 곁에 누워 있는 마담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또다시 살인미수용의자가 될 것이었다. 아니, 이번에는 미수용의자 정도가 아니라 바로 살인범이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알리바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담의 잠은 깊었다. 마구 흔들어대거나 뺨이라도 한대 갈기지 않으면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깊어 보이는 잠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담은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것일지도. 그는 가만히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펴보았다. 혹시 묻어 있을지도 모를 핏자국 같은 것을 찾고 싶은 것처럼. 그러나 세 줄의 손금이 굵게 그어진 손바닥은 여자의 체액냄새를 풍기고 있을 뿐, 멀쩡했다.

그가 그 또래에서는 드물게 자그마치 오형제의 맏이라는 운명을 타고 태어나게 되었을 때, 그의 손금은 아마도 비극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는 60년대 스토리에서나 등장할 법하게 동생들의 몫을 혼자 차지하며 성장했다. 그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그 댓가를 요구받았는데 그건 그가 ‘훌륭한 사람’ ‘능력있는 장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것일까? 훌륭하면서도 능력있고 존경받으면서 겸손한, 그리고 책임있는 인간이란 어떤 것일까.

그의 부모가 처음부터 자식을 그리 많이 낳을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에게 그런 짐을 지워주기 위해 약속이나 한 듯 그런 다산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년도 되기 전의 나이에 암투병을 한 이후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신자가 되었고, 주는 대로 받으라는 신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주는 대로 받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었고 근동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고, 서울에 있는 가장 좋은 대학엘 들어갔다.

어린시절, 그는 공부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읍내에서 가장 달리기를 잘하는 소년이기도 했다.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백미터를 뛸 때, 운동장의 스탠드 위에서 뛰어내려와 트랙까지 달려들어 소리를 지르던 네 동생의 환호는 찬란했고, 숨이 가빴고, 고통스러웠다. 주먹 쥔 그의 손 안에서 세 줄의 손금이 점점 더 굵어졌다. 그를 육상선수로 키우고 싶어했던 당시의 체육선생은, 그의 부모와 그의 친척들과 심지어는 그의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일시에 비난을 당하느라, 그에게 주먹 쥐고 달리는 것이 좋은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가르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참가했던 마라톤대회에서도 그는 내리 주먹을 쥐고 달렸다. 오래 달릴수록 그의 주먹 속에서 손금이 경련하고, 그의 어린 심장이 고통스럽게 쥐어짜졌다.

괜찮아, 그만 달려도 돼. 여기서 멈춰. 멈추라구.

주먹 속의 손금이었을까, 아니면 고통스럽게 뛰고 있던 심장의 외침이었을까. 그는 그 유혹의 소리를 선명하게 들었으나,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삶은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고, 그는 가급적 그 안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은, 그의 삶속에 각인되었다. 그 기억을 간혹 잊거나, 놓치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억까지 까마득해질 때, 말하자면 만취했을 때뿐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깨어나지 않고 있는 여자를 보듬어 안았다. 여자 가슴의 칼에 찔린 자국이 그의 가슴까지 전해져왔다. 금속성의 느낌이다. 그리고 피의 냄새가 있다.

─사랑, 목숨 건 사랑…… 그런 거.

여자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문득 떠올랐다.

─그 사람이 당신 맞죠?

지난밤, 여자도 만취해가면서 술의 힘으로 기억을 되살렸던 모양이었다. 빚보증 때문에 찾아왔던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여자는 눈을 빛내며 거의 숨도 쉬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말했다.

─맞아요, 당신이에요. 기억이 나요.

─그렇지만 당신을 찌른 사람은 내가 아니잖소.

─아니에요. 바로 당신이에요.

여자는 취했고, 그도 취해 있었다. 그는 웃었고, 여자도 웃고 있었다. 만일에 여자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다면, 그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바로 내가 맞소,라고 말할 수 없듯이 내가 아니다,라고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담을 칼로 찌른 진범이 누구인지, 마담과는 어떤 관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담에게 그 설명을 들을 생각도 없었고,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는, 그가 아니라는 것, 마담의 가슴에 칼자국을 낸 사람이 그가 아니라는 것을 마담의 목소리로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취한 마담이 손가락을 똑바로 세워 그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바로 당신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담을 칼로 찌른 사람은 어쩌면 자기였을지도. 그리고 고속도로의 연쇄추돌사고에서 짜부라져 있던 차는, 바로 자기 차였을지도. 그리고 깨진 유리창 밖으로 덜렁거리던 팔목의 주인공 역시 바로 자기였을지도.

 

그는 가만히 누워서, 여관방의 두터운 커튼 사이로 힘겹게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연쇄추돌사고가 있던 날 오후 강의실에서 보았던 붉은 노을빛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그 노을빛은, 아주 오래 전, 오래달리기를 하던 학교 운동장에서 보았던 노을빛이었던 것도 같다. 그가 달리는 일을 좋아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출발하였고, 다만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달리기의 속성이었으므로, 그렇게 알았으므로. 게다가 그는, 근동에서 가장 달리기를 잘하는 소년이었으므로.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고, 자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멈춰서는 안되었고, 멈출 수가 없었다.

노을이 지고, 해가 저물었으므로 라스트라인은 감춰졌다. 운동장에서 펄럭이던 만국기도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달리기에 환호하던 어린 네 동생과 부모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몸은 이제, 그를 원하지 않는다. 그의 다리가 점점 무거워져, 이제 달리기는 빠른 걸음 정도로 바뀌고, 곧 그나마도 속도를 내지 못하기 시작한다. 어두운 운동장에 남겨진 것은 이제 그뿐이다. 그는 너무 지쳤으므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고, 때때로 떠오르는 생각은 느리게 다가왔다가 빠르게 사라져간다. 이제 끌듯이 걷는 걸음 뒤로, 어둠과,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그를 따라올 뿐이다. 노을도 지고, 해도 진 운동장의 트랙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