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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크로노스’와 싸우는 시인들

김진경 시집 『슬픔의 힘』, 문학동네 2000

최영철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 문학과지성사 2000

김명수 시집 『아기는 성이 없고』, 창작과비평사 2000

 

 

류신 柳信

문학평론가. 중앙대 강사, 독문학.

 

 

1. 그리스신화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Khronos)는 낫과 모래시계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낫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의 파괴력을, 모래시계는 시간의 공허한 반복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정작 크로노스의 속성은 고야의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파된 것처럼, 제 자식을 낳는 족족 가차없이 잡아먹는 섬뜩한 식인(食人)의 면모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인간의 총체성을 잘게 쪼개어 갉아먹는 시간의 가혹한 메커니즘에 대한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자본주의 시계판의 분침과 시침 사이에 충직한 노예로 예속된 처참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신화란 허구적 상상력의 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있는 개념 생산의 화수분이란 점을 새삼 통감케 된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정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토제(吐劑)를 사용해 아버지가 삼킨 남매들을 내뱉게 하는 사건이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폭압적인 시간의 유린을 뿌리친 인류 최초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벽두, 거침없이 줄달음질치는 시간이란 괴물의 발목을 붙잡은 제우스의 후예는 누구일까? 우리가 최근에 나온 시집 가운데 각기 개성있는 토제를 사용해 크로노스와 싸우는 김진경·최영철·김명수의 시집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2. 『슬픔의 힘』에서 김진경(金津經)은 속도와 능률을 숭상하는 근대적 시간의 광포한 질주에서 한발짝 물러나, 가쁜 숨을 고르며 느림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김질”(「겸손한 여생」)한다. 진보를 목표로 내달리는 현대사회의 한복판, “점점 밀도가 높아지는 청동 공기 속을”(「청동 물 속을 헤엄쳐다니는」) 산책자의 행보로 유유히 가로지르면서 ‘건강한 느림’을 설파하는 것이다. 여기서 ‘건강한 느림’이라 함은 그가 탐침(探針)하는 느림의 미학이 현실도피적 발상에서 촉발되는 무위·나태·권태와 직결되거나, 현실을 초극한 자족적인 유토피아의 착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의 속도에 대한 냉철한 반성을 통해 매개되는 올곧은 시간의식의 소산임을 뜻한다.

예컨대 그는 현대 산업문명의 질료적 근거가 되는 시멘트를 업고 거리를 맹렬히 질주하는 레미콘차를 보고, “지질학적 자본의 시대가 발명해낸/육식 공룡 같다”(「레미콘차」)고 규정한다. 폭주 속에 감춰진 자본주의의 거대 욕망과 파렴치한 탐식의 흔적을 발가벗기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한 “채찍에 맞을수록 빨리 도는 팽이”를 넋놓고 바라보다가 자신이 “팽이의 속도에 얼어붙”고 있음을 깨닫고는,  “돌아가는 속도의 밖으로 뱉어진 후에야/우리는 비로소 물을 수 있을 거야/이 속도가 무엇을 위한 건지”(「딸애가 팽이 돌리기 숙제에 매달리는 동안」)라고 자문하며 속도의 황홀감에 마비되어 무뎌졌던 시간의식을 다시금 추스른다. 여기서 가공할 만한 속도의 원심력에 의해 “밖으로 뱉어”졌다는 시적 자아의 시간체험은 ‘사물의 속도’에 대한 단순한 멀미나 현기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시간의 ‘밖’에서 시간의 ‘안’을 들여다보기 위한 적극적인 탈주의 전략으로 읽힌다. 이렇게 시인은 형식적으로는 부단히 앞을 향해 움직이지만 더이상 삶의 동력으로서 기동하지 않는 공허한 시간의 흐름에서 단호히 이탈함으로써, “한순간 지나가는 자신의 생애”(「무서운 시간」)를 포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속도가 뱉어낸 모래알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막, 시는 그 사막 위를 지루하게 걷고 있는 낙타인지도 모르겠다”는 자서(自序)의 고백처럼, 김진경의 시에서 낙타는 숫자로 환원되어 경제화되는 자본의 속도와 결연히 맞서 느림의 힘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시인의 분신이다. 이러한 느림의 저력은 “백록담의 봉우리”와 비견되는 “새파란 하늘을 향해 거대하게 솟은 희디흰 육봉”(「등이 흰 낙타」)에 의해서 선연하게 가시화되기도 하고,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초연한 낙타의 “단순한 생존법”을 환기시킴으로써 절제와 비움의 미덕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굴절되기도 한다.

 

109-344

 

마실 물과 먹을 것

그 이외의 것은 갈수록 무거운 짐이 되는

낙타는 사막의 단순한 생존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다

낙타는 무슨 성자처럼

겸손하게 큰 눈을 끔뻑거린다

─「삼방산 밑에서 낙타를 보다」 부분

 

드넓은 모래사막을 묵묵히 횡단하는 낙타의 유장함에서, 욕망의 급류를 타고 좌충우돌 들끓는 속세의 현장에서 출가한 ‘도보 고행승’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질주의 편벽됨과 일면성에서 벗어난 낙타는 무엇을 둘러보려고 “겸손하게 큰 눈을 끔뻑거”리는가?

그것은 시집의 해설에서 김상욱이 간파한 것처럼 “부재하는 삶의 진정성, 그로부터 야기되는 슬픔, 슬픔을 바탕으로 쏘아올리는 그리움의 몸짓”으로 요약할 수 있는 무엇이다. “내 마음의 바닥”(「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에 대한 무한한 연민, “거대한 원시의 어머니”(「마산포 하루」)의 품속에 대한 동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때론 “동터오는 노을을 보며” 짓는 “엷은 미소”(「가을 편지」)처럼 시각적 이미지로 오롯이 빛나기도 하고, 때론 눈 쌓인 재를 넘어 사랑하는 이의 집으로 “딸랑딸랑 말방울을 울리며”(「첫눈」) 달리는 소리로도 생생하게 귓전에 감겨든다. 동시에 그것은 이불 속에서 “엄지발가락으로/누이들의 발바닥을 콕콕 찌르”(「미소」)는 촉각을 통해서도 짜릿하게 전해지며, 은은한 “치자꽃 향기”(「부처」)를 머금고 퍼져가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이 그토록 애절하게 찾고자 하는 “그대는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백자진사매국문병」)다.

이렇게 볼 때, 김진경의 『슬픔의 힘』에 임리(淋漓)한 존재의 시원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느림이 숙성시킨 감성적 분비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움의 ‘발효(發效)’를 위한 시간의 ‘발효(醱酵)’! 하지만 그가 견지하는 느림의 시학이 ‘디지털’이란 유령의 광(光/狂)적인 스피드에 홀린 우리의 무감각한 시간의식을 꼬집어 깨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매개로 느림이란 시적 주제를 끌어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느림을 통해 다시 현실과 길항하는 시적 방법론이 서정적 자연의 풍광에만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가 지향하는 느림의 미학이 생활현장과도 교호하는 ‘건강한 느림의 창조성’으로 전개되길 바란다.

 

3. 김진경이 매끈하게 다림질된 시간을 겹겹이 주름잡아 느림의 권리를 모색한다면, 『일광욕하는 가구』에서 최영철(崔永喆)은 우리를 앞으로만 끌고가는 팽팽한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난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왜 흘러간 시간의 뒤를 밟아가는가?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

앞을 보내고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

차례대로 가서 처박힌

줄줄이 늘어서서 발 동동 구르며 하품하는

앞은 절벽

─「앞으로 뒤로」 부분

 

인용된 시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한마디로 시인이 내다본 앞의 풍경이 심히 마뜩치 않기 때문이다. 암표를 사고 급행료까지 지불해가면서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 길의 끝은 장밋빛 복락원의 입구가 아니라, “절벽”이나 “천길 벼랑”(「세상 밖으로」)이라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시인을 뒤로 이끌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길의 끝이 무덤이다”(「정상에서」)란 인식처럼 언젠가는 맞닥뜨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도 시인의 암울한 전망을 부추겼을 터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황금시대로 인식하는 낭만적 동경이 뒷걸음을 재촉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는 시구가 암시하듯, “부끄러움도 기다림도 남은 게 없는/풍비박산의 시간”(「노부부」)을 견디지 못해 “저를 밟고 간 세월에 딱지가 앉아/곰보 얼굴이 된 난간”(「곰보 다리」)이 흉물스럽게 그의 귀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퇴유곡의 암담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서늘한 퇴로”(「쥐스킨트를 읽는 밤」)를 고집하는 까닭은?

해답은 간명하다. “위로 뻗기만 하는 삶을 받치려고/실타래처럼 엉킨 땅 아래 상념들”(「대숲에서」)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재인식을 통해 ‘생의 의지’를 북돋우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렇게 만신창이로 허덕거린 사이/나는 다 망가져 처음으로 돌아왔다”(「20세기 공로패」)에서 들리는 삶의 초발심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독성 이 아귀다툼이 나를 새롭게 할 것이야

마디마디 박히는

민물장어 부스러진 뼈의 원한

힘이 솟는다

다 부서지면 나는 날아오를 것이야

─「이 독성 이 아귀다툼」 부분

 

과거로의 낭만적인 복귀는 재출발의 잠재력을 온축할 수 없는 법이다. “독성”과 “아귀다툼”으로 생채기 난 삶을 온몸으로 뜨겁게 끌어안을 때, 비로소 비상(飛翔)의 의지와 부활의 심지를 세울 수 있게 되리라. 그에게 끝과 시작은 서로 ‘상충’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보’하는 타자다. 즉 ‘뒤’는 뒤집혀진 ‘앞’이다. 따라서 “민물장어 부스러진 뼈의 원한”과 같은 삶에 대한 고통과 번뇌를 극한까지 밀고나갈 때, 생의 시작은 더욱 절실하고 치열하게 다가온다. 이제 시인은 낚시에 걸려 죽어도 따라오지 않으려는 바닷고기의 처절한 항전을 향해 부르짖는다. “파닥거려야지 갈갈이”!(「바보 고기」) 이런 소생의 의지는 “갯쑥부쟁이까지 피면 다시 출항이다”와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란 시구로 각각 시를 종결하는 「폐선」과 「일광욕하는 가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탈탈”에서 감지되는 과거 극복의 결의, “쨍쨍”에서 느껴지는 미래를 향한 박동!

과거나 미래, 어느 한 편만을 절대화하고 특권화하는 유토피아주의는 절름발이 시간의식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이미’와 ‘아직’, 양편 모두의 한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빚어지는 긴장 속에서 자기갱신을 기투(企投)할 때, 우리는 과거를 치유할 수 없는 영역으로 만들고 미래를 죽음과의 독대로 서둘러 몰고 가는 선형적(線形的)인 ‘세속시간’(Weltzeit)의 궤도에서 벗어나, “미래는 과거보다 더 늦은 것이 아니며 과거는 현재보다 더 이른 것이 아니다”(하이데거)로 압축되는 나선적(螺線的)인 ‘시간성’(Zeitlichkeit)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최영철의 시가 노정하는 과거로의 역행이 복고적 퇴행이나 소극적 도피가 아니라 ‘편력의 길’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여기에 숨어 있다.

 

4. 최영철의 시가 과거와 현재를 ‘직렬’로 연결한다면, 김명수(金明秀)의 『아기는 성이 없고』는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병렬’로 접속함으로써 시간의 기계적인 흐름에 저항한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시간의식은 과거와 현재의 거리가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병발(竝發)하는 사태를 방지함으로써 이질적인 두 개의 시간지평이 상생(相生)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저기 저 산등성이에 보랏빛 들국화가

무리져 피어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나던 그날 그 시각의

햇살을 떠올린다

─「물결」 전문  

 

이 시는 언뜻 보면, 시적 화자인 “나”가 들국화를 보며 회상에 젖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서정시의 주제와 문법을 그대로 재현한 평범한 시편으로 읽힌다. 그러나 “물결”이란 시의 제목을 가슴에 품고 시의 행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서로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수평성’의 시간의식이 은밀한 무늬를 내비치며 수면 위에 떠오른다. 산등성이에 무리져 피어 있는 들국화, 그곳을 지나가는 산들바람, 그 바람에 의해 잔잔한 물결로 시인에게 밀려오는 보랏빛 수군거림,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던 그날 그 시각의 햇살”을 반추하고 있는 시인. 보랏빛 들국화의 “물결”(현재)과 “햇살”(과거)이 얼마나 평화롭게 ‘공존’하며 단아한 ‘공명’을 자아내고 있는가. 화하되 하나가 되지 말라〔和而不同〕는 ‘차이’의 존중에 대한 시인의 염원이 내밀히 전해진다. 우리가 이 시에서 과거가 현재를 주박하거나 현재가 과거에 혼융되는 지저분한 욕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와같은 ‘수평성’의 시간의식은 이번 시집에서 두 가지 차원으로 변주·심화·확대된다. 첫째, 타자성의 인정을 기반으로 형성된 시간의식은 존재론적 탐구로 이어진다. 예컨대 “내가 봄을 보고/봄이 나를 보는 거리여/멀어라, 멀어져라!/봄이 나를 보고/내가 봄을 보는 거리여”(「遠視」)란 시구를 보자. 여기서 “멀어져라!”란 단호한 외침은 “나”와 “봄”,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사이를 특정한 관계의 사슬로 연결하고자 했던 무모한 근대적 기획을 버리고 양자 사이의 참다운 개별성과 독자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려는 시인의 의지표명으로 읽힌다. 존재의 본성은 서로가 연루되어 얽히고설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모래는 그저 모래/바람은 그저 바람”(「인연」)이란 단언처럼, 존재에 달라붙은 모든 정념과 관념의 불순물이 제거된 순도높은 ‘있음’(Sein)의 집요한 탐구에서 드러난다는 인식이다. 동시에 이것은 ‘수평성’의 시간의식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모든 망혹(妄惑)을 버리고 존재 본연의 천성을 깨닫는 견성(見性)의 철리를 아우르는 장면이라 하겠다.

둘째, ‘수평성’의 시간의식은 생명현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자연스럽게 기맥을 통한다. 과거와 현재를 소통 불가능한 상태로 절연시키거나 둘 사이를 무시로 넘나드는 신비주의적 시간론과는 달리, 과거와 현재를 평형상태로 유지함으로써 그 사이에서 순환하는 내적인 생명에너지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투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에 나뭇잎이 새겨져 있다

꽃도 줄기도

뿌리도 흔적 없다

나는 나를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

나의 시간을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 숨을 쉰다.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내 그림자가 벽에 비친다

─「나뭇잎 화석」 부분

 

일반적으로 화석이란 과거의 시간이 응고된 결정체, 생명활동의 전면적 정지가 가시화된 죽은 시간의 은유다. 하지만 그에게 화석은 누군가 흔들어 깨워주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긴 휴지상태로 들어간 시간의 일시적 동면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생명의 수분이 탈수된 딱딱한 나뭇잎 화석을 보고도, “옛날, 그 옛날”에 내리던 “이슬비”와 “햇살”을 떠올린다. 그렇다고 매장된 시간의 부활이 감흥과 흥분의 정서로만 가파르게 경사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 이 시간/나의 시간을 생각해”봄으로써 “나를 생각”할 수 있는 명상의 화두를 부여해준다. 그리고는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나는 지금 숨을 쉰다”는 소박하지만 깊은 참구(參究)의 답을 내놓는다. “수억년 전”의 광합성 활동과 현재의 나의 호흡작용이 오묘한 생명의 통로를 통해 접점을 찾는 순간이다. 태고의 나뭇잎 화석이 내뿜는 산소를 지금 들이마시는 나. 과거와 현재의 행복한 공시적 만남이다. 따라서 벽에 비친 “내 그림자”는 시인의 전존재성이 삼투된 활화석(活化石), 다시 말해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정지된 시간”(「정지된 시간에게」)의 외시(外示)이자 “해바라기 시든 대궁/까만 씨앗 영그는”(「맨드라미」) ‘오래된 미래’의 현시(顯示)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번 시집의 주조음인 “생명현상의 순연함과 지극함”(이경호)은 강퍅한 가슴을 지닌 어른의 눈으로는 목도할 수가 없는 법. 따라서 그가 아이들의 무색 투명한 천진함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 것은 자연스럽다. “내 마음 아기 키우네/아기/내 마음 키우네”로 매듭짓는 「아기는 성이 없고」는 동심에 대한 시인의 항심(恒心)을 잘 대변해준다.

 

5. 살펴본 대로, 김진경·최영철·김명수 시인은 각각 미친듯이 날아가는 시간의 화살을 정지시켜 늘이거나, 구부렸다 펴거나, 나란히 놓으면서 크로노스와 대결한다. 그러나 이들의 값진 성찰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면, 이들의 시가 대부분 ‘과거─현재’라는 편향된 시간지평 사이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측면이다. 물론 최영철의 몇몇 시편은 미래를 향해 약동하는 것이 사실이나 아직은 출항을 알리는 기적소리일 뿐, 구체적인 방향타 설정에 대한 절차(切磋)의 고심이 미약한 아쉬움이 남는다. 김명수의 경우도 “그림자”란 시어가 암시하듯, 투사된 미래의 모습이 실체가 불분명한 씰루엣으로만 형상화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는 짐작컨대, 회상은 현재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지만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취하는 일은 조만간 현재의 황폐한 손길에 휩쓸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심리적 부담감이 내심 똬리를 틀고 있을 터이다. 물론 그리움·기억·추억이야말로 태생적으로 시가 돛을 올리는 근원적 정서임을 부정할 뜻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분명 시의 진정성, 그 깊숙한 내부에는 앞에서 밀려오는 격랑의 파고를 미리 가늠해보는 참언(讖言)의 몫이 잠재해 있음을 놓치지 말자. 앞으로 이들의 시세계가 ‘과거지향’(Retention)의 정서로 좀더 뿌리를 튼실히 다지면서, ‘미래지향’(Protention)의 예지로 힘찬 날개를 달아 균형잡힌 시간의식을 벼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