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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시와 언어, 그리고 리얼리즘

 

 

정남영 鄭男泳

문학평론가. 경원대 영문학과 교수.

 

 

오늘날 시는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경제학, 인간과학들

그리고 정신분석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을 수 있다.

─펠릭스 가따리

 

 

1. 현대사회와 ‘사물화’

 

‘21세기 한국문학의 향방’이라는 이 씸포지엄의 큰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과연 어떠한 시대인지를 생각하는 데서 논의를 출발할 수 있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후기자본주의(Late Capitalism), 전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 탈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 매체사회(Media Society), 정보사회(Information Society), 소비사회(Consumer Society), 전자사회(Electronic Society), 하이테크사회(Hightech Society), 디지털 시대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혹은 사회를 지칭하는 명칭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모든 명칭들이 각기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 지구 위에서 영위되는 삶을 장악하는 능력이 더욱 높아졌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자본의 장악능력이 높아졌다는 것은 자본의 총량이 늘었다든가 하는 식의 양(量)적인 기준으로만 측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자본가집단과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결탁 정도가 높아졌다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속적인 민중투쟁의 결과로 정권의 친자본가적 성격의 일부는 현저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자본의 현실장악 능력의 고도화에는 우리의 실존적 삶의 질(質)의 변화가 필수적으로 포함됩니다.1 저는 여기서 프랑스의 철학자 펠릭스 가따리(Félix Guattari)가 ‘비물질적 사물화’(incorporeal reification)라고 부른 것2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비물질적 사물화’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7,80년대에 자본주의의 부정적 효과로서 자주 지적된 ‘사물화’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알다시피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물과 사물의 관계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사물화’가 지칭하는 바입니다. 이것을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사물화’는 가시적이고 물질적 관계만을 승인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물질적’이란 말은 엥겔스가 유물론을 정의할 때 사용한 바와 같은 넓은 의미의 물질성materiality이 아니라 물리·화학·생물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좁은 의미의 물질성corporeality의 형용어로 사용한 것입니다.) 실제 우리의 구체적 실존이 이러한 물질성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기에 사물화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입체적인 다양성과 복합성을 평면적인 단순성으로 환원한 것에 해당합니다.

‘사물화’에 의하여 배제되는 것은, 비물질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관적’이지는 않은 실존영역, 외연 속에서 좌표로 표시될 수 없는 가상적이라고나 할 실존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물질적인 세계 못지않게, 아니 실상은 앞으로 논의될 이유로 인해서 그보다 더욱더 핵심적으로 인간의 구체적 실존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저는 졸고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창작과비평』 1999년 겨울호)에서, 문학작품에 의하여 열리고 인간의 창조적 상호협동에 의하여 유지되는 이러한 실존공간을 ‘만남의 공간’ 혹은 ‘제3의 영역’이라는 용어를 빌려 설명한 바 있습니다.3

‘사물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비물질적 실존공간’ 혹은 ‘제3의 영역’이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먹고사는 문제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강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대체로 동반하는 노동자 의식의 진전과 정치적 힘의 증가는 예의 강압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게 만듭니다. 의식이 깨인 노동자는 더이상 물질적 이익에만 시야를 국한시키지 않고 자신의 ‘비물질적 실존공간’의 풍요화, 즉 문화적 삶의 고양을 추구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은 자본주의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 ‘비물질적 실존공간’을 단순히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곳을 장악해야 할 필요에 처하게 됩니다. 그 장악의 형태는 우리의 구체적 실존과 내적인 연관이 없는 초월적인 물신(物神)들에 의하여 예의 ‘비물질적 실존공간’이 지배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과학이 숭앙하여 마지않는 논리적 이상물인 ‘진리’, 공적 공간의 신(神)으로 기능하는 ‘법’, 경제적 관계를 지배하는 ‘자본’, 삶과 분리된 이상물인 ‘미’ 등이 바로 ‘비물질적 실존공간’의 물신들입니다. ‘비물질적 사물화’ 혹은 ‘비물질적 실존공간의 사물화’는 바로 이러한 물신들의 지배를 일컫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고도화된 단계에 상응하는 고도화된 형태의 ‘사물화’인 것입니다.

‘비물질적 사물화’가 지배적이 되면,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을 파는 사람보다도 자본의 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여기고, 자본이 마련해주는 꿈을 꾸고, 자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다수가 됩니다. 인간은 이제 안(내면)으로나 밖(외적 활동)으로나 자본의 함수가 되어갑니다. 자본의 운동이 주된 운동이고 인간의 활동은 이러한 운동의 운동구간─판매·구매·노동·소비 등등─을 나타내는 일시적 이름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2. 언어에서의 ‘사물화’

 

‘사물화’의 고도화된 형태인 ‘비물질적 사물화’는 언어에서도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언어는 ‘비물질적 실존공간’과 필수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란, 원래는 현실의 일부였던 것(구어의 경우에는 소리, 문어의 경우에는 형태)이 단순히 즉자적인 물질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속성을 갖게 될 때, 즉 새로운 ‘비물질적 실존공간’을 열면서 이미 열려진 다른 ‘비물질적 실존공간’들과 다채롭게 연결하는 속성을 더불어 갖게 될 때 형성됩니다. 언어는 한편으로는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모든 현실의 속성인 유동성과 운동성을 가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성으로부터의 자유로움으로 인하여 그 유동성과 운동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이러한 유동성과 운동성으로 인하여 언어가 열어놓는 ‘비물질적 실존공간’은 다가적(multivalent)이고 다성적(polyphonic)이며 다의적(polysemic)인 공간이 됩니다.

이러한 다양한 입체성이 일면적 평면성으로 바뀌는 것을 언어에서의 ‘사물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여러 형태(단계?)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 언어에서 모든 유동성과 그로부터 나오는 창조적 애매성은 제거되고, 특정의 사물이나 이미 확연히 규정된 생각을 확연하게 지시하는 단순한 기능만이 장려될 수 있습니다. 제가 졸고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에서 ‘산문적 언어사용’이라는 말로 지칭한 것이 바로 이러한 기능에 촛점을 둔 것입니다. 하나의 단어가 확연하게 정해진 사물이나 생각을 정확하게 지시하도록 정한 체제에서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고유한 표현에너지가 미리 정해진 체제에 구속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언어생활이란 미리 정해진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하나의 단어가 어떤 확연하게 정해진 것을 ‘정확하게’ 지시하려면 그 지시관계가 계속 회귀해야만, 즉 반복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지시관계의 유지는 보이지 않는 ‘권위’를 전제합니다. 특정 단어에 특정 사물을 배분하여 의미를 생성하고 누구나 거기에 따르게 하는 ‘권위’ 말입니다. 그리고 언어생활은 이 ‘권위’에 대한 복종을 전제합니다. 믿고 따라야 안전한 ‘의미’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4 이런 의미에서 모든 단어는 명령어가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언어와 현실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고, 하나의 기호(단어)가 이제는 다른 기호(단어)를 지시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욱 발전하면 (아니, 더욱 악화되면) 이러한 지시관계가 무한하게 이루어져서 하나의 기호가 결국 다른 기호들에 의해 회귀하게 되는 순환적 체계가 형성됩니다.5 이 체계는 자본에 의하여 구조화된 체계와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든 현실이 자본의 순환운동으로 환원되고 모든 사물은 자본이 거쳐 지나가는 한 계기이듯이, 기호의 순환체계에서 언어현실은 실제 현실로부터 분리된 기호들의 순환운동으로 구성되며, 여기에 전체 과정을 지배하는 자본에 해당하는 이른바 지고의 기표 혹은 독재자 기표(the Signifier)가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사물화’의 극단에 있는 것은 모든 질적인 차이가 제거되고 오직 양적인 차이만이 남는 형태의 언어, 비트(bit) 수로 계산될 수 있고 컴퓨터에서 재생될 수 있으며 정보교환의 토큰처럼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언어의 ‘사물화’의 가장 완화된 형태는 언어의 표준화일 것입니다. 언어의 표준화란 언어에서 상황과 맥락에 밀착된 일회적 의미를 모두 제거하고 언제 어디서나 반복되는 의미를 고정해놓은 것입니다. 사전은 표준화된 언어의 저장고입니다. 언어의 표준화란 건축재료인 벽돌의 표준화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나 같은 크기의 벽돌을 사용하듯이, 어디서나 같은 의미를 지니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벽돌의 표준화가 양적인 고려, 즉 대량생산의 필요성에서 시작되었듯이, 언어의 표준화도 대중교육 및 대중매체의 발달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언어의 표준화는 현대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또한 표준화된 벽돌을 가지고도 상당히 다양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듯이, 표준화된 언어를 가지고도 어떤 종류의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보다는 많은 수의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소설의 경우에 더 유리하겠지요.)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건축이 가능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에서는 소재의 자연스러운 차이를 살리고 결합해서 하나의 건물을 만들어냅니다. 서양에서도 고딕 건축이 이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표준화는 작가의 외부에서 혹은 위에서 명령처럼 내려온 것인 데 반하여, 이 경우에는 구성요소의 선택이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스스로의 힘과 판단에 입각하여 출발하는 것이 미리 정해진 상황 혹은 명령에 대한 순응에서 출발하는 것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데 어떤 차이가 나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건축의 구성부분이 자연스럽게 서로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액체 혹은 기체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성부분이 고체로 된 경우에 작품은 일종의 구조물이 되고 그 ‘구조’가 전체의 핵심이 되겠지만 구성부분이 유동성을 띤 경우에는 작품은 기본적으로 ‘흐름’이 됩니다. 이 ‘흐름’을 구조의 측면에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건축물을 파악하는 관점과 강이나 바다를 파악하는 관점은, 공통점이 없지는 않겠지만 핵심적 강조점은 다르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좋은 작품이란 이러한 ‘흐름’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6

 

 

3. 시와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

 

위의 논의로부터 내릴 수 있는 잠정적 결론은, 시는 그 창조성의 온전한 발현을 위해서 이제 그 표현재료인 언어에서부터 ‘사물화’와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언어가 가진, 새로운 ‘비물질적 실존공간’을 창출하는 능력의 회복을 필수적으로 포함합니다.

언어의 ‘사물화’와의 싸움은 직접적으로는 언어영역에서의 싸움이지만 그 영향이 언어에 국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비물질적 실존공간’을 여는 것은 곧 새로운 주체성, ‘자본주의적 주체성’과는 다른 주체성의 창출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다시 자본주의가 원하는 바와는 다른 차원의 실존의 창출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비물질적 사물화’가 더 고도화된 단계의 자본주의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초기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또 물리적으로 힘이 모자라니까 자본의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자본의 원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습성이 양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물질적 사물화’는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대량생산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주체성’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습니다. ① 개인 혹은 집단은 그 주위세계(자기와는 다른 존재, 타자성)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됩니다. 양자 사이의 경계는 영원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② 자기와는 다른 존재(타자성)와 상호교류(상호협동)하는 능력이 없으며, 경쟁하는 능력만이 남습니다. ③ 개인 혹은 집단은 사물과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전유의 대상—먹고 마시고 사용하는 대상—이나, 아니면 소유의 대상으로밖에는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④ 따라서 측정될 수 있고 계산될 수 있는 것 이외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⑤ 모든 주체성(개인 혹은 집단)은 질적으로 동일하며 따라서 숫자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⑥ 또한 자본주의의 성립과 함께 일어난 주객분리 현상으로 인하여7 개인의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고 이에 따라 공적 인간과 사적 인간이 분리됩니다. ⑦ 이렇게 분리되고 분열된 주체성은 자신을 창조적으로 바꿀 줄 모르며 이미 정해진 구조 혹은 코드 내에서 자신의 위치 혹은 물질적 이익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것만을 자신의 실존적 삶의 고양으로 간주합니다. 이 경우에 주체는 이 세상에 새로운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 지배적 구조의 생명유지에 복무하게 됩니다.

198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던 자본주의 극복의 기획은 국가권력을 중심에 놓고 작성되었으며, 새로운 국가권력(피지배계급의 권력)으로 기존의 국가권력(지배계급의 권력)을 대체하는 데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러한 기획에 따라 형성된 주체성은 진지하고도 강력한 변혁의 에너지를 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전도된 형태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정해진 혁명코드(code)에 따라 치열하게 실천하는 데서 혁명성을 보았지, 혁명코드 자체의 창조적 변이(變異)와 주체 자체의 창조적 변이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0년대에 지배적이었던 전위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중앙에 세우고 중앙에서 주변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진리’를 배분하는 식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삶, 자본주의의 코드로는 장악되지 않는 삶의 창출보다는 기존의 실존구조 안에서 정치적 권력의 교체만을 가져오는 데, 즉 ‘물질적 이익’을 새로운 비율로 분배하는 데 시야를 국한하기 쉽습니다.8

이제 자본은 그 위력의 가시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존립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 단계를 포함한 자본주의 초기의 물리적 강압은 이제 통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주체성’과는 다른 주체성의 창출에 직접 기여하는 문학이 자본주의의 극복에 근본적인 차원에서 복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제는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앞에서 저는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특성 중 하나가 기존의 구조 및 코드의 승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제대로 된 문학작품은 항상 새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기존의 코드에 대한 부정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아니, 작품이 열어놓은 가상의 공간에서만 작동하는 새로운 코드를 생성함으로써 그 부산물로 자동적으로 기존의 코드를 부정하게 되며,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 긍정을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바꾸어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작품은 그 창조성을 오직 스스로에게만 빚지고 있으며 문학작품이 창출하는 주체성은 늘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한 관계를 늘 갱신하여 풍부하게 하는 주체성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작품에서 기존의 코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사전이 구현하는 표준화된 언어가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시의 창조성의 핵심을 이루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새로운 코드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코드가 처리 혹은 변환되는 방식은 작품과 작가마다 다를 수 있고 또 장르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김수영(金洙暎)의 시 중에서 난해시 계열에 속하는 시들처럼 아예 처음부터 기존의 코드를 거의 깨고 시작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다수의 소설들처럼 기존의 코드를 따르는 듯하다가 은근히 타고 넘는 유형도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코드를 열심히 전달하는 데 치중하거나 아니면 그 안에 갇혀버릴 때, 그 작품은 새로운 주체성의 창출에 기여할 수 없으며, 결국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번성과 강화에 복무할 뿐일 것입니다.

시는 소설과 비교해볼 때 기존의 코드와의 싸움, 새로운 ‘비물질적 실존공간’의 생성을 더 좁은 공간 속에서 더 집중적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좋은 시작품이나 좋은 소설작품은 공히 가장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시(poesy, 창조)에 속한다고 할 것입니다. 문학의 핵심으로서의 ‘시’가 자본주의와는 다른 실존을 자본주의체제에 창출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극복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제 이 점을 리얼리즘과의 관계에서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시와 리얼리즘

 

리얼리즘문학론은 자본주의 극복의 과제를 문학성(예술성)과 연결시켜 파악하려고 한 노력의 표현으로서, 민족문학론·민중문학론·제3세계문학론의 핵심을 이루는 이론이었습니다. 한국의 리얼리즘문학론은 문학을 현실반영의 차원에 국한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충실한 반영(더 자세하게는 전형을 통한 총체적 현실반영)을 중요한 핵심으로 강조해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반영’은 묘한 애매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주로 ‘모사’나 ‘재현’으로 해석되어왔습니다. ‘모사’로 해석되는 경우에 대한 비판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리얼리즘론은 사진기가 하는 바와 같은 형상적 유사성의 복제를 늘 최고의 예술적 성취에서 배제해왔습니다. 문제는 ‘재현’으로 해석되는 경우입니다. ‘재현’은 표현재료(문학의 경우에는 언어)와 실제 현실의 관계를 지시관계로 축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시관계의 정확함을 위해서는 유동하는 양측을 고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현실은 고정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기의’에 해당하는 가상의 고정된 의미를 설정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물질적 존재─구어의 경우에는 소리라는 물질적 현상, 문어의 경우에는 문자의 형태─를 고정시켜 ‘기표’에 해당하는 것으로 축소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과학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이 되고 동일한 활동의 순환적 반복으로 이루어진 일상성이 현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정확한 ‘재현’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객관주의적 환상이 점차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에 조응하여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시관계로 환원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언어에서 지시관계 이외의 요소가 점차 배제된 결과, 언어는 기호(기표)로 환원되어 의사소통의 매체이거나 정보전달의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사’나 ‘재현’으로 해석되기 쉬운 ‘반영’ 개념을 굳이 버리지는 않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넘어선 ‘표현’의 차원으로 관심을 확대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원래는 현실의 일부였던 것이 ‘비물질적 실존공간’을 창출하는 것을 ‘표현’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9 여기에 사물에 대한 지시관계가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부산물—결코 절대화되면 안될 부산물—이지 살아있는 핵심은 아닙니다.10 이는 고흐(Vincent van Gogh)의 해바라기 그림이나 쎄잔느(Paul Cézanne)의 사과 그림에서 어떤 특정의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그 작품들의 핵심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얼굴을 한번 예로 들어봅시다. 얼굴 근육의 일정한 움직임—이는 물질적 현상입니다—은 우리가 ‘웃음’이라고 부르는 바의 ‘표현’을 하게(표정을 짓게) 합니다. 여기서 ‘표현’은 확연하게 무엇을 지시하거나 재현한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상황이 구체적으로 주어진다면 그것이 웃는 이의 마음의 어떤 상태를 재현한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그 웃는 얼굴에서 느끼는 어떤 것,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을 ‘재현’이라는 말로 온전히 포착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을 보고 당신의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재현’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일일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일상적 언어생활에서조차도 언어가 ‘재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말하는 사람의 어조나 동반되는 제스처, 주변의 상황─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원하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분명 일반적 의미로 시원하다고 말한 것과는 다르겠지요─등에 의하여 다른 표현내용을 갖는 것을 항상 경험할 수 있습니다. ‘표현’의 관점에서 볼 때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매체이거나 정보전달 수단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의 구체적 실존을 생성하는 어떤 것입니다. 의사소통 매체나 정보전달 수단이란 언어가 갖는 낮은 차원의 기능입니다.

문학작품의 경우에 그 ‘표현’은 고도화되고 집중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상적 세계를 열어놓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작품들이 각각 열어놓은 가상적 세계들이 모두 배열된 4차원적 공간을 실존의 핵심적 부분으로 삼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주체성’은 이 4차원적 공간 속에 배열된 각기 다른 코드를 가진 여러 세계들을 가로지르며, 작품을 새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변이를 겪는 ‘주체성’으로서 앞에서 말한 ‘자본주의적 주체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주체성’입니다.

80년대에 일종의 정점에 다다른 리얼리즘문학론은 대체로 ‘표현’의 차원에 크게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전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다른 자리에서의 과제로 넘깁니다.) 그러다보니 문학이 현실에 대한 앎(지식)을 제공하되 다만 앎의 종류가 과학이나 철학과는 다르다(미적 현실반영은 특수성을 중심범주로 한다는 루카치G. Lukács적 통찰)는 것을 역설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물론 분단 이후 의도적으로 현실과의 연관을 끊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한국 문학계에서 문학이 현실에 대한 앎을 제공한다는 주장이 가진 중요성은 정말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문학이 가진 능동성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비물질적 실존공간’ 혹은 ‘제3의 영역’은 현실에 대한 앎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닙니다. 주객이 애초에 분리되지 않은 이 공간은 유한(有限)이 무한(無限)과 접하고 이미 알려진 것이 미지의 것과 접하는 공간으로서 현실에서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실현될 수도 있는 것, 즉 가능한 것들에 대한 실험과 모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서는 “뜻밖의 일”(김수영)들이 수없이 유성처럼 스쳐지나가며, 모든 시간은 “아까와는 다른 시간”(김수영)입니다.

현대사회는 바로 이러한 모험과 실험과 창조의 공간을 고사(枯死)시키는 경향이 지배적인 사회입니다. 자본의 지배란 특정 계급이 집중적으로 물질적 이득을 취득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고사의 일반화를 의미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공히 소외되어 있다고 맑스(K. Marx)가 말한 취지가 바로 이런 데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이 가진 창조적 잠재력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서 시는 소설과 달리 현실에 대한 앎을 제공한다는 부담을 애초부터 안 가져도 되며, 따라서 새로운 실존공간을 창출하는 모험에 좀더 자유롭게 나설 수 있는 문학장르입니다. 물론 이것이 시라는 장르를 소설이라는 장르보다 우위에 놓는 것도 아니고, 또 반대로 시 창작이 더 쉽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르간의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편의 시작품이 자본주의적 공간과는 다른 실존공간, 자본주의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바로 이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 세워서, 종국에는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와는 다른 역사 단계에 실제로 들어서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창조적 핵이 되느냐 아니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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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말하는 ‘실존’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일단 실존이라는 말로 인간의 실제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차원을 그중 특별하게 우세한(지배적인) 차원을 설정하지 않은 채로 온전하게 지칭하고자 합니다.
  2. “The New Aesthetic Paradigm,” Chaosmosis: An Ethico-Aesthetic Paradigm, trans. Paul Bains and Julian Pefanis (Bloomington &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103면
  3. ‘제3의 영역’과 ‘만남의 장소‘는 영국의 비평가 리비스(F.R. Leavis)의 용어입니다. 옛 영국의 유기체적 공동체에 대한 향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리비스는 ‘탈구조주의’의 대표자로 분류되는 가따리(그리고 그의 공동작업자인 들뢰즈G. Deleuze)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창조성과 관련된 양측의 견해는 서로 매우 중요한 점에서 상통한다는 것이 저의 판단이며, 졸고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에서 이러한 판단을 소략하게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아울러 지적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통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양측의 평가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길게 토를 달기는 어렵지만, 아일랜드의 소설가 조이스(James Joyce)에 대한 평가가 그렇습니다. 들뢰즈·가따리는 조이스를 대체적으로 창조적 생성의 언어를 구현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는 반면에 리비스는 특히 『율리씨즈』(Ulysses) 후의 조이스의 언어실험의 결과를 “허식성”과 “기계적 조작”이 만연된 것으로 봅니다.
  4. 서양의 언어이론에서 ‘기표’(the signifier)란 언어의 물질적 존재가 고정되는 것을 나타내며, ‘기의’(the signified)는 ‘비물질적 실존공간’이 고정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5. 이를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호작용체계’(signification regime)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대해서 더 상세한 논의는 들뢰즈와 가따리가 공동으로 저술한 『천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ta Press 1987) 중 5장을 참조하십시오.
  6. ‘구조’와 ‘흐름’의 대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로는 졸고 「새로운 문학을 위하여」(『내일을 여는 작가』 2000년 봄호)를 참조해주십시오.
  7. 이에 대해서는 졸고 「새로운 문학을 위하여」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8. 이러한 전도를 통한 닮음을 어느 사회에서나 그 변혁운동 발전의 특정 시기에 시행착오로 거치게 마련이라는 점, 그리고 예컨대 러시아의 경우처럼 나중에 변질될 수는 있어도 애초에 그 동기는 진정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9. 이는 ‘주관적’ 감정이나 심리 혹은 견해의 ‘표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일단 ‘표현’이라는 말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중요하지, 꼭 이 말을 써야 하는지 아닌지는 문제의 촛점이 아닙니다. 혼란의 여지가 있다면 더 좋은 말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10. ‘비물질적 실존공간’의 유동성과 비결정성이 반복과 영속적 회귀로 인하여 결정성(굳어짐)을 획득할 때 재현관계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언어생태학적 관점—만일 이러한 것이 있다면—에서 볼 때 재현관계는 ‘표현’의 사망, ‘표현’의 시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은 것들도 쓸모가 있기에 재현관계도 쓸모는 있습니다만(음식은 대부분 죽은 것들인데, 우리가 먹어서 소화하면 살아있는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