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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점검 | 의료대란과 의료개혁
국민과 함께하는 의료개혁을 위해
황상익 黃尙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의학사 전공.
R선생에게.
지난 8월말이었나요? 태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던 보라매공원에서 우리가 만난 것이. 그리고 그것이 몇해 만이던가요. 하지만 아쉽게도, 서둘러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야 한다기에 그날 집회에 대해서 또 요즈음의 ‘의료사태’에 대해서도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네요.
나는 올해 들어 학생들, 전공의들 그리고 교수들 집회에 몇차례 참석해 보았지만, 그렇게 큰 모임은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보라매공원이 가득 찼으니까 2만명, 아니면 3만명쯤 되는 건지. 그리고 점점 더 거세지는 강풍과 폭우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혹은 연사들의 연설에 혹은 학생과 전공의 들이 벌이는 공연에 눈과 귀를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그러한 놀라움은 한편으로는 그 규모와 열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사회의 반응과의 커다란 차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파업’과 ‘수업거부’에 직접 참여하거나 심정적·재정적 지원과 동조를 아끼지 않는 대부분의 의사나 의과대학 학생들과, 그것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냉담한 적지 않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라고 할 수 있는 괴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적지 않은 의사들이 그러한 점 자체를 부정하거나, 현상은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정부와 언론과 시민단체의 농간이나 왜곡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말이지요. 나는 지금의 의사파업이 진정 ‘국민을 위한’ 그리고 ‘국민과 함께하는’ 올바른 ‘의약분업’과 ‘의료개혁’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라면, 우선 이 괴리에 대해 의사들이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의사들이 내세우는 명분에 합당할 뿐만 아니라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길이 될 테니까요.
관찰자마다 견해가 똑같지 않겠지만, 나는 의사들이 그동안의 폐·파업 투쟁으로 우리 사회 보건의료의 산적한 문제점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의사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일정 정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넉달이라는 기간이, 다급한 환자들과 그들에게 곧 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의사들에게는 엄청나게 긴 세월이지만 사회적 투쟁의 측면에서 보자면 길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의사들의 대의명분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R선생도 80년대 학창시절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참여해서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정신이 나가거나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다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반파쇼투쟁이나, 인간 세상에 그것도 문명국가라고 자부하는 사회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인간적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싸운 노동운동의 대의를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그들에게서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요.
나는 1980년 봄, 연건동 캠퍼스를 박차고 서울역과 종로를 향해 의연히 달려나가던 의과대학 학생들의 모습과 그것을 감격스럽게 지켜보던 나 자신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이해에 직접 관계있는 것만 챙긴다며 우물안 개구리, 반지성적·몰역사적인 비겁자라고 다른 학과 학생들로부터 오해(?)와 지탄의 대상이 되기만 하던 연건의 학도들이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없이는 제대로 된 의학도 의사도 없다며 말 그대로 ‘똘똘 뭉쳐’ 일어나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또 최루탄과 곤봉으로 시가전을 방불하던 1987년 6월의 거리에서도 구급낭을 등에 걸머진 자랑스런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연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었지요. 나는 오늘날 의사들의 투쟁이 그러한 모습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온갖 비난과 손실을 무릅쓰고 투쟁에 나서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말이지요.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국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 동안의 이른바 ‘가두투쟁’의 결과는 어땠나요? 학생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명분과 방법의 투쟁이었지만 국민들은 뜻밖에도 냉담하였지요. 정말로 뜻밖이었지요. R선생은 당시에 고등학생이라 분위기를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때는 그랬답니다. 나는 당시 우리 학생들의 실망어린 눈빛, 아니 그보다는 국민들을 원망하는 소리가 눈과 귀에, 아니 가슴에 지금도 선합니다. 내 마음도 터질 지경이었으니까요. 1987년 6월은 어땠나요? ‘6·10항쟁’ 전날, 아니 당일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신문과 방송은 ‘과격’ ‘난동’ ‘반민주’ ‘무질서’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단어와 그보다 더 폭력적인 표현으로 도배질되었지요. 그러나 국민들의 반응은 7년 전과는 전혀 달랐고, 결국 승리했지요. (기만적인, 이른바 ‘6·29선언’이라는 것말고 무엇을 얻어냈는가라며 냉소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요.)
나는 의사들도 6월항쟁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6, 87년 어간의 국민의식과 동떨어지고 오히려 현학적이라고나 할 ‘투쟁노선’으로 6월을 치렀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직업적 활동가가 아니라면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구호와 전략·전술로 승리가 가능했을는지요. 나는 ‘직선제 쟁취’라는 대중적 구호와 목표를 내세우고 거기에 걸맞은 전략·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6월항쟁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 10만의 의식화된(?) 학생들이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 집결했을 때 군부독재정권은 끝장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기도 했지요, 우리는. 그러나 6월의 현장에서야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10만의 열 배, 스무 배, 또 그 이상의 힘이 합해질 때 가능한 일이라는 진실을 발견하게 된 거지요. 학생운동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주력군은 역시 국민이고 민중이었습니다. 국민의 지지와 참여 없이는 궁극적 승리가 가능하지 않다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진리를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앞에서 나는 의사들이 투쟁의 대의명분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어느정도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의사들의 단결된 힘이 크게 작용했을 터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우리 국민들이 의료에 대해 진작부터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아마도 의사나 병원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을 테지요. 그런데 의사들은 이 몇달 동안 우리나라의 의료문제가 왜곡된 데는 역대 정부의 잘못이 크다는, 아니 결정적이라는 점을 지난 몇십년 동안 했던 것을 다 합한 것보다도 훨씬 큰 목소리로 또 훨씬 구체적으로 외쳤습니다. 이제 많은 국민이 병원에서 불편했던 점, 의사들에게 가졌던 불만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왜 국민들은 의사들의 투쟁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요? 나는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우선은 투쟁의 방법입니다. 아마 적지 않은 의사들이 파업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그것 외에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고 할 테지요. 정부에 항의해보기도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집회와 시위를 갖기도 했지만, 그것들만으로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최후의 ‘무기’인 파업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어쩌면 나처럼 파업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고 거세게 항의할지도 모르지요.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의사단체나 언론기관 등의 인터넷 게시판은 온통 그런 항의와 분노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우선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사용하더라도 적시적소에 매우 제한적으로 써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파업의 윤리적 측면이 아니라 유용성과 효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득과 실을 냉정히 따져보자는 것이지요. 의사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정당함과 정부의 부당함을 국민들에게 충분히 알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여전히 파업이 가장 유용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학생과 전공의 모두가 유급을 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져야만 국민들이 온전히 의사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의사들의 편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일까요?
의사들은 분명한 어조로 ‘국민들을 위한’ 파업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그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은 투쟁의 대상이 잘못된 제도를 만들고 잘못된 정책을 펴온 정부와 옆에서 말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잘못된 정부를 거들고 의사들을 ‘매도’만 하는 언론과 ‘시민단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참의료 진료단’과 같은 봉사기구를 통해 환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있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국민들은 의사들과 똑같이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파업만은 제발 그만”이라고 하는 것처럼 비칩니다, 내 눈에는. 인식의 차이라고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요? 지속적 파업만이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구요? 장기간의 파업이나 투쟁을 통해 승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설치처럼 1년이 넘는 장기간의 투쟁으로 목적을 달성한 경우도 있지요. 아니, 군부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30여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했지요. 의사들은 결코 국민이 투쟁의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돌아갈 피해도 극소화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과연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의약분업이 국민과 환자들에게 불편함을 줌으로써 의약품 오·남용 방지 등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처럼 파업도 불편함, 나아가 환자들의 피해를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효과가 없는 파업이라면 이미 파업으로서의 의의를 상실한 것일 테지요. 다시 87년으로 돌아갈까요. 6월항쟁이 투쟁의 수위를 운동권에서 국민들의 눈높이 수준에 맞춘 것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했는데, 그 방법은 어떠했습니까. 앞선 시기의 상대적으로 과격한 방법에서 벗어나 일반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온건한 방법을 취했던 것도 또 한가지 주요한 요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과격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돌아간 것이 얼마나 되었던 걸까요. 정말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정권과 이해와 운명을 같이하는 언론에 의해 허황되게 조성된 막연한 불안감말고 무슨 큰 피해와 불편함이 국민들에게 끼쳐졌던 것일까요? 나는 이 점을 의사들이 잘 파악했으면 합니다.
그동안의 의료가 파행적인 데는 정부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의사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들도 잘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모든 의사는 아닐 테지만, 적지 않은 의사들이 그동안의 잘못된 의사들의 행태에 대해서 국민들과 다른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설령 의사들의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부분 잘못된 의료제도와 정책에 기인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역대 정부가 공언한 재정부담을 제대로 하지 않아(해가 갈수록 오히려 줄어들어) 의료보험재정이 점점 더 취약해지고, 그에 따라 의료보험수가가 원가에 훨씬 미치지 못할 정도로 낮아짐으로써 의사들은 병·의원을 경영하고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마련하기 위해서는 편법과 불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의사들의 처치료와 기술료를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턱없이 낮게 책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검사를 하거나 약을 쓰고 제약회사 등과 부당한 거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충분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 환자마다 고통과 고충을 일일이 들어주고 그들에게 성심껏 설명하다가는 병원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니 ‘3분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나도 의사들의 그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동합니다. 기억할지 모르지만 R선생이 학생일 때도 그랬고 지금도 어느 자리에서든 그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한답니다. 연전에 대한의사협회가 내게 초안 작성을 의뢰한 의사윤리지침(안)에 대해 공개토론을 벌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마련했던 그 초안에 “의사는 국민의 건강을 위해 적절한 의료제도, 충실한 의료설비, 적정한 의료수가 등 최선의 의료환경 조성을 국가와 사회에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지요. 그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한 어느 변호사가 ‘윤리지침’에 그런 조항이 들어가는 것은 어색하고 걸맞지 않는다는 요지의 지적을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의사들의 개인적·집단적인 노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의사들이 윤리적인 의술을 펼칠 수 있도록 의료제도를 비롯하여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라고 답변했지요. 나는 그러한 점이 의료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성인군자’가 아닌 한 도저히 윤리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윤리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 변호사는 토론이 끝난 뒤 사석에서 그 조항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의사들이 스스로 그런 언급을 하는 것은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다시 지적하더군요. 모든 잘못을 ‘네 탓이요’로 돌리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주장은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민단체나 언론은 배경과 과정은 생략한 채 온통 의사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매도한다고 많은 의사들이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의사들은 ‘교과서적인 진료’를 원하는데, 그러한 진료가 가능한 환경은 마련해주지 않은 채 현상과 결과만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나도 비슷한 취지의 언급을 한 적이 있다고 방금 말했지만, 지금과 같은 파업투쟁 과정에서 의사들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적잖이 당혹스럽습니다. 한편으로 직업적 자부심과 개인적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의사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은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자부심과 자긍심이 어디에 남아 있느냐는 의사들도 적지 않은 것 같더군요. 환자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것은 옛날 일이고, 멱살이나 안 잡히고 도둑놈 소리 안 들으면 다행이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도 종종 들리더군요.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대해 예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그것이 의례적으로 불려왔다면, 이제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생님’ 소리를 듣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도 내가 많은 의사들과 달리 생각하는 것일지 몰라도,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의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의사들이 자조할 정도는 결코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언짢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 몇달 동안 국민들의 인식이 나빠지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것이지요.
나는 의사들이 그동안의 자신들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것이, 그 뿌리라고 할 잘못된 의료제도와 정책을 지적하고 시정하는 것만큼이나 현싯점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당위를 넘어서서 국민들의 더 큰 지지를 이끌어내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도 여깁니다. 요즈음 들어 의사사회 내부에서 그런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여기지만, 내 눈에는 아직 구체성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테지요. 더욱이 정부와의 ‘투쟁’이라는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그런 일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일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것이고, 국민들은 의사들의 변화된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다수 국민들이 드라마 속의 ‘허황된’ 허준의 모습을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물정 모르거나 황당무계하지는 않지요. 나는 의사들이 “배경과 원인이 어떻든 그동안의 의사들의 행태에는 잘못된 점이 많았다”고 하고, 거기에 대해 오히려 국민들이 의사들에 앞서서 “그것이 어떻게 의사들만의 탓이냐. 그렇게 된 데는 구조적인 잘못이 더 크다”는 식의 구도로 바뀔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의사들의 선도적인 자성과 자정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미국의 ‘정규의사’들이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종(同種)요법사나 약초치료사와 같은 ‘유사의료인’들과의 투쟁에서 결국 승리하게 된 데는 그 당시 발전하던 ‘과학적인’ 의학 지식과 기술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이와 더불어 의사사회 내부의 자정운동도 큰 몫을 했지요. 그래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의사들의 ‘직업적 권위’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의사들은 스스로의 권위와 권리를 ‘쟁취’하고 ‘형성’해왔으며, 국민들은 그것을 ‘부여’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많이 언급되는 미국의사협회의 윤리지침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사정은 유럽의 경우도 비슷하지요.
순서가 바뀌었지만 잠깐 ‘의사파업’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내가 알기론 적지 않은 의사들이 그러한 용어와 표현 자체를 무척이나 싫어하더군요. 자신들의 직업적 행위는 여느 노동과 크게 달라서 노동자들에게 쓰이는 파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의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선민적’이라고 비칠 수밖에 없는 그런 생각을 대다수 국민들도 납득할까요. 나는 그런 전근대적인 관행적 의식을 깨는 노력도 ‘국민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6월 하순, 전국 대부분의 의사들의 참여하에 ‘준비 안된 의약분업’을 비판하고 배척하면서 시작된 1차 의사 폐·파업은 준비가 안되기로는 의약분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응급환자와 중환자의 진료마저 방기한 점이 그렇지요. 잘 알다시피 응급환자 진료 거부는 실정법으로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법 이전에 저 히포크라테스 시대 이래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의사 스스로도 인정한 적이 없는 일이지요. 폐·파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이 점도 의사들의 자발적 동참이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대한의사협회와 그 산하 실무투쟁기구인 ‘의권쟁취투쟁위원회’는 성명서 발표, 집회와 시위, 휴진 등으로 투쟁수위를 높여가며 폐·파업을 예고하면서 준비해왔다고 하지만, 막상 벌어진 사태를 감당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벅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71년 여름 주로 처우 문제를 둘러싸고 자연발생적으로 벌어진 몇몇 병원의 ‘수련의 파업’을 비롯하여 소규모 파업은 더러 있었지만, 올해와 같은 전국적 파업은 처음이기 때문일 테지요. 이처럼 의사파업은 응급환자·중환자 방기와 같은 오점과 그밖에 드러나거나 또는 드러나지 않은 여러 문제점을 남겼으며 또 그것은 누천년에 걸친 의사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에 먹칠을 한 결과를 낳았지만, 사태가 진행되면서 문명국가라면 당연히 인정해야 할 의사들의 ‘파업권’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전향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이며, 이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사의 파업권과 사용범위 등을 법으로 정하고 의사사회 내부에서도 파업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켜 의사파업의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 의사와 환자 그리고 사회를 위해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료개혁을 향한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의사파업이 우리 사회의 파업과 노동운동 일반에 대한 지평이 확대되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그동안 파업이나 노동운동이라면 흔히 임금인상이나 좁은 의미의 노동조건 개선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어왔지요. 또 사용자와 정부는 그러한 인식과 법 규정을 구실로 노동조합의 민주화운동이나 개혁 요구를 거부하거나 무시하기도 했구요. 병원 전공의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7월말부터의 2차 의사파업은 ‘의료개혁’이라는 의료계 전반과 전사회적인 의제를 파업의 핵심적인 화두로 삼음으로써 의사파업의 양상을 일신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진일보시켰다고도 생각합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의사파업은 의료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런데 잘 알다시피 이 ‘의료개혁’이라는 파업의 슬로건은 이번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지요. 1980년대말 여러 병원에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초기의 절박한 사정과 미숙함을 벗어나면서 ‘의료개혁’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지요. 나는 당시 의사들이 그러한 움직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답니다. 그거야 어쨌든 지금 특히 젊은 의사들이 활발하게 의료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 보기 좋습니다. 바라건대 의사들이 기왕에 그런 운동을 펼치던 단체나 개인들과 함께한다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의사들이 증오(?)하기까지 하는 시민단체와 노동조합들, 그리고 파업사태를 둘러싸고 의사들의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또다른 의사단체나 의사들과 함께할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R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지금은 서로간에 감정의 골이 깊고, 구체적인 ‘전략·전술’에도 차이가 적지 않지만 내 눈에는 서로간에 합의할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의사들의 주장 그대로 의료개혁이 최고의 목표라면 눈에 드러나는 차이들을 극복하고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내가 사정을 너무 몰라서 하는 이야기일까요? 나는 그러한 연대야말로 6월항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료개혁의 주력군인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이 길어진 요즈음이지만 이제 동이 터오는군요. 의료개혁의 내용에 대한 내 생각도 R선생에게 들려주려 했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군요. 몇마디만 보태기로 하지요.
문제점 투성이인 우리나라 의료제도와 정책 중에서도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이 정부의 규제는 지나치게 많고 투자는 지나치게 적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의료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 점부터 고쳐야 한다고들 하지요. 얼마 전 세계보건기구(WTO)가 발표한 「2000년 세계 보건실태 보고」(The World Health Report 2000)를 보니까, 우리나라의 보건의료비(1997년)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리 적은 편은 아니더군요. 물론 절대액수는 이른바 선진국에 비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요. 그 자료에는 국민 1인당 보건의료비가 미국은 4187달러, 일본은 2373달러, 영국은 1303달러, 우리나라는 700달러로 나와 있더군요. 경제 수준에 비해서는 보건의료의 사정이 좋다는 쿠바는 131달러이고, 중국은 불과 20달러였어요. 그리고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우리나라가 6.7%로 미국의 13.7%에 비해서는 절반 수준이지만, 일본의 7.1%, 영국의 5.8%, 쿠바의 6.3%와는 엇비슷합니다. 그런데 전체 보건의료비 중에서 공공부분 지출은 우리나라가 38%로, 영국의 97%, 일본의 80%, 쿠바의 88%에 비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사적(私的) 의료체계의 대표라는 미국의 44%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이 25%에 불과해 일반적 짐작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아서는 우리나라의 보건의료비가 적다고 할 수 없는데, 문제는 그것이 주로 개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점이지요.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1977년부터 의료보험(국민건강보험)제도를 실시하여 이제는 전국민이 수혜대상이지요. 그 자체만으로는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만하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ystem)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지만, 사회보장적인 의미를 가지고도 있지요. 이렇게 큰 틀은 어느정도 공적인 것으로 해놓고 부담은 사적인 것 위주로 되어 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국민들은 보험료는 보험료대로 내면서 실제로 병원을 이용하려면 또 ‘본인부담금’이라는 이름의 별도의 돈을 내야 하지요. 의사들은 원가에도 못 미치는 보험수가 때문에 불만이 폭발한 상태구요. 이렇듯 국가(정부가 아닌) 전체로는 돈을 제법 쓰면서도 모두가 불만인 것이 지금 우리의 실정입니다. 나는 지금이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정부의 재정부담 몫을 40%나 50%로 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의료비의 총체적인 개선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6.7%’를 제대로 잘 쓰자는 것이지요. 그래야 국민들도 안심하고 병원을 이용할 수 있고, 의사도 보험에서 손해나는 부분을 메우기 위해 ‘교과서적인 진료’에서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의료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이렇게 전자우편으로말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그때 오늘 내 이야기에 대한 견해도 듣기로 하구요. R선생이 학생시절 나를 찾을 때 내 역할은 주로 듣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었네요. 자, 그러면 오늘도 환자들의 건강과 R선생의 직업적 보람을 향해 즐거운 시간을 가지세요.
2000년 10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