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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타는 혀’의 칼날
이명원 비평집 『타는 혀』, 새움 2000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때로 글보다는 사람 자체를 먼저 만나는 경우가 있다. 내게 ‘이명원(李明元)’이란 이름도 그러했다. 이런저런 풍문이나 신문기사, 인터넷상의 자유게시판에서 말이 만들어낸 사람으로 그를 먼저 만났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한 젊은 평론가의 대학원 자퇴이유서’란 부제가 붙은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말』지의 글을 보게 되었다. 표절시비에 관한 논문 발표로부터 시작하여 대학원 내에서 교수와 대학원생 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한 고백은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비평집 『타는 혀』를 읽게 되었다. 최근의 사건이 갑작스럽게 표출된 우발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번민하며 결정한 ‘독립적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길찾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자리는 책이 주인공인지라 ‘이명원 사건’의 진원이 되는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을 중심으로 ‘화제’가 아닌 ‘서평’의 말머리를 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① 『한국근대소설사 연구』(이하 『연구』)의 2장, 4장만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이 글들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하 『기원』)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씌어진 것이다. ② 아니 한마디로 말하면 표절 혹은 번안에 가깝다. 더구나 코오진의 역사적 문맥과 가치개념을 사상함으로써 기계적인 표절에 불과하여 ‘현해탄 콤플렉스’에 김윤식 자신이 함몰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분석과 주장에 대해 나는 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수긍하지만 ②에서 기계적인 표절에 불과하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다소 생각을 달리한다. 이명원의 지적대로 김윤식(金允植)이 4페이지에 걸쳐 기술한 내용(53〜56면)은 코오진의 저서 75〜78, 84면(민음사판 번역서 기준)을 고스란히 옮겨 적으며 짜깁기하였다. 그러므로 이 점만을 문제삼는다면 표절 혐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뒤에 코오진의 저작에 대한 각주가 나온 것을 두고 이를 김윤식적 글쓰기의 한 버릇으로 ‘너그럽게’ 보려는 이도 없지 않은 듯하나 아무래도 그것은 아전인수다. 가령 코오진의 저서에 인용된 것을 그대로 재인용한 이또오 세이(伊藤整)의 글이나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부분은 일부러 원전을 찾아 면수까지 정확히 밝히고 있는데(코오진의 저서에는 이들의 책이름만 부기되어 있다), 정작 코오진에 대한 각주는 “柄谷行人,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講談社, 1980 참조”로 처리되어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코오진의 분석과 주장이 김윤식 『연구』의 중요한 이론적 밑기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리말에서 김윤식은 “우리 것과 근대적인 것의 자리를 매기기 위해서는, 헤겔주의자들의 생각을 이끌어들이기 이전에 일단 기호론적인 점검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예로 드는 것이 새로운 시각에 의한 언문일치운동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코오진의 『기원』이 주장하는 핵심이다. 말하자면 김윤식 본인이 『연구』의 가장 득의의 영역이라 간주했고, 실제로 제도적 장치로서 ‘풍경의 발견’ ‘고백체 형식’ ‘내면’ 등이 이후 김윤식 저작의 중추 개념으로 기능하고 있는만큼 단순한 인용과 각주상의 문제가 아니라 코오진에 대한 학문적 예우와 그와의 대결이 당연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곳에도 없다.
또한 이명원은 코오진이 의미하는 개념을 김윤식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 분석에 대해서는 이명원 역시 일면적 이해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다. 분명 『기원』은 이명원의 지적대로 당대 일본의 역사적 문맥에서 나온 실천적 소산이다. 그러나 『기원』은 일본 이외의 어떤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코오진의 문제의식은 근대의 ‘기원’을 서양 자체에 묻기보다는 비서양의 ‘서양화’ 과정에서 보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구의 근대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그 본질이 은폐되어 있는 데 반해 일본에서는 극도로 압축된 형태로, 그것도 모든 영역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형태로 노출되어 문제의 발견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코오진의 이론틀을 우리의 근대문학에도 창조적으로 적용해볼 여지는 충분하다. 코오진과 김윤식의 차이는 오히려 그런 각도에서 좀더 정밀하게 규명되어야 했다. 그런만큼 일본인의 일본문학에 대한 논의를 끌어왔다 해서 식민주의적 사고라고 예단하는 태도는 요령부득의 논리다. 그리고 코오진 역시 풍경, 고백, 내면, 언문일치운동 등을 제도적 장치로 이해했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근대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연결한 코오진의 방법적 의식을 김윤식이 근원적으로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그 결과가 매우 대조적인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푸꼬(M. Foucault)의 계보학적 사유틀을 단순히 기호론의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나, 근원적인 근대비판을 가치중립적 접근으로 이끌어나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서양문학과의 ‘영향’관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코오진의 비판을 거꾸로 단순 비교문학적 차원(일본이라는 안경 혹은 제도)에서 바라보는 관점 등등에서 이 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앞에서 본 대로 이명원의 서술방식은 상대가 공격한 대상 혹은 표적을 역으로 활용하여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가는 속전속결식 육박전과 흡사하다. 김윤식의 비평을 ‘현해탄 콤플렉스’에다, 김현의 비평을 ‘새것 콤플렉스’에다 표적을 두는 방식이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뒤집기의 공략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듯하다. 가령 세대의식을 표나게 강조한 김현을 세대론으로 역접근하여 비판함으로써 자기 세대에 대한 반성적 의식 없이 전세대를 공박한 것이나, 김현이 세대론을 더욱 구체화하여 내건 ‘55년 세대’론이 내포하고 있는 자의성 문제, 그리고 민족문학론 등을 공박할 때 흔히 구사되는 자기동일성 논리에 역으로 갇혀 있는 점 등을 지적한 대목들은 눈길을 끈다. (실제로 김현·김윤식 비판이 『타는 혀』의 본령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김현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3/4을 차지할 만큼 가장 중심이 되고 있다. 백낙청과 임화를 다룬 글은 이와는 서술방식도 다소 다르고 주장하는 내용 자체도 상대적으로 빈약할뿐더러 분석수준 또한 낮은 편이다.)
물론 수록된 논문 자체의 밀도나 분석의 깊이를 보자면 여러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요즘의 유행이라 할 인물비평식 글쓰기 방식도 나로서는 마뜩찮다. 이런 유의 글에서 곧잘 빠지게 되는 함정 하나가 비판하는 주체 자신은 마치 재판관처럼 독립되어 선(善)의 얼굴로 군림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의 글에 보이는 가장 큰 약점은 공격하는 타자에 정직하게 맞선 자신의 대안적 육체와 논리적 정신이 보이지 않고 비판을 위한 비판의 가파른 능선만 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 탓인지 글마다 드러내고 있는 비장한 표정 또한 권력 운운하며 스스로 문제영역을 협소화해 전사처럼 거친 포즈를 취하는, 타자에 빗대어 자기를 드러내는 최근의 여러 움직임과도 무관치 않게 보여 개운치가 않았다.
사실 그의 지적대로 학계나 평단의 제도 또는 그 운영방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만큼 관행화된 연구풍토에 맞서 스스로 결단하여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펼쳐나가는 실천의지는 존중되고 격려되어야 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는 꽤 긴 시간 동안 우리 문학은 활력을 잃은 채 사회적으로 급격히 소외되어왔다. 그런 가운데 자본주의의 진군에 힘입어 학계나 문단은 역으로 기묘한 안정적 체제를 이루어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진 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그가 지향하는 비판적 글쓰기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나름의 의미있는 사회적 맥락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글쓰기가 잠깐의 ‘타는 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을 혓바닥 위에 두고, 현명한 자는 자기의 혀를 마음속에 둔다.”(인도 속담) ‘타는 혀’의 칼날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