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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정인 曺晶仁
1953년 서울 출생. 1998년 『창작과비평』 겨울호로 등단.
어떤 갠 날 계단 끝 아득히
1
아침이 새 부대에서 밤새 닦인 반짝이는 것들을 꺼내놓네
수천의 초록불꽃 파닥이는 플라타너스 아래를 지났네
건물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허리를 휘네
거리 끝에 햇빛 실은 군함이 들어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하네
수백장 창유리가 챙강챙강 환호하네
갑판 위에서 보이지 않는 선원들이 어깨에 궤짝을 메고
투다닥 뛰어내리네 뚜껑을 젖히자 빛의 표창들이 뛰쳐나와
온 거리를 쏘다니네 아무데나 꽂히네
이마에 창이 꽂혀 어질머리하는 대한투자금융 건물 지나
아무려나 버스에 올랐네
2
참새가 폴짝, 성모원 돌계단을 오르네 그래, 너 먼저 오르려믄
저들끼리 담소하며 계단을 내려서는 한 무리 바람에도
어깨 비켜 길을 내주네
계단 끝 아득히 맹인 사내 하나 머뭇,
살과 뼈를 다하여 내리는 지팡이 끝에 무수히
등꽃 꽃망울 터지는 푸른 소리 들리네
사내의 눈 속엔 등잔만한 작약이 피고 있을 거네
보이지 않는 바늘귀에 실낱을 꿰는
비인 눈을 휘도는 목이 가느란 햇살, 문득
사내의 속사람이 이슬 촘촘한 은하 위에 서 있네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우후우우우─
헛간 깊숙이서 그, 짐승이 앓고 있습니다
앓을 만큼 앓는 것이 그 병의 次善의 치유라고 합니다
그, 짐승이 밤낮으로 제 병을 울부짖는 한
집은 형편없는 움막이곤 합니다
그 짐승, 짐짓 나가버리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창호를 찢고 문을 젖히고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피 묻은 사금파리 깊은 외침을 뱉으며
그, 짐승 아주 나가버리면
이 움막은 형편없이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한 생이란 것은 간신히
그리움으로 산발한 그, 짐승의 털을 곱게 빗질하고
문살을 뜯던 발톱을 깎아
잠 재우려는 데 소모되는 한 세월일 겁니다
온 집이 그리움으로 흔들리다 깨어난 고적함은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고
방바닥에 떨어뜨린 제 아기를 안아올리는 여자, 탈진으로 잦아든 간질을 앓는 것과 같은 질병이어서
다시 쓰는 편지
1
늙은 대추나무 언저리에서 어떤, 빛알갱이 탁 터지며
나비가 날아나와 담장에 쓰윽 연둣빛을 묻히며 날아갔었죠
햇빛은 셀 수 없이 많은 나비와 나뭇잎으로 몸을 바꾸던 걸요
지난 여름 빛의 레이스로 성장한 숲에 갔을 때
숲속, 반짝이던 해의 마그마들을 기억해요
저수지 수면 위에 부서져내리는 빛의 일회성을 바라보던 우리는
두, 빛기둥
2
오늘 다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어요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우리를 스쳐갈 뿐인, 그 일회성을
망막 가득 담아내려 고개를 젖혔습니다
당신이 네 사랑을 펴봐, 하신다면 말간 손금이 흐르는 손바닥을 펴 보일 뿐인, 나는 하늘 한 가득 마음이 흩날렸어요
어쩌면 저것은 먼 옛날 어떤 연인들의 석류빛 약속이나처럼,
이제 하얗게 사위어 분분해진 화산재나 아닐는지
하지만 저 차가운 불꽃의 춤을 딛고 나비 群舞가 밀려들 걸요
들리는 말로는 지금 어떤 들녘엔가 봄눈 설풋 입술 댄 자국마다
강아지풀 풀씨가 발가락을 꼼지락대고
오백년 된 회화나무 밑둥, 오백년도 더 된 녹빛 우물서 들리는
두레박 내리는 소리 더욱 청명하다던 걸요
문득 한장 손수건처럼 흔들리는 별!
당신이 내 강아지,라고 불러주는 봄눈 내리는 이 별에서
남들 낡았다고 버린 언어를 주워 다시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