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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대중문화 속의 소설과 영화

김영하·하성란·홍상수의 작품들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등이 있음. englhkwn@ijnc.inje.ac.kr­

 

 

1

 

최근 우리 문학이 침체되어 있는 데 반해 영화는 60년대 이후 바야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뮤직TV와 영화, 비디오와 인터넷, 핸드폰과 자동차 등의 대중소비문화에 열광하는 소위 ‘신세대’들이 문학을 외면한 지 오래기 때문에 앞으로 문학의 전망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라는 강성 비관론도 심심찮게 등장한다.1 필자는 이런 문학비관론을 믿지 않지만, 한국의 최근 영화계가 사상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金洙暎)이 60년대에 영화평을 의뢰받고 영화관에 갔다가 배우들의 엉터리 연기와 말도 안되는 장면들을 못 견뎌 십분도 채 안되어 나왔던 시절과는 사정이 판이한 것이다.2

최근에 나온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 독자(관객) 수나 화제생산력에서 영화 쪽이 단연 우세하다. 이 점에서는 요 몇년 사이 영화가 소설을 추월한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제 대다수 우리 영화들이 ‘말이 되게끔’ 만들어지며 개중에는 예술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박하사탕」, 「오! 수정」과 「섬」과 같은 진지한 영화들은 물론이거니와 「주유소 습격사건」 같은 오락영화조차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보다 흥미롭다. 그렇다면 하나의 예술로서 최근의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상당히 궁금한 질문이지만, 필자는 이 거창한 물음에 답할 능력이 없다. 다만 한국의 영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이제 소설과 비교해볼 만한 정도는 되지 않았는가 하는 막연한 느낌만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김영하, 하성란의 소설과 홍상수의 영화를 연결지어 논하려는 엉뚱하다면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은 이 막연한 느낌의 일단이나마 구체화해보려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이런 엄두를 내게 된 것은 우선은 김영하, 하성란의 소설이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 반해 홍상수의 영화는 반대로 소설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장르를 가로질러 비교해볼 만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들을 논의대상으로 선정한 유일한 또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신예작가인 김영하와 하성란은 아직 한국 문단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독자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예술적 작업을 해온만큼 개별적으로도 평가할 만하다. 이들의 소설은 대중문화에 침윤된 메트로폴리스의 자폐적인 일상을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우리 시대 도시적 삶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예술을 선보였다고 하겠다. 두 작가의 소설이 홍상수의 영화와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2

 

김영하(金英夏) 소설의 특징은 데뷔작인 「거울에 대한 명상」(『리뷰』 1995년 봄호)에서 이미 뚜렷이 나타난다. 어느날 밤 강변의 고수부지에서 한 유부남과 그의 정부인 미혼의 여자(가희)는 정사를 벌이기에 적절한 장소를 찾다가 폐기된 자동차의 트렁크 속에 장난삼아 숨어드는데, 여자는 고의인지 실수인지 트렁크 덮개를 쾅 닫아버린다. 두 남녀는 졸지에 좁은 공간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김영하는 이 상황을 “우리 둘은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이었으며, 가장 가까워졌고 가장 멀어졌으며, 구멍을 채웠으되 구멍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황은 김영하 소설의 기본적인 쎄팅이기도 하다. 트렁크의 좁은 공간은 여기서 메트로폴리스라는 거대하지만 폐쇄적인 공간의 축도이다. 이런 상황설정을 발판으로 김영하의 재치있는 말재간과 발빠른 변전이 돋보이는 화려한 허구의 세계가 펼쳐진다.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여자는 남자에게 쎅스를 시도한다. “짙은 어둠속에서 반복되는 성희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여자에 대한 남자의 “두려움은 서서히 가학으로 변질”되는 가운데, 여자의 말은 어느덧 남자의 은밀한 심리를 난도질하는 흉기로 변해간다. 여자는 정사중에 불쑥 “나 오늘 위험해. 배란기거든”이라고 말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아직도 농담할 여력이 남아 있나보지?”라고 타박하자 여자는 여전히 장난기 섞인 어조로 되받는다. “재밌잖아, 죽기 직전에 임신하다. 기발하잖아. 정말로 그랬음 좋겠어. 형을 한번에 둘이나 죽이게 되는 거잖아. 형하고 형 자식.” 신세대 어법을 실감나게 구사하는 김영하의 냉소적인 언어는 희비극적인 상황에서 효과를 최대로 발휘한다. 극한상황에서 이런 말이나 행동이 정말 가능할까 따위는 신경쓰지 마라, 이 기발한 상황과 언행의 자극적인 묘미를 한껏 느껴봐라 하고 주문하는 듯하다.

김영하 소설에서 기발함을 빼면 그 매력은 상당부분 사라진다. 그러나 김영하의 소설이 오로지 기발함을 위해 구축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심각한 메씨지가 있다. 어쩌면 기발함은 이 메씨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미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메씨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인간의 표층심리를 가로질러 심층으로 내려가는 꽤 복잡한 미로를 헤쳐가야 하는데, 전자게임을 하듯 그 복잡한 수순을 신속·정확하게 밟아가는 솜씨를 지켜보는 것 또한 김영하 소설을 읽는 재미이다. 이 소설에서 남자는 두 여자, 즉 정숙한 아내 성현과 혼외의 쎅스 파트너인 가희와 관계를 맺고 있다. 남자는 이 두 여자와의 관계를 “아내가 상수도라면 그녀〔가희〕는 하수도였다”고 간명하게 정리하고는 “아내는 하수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같은 남자의 표층심리가 완전한 허구라는 것을 가희의 언어는 무자비하게 까발리기 시작한다.

가희는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면서 3인의 관계를 다시 보여준다. 남자는 마법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마녀이고, 그의 아내 성현은 말하는 거울이며, 그녀 자신은 백설공주라는 것이다. 페미니즘 담론을 연상케 하는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3인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면서 마녀역인 남자의 파멸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끝은 아니다. 남자가 가희에 대한 증오감이 타올라 그녀를 목 졸라 죽이려는 순간 가희는 “그래 죽여라.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 얘기해둘 게 있어. 네 거울은 깨졌어”라고 내뱉으면서 성현과 자신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괴한들에게 함께 강간당한 후 동성애 관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남자는 그때서야 깨달음에 이른다. 아내인 성현은 “정갈하고 상처입지 않은 백색의 대지” 같은 여인이 아니라 가희와 동성애를 나누면서 자신을 교묘히 속인 요부인 것이다. 남자의 마지막 독백이자 이 소설의 결말은 이렇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그렇다. 거울은 없다.” 이것이 아마 김영하의 최종적인 메씨지인 듯하다. 거울의 왜곡 혹은 부재는 이 소설에서 남자의 나르씨시즘적인 삶의 원리가 무너짐을 뜻한다. 이는 근대소설사에서 그다지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근대적 삶의 특징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이 자기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되며, 그렇기에 자기 상에 대한 매혹과 반발은 근대소설의 빈번한 주제였다. 그럼에도 김영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은 그의 예술관의 핵심에 나르씨시즘의 신화가 놓여있기 때문이요, 또 이 신화가 그에게는 미학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역사와 민족 등이 90년대의 인간에게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역사와 민족 등의 범주를 동시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틀로 규정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80년대를 풍미하던 역사와 민족 등이 빠져나간 상태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후일담 문학이나 리얼리즘 소설을 부정하는 자리를 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90년대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준거집단이 해체된 상태이며, 그 결과 어느 누구도 나를 비추는 객관적인 거울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객관적인 거울 없이 각 개인은 자신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물질적인 것 혹은 물화된 가치관에 자신을 투사한다. 자동차나 컴퓨터의 끊임없는 버전업 욕망이나 삐삐 증후군 등은 이전의 어느 개념틀보다도 현대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개체이다.3

 

필자는 80년대/90년대를 이런 식으로 뚜렷이 갈라세우는 김영하의 시대구분에 공감하지 않는다. 역사나 민족에 대한 그의 이해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김영하의 판단에 따르면 80년대 리얼리즘 문학이 구가한 ‘객관적인 거울’이 90년대에 와서는 깨졌거나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의 거짓 혹은 부재를 최종적인 메씨지로 내세운 김영하의 데뷔작은 역사와 민족 등을 준거틀로 삼는 리얼리즘 소설이나 거대서사를 거부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여기서 이 거울의 빈자리에 무엇이 대신 들어서느냐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객관적인 거울을 깨뜨린 주체에게는 이제 “물질적인 것 혹은 물화된 가치관에” 투사된 조각난 이미지들, 즉 눈과 카메라 렌즈(작은 거울)에 포착되는 이미지들이 세계를 가득 채운 듯이 보인다. 이미지들과 그것들이 자동적으로 환기하는 사물화된 관계들이 압도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이제 “눈은 마음의 창이라기보다는 스크린”(「손」)이 되고 “세상 모든 것이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가 취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이 우리가 어디선가 보았던 어떤 이미지나 실체의 복제물에 불과한”(「거울에 대한 명상」) 시대가 된 것이다. 씨뮬라크르의 세계에 진입하는 이 지점에서 김영하의 소설은 영상매체와 특별한 친화성을 갖는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거울에 대한 명상」을 포함하여 김영하의 첫 소설집 『호출』(문학동네 1997)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기발한 이야기이자 작가 나름의 ‘진지한’ 예술론이다. 왜 자신이 거울과 같은 재현을 버리고 영상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순전한 허구의 예술로 이행하는가를 밝히는 진술서인 셈이다. 사실 그의 작품들 다수가 80년대 리얼리즘 소설이나 90년대 초반의 후일담 소설들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로도 읽힌다. 하지만 김영하의 포스트모던한 시대인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입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한 최종평가는 자신의 말대로 ‘지금 이곳의 사람들’의 삶을 얼마만큼 보여주고 그들이 맞닥뜨리는 곤혹스런 문제를 얼마나 깊이 파고드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영하의 소설들이 90년대 이후 하나의 문화적 집단군을 형성한 대도시 젊은 세대들의 삶을 직시하고자 분투한다는 점을 일단 사주고 싶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 노인과 아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어떠한 공동체에 대한 애착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의 결함으로보다는 그의 예술 성격을 드러내는 징표로 읽고 싶다. 이런 부재들이란 그의 예술이 젊은 세대의 대중문화적 병리학에 촛점을 맞춘 데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결핍이라고 옹호하고 싶은 것이다. 기발한 착상, 포스트모던한 기법(특히 메타픽션과 상호텍스트성과 패러디의 활용), 비교적 탄탄한 구성, 발빠른 템포, 가볍고 도발적인 언어는 확실히 영상세대의 즉각적인 지각과 변화무쌍한 생활양식을 따라잡는 데 성공하는 듯하다. 게다가, 「나는 아름답다」와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현란하게 보여주는 ‘죽음과 쎅스에 대한 명상’이나 「손」과 「베를 가르다」에서 제시된 ‘몸에 대한 명상’ 역시 재미있을 뿐 아니라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한편 「도마뱀」이나 「나는 아름답다」 등에 나타나는 그의 분방한 정신분석학적 상상력은 기존 소설들이 다루기 꺼리던 성애(sexuality)의 영역들을 거침없이 파고든다. 특히 시선(카메라 렌즈)과 성애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탐색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듯 그의 작품들이 젊은 세대의 문화적 병리를 다양한 기법과 심각한 주제로 변주하고 심지어 그들의 현란하지만 허망한 삶의 양식을 화끈하게 까발리고 있음에도 그에 합당한 깊이와 현실감을 지니지는 못한다. 이것이 김영하 문학의 딜레마이다. 리얼리즘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에게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마음대로 가로지르며 온갖 포스트모던한 기법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반면, 그의 언어가 구축하는 세계는 삶의 실제적인 공간을 건드릴 권능을 박탈당한 듯하다. 가령, 자동차 트렁크에 갇힌 남녀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쎅스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은 사뭇 심각한 대화내용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오락용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 같다. 일정한 효과와 재미를 내기 위해 현실과 환상을 조합하고 인물과 언어를 디자인한 듯한 것이다. 이 작품의 공간은 현실의 공간도 환상의 공간도 아니며, 기발한 착상과 재치있는 말과 화려한 정신분석학을 펼쳐놓기 위해 조작된 제3의 가상공간인 것이다.

필자는 김영하가 환상적인 요소를 사용하는 것에 못마땅해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너무 쉽게 무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뿐이다. 이 점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관한 명상’이라고 부름직한 「호출」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이 경계를 교묘히 활용하여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구사하는 김영하의 빼어난 연출솜씨와 아울러 그 재능의 지나침에서 비롯되는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영하가 그 경계를 조금만 더 신중하게 다뤘더라면 이 작품은 대중문화시대의 공허한 인간관계를 묘파한 걸작이 되었을 것이다.

「호출」은 한 청년이 권태로운 일상을 메우기 위해 벌이는 자그마한 상상적 모험에 관한 이야기로, 세 절로 구성되어 있다. 1절 ‘호출하는 자’의 초두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이 청년은 한 여인을 삐삐로 호출할까 말까 망설인다. 화자는 석달 전에 애인한테 버림받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가 전날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지하철에서 삐삐를 덥석 안겨주고 내린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여자와 만나기 직전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가장 즐기는 경계는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이다. 나는 가끔 현실을 상상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상상을 현실이라 믿고 살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그 혼동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적은 없었다. 마치 영화를 보듯, 나는 내가 구성한 그 상상의 세계를 제한된 시간 동안 탐험한다.” 이 작품은 화자의 말 그대로 “상상의 세계를 제한된 시간 동안 탐험한” 것이다.

2절 ‘호출되는 자’는 대역배우 생활을 하는 한 여인의 피폐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녀는 생리의 조짐에 “자궁을 적출해버릴까” 하는 험한 생각까지 하며 어두운 11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그녀의 일상은 호출하는 남자의 일상만큼이나 황량하고 고립되어 있다. 게다가, 주연 여배우의 정사씬을 대역하면서 당하는 고초가 씁쓸하기 그지없다. 2절은 영상산업의 화려한 외양에 가려진 한 대역배우의 그늘진 인생살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편의 독립된 드라마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1절에서 제시된 독신남자의 인생과 삐삐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지하철역에서 한 남자가 던져준 삐삐에 쏠려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삐삐를 가지고 다니는 한, 그가 어디서든 그녀를 불러낼 수 있다는 일방성 때문에 마치 창녀가 된 기분을 느끼면서도 삐삐를 버리지 못한다. “이 삐삐를 버리면 세상의 모든 사람과의 연이 끊어질 것 같은 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3절 ‘호출은 없다’에서 다시 남자의 삶이 비춰진다. 드디어 남자는 여자를 호출하기로 결정하고 번호를 누른다. 그때 근처에서 요란한 수신음이 들려와 남자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지만 곧 자기 점퍼의 속주머니에 삐삐가 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마지막 순간에 돌아선” 것이다. 이 작품은 여기서 1차로 마무리된다. 남자는 여자에게 삐삐를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지 못한 것이다. 남자는 허탈해하며 “삐삐를 통해 호출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결국 나 자신일 뿐이다”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소재로 “생리가 시작될 조짐이었다……”로 시작되는 단편을 쓰기로 한다. 정확히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2절은 그러니까 화자가 앞으로 쓸 소설인 셈이다. 그러나 「호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의 결말은 화자가 지하철역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조차 허구일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의자에서 일어나 9월달치 달력을 뜯으며 바닷가 바위 위에 누워 있는 반라의 여자를 유심히 살펴본다. 그래 저 여자, 어딘가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이 소설의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정리하면 이렇다. 작가 김영하는 「호출」이라는 단편을 쓴다. 소설이 허구의 양식인만큼 1단계의 허구세계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 허구 속에도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 속의 현실에서 한 남자─이 인물도 작가이다─가 한 여자를 만나서 삐삐를 전해주고 여자는 여자대로 삐삐를 건네준 남자의 신호를 기다린다. 여기까지가 「호출」의 1막이다. 2막은 남자가 삐삐를 여자에게 실제로 전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상상일 따름이라는 것. 한번의 전복이다. 2절의 여자 드라마는 작가인 남자가 이 현실의 일화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조정된다. 이제 여자는 1단계 허구의 현실에 속하지만 그녀의 삶을 그린 2절 전체는 소설 속의 소설(허구)이다. 3막은 남자가 실제로 만났다고 생각한 여자 역시 달력의 여자를 보고 상상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여자는 2절처럼 허구 속의 허구로 밀려난다. 또 한번의 전복이다. 그런데 상이한 단계를 가로지르는 이 전복은 기법적으로는 아주 매혹적이지만 1단계 허구 속에 생생하게 그려진 현실에는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다. 이제 1단계 허구(소설) 속에는 허구와 허구의 허구만 있고 현실은 오로지 잔상(殘像)으로만 남는다.

「호출」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루는 방식은 보르헤스(J.L. Borges)적 메타픽션 기법과 코언(Coen) 형제의 「바턴 핑크」(Barton Fink) 같은 컬트영화의 환상적 수법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호출」 속의 현실은 ‘지금 이곳의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 근거하고 있어, 재현양식의 뒤집기에 촛점이 맞춰진 전위적 실험작들과는 거리가 있다. 김영하가 2막 어디선가에서, 소설이 허구의 양식임을 보여주려는─이제는 그다지 전위적이지도 않은─집착에서 벗어났더라면, 현실과 환상 양자간의 팽팽한 긴장에서 비롯되는 생동감이 결정적으로 훼손되는 결과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영하의 두번째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문학과지성사 1999)에서도 「호출」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는다. 가령 「고압선」은 구조조정기의 실업위기에 봉착한 은행원의 현실적 삶과 사랑할수록 ‘투명인간’으로 변한다는 환상적 요소가 병치되어 있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현실과 환상의 공간이 길항하여 어느 쪽도 생동감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전반적으로 관념의 현란함이나 착상의 기발함이 절제되어 있고, 우리 시대의 현실적 삶과 ‘지금 이곳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호출」에서는 끝내 만나지 못하던 남녀가 「당신의 나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되 지탱해주기도 하는 관계로 재조명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첫번째 소설집에서 선보인 김영하다운 매력과 패기는 줄어든 감이 있다. 가령, 「비상구」는 한 부랑자의 막다른 삶을 사실적인 필치로 실감나게 그려내지만, 이것이 누아르 영화를 복제한 듯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기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대한 물음이 전혀 제기되지 않은 것도 미덥지 않은 징후로 읽힌다. 김영하의 근작 소설들이 다소 어정쩡한 영역에 걸려 있어 그의 예술이 어떤 전환기를 맞이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의 소설은 이제까지 ‘객관적 거울’의 전도된 상에 사로잡혀 소설이 재현의 양식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매진하다가 이제 막다른 지점에 봉착했는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에는 김영하가 진짜로 그 ‘뒤집힌 거울’마저 깨버리고 반리얼리즘의 굴레에서도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3

 

하성란(河成蘭)이 「풀」(서울신문 1996.1.1)로 문단에 데뷔하자 비평가들은 이 신인의 특이한 묘사방식에 주목했다. 마치 정교한 카메라로 촬영을 하듯 메트로폴리스의 생활공간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마이크로스런’ 문체가 이목을 끈 것이다.4 소설의 서두는 이렇다.

 

여자는 저 아래 펼쳐지는 텅 빈 놀이터의 흰 모래밭을 보며 서 있다. 미끄럼틀의 미끄럼대와 그 그림자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90도 각도로 벌어져 있다. 해가 서서히 건물 측면을 지나 옥상 한가운데로 올라오면서 미끄럼대와 그림자는 막 아홉시 십분을 지난다. 여자는 아까부터 창가 에어컨 환기구에 반쯤 엉덩이를 기댄 채 건물과 건물이 놀이터 위에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본다. 건물과 옆건물의 그림자가 교차하듯 떨어지는 그 틈새에 케이크 조각 같은 양지가 있다. 미끄럼틀은 그 양지 속에 서 있다. 미끄럼대의 양철판이 눈부시다. 놀이터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키 낮은 양옥들이 줄지어 서 있다. 건물들 쪽으로 뚫린 창마다 커튼이 쳐 있다.

 

「풀」의 화자인 여자가 한 건물의 9층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이다. 화자의 주관적인 개입을 배제한 채 오로지 사물의 세계에 촛점을 맞추어 세밀하게 기록하는 이런 묘사는 5,60년대 프랑스의 ‘누보로망’(nouveau roman)5에서 비근한 예를 찾을 수 있지만 이전의 한국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객관세계의 재현을 중시하는 80년대의 리얼리즘 소설도 인간 화자를 중심에 놓고 작품의 주제와 극적 전개에 필요한 만큼의 절제된 객관묘사를 미덕으로 여겼고, 9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감성적인 소설 속의 내면적 화자는 사물의 세계를 이렇게 냉랭한 눈으로 보지 않았다. 마치 대도시의 전형적인 건물과 풍경을 ‘조안각(鳥眼角)’으로 찍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대목은 하성란의 초기소설의 시각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김영하가 메트로폴리스 대중문화의 물상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만을 고감도 카메라로 맵시있게 포착한다면, 하성란은 메트로폴리스 생활공간의 가장 평범한 풍경을 무작위로 택하여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을 찍듯 꼼꼼히 촬영한다.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김영하의 감각적인 사진이 오히려 익숙하게 보이고, 하성란의 밋밋하지만 정밀한 다큐멘터리는 어딘지 낯설게 보이는 것이다.

하성란의 소설들을 특징짓는 이런 ‘마이크로스런’ 묘사에서는 인간이 사물보다 어떤 특별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메트로폴리스의 거대한 물질세계와 대비된 인간의 모습은 왜소하기 짝이 없으며, 그나마 서로 단절·고립되어 있다. 게다가 개체적인 특성을 인정받지 못해, 주요인물들은 ‘여자’나 ‘남자’로, 조연급 인물들은 ‘사내’ 혹은 ‘그 여자’로 불리며, 심지어 외모의 특징이 이름을 대신하기 일쑤이다. 이렇다 할 사건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만큼 극적 요소도 아주 미약하다. 메트로폴리스 속에 갇혀 사는  익명의 인간의 권태롭고 그저그런 일상을 극화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것이다.  

예컨대 「풀」은 한 잡지사의 사진부 여직원의 대수롭지 않은 일상을 아무 논평도 없이 찬찬히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어디가 중요한 대목인지 쉽게 찾을 수 없다. 사후적으로 주요사항들만 발췌하여 연결하면 이렇다. 여자는 애인으로부터 받은 장미꽃다발을 잃어버린 것과 광고문안 대지작업에 필요한 ‘탐’자를 잃어버린 것이 하루종일 마음에 걸리고, 이런 자신의 심각한 건망증에 위축된다. 하지만 여자는 놀이터의 미끄럼판 아래서 풀 한포기를 발견하고 약간의 위안을 받는다. 그날 밤 남자와 함께 투숙한 여관에서 옷을 벗다가 여자는 치마에 묻어 있는 ‘탐’자를 발견하고 점심때 본 풀을 떠올리며 남자에게 “당신은 믿을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남자가 “무슨?” 하고 묻자 여자는 “풀”이라고 중얼거린다. 여기서 소설이 끝난다. 물론 카메라는 가끔 화자의 의식 속을 비춰 몇몇 추억들, 특히 무능한 아버지와의 추억을 애틋하게 회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자의 의식 속의 세계도 그다지 극적인 것은 아닌데다 단편적이기 때문에 그녀의 현실에 대한 의미있는 논평이 되지 못한다. 이 소설이 최소한의 극화를 이뤄내려면 뭔가 단서가 주어져야 하는데, 사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연결고리, 즉 “거멀못”의 설정이 그것이다.6 이 소설의 거멀못은 잃어버린 ‘탐’자와 ‘풀’의 연관이다.

하성란은 이 거멀못을 여자가 사무실에서 들여다보는 착시를 이용한 ‘숨은 그림 찾기’ 책(『환상의 매직아이』)처럼 소설 속 어딘가에 몰래 숨겨놓는다. 독자가 이 숨은 그림을 찾지 못하는 이상, 이 소설은 『환상의 매직아이』를 들여다보는 여자한테처럼 “모래알 같은 작은 점들”로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눈에 힘을 주지 말고 힘을 빼. 멀리 봐. 가깝게 있지만 아주 먼 곳을 보듯이”라는 동료의 충고는 여자뿐 아니라 소설의 독자를 겨냥한 것이다. 충고대로 눈에 힘을 빼고 멀리 보면 이 소설의 거대한 사물의 세계 속에는 작은 ‘풀’ 한 포기가, 그리고 왜소해진 인간의 세계 속에는 ‘탐’자가 각각 반짝거린다. 이 양자가 여자의 의식 속에서 서로 연결되면서 어렵사리 하나의 작은 드라마가 탄생한다. 이 작은 반짝거림은 너무도 미약하고 가냘프지만 여자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렇기에 여자는 뚱딴지처럼 남자에게 ‘풀’을 “당신은 믿을 수 있어요?”라고 묻는 것이다.  

하성란의 첫 소설집 『루빈의 술잔』(문학동네 1997)에 수록된 작품들의 소설적 효과는 거의  ‘마이크로스런’ 묘사와 거멀못 장치에 의존한다. 전자가 메트로폴리스의 거대한 사물의 세계를 부각한다면, 후자는 그 속의 인간세계의 가냘픈 희망을 표현한다. 전자에서 하성란은 자신의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는 대신 후자에다 아주 강렬한 주관적 의지를 투여한다. 다시 말하면 그녀의 초기소설들은 희망할 수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어떻게든 일궈내야 하는 모순을 거멀못이라는 장치를 통해 해결한다. 「풀」에서 「루빈의 술잔」, 그리고 장편 『식사의 즐거움』에 이르는 과정에서 하성란의 이 희망은 조금씩 커지고 거멀못 장치 역시 다양하게 변주되지만 희망의 기본적인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희망은 타자에 대한 작가의 애처로운 연민을 어떻게든 담아내려는 의지의 표현이지만, 기본적으로 거멀못 장치를 통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항상 작가의 주관적인 감상에 빠져들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성란 초기소설의 미덕과 한계를 좀더 분명히 짚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소설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작품이라 할 「지구와 가까운 소행성과의 랑데부」(이후 「랑데부」)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중편소설은 지하 4층 지상 52층의 거대한 디귿자 빌딩의 39층에서 일하는 여자와 남자의 일상을 교차하면서 꼼꼼히 보여준다. 남자는 척추 교정기를 파는 회사의 직원이며 여자는 이 빌딩의 청소와 경비를 담당하는 ‘충실용역’의 사무원이다. 그들은 같은 층에 근무하지만 디귿자의 양 날개에 제각각 사무실이 있는 탓으로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남자는 어느날 나뭇잎 하나를 주워드는데, 거기에는 “누가 내 발 좀 걸어주세요. 흙바닥에 힘껏 나동그라지게요. 나 좀. 102”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남자는 그 글귀의 의미를 추측하다가 이파리를 호주머니 속에 찔러넣고 한동안 그것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이 이파리는 광대한 빌딩에서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에 지친 여자가 ‘102’번째로 창밖의 누군가에게 날려보낸 구원요청이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사무실의 화분에 심은 나무를 늘려나가는 것인데 여기서 나무와 나뭇잎은 「풀」에서의 ‘풀’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이 소설이 「풀」과 다른 것이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랑데부」는, 여자가 희망의 싹을 발견하였으되 그것을 남자와 공유할 수 있을지는 미정으로 남겨둔 「풀」의 후속편인 셈이다. 진정한 만남이란 한쪽의 일방적인 발견이 아닌 양쪽 모두의 노력을 전제하는 ‘랑데부’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의 ‘풀’을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만남을 성취하는 데 쌍방향의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남녀 각각이 독립된 화자로 등장하여 각각의 삶을 묘사하는 서사구조의 대칭성과 디귿자 빌딩의 양쪽 날개에 위치한 남녀의 생활공간상의 대칭성에 의해 한층 더 강조된다. 하지만 결론은 「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는 ‘건망증’에 걸렸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파리에 씌어진 의미를 판독함으로써 맞은편 창에서 손을 흔드는 여자를 알아보고 여자 역시 그런 남자를 알아보면서, 서로 맞은편 창의 상대방에게 손을 모아 소리친다. 천신만고 끝에 두 남녀는 교신에 성공하여 기막힌 랑데부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야 상대방의 존재뿐 아니라 이 빌딩의 실체 역시 제대로 보인다(“여자에게 비로소 이 빌딩은 디귿자 모양이 된다”). 여기서 소설은 끝난다.

눈에 힘을 빼고 멀리 보면 이 소설이 성취한 점들이 쉽게 눈에 띈다. 메트로폴리스의 삭막한 환경과 그에 대비되는 왜소한 인간의 무미건조한 모습을 원근을 조절해가며 보여주는 ‘마이크로스런’ 묘사의 미덕이 돋보이는 것이다. 가령, 남자가 39층의 사무실에서 출근시간에 디귿자 건물 중앙의 광장을 가로질러 건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안각’으로 내려다본 광경(“다지류의 벌레처럼 광장 사방에서 사람들이 설설 기어와 세 줄로 늘어서 차례로 없어진다”)이라든지 전모를 알 수 없는 대형빌딩 속에서 일상적 권태의 마비증세를 뿌리치려는 듯 사무실 안팎을 연신 들락거리며 끊임없이 꼼지락대는 여자의 작은 몸부림을 촘촘히 묘사한 대목은 「풀」의 다소 밋밋하고 비경제적인 묘사보다 한 단계 나아간 것으로, 하성란 특유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이런 미덕들이 돋보인다고 해서 이 소설의 근본적인 취약점에 눈감을 수는 없다. 눈에 힘을 주지도 빼지도 말고 자연스럽게 뜨고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이 소설에서 제시된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무척이나 작위적이다. 그래서 이 만남에 ‘지구와 가까운 소행성과의 랑데부’라는 이름을 달았겠지만 이런 정도의 무리를 감내하고 천행의 도움을 빌리느니 차라리 김영하의 「호출」에서처럼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 여기서 희망은 ‘기계에서 내려온 신’(deux ex machina)이 주는 선물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여자는 나뭇잎에 자신의 애절한 사연을 써서 연속해서 내보내는 유치한 행동을 해야 하고 남자는 고등학교 졸업식날 책상 아래 몰래 새겨놓은 ‘자유’라는 글귀를 만져보려고 자신의 모교를 찾아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 남녀의 삶 군데군데 박혀 있던 상실과 소외와 아픔의 결절점(結節點)들─온몸이 시침에 찔리는 피팅 모델 시절에 대한 여자의 아픈 기억이나 남자의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애증병존(愛憎竝存)적인 갈등 따위─이 애상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풀」에서도 조짐이 있었지만 글이 길어질수록 더 두드러지게 보여, ‘루빈의 술잔’─“같은 도형(그림)이면서 보고 있는 중에 원근 또는 그밖의 조건으로 다르게 뒤바뀌어, 다른 그림으로 보이는 도형”─이라는 좀더 나은 거멀못 장치로도 감당하지 못한다.

하성란이 두번째 소설집 『옆집 여자』(창작과비평사 1999)에서 선보인 예술은 초기소설의 그것과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거멀못 혹은 숨은 그림 찾기 장치를 점진적으로 폐기하는 대신 ‘애매성’(ambiguity)을 극화의 핵심장치의 하나로 채택한 점이다. 사물세계와 인간세계를 거멀못이라는 인위적인 장치를 통해 억지로 얽어매기보다 메트로폴리스의 익명적 공동체에 내재하는 불확실한 측면을 적극 활용하여 애매한 결말을 통한 극적 반전의 효과를 거두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런 애매성을 결정적인 요소로 사용한 예로는 이 소설집의 「옆집 여자」와 「악몽」, 그리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작가』 2000년 봄호)를 꼽을 수 있지만, 이를 부분적으로 활용한 작품은 상당수에 이른다. 애매성은 이제 이 작가의 주된 장기요 예술적 자산이라고 평할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예전의 거멀못 장치가 ‘루빈의 술잔’을 거치면서 점점 세련되어 드디어는 하나의 유력한 예술적 장치로 자리잡은 것이리라.

가령 「옆집 여자」에서 이 장치는 옆집 여자의 불확실한 속내(정체)와 화자의 ‘건망증’을 교묘히 연결하여 조금씩 불길한 조짐을 쌓아가다가 결말의 결정적인 애매성을 통해 섬뜩한 반전의 효과를 거둔다. 독자는 1인칭 화자의 이야기로만 상황을 판단해야 하는데 여자가 지독한 건망증인데다 나중에는 강박신경증 증상도 보이기 때문에 여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곤경에 처한다. 만약 여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여자는 옆집 여자와 남편의 공모에 의해 억울하게 도둑에다 정신병자로 몰리는 셈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독한 건망증과 강박신경증으로 말미암아 무고한 옆집 여자와 남편을 오해하고 실제로 미쳐가는 형국이 된다. 그런데 건망증과 강박신경증 모두가 메트로폴리스의 익명적인 공간에서 타자와의 진정한 교감을 이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병증이고 보면, 이 애매한 상황은 더욱 통렬한 바가 있다. 이 작품이 절묘한 것은 진실이 어느 쪽이라 해도 이 세계에 내재된 불길함과 상실감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성란의 최근 소설을 흥미롭게 만드는 데는 애매성의 장치 못지않게 문체상의 변화도 톡톡히 기여한다.

 

이번 소설집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방식이나 인물의 묘사가 한층 극적인 속도감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전의 소설들에서 지루하고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일정한 톤으로 서술되던 사물 묘사가 서사의 긴장감과 어우러지는 적절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는 점은 발전적인 면모이다. 이야기의 진행과정에 따르는 적절한 긴장과 이완이 사물 존재가 갖는 상징성을 높여주고 있다.7

 

이런 변화가 하성란의 초기소설을 특징짓는 ‘마이크로스런’ 묘사의 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가의 문장은 이제 ‘극적인 속도감’을 확보하면서 작품의 극적 전개에 따라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유연하게 구사한다. 이처럼 이야기 템포가 빨라지고 리듬이 들어감에 따라 그녀의 문체는 예전의 ‘지루하고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일정한 톤’에서 벗어나 생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 작가의 문체상의 변화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이야기 템포의 유연한 조절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는 화려하고 극적인 영상화이다. 가령 「양파」의 다음 구절을 보라.

 

회칼이 공중으로 튀어올라 포물선을 그리면서 남자의 뺨을 훑고 그대로 욕실화를 뚫고 들어가 발등 위에 내리꽂힌다. 칼몸이 부르르 떨며 이상한 소리를 낸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톱날 연주 소리와 비슷하다.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리고 의자 위로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남자는 두 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붙들고 힘겹게 칼을 빼어낸다. 관자놀이가 뛸 때마다 남자의 뺨에서 매화 꽃봉오리 같은 핏방울이 봉곳 솟구친다.

 

「양파」의 여자가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도마 위의 회칼 손잡이를 치는 바람에 회칼이 남자의 뺨을 가르고 발등에 꽂히는 장면이다. 예전에도 하성란의 ‘마이크로스런’ 묘사들 가운데 아주 인상적인 대목들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꼼꼼하지만 밋밋한 묘사에 속도감을 불어넣고 고감도의 영상 이미지를 입혀놓은 듯한 질감은 『옆집 여자』부터이다. 하성란의 예술은 무채색의 다큐멘터리 세계에서 벗어나 메트로폴리스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인상적인 장면들을 발빠르게 잡아내는 화려한 칼라영상의 세계로 이행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성란의 소설은 대중적인 극영화와 만나며 김영하의 기발한 착상과 도발적인 영상감각의 세계와 가까워진다. 이제 「양파」를 ‘칼에 대한 명상’으로 「곰팡이꽃」을 ‘쓰레기에 대한 명상’으로 불러도 어불성설은 아니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즐거운 소풍」이나 심지어 「옆집 여자」의 낯선 풍경마저도 잔혹 컬트무비와 스릴러로 익숙하게 다가온다. 요컨대 하성란의 근작소설들은 문체, 주제, 구성, 기법, 시각적 특성이 모두 정교해지고 화려해지면서 대중영화에 동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성란의 세계관적 전망에 대해 한마디할까 한다. 거대서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하성란도 김영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작가가 거부한다고 해서 작품에서 역사나 세계관과 같은 거대서사가 완전히 추방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형태로 표현되거나 적어도 흔적은 남는 것이다. 하성란의 초기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이크로스런 묘사와 거멀못이고, 여기에 각각 삭막한 메트로폴리스의 공간과 그 속의 인간 주체의 애상적인 희망이 대응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희망을 현실의 삶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 현실을 보는 미세한 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하성란의 마이크로스런 묘사와 세계인식은 희망이 들어설 가능성을 남겨놓지 않은 것이다. 사물세계의 꼼꼼한 기록은 도시공간의 위압적인 외양과 왜소한 주체화자의 일상적 삶을 충실하게 보여주기는 하겠지만, 주관의 개입을 극도로 배제한 결과 양자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에 도달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던 셈이다. 가령 「랑데부」의 남녀 화자들은 거대한 디귿자 빌딩에 갇혀 있는데도 빌딩에 대해 어떤 유의미한 논평이나 사유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 결과 거대한 빌딩은 그 속에 투여된 인간의 노동이나 그것과 관련된 사회관계의 맥락은 결락되고, 사물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기소설에서 ‘삭막한 환경’ 속에서 희망을 일궈내려고 발버둥치던 주체는 최근소설에서는 이제 섣부른 희망 따위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듯하다. 「깃발」 「촛농 날개」 「곰팡이꽃」 등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따스함은 희망의 조짐이라기보다 고립과 좌절로 불구가 된 삶에 대한 작은 위로에 불과하다. 최근 소설의 기본 정조는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현실 대 비정한 주체’로 나타나는 듯하다. 특히 「옆집 여자」 「즐거운 소풍」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을 보면 이런 비정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비정함이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직시를 통해 획득된 것이라기보다 예술적인 효과를 겨냥해서 배합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거멀못 장치로 희망의 단초를 일궈낼 때와 거의 동일한 양상이다. 가령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결말(“네 아버지는 파우스트란다. 파우스트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결국은 구원을 받게 되지. 내 아가. 난 널 사랑한다”)은 작가의 의도를 너무 노출함으로써 ‘애매성’의 묘미도 반감되고 그 냉소마저 작위적으로 만든다. 하성란 예술의 과제는 이 작위성을 돌파하여 대지의 자연스러움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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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논하는 자리에서 영화를 거론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다. 영화는 영화로 보아야 제대로 논의할 수 있는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상수(洪尙秀)의 영화는 문학 텍스트로 읽어도 매우 흥미롭다. 독특한 서사구조나 인물들의 실감나는 대사, 현실과 상상의 관계를 다루는 교묘한 기법, 남녀‘관계’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문학평론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아가, 홍상수 영화가 우리 시대의 주목할 만한 ‘예술’을 선보인 것이라면, 그 ‘예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의 구분에 크게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지평에서 보면, 홍상수 영화의 진면목은 무엇보다 그 ‘형식’의 새로움에 있다고 여겨진다.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하 「우물」)이 관객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영화의 여러 장면들이 우리의 일상을 징그러울 정도로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어딘지 낯설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홍상수의 영화가 기존의 영화문법을 뒤집은 데서, “영화형식의 전통을 우물에 빠뜨린” 데서 나온 결과임에 틀림없다.8 적어도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영화는 분명 획기적이다. 이 새로움 혹은 낯섦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우선 홍상수 영화에서 하나의 상황묘사가 갑갑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극적 전개가 더디게 일어난다거나 지연된다는 것과는 또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가령, 「우물」에서 주인공 여자(효경)가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돈을 빌리는 장면을 보면 느려터졌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기존의 영화에서라면 “만원만 빌려주시겠어요?”라는 요청에 만원을 꺼내어 주든지 거절의 표시를 하든지 신속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는 여자로 하여금 꾸역꾸역 양쪽 호주머니를 다 뒤져 천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엉거주춤 내밀며 “5천원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쓰실래요?”라고 느릿느릿 말하게 한다. 실제로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렇게 뜸을 들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장면이 느리게 느껴지는 것은 기존의 영화나 영상매체들이 주요한 메씨지를 전달하거나 극적 효과를 거두는 데 집중하고 나머지 요소들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홍상수 영화에서 한 샷(shot) 내의 동작이 실시간(real time)에 가까운데도 느리게 느껴지는 것은 기존 영화의 속도감에 길들여진 우리의 ‘시간적’ 착시 때문이다. 요컨대, 홍상수 영화는, 영화 속의 현실을 실제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느낄 만큼 영상매체에 익숙해진 관객의 의표를 찌른다.  

이렇게 인물의 동작에 일상적 현실의 속도와 ‘삭제된’ 동작을 되찾아줌으로써 기존의 영화문법을 뒤집는 방식은 홍상수의 영상적 요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흔히 접하는 현실 속의 장면들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듯하기에 오히려 낯섦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사(遠寫, long shot), 특히 ‘조안각’의 원사가 한몫 톡톡히 한다. 집, 사무실, 여관, 아파트의 상층이나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도시공간 속의 왜소한 인간의 모습을 멀찍이 보여줌으로써 나르씨시즘적인 도시인들에게 자신의 실제 크기를 상기시킨다. 홍상수의 영상이 문득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기존 영상들의 분식되고 양식화된 이미지들이 사라지고 우리에게 낯익은 탈색되고 초라한 현실이 들어서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상이 때로는 잔혹하고 섬뜩함에도 불구하고 하성란의 근작보다는 초기소설의 분위기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홍상수 영화의 서사(이야기)적인 요소 역시 영화의 문법에 어긋나기는 마찬가지다. 기존의 문법으로는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가 탄탄하게 짜여 있을수록 좋은 영화였다면, 그의 영화는 이런 규칙에 반발하거나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가령, 「우물」에 플롯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 개다. 유부녀인 효경과 팔리지 않는 책을 쓰는 작가 효섭 간의 불륜의 사랑, 효경과 남편의 일그러진 부부관계, 효섭을 따라다니는 삼류극장 매표원(민재)의 짝사랑, 그리고 민재에 대한 극장경비원의 짝사랑 등이다. 처음부터 ‘단일한 플롯에 단일한 효과’를 추구하는 극의 원칙과 상반되는 것이다. 효경과 효섭 간의 관계가 중심이라고 하겠지만 다른 관계들이 이 중심을 끊임없이 분산시킨다. 이런 원심성(遠心性) 구성에다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엉뚱한 장면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들어와 얼마 되지 않는 극적 계기들을 흩뜨려놓는다.

이런 산포적 서사방식이 갖는 딜레마는 하성란의 초기소설에 나타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홍상수의 영상이 일상 속의 낯섦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사의 극적 짜임새를 훼손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의 ‘극’영화를 만들자면 산개(散開)된 삶의 요소들을 약간이라도 추스려 극화해야 하는 역설에 봉착하는 것이다. 하성란이 이 딜레마를 거멀못으로 무리하게 해결하려 했다면, 홍상수는 「우물」에서 그런 수고조차 하지 않는다. 고작 이것이 ‘하나의 극’임을 암시할 뿐이다. 가령, 영화의 초두에 민재가 효섭의 원고를 읽고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특히 그 여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죽는 거요. 우선 그 여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소감을 말하자 효섭은 “그건 좀 작위적이지 않니?”라고 되묻는 장면은 바로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토론이기도 하다. 결말 직전에 주요 등장인물들이 자기의 죽음을 조문하는 효경의 기이한 꿈도 극적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힌다. 하지만 영화의 관객이 서사를 ‘실시간’으로 꼼꼼히 음미할 수도 없거니와, 이런 암시에 홍상수가 하성란처럼 각별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관계들의 맞물림과 연속적인 어긋남, 그로 인한 살인과 죽음이 극의 통일성을 대신한다. 하성란이 무리를 감수하면서 독자에게 ‘희망’의 싹을 보여주려 했다면 홍상수는 자기 예술의 딜레마를 방치하다시피 함으로써 관객들에게는 절망적 상황을 안겨주고 자신은 비정한 예술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강원도의 힘」(1998)에서도 극적 구성의 분열양상은 해소되지 않는다. 유부남 대학강사 상권과 여대생 지숙의 불륜의 사랑을 축으로, 한쪽에는 교수가 되려는 상권의 삶이, 다른 한쪽에는 상권과의 관계를 청산하려는 지숙의 삶이 각각 설정되어 있다. 「랑데부」와 같은 대칭적 구조인 것이다. 상권과 지숙은 각각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같은 시간대에 강원도로 여행을 가지만 서로 만나지 못한다. 이 어긋나는 행로를 연결하는 것은 우연히 마주치는 한 여인인데, 나중에 이 여인의 주검이 발견됨으로써 상권과 지숙의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비춘다. 이 여인은 일종의 ‘거멀못’ 역할을 하지만, 여기서는 희망보다는 좌절을 암시한다. 영화 초두에 나오는 붕어 두 마리 가운데서 한 마리만 남는 것도 작품의 취약한 구성을 보강하는 상징적 장치로 보이지만, 어긋나는 두 세계를 단단히 얽어매기에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작가는 이 두 장치에 전작보다 좀더 의지를 투여함으로써 「강원도의 힘」은 구성 면에서 그만큼 더 작위적이 된다.

그럼에도 「강원도의 힘」이 중요한 것은 여성의 곤경에 대한 홍상수의 인식이 전작보다 훨씬 성숙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물이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전망 없는’ 세계 속에서도 선연히 드러나는 지숙의 상처와 삶에의 투지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가령, 지숙이 다른 남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목놓아 우는 장면이 그렇다. 드디어 교수가 된 상권에게 불려나가지만 침대에서 상권의 손길을 뿌리치며 “나, 수술했어…… 걱정하지 마. 네 아기 아니니까”라고 내뱉는 어투에는 짙은 냉소가 묻어 있다. 그렇지만, 이 지독한 냉소조차도 “나도 살아야겠어”라는 지숙의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절규에 비하면 오히려 가볍게 느껴진다.

「오! 수정」은 홍상수 영화치고도 여러 면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이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흑백영화를 시도한 것이라든지 씨퀀스(sequence)마다 소제목을 붙인 것이 그것이다. 인물들의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홍상수 특유의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홍상수의 전작들에 비해 나아진 점은 무엇보다 과감하고 치밀한 형식실험을 통해 서사구조의 취약성을 극복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의 ‘일차적인’ 서사는 부잣집 남자 재훈과 구성작가인 수정 그리고 유부남 PD 영수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하되, 이를 재훈과 수정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제시된다. 세분화하면, 1부는 재훈의 기억을, 2부는 수정의 기억을, 그리고 3부는 두 남녀간에 드디어 쎅스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1,2부는 각각 3부의 쎅스장면 직전에서 시작되었다가 플래시백을 통한 두 남녀간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 3부의 직전에서 끝난다. 말하자면 대칭적 구조인 것이다. ‘기억을 통한 경험의 재구성’에 착안한 이 특이한 양식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1,2부(재훈과 수정의 기억)를 서로 대조해보면, 어긋나는 것들이 많다. 이런 차이들 대다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계층적 지위나 성별에 따라 기억의 내용이 뚜렷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가령, 재훈과 수정이 처음으로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재훈의 기억에서는 부재하던 재훈의 운전기사가 수정의 기억에는 등장한다. 이는 수정이 재훈의 부나 사회적 지위에 민감함을 드러내는 하나의 암시이다. 또한 영수와 박기사의 싸움이 재훈의 기억으로는 영수의 말대로 화해로 끝나지만 수정의 기억에서는 영수가 박기사한테 뺨을 맞고 험한 욕(“그 씨발년은 어디 갔냐? 좆같은 년. 너네 박았지?…… 너네 편집실에서 이상한 짓 하다 걸리면……”)을 듣는 현장을 자신이 엿본 것으로 나온다. 이는 수정이 자신의 삶의 곤경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한 증거로 읽힌다. 종합하면, 같이 나눈 경험이라도 개인에 따라, 특히 성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재구성되며, 그것이 한 개인의 ‘과거’가 된다는 것, 그리고 이 ‘과거’가 그 개인의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둘째, 1,2부의 기억 속에는 재훈과 수정 각각의 독자적인 삶이 끼여드는데, 이 독립적인 기억소(記憶素)와 두 남녀의 기억 가운데 어긋나는 지점을 연결하면 각각의 개인적 삶의 서사가 새롭게 구성된다는 점이다(이를 ‘2차 서사’라고 하자). 2차 서사에서 재훈의 경우는 대학시절 여자친구(정아)와의 수상쩍은 관계가 암시되는 정도이기 때문에 두 서사간에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수정의 경우는 다르다. 수정의 기억에는 영수와 재훈이 알지 못하는 오빠와의 근친상간적 관계9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서사는 엄연히 다르다. 2차 서사에서는 1차 서사의 삼각관계가 진실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그녀가 1차 서사에서 하는 속물적인 행동의 이면에는 오빠와의 관계가 작용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홍상수는 2차 서사를 끼워넣음으로써 수정의 삶을 좀더 섬세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3부의 쎅스장면은 지금의 현실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서사구조상 현재적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으로는 3부가 수정과 재훈, 혹은 감독인 홍상수의 또다른 기억이나 환상일 수 있지만 극적 구조상 그런 메타픽션의 계기가 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김영하의 「호출」과 대비된다. 「오! 수정」의 기억을 통한 경험의 재구성과 「호출」의 메타픽션을 통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 탐구는 모두 우리가 ‘현실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 수정」은 기억의 구성성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삶의 요소들을 전제하는 데 반해, 「호출」은 그것마저 상상일 수 있음을 내비친다. 수정은 재훈이 다른 여자와 몰래 키스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심지어 그 상상을 기억할 수는 있어도, 오빠와의 근친상간 관계를 그런 식으로 조작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 수정」의 특이한 예술형식은 현실과 기억 혹은 상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현실의 핵심적인 부분이 상상에 의해 조작될 수는 없다는 점 역시 분명히해둔다.10

홍상수는 이런 독특한 형식을 통하여 드디어 서사구조의 분산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된다. 이야기는 여전히 수많은 곁가지들을 갖고 있지만 그 골자는 김영하의 말대로 “한번 달라는 남자들과 쉽게는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여자의 이야기”11라 하겠다. 수정과 남자들의 로맨스의 밑바탕에는 수정의 ‘처녀성’을 놓고 이런 갈등과 흥정이 벌어지는 것이다. ‘처녀성’ 혹은 ‘정절’을  매개로 하는 이야기 자체는 영국소설 초창기의 『패밀러』(Pamela) 혹은 우리의 『춘향전』에서부터 작금의 연애소설·영화에 이르기까지 근대서사의 낯익은 주제이다. 그럼에도 「오! 수정」의 서사가 놀라운 것은 ‘처녀성의 신화’를 활용하여 성과 권력을 둘러싼 ‘몸’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에서 수정의 몸은 남성들이 정복하려는 일종의 ‘영토’가 된다. 수정의 오빠는 수음하는 데 수정의 손을 빌리고, 영수는 수정의 입술을 점령한 데 고무되어 그 영토의 수도(?)까지 진격하려 하나 실패하고 만다. 영수는 유부남이라는 불리한 위치 때문에 강제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너 빤스까지 벗긴 거다. 할 수 있는데 안한 거다”고 자위한다. 한편, 수정이 재훈의 쎅스 요구를 거절하면서 “가슴은 가졌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 남자들에게 하나의 점령대상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정의 몸을 둘러싼 각축전을 지켜보는 것도 이 영화의 대단한 흥밋거리임에 분명하지만, 이 각축전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들에 대한 통찰은 놀라운 데가 있다. 수정이 영수와 멀어지는 계기는 영수가 박기사한테 뺨을 맞고 욕을 듣는 장면을 목격한 사건이다. 영수가 수정을 강제로 범하려는 시도가 무산되는 이유는 영수 쪽에서 자신의 처지(유부남)에 대한 자의식이 작용한 것 외에도 수정은 수정대로 영수를 좋아하면서도(“감독님, 저 감독님 좋아한 것 알아요?”) 박기사로부터의 수모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오빠와의 관계까지 감안하면 영수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수모를 수정이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이다. 여기서 수정의 영수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이고 이런 ‘애매성’은 재훈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수정이 재훈의 부와 지위를 의식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것 때문에 그를 짝으로 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깨어질 뻔한 것은 재훈이 애무를 하면서 수정을 딴 이름(“정아씨”)으로 부르는 사건이다. 재훈의 말대로 “사람 이름 한번 잘못 부른 게 무슨 죽을죄라고 날 이렇게 미치게 만드느냐”고 항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정의 입장에서 이것은 상당한 위협이고 어쩌면 ‘죽을죄’에 해당한다. 이는 재훈이 다른 여자와 놀아났다는 암묵적인 증거이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수정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이다. 이 위협의 강도는 제 이름을 걸고 관계를 맺지 못했던 수정의 삶(오빠, 영수와의 관계)을 고려할 때만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3부의 쎅스장면의 절정에서 재훈이 “수정씨 맞지요?”를 되풀이하는 대목은 수정을 ‘정아씨’로 잘못 부른 장면을 상기시키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수정이 첫경험의 아픔으로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와중에도 “네, 난 수정이에요”라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수정의 오빠와의 관계가 강하게 환기되면서 절절한 자기확인의 욕구가 드러난다.

제주도에서 근사하게 정사를 나누자고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고 우이동의 한 호텔에서 그간 미루어왔던 쎅스를 해치워버리려는 재훈의 굴욕적인 제안(“수정씨, 꼭 제주도에 가야만 하겠어요?”)에 수정이 상처를 입으면서도(“제가 무슨 제주도에 환장한 사람인 줄 아세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런 수모를 감내하는 것을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굴욕을 참는 식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따져보면 재훈이 서로간의 로맨스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새 제안을 내어놓은 것 자체가 남녀관계에서 남성의 폭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절묘한 것은 수정이 여성으로서의 불리한 입장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 때문에 이 굴욕적인 제안과 이에 깔린 권력관계를 받아들이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수정의 속내의 어두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이동 호텔에서의 ‘실무적’인 정사에 깔려 있는 착잡한 의미를 충분히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간의 처절한 자기확인의 과정과 여자의 “악악”거리는 비명, “정말 안 아프게 할게요”라는 남자의 거짓 약속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장면은 다른 영화의 정사장면과 비교할 때 참 ‘기이’하게 보인다. 하지만 첫경험의 핏자국을 발견하고 화장실에서 그 피를 씻는 장면도 이에 못지않게 기이하다. 수정이 핏자국을 보고 자신의 순결을 입증한 데서 안도감을 느끼고 재훈은 그것이 무슨 훈장인 양 의기양양해하지만, 호텔의 침대씨트에 묻은 피를 씻어놓고 가야 하는 일상의 상황이 개입하면서 이 ‘성스러운’ 피는 씻어내야 할 ‘더러운’ 피로 바뀐다. 이 장면은 ‘처녀성의 신화’를 재연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일상성의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친다. 그렇기에 정사 후의 다정한 분위기는 진정한 로맨스의 성취인지 어렵사리 성사시킨 계약(결혼약속) 후의 안도감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애매성’은 작품의 세부에서 제시되는 미묘함과 맞물려 있기에 하나의 조작적인 장치로 떨어지지 않고 현실의 복잡성을 일러주는 지표가 된다.

홍상수 영화 역시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장르에서는 우리 시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느낌이다. 「오! 수정」을 큰 이야기를 다룬 「박하사탕」이나 「공동경비구역 JSA」와 비교하려면 또다른 분석이 필요하지만, 예술의 질에서는 후자의 두 영화보다 낫다고 평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우리 시대 도시인의 남녀관계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 관계의 미세한 틈새를 파고드는 섬세한 감수성과 날카로운 분석력이 부단한 형식실험을 통해 빛나는 결실을 거둔 것이라 하겠다. 최근작에서 예전의 냉소가 걷히고 따뜻함이 느껴진다는 세간의 평가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남녀관계의 복잡성과 여성의 곤경에 대한 깊은 인식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오! 수정」 출시 후 “좀더 소통범위가 넓은 언어로 말하는 과정 자체가 역설적으로 내게 자유를 주는 것 같다”는 홍상수의 소감12을 읽고 그의 예술이 개인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에도 눈길을 돌리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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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예리하게 포착하려는 김영하·하성란·홍상수의 예술을 검토하면서, 필자는 특히 이들의 부단한 형식실험에 주목하였다. 묘사·서사·영상 기법들은 소설과 영화의 형식이면서, 작가들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나 세계를 보는 관점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두 역사와 민족과 같은 거대서사를 외면하고 도시인의 일상에 얽힌 작은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고 있지만, 거기에조차도 세계관적인 전망이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반드시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홍상수의 「오! 수정」에서 기억을 통한 경험의 재구성이 바로 개인의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아주 복잡미묘한 관계들이 끼여들어 크고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한편, 깊은 토대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거기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

예술에서는 개인의 삶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되는 지점이 있기에 거대서사를 다룬다고 반드시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우리의 이웃들이 형성하는 조금은 큰 이야기와 역사를 기피하는 경향은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김영하와 하성란의 소설을 야박하게 평한 대목이 있다면 거기에는 이런 우려가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소설에 나타나는 조작성 혹은 작위성은 이들의 활발한 실험정신을 증거하는 한편 대지(공동체)의 삶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메트로폴리스의 대중문화와 가상현실에 대한 빼어난 감각을 갖고 있지만,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들의 예술은 냉혹한 현실과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성을 잃지 않은 선배작가들의 소설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끝으로, 「오! 수정」의 성공이 홍상수 특유의 영상미학과 아울러 그의 빼어난 ‘언어예술’에 바탕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대중문화시대에는 영화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 분명하지만, 영화가 대중적인 소비문화의 하나로 떨어지지 않고 참다운 대중예술로 꽃피기 위해서는 소설이나 연극의 예술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적 특성을 자신의 예술적 자산으로 삼을 줄 아는 적극적인 태도가 요청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시대적 요청에 경도된 나머지 소설다운 특성을 잃어버리면 영화각본의 소설판에 불과한 처지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중문화시대의 소설과 영화의 과제는 양자가 서로 경쟁하면서 함께 주류 대중문화의 소비주의와 상업주의를 돌파하는 대안적 예술영역을 확보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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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하 「워크아웃 직전의 문학」, 『현대문학』 2001년 1월호 참조.
  2. 김수영 「‘문예영화’ 붐에 대하여」, 『김수영 전집』 2권, 민음사 1981 참조.
  3. 류보선 「죽음, 그 아름답고도 불길한 유혹」,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1996, 170〜71면.
  4. 김윤식 「‘가족소설’에 이르기와 넘어서기」, 하성란 『식사의 즐거움』, 현대문학 1998 참조.
  5. 로브그리예(A. Robbe-Grillet)는 『누보로망을 위하여』(1963)에서 “인물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논평을 일절 삼가면서 사물·제스처·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연계들”에 각별히 주목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6. 김윤식, 앞의 글 193〜94면 참조.
  7. 백지연 「잿빛 도시에 내려앉은 촛농 날개의 꿈」, 하성란 『옆집 여자』, 창작과비평사 1999, 274면.
  8. 허문영 「삶이란, 귀여운 위선과의 입맞춤」, 『씨네21』 256호 참조.
  9. 수정이 오빠에게 손으로 수음을 시켜주는 장면은 특별한 주목할 요한다. (카메라를 거꾸로 잡은 것만 제외하면) 이 충격적인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슬쩍 제시되는 방식이 특이한 것이다. 홍상수의 이런 수법은 이 ‘금기’의 행위가 일상화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수정이 표층의식에서는 그 관계에 내재된 ‘금기성’에 이미 익숙해졌음을 명백히하는 동시에 이것이 그녀의 의식 밑바닥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10. 김영하가 홍상수의 예술을 가리켜 “흥신소적 모더니즘”이라고 평한 반면, 홍상수 자신은 “내가 생각하는 리얼리즘, 내가 본 것을 다 아우르는 표현으로서의 리얼리즘”을 구현하고자 한다고 밝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김영하 『굴비낚시』, 마음산책 2000, 20면; 홍상수 인터뷰 「조금은 굵은 언어로 말하고 싶었다」, 『씨네21』, 256호 참조.
  11. 김영하 『굴비낚시』 19면.
  12. 홍상수, 앞의 인터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