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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한국의 눈, 한국의 사람들

 

 

위 화 余華

중국의 소설가. 1960년 항져우(杭州) 출생. 뻬이징 루쉰문학원 창작수업 과정 졸업. 1984년 1월 『뻬이징문학』에 처녀작 「18세에 먼길을 나서다(十八歲出門遠行)」를 발표. 국역작품으로 장편소설 『살아간다는 것』 『허삼관 매혈기』, 소설집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내게는 이름이 없다』 등이 있음. huozhe@ht.rol.cn.net­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다. 갓 지나온 지난 세기에, 전혀 유명하지도 않은 평범한 한사람, 더 정확히 말해 한명의 노동자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했다. 그는 죽음을 맞으면서 인간세(人間世)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유감(遺憾)을 남겼다. 스스로를 위해 상급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점을 한탄하며, 법률을 공부한 대학생 친구를 한명 가지고 싶었다고 했다. 법을 통해 노동자들이 권리를 보장받는 방법에 대해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소박하고 평범한 한사람이 몸에 붙였던 불길은 이후 다시는 꺼질 줄 몰랐다. 한국의 지식인과 대학생 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좋은 사회적 조건 아래 안정된 생활을 누려오고 있었는데, 바로 이 평범한 노동자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마음속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최소한의 국민의 권리인가? 무엇이 민족의 전도(前途)라는 것인가? 이 한 노동자의 생명을 불사른 뜨거운 불길은 수없이 많은 한국인의 마음속으로 번져갔으며, 그들의 자존(自尊)의식과 분노에 불을 붙였다. 그리하여 가무(歌舞)를 사랑하던 이 민족은 강골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80년대를 풍미했던 학생운동을 지켜보고 체험하며 국민들은 조금씩 조금씩 정치가의 수중으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되찾았던 것이다.

청년기를 보내던 이 무렵, 나는 신문과 흑백텔레비전을 통하여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나와 연령이 비슷한 한국의 청년들은 한명 또 한명 몸에 불을 끼얹고 자살을 하거나 고층빌딩에서 투신해 자신의 육신을 훼멸(毁滅)함으로써 독재정치에 항거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을 두고 놀라움이라 하는가를 한차례 한차례 몸서리치게 느끼며,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진정한 인생의 도로를 막 걷기 시작하였고, 기나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했다. 날마다 꿈 같은 환상 속에서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죽음으로 내달리던 한국의 같은 또래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연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좀더 소중한 인생의 체험과 무수히 아름다운 희망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들은 격렬한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사무친 절망을 표출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죽음 또한 오래도록 시들지 않는 절규가 되어 그들 동포가 영원히 깨어 있으라고, 결코 잠들지 말라고 동포의 귓전에 맴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삼십을 넘긴 후, 한국은 또다른 하나의 형상으로 중국에 나타났다. 바로 아시아 네 마리 용 가운데 한 마리의 이미지, 다시 말해 경제적으로 고속성장을 이룬 부유의 이미지였다. 비록 중간중간 백화점이 내려앉고 한강다리가 붕괴되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긴 했지만, 이러한 그림자는 한국인 자신들의 마음 깊은 곳에나 자리잡았을 뿐 중국인에게는 마치 예쁜 얼굴의 주근깨 몇개에 지나지 않아 결코 한국의 아름다운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이때 중국은 정치적 고난을 넘긴 직후인데, 바야흐로 경제에 대한 관심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면서 사람들은 경제발전에 대해 전에 없는 열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국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미 거친 한국, 학생운동이 있는 한국을 보려 하지 않았다. 한 시대의 시선은 왕왕 구매자의 시선이기 일쑤인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때 중국은 경제 방면에 기적을 이룬 한국만을 보고 싶어했으며, 한국의 발전 속에서 자신에 유익한 경험을 찾아내고자 했다. 중국의 수많은 경영자들은 한국 대기업의 경영방식에 매료되어, 확장이 곧 발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서둘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앞다투어 한국으로 날아가 여행을 즐기면서 견학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현한 또하나의 한국의 이미지는 아시아 금융대란의 폭풍 속에서 시들어버린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전에는 한국경제 모델에 대해 일제히 찬양하던 중국의 매체들도 일제히 부정 내지 비판의 목소리를 내보냈고,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의 한국에 관한 보도들은 온통 회사의 도산이나 은행의 파산, 마이너스성장 혹은 실업률 상승 지속 등의 얘기로 도배되었다. 한국의 원화 가치가 일락천장(一落千丈)의 지경일 때 자기도 모르게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화폐가치가 아직 미국 달러화와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지 않은 점을 은근히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때 중국에는 ‘거품’이라 불리는 단어가 유행처럼 나돌았는데, 이 단어의 뒤에는 또다른 단어가 항상 따라다녔다. 바로 한국(韓國)이란 단어였다. 나의 한국인 친구는, 이때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직 무사히 살아남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라는 자조 섞인 우스개 인사말이 출현했다고 들려줬다.

한국에 대한 적잖은 기억과 소문을 가진 채로, 나는 작년 6월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바다를 향해 펼쳐진 반도, 온통 산림인 국가에 첫발을 디뎠다. 서울의 김포공항을 나서며 받은 첫인상은 아시아 도시들에서 받는 특유의 인상, 바로 질서 부재의 번영 그 자체였다. 행인과 차량의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귓전을 떠날 줄 몰랐다. 나는 속으로 이것은 필경 도시의 무절제한 발전이 초래한 풍경이겠거니 생각했다. 서울에 1천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부산에 4백만명 이상, 광주 같은 도시만 해도 1백만명 이상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안 후, 내 마음속에는 한국의 4천여만명 인구 가운데 도대체 얼마나 지방에 거주할까라는 의문이 일었다. 바로 이 점은 나로 하여금 아시아 금융대란 가운데 처한 한국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다. 도시의 확장은 흡사 한국경제의 확장을 대표하고, 도시의 운명 또한 흡사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듯하였다.

나는 한국 방문길에 광주민주화운동의 한국과 학생운동의 한국을 찾고 싶었다. 이것은 한국이 나에게 남긴 최초의 인상이자 또한 성장기 청년시절 한국에 대한 기억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그리고 부산과 광주에서 나는 번영의 면사포를 보았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혈흔과 오늘날의 눈물을 가리고 있었다. 도처에 빛나는 고층빌딩과 번화한 상점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은 유행에 맞춰 멋있는 의복을 걸치고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거리에는 인파로 숨통이 막히는 호텔과 술집 들이 즐비했고, 어디서든 취기 오른 술귀신들의 즐거운 얼굴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80년대 혁명의 한국, 금융대란을 거치며 초라해진 한국의 자취를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번영이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이 변화는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꿈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유혹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허수와 가짜를 믿게 하며 나아가 진실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마치 한국의 텔레비전을 잠식한 멜로드라마나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처럼, 그것은 결코 우리들 자신이 살아가는 얘기가 아니고 딴나라 사람들 얘기와 같은 것이다. 대중문화라는 라벨을 단 상품들은, 정말 그것은 예술품이 아니라 상품인데, 사실  처음부터 대중과는 딴세상의 것들이다. 그것들은 상점에서 팔리는 썬글라스처럼 대중들로 하여금 현실의 실제를 정확히 보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한국은 나에게 김민기의 뮤지컬과 전인권의 콘써트를 선사했다. 이것들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체험이다. 서울의 한 귀퉁이, 뉴욕 브로드웨이와 같은 곳, 상업적 분위기 가득한 소극장들이 즐비한 곳, 그곳 길가에는 공연소식을 알리는 광고전단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곳에는 아무런 질서도 까닭도 없이 또다른 전단이 도배되어 있었는데, 흡사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 길가에 나붙은 대자보를 연상케 했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김민기가 연출한 「지하철 1호선」을 보고, 가슴깊이 감동받았다. 로큰롤그룹이 연주한 이 뮤지컬이 전달하고자 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중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후 나는 또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전인권의 콘써트를 보았다. 이틀에 걸친 로큰롤 콘써트였는데, 어떤 이는 한국 로큰롤의 전람회라 했다. 거의 모든 로커들의 무대공연이 아주 훌륭했는데, 최후로 등장한 그룹이 바로 전인권의 들국화였다. 비록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음악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노래에는 한국의 격정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내가 더욱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 작품들이 한국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파고드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하철 1호선」 공연을 관람한 때는 이미 1천회 공연을 넘긴 후였지만, 여전히 극장은 관중들로 만원이었고, 모든 관중은 예외없이 무대 위의 연출에 감동받아 때때로 회심의 미소를 보내거나 소리 없는 적막 속에서 과연 무엇이 감동인가를 음미하고 있었다. 전인권은 미치광이에 가까운 풍경을 연출했다. 바로 노동자를 옮겨놓은 듯한 그가 무대에 등장했을 때 젊은 관중들은 즉각 내 좌석 앞의 빈 공간으로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공연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콘써트를 관람한 관중은 이미 모두가 일어서서 전인권의 어리숙한 동작을 따라 함께 율동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것은 내가 서울에서 겪은 아름다운 체험이다. 그것은 대중문화라고 스스로 표방하고 자랑만을 일삼는 사이비 멜로드라마 따위가 결코 아니었고, 떠벌리는 바와는 달리 대중과 오히려 담을 쌓는 엘리뜨의식에 흠뻑 젖은 이른바 모더니즘도 아니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중의 예술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으로부터 비롯되어 대중으로 다시 귀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은 마침내 나로 하여금 한국의 진정한 면모를 똑바로 보게 하였다.

나는 일찍이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열사들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들은 핏자국 선명한 얼굴, 이미 생명이 소실된 얼굴로 희미하게 실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은 동공이 열리고 시선이 사라진 이후의 눈이었다. 그들의 눈은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 갑자기 식어버린 그 순간을 방불케 하였다. 고요함 뒷면으로 불가사의한 우울함이 있으며, 멍함 뒤편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굳은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본 사진 가운데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눈은 어느 것 하나 감긴 것이 없었다. 그들의 무심한 눈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후로 나는 그들의 눈을 한국의 눈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길지 않은 날들 동안 나의 느낌은 아주 날카로운 칼에 의해 두 쪽으로 쪼개지는 듯했다. 한편으론 한국의 번화한 도시의 대낮과 홍등녹주(紅燈綠酒) 야밤은 나의 느낌을 마치 바닷물처럼 침몰시켰고, 이 모든 것은 흡사 거짓 사랑과도 같았다. 또다른 한편으로 나는 평온한 바닷물 아래로 흐르는 도도한 격류를 느끼기도 하였다. 서울의 성공회대학교에서 광주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을 기념하는 전시실을 관람하였는데, 이 행사는 나의 친구 백원담과 그의 친구들이 마련한 것이었다. 양복과 가죽구두 차림의 푸른숲 출판사 편집주간 김학원과 현모양처 같은 그의 아내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일찍이 독재정치에 반대했던 혁명가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실제로 팔목에 수갑을 차본 것은 물론 감옥살이의 시련도 겪은 사람들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묘역의 한 학생 희생자 묘 앞에서 나는 아직 숙제를 채 완성하지 못한 노트가 유리상자 안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또 그의 학우들이 그에게 써보낸 편지가 들어 있는 것도 보았다. 역시 광주에서, 김학원은 나에게 김현장을 소개시켜줘 서로 알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민족의 영웅인 그는 일찍이 부산 미국문화원을 불사른 장본인이다. 김현장이 당긴 이 불길은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갑자기 미국은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는 하나의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였다. 김현장은 그후로 감옥 안에서 셀 수 없는 수많은 밤과 낮을 보내며 몇차례 사형에 처해질 뻔했는데, 그가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은 운명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날 밤 우리들은 김현장의 집 거실바닥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와 김학원이 끊임없이 무엇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비록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는 것은 알 듯했다. 그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빛나는 정기를 보았다.

나는 한국의 시인 김정환을 좋아한다. 비록 우리들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이 있지만 어린시절의 동무처럼 함께 자란 느낌을 늘상 가지게 된다. 그는 여러 우수한 시편들, 그리고 음악에 관한 두 권의 두꺼운 책을 써냈다. 더욱이 돋보이는 점은 그의 작품 모두가 수면 부족의 상황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항상 얼굴에 두꺼운 미소를 띠고 있으며, 두 눈은 늘 충혈되어 있다. 그는 거침없이 유머를 토해내는데,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주위 사람들은 어느 때고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당시 혁명을 하던 시절의 습관을 지니고 있다. 정말로 피곤을 느낄 때 그는 지하철을 타고 빈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나는 듯한 지하철의 전진속도와 끊임없는 브레이크 소리 속에서 한두 시간 잠을 청하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여러 날 동안 밤이 되면 나는 김정환을 따라 도처를 휘젓고 다녔다. 우리들은 여명이 밝아오는 서울의 거리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고, 밤기운이 드리워지면 우리들의 방랑은 다시 시작되었다. 김정환은 늘 작은 골목의 술집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술집의 이름을 외울 수는 없지만 가정집과도 같은 소박하고 아담한 내부구조와 분위기만은 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 내 친구 최용만은 나에게 80년대에는 이곳이 바로 문화계 혁명가들이 모이던 곳이라고 알려줬다. 술집의 한쪽 벽은 온통 클래식 CD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이것들은 바로 김정환의 외상기록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는 이곳의 술값을 갚을 수 없어 집에 소장하던 CD를 아예 이곳에 옮겨 외상값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이곳의 CD를 꺼내 친구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나와 헤어질 때도 김정환은 레코드 두 장을 골라 나에게 선물했다.

이 술집의 주인에 대한 인상은 각별하다. 그녀는 고객이 냉장고 문을 열고 술을 가져다 먹든 아니면 다른 무엇을 찾든 상관 않고 늘 한켠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한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비범한 평온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눈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내면에 또다른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는 듯하다. 우리들과 합석해 그녀가 미소를 띠고 말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녀의 눈이 여전히 그렇게 평온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80년대에 한 절반쯤은 미치광이였을 시인과 예술가 들이 길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한 후 이 술집에 들러 여명을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술값은 외상으로 달아놓고 취기로 몽롱해 하나둘씩 술집을 나설 때도 그녀는 저렇게 평온하게 그들을 배웅했겠구나 상상할 수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것이 바로 한국의 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작년 10월, 나는 두번째 한국 방문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야색이 드리워진 부산의 김해공항에 비행기가 내렸다. 비행기가 하강할 때 나는 부산의 야경을 보았다. 산비탈을 둘러끼고 세워진 까닭에 이 도시의 불빛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부산의 등불은 서로 다른 색깔로 빛났다. 노란색, 하얀색, 푸른색, 그리고 빨간색이 교차하여, 마치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난 것 같은 아름다운 인간세의 경치를 이루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경치는 대마초를 피운 후에 바라보는 아름다움일 듯했다. 마치 번영 이후에 출현하는 아름다움처럼 그것들의 아름다움은 더 많은 현실을 덮어 가린 후에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사람들은 때로 허상의 아름다움을 필요로 한다. 다만 인간들이 혼미한 잠에서 깨어나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운 꿈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멜로드라마가 중국의 텔레비전에서 널리 환영받고, 뻬이징의 노동자경기장에서 열린 안재욱의 콘써트가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한국의 대마초는 이미 중국의 대마초와 섞여 하나가 되었다. 대마초를 피운 탓에 감옥행에 처해졌던, 노래로 사람들을 깨우는 전인권의 세번째 출옥이 이루어졌다지만, 나는 그의 네번째 감옥행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노랫가락 대마초’는 합법적인 것이고,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위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결코 한국의 눈은 아니라고 믿는다. (2001년 1월 12일)

〔申正浩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