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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회사 넘어서기와 신문화사
김기봉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푸른역사 2000
조한욱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책세상 2000
곽차섭 엮음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0
김영범 金榮範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이 있음. kint@taegu.ac.kr
1. 요즘 국내 사학계에는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서양사학계만 아니라 국사학계도 마찬가지여서, ‘과학적·실천적’ 역사학과 민중사학의 성채로부터 뛰쳐나와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주제와 분야로 슬며시 눈을 돌리거나 과감히들 뛰어들고 있다. 이를 두고 ‘전향’했다고 수군대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새로운 대상, 새로운 주제,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법, 한마디로 ‘새로운 역사학’의 바람이 묵은 역사학을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출판시장에서는 ‘거꾸로 본’ 역사, ‘이렇게 살았다’ 식의 생활사, 성·사랑·죽음의 역사를 다룬 서책들이 호응을 얻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해째다. 역사(서)에 대한 대중적 기대와 선호도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중반에는 사회사가 ‘새로운 역사학’의 이름표를 달고 등장했다. 처음에는 사회구조사, ‘사회적’ 영역의 역사를 뜻하거나 사회경제사 및 사회문화사와 혼용되던 사회사의 개념은 이윽고 경제·사회·문명을 두루 포괄하는 전체사로 그 외연이 확장되었다. 그러고는 곧 역사학의 주도적 패러다임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후 사회사는 역사와 동의어처럼 쓰여서, 망딸리떼사(histoire des mentalités)만 하더라도 사회사와 별개의 분야가 아닌, 그것의 확장이요 첨단적 영지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그 ‘전체’로서 아우르지 못한 어떤 결핍의 요소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브로델(F. Braudel)식 전체사의 전망에 짓눌려 숨죽였던 부분들이 마침내 아우성치며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모양이다. 의식적으로 ‘사회사 넘어서기’를 주창하는 움직임이 90년대초를 전후해서 주로 미국 역사학계 쪽에서 대두했으니 말이다. 이른바 ‘새로운 문화사’가 그것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각종 ‘포스트◯◯주의’ 사조가 세계사적 격변을 배경으로 승기를 잡게 된 점, 그와 더불어 다문화주의와 탈식민주의 조류가 지성계의 풍향을 바꿔놓기 시작한 점도 기존의 인문학 문제틀의 근본적인 수정 또는 조정의 기운을 부추기는데, 역사학이라고 그런 추세를 비켜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런 사태 추이를 주시하면서 제 갈 길을 잡거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권장할 바에 속하지 탓할 일이 아니다. 말로만 ‘인문학의 위기’니 ‘역사학의 위기’를 떠들고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천적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근래에는 서양사학계가 그런 방향으로 눈에 띄게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왔는데, 여기 서평 대상으로 올려진 세 권의 사론집도 그런 대응의 시도요 중간결산이라 이해된다. 세 책의 논술구조를 가로지르는 질문은 ‘어떤 눈으로 역사를 읽고, 어떻게 역사를 쓸 것인가’이다. 그것은 40년 전에 카(E.H. Carr)가 던졌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곧바로 상기시킨다.
2. 김기봉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는 위의 물음에 새로운 대답을 내놓으면서 역사학의 진로를 새롭게 설정해본 대표적 사례로 들 만하다. 저자가 목표하고 주장하는 바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하나는 카가 대변한 모더니즘적 역사인식론을 넘어서는 것, 다른 하나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새로운 역사학’의 지향점을 확실히 다잡고 그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매우 신중하고도 용의주도한 논법을 쓰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명백히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제3부의 제목에서도 ‘포스트모던 역사를 옹호’한다고 공언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소 색다른 데가 있다. 해체주의는 가급적 멀리하고 재구성 쪽에 주력하는 것이다. 재건적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나 할까.
그는 카의 역사인식론의 3대 요소—‘진보로서의 역사’ 개념, 역사연구의 과학성, 현재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먼저 헤겔식 거대담론에 지배되는 ‘근대’ 개념과 진보사관을 가차없이 공격한다. 그리고 과학성의 문제에서는 사료 ‘해석’과 사실 ‘구성’의 측면에 주목하여 역사학을 ‘의미의 과학’으로 조심스럽게 자리매김한다. 또한 ‘역사’〓‘이야기’의 구성과정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상상력과 문학성의 측면에도 저자는 각별히 주목한다. 그러면서도 화이트(H. White)나 라까프라(D. LaCapra)식의 ‘언어로의 전환’(linguistic turn)은 배척한다. 역사적 사실까지도 픽션으로 간주해버리는 극단적 입장은 역사학의 종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이다.
현재주의 역시 비판의 과녁이 된다. 과거인들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현대인의 그것과 달랐으리라는 점을 몰각해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모름지기 역사연구 과정에서는 사회과학적 개념이나 이론의 적용보다 과거인들의 의미체계, 즉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도 오늘의 역사학이 취택해야 할 방향은 ‘문화로의 전환’(cultural turn)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때문에 그가 카의 정의를 수정해서 “역사란 과거의 ‘문화’와 현재의 ‘문화’ 사이의 대화”(37면)라고 재정의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이는 ‘문화를 통해 본 역사’(신문화사)의 발흥을 의식한 포석이겠는데, 그러나 그 과정에 분명 무리수를 두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현재주의는 카의 현재주의와는 의미가 영 다른 것이다. 카의 현재주의는 문제의식(문제의 선택 또는 설정)의 차원에서 발동하는 것인 데 반해, 저자의 현재주의는 해석의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결론을 너무 의식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역사가의 문제의식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늘날의 역사학이 처한 위기가 과학주의에 사로잡힌 역사가들의 문제의식 상실, 열정과 고민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 그 해결책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대답은, 역사서술이 어차피 담론적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라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진지하게 되물으면서, ‘역사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역사를 쓸 것인가’의 ‘실행’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서술을 통해 ‘누구의 어떤 기억이 재현되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므로, 집단기억 재현의 문제가 역사학의 중심과제로 부상한다. 여기서 저자는 민중적 대항기억을 역사화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예컨대 인도의 써발턴Subaltern 연구와 같은), 잊혀진 삶의 이야기와 민중의 한을 복원해내는 ‘삶으로서의 역사’(삶의 이야기로서의 역사? 삶의 역사?)를 적극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문제제기가 김현식의 ‘생의 역사학’ 개념을 통해서도 행해진 바 있지만, 어떻든 저자는 그것이 역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유일의 출로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그는 역사교육조차도 대항기억을 위한 투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이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어떤 조건에서 그런 기획의 실천이 가능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와 제안으로 이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옹호 또는 추구하는 ‘포스트모던’ 역사의 지향점이 종래의 민중사학, ‘실천적 역사학’의 정신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다만 후자의 것들이 내보였던 모더니즘적 특징의 여러 한계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자처하고 ‘열린 역사학’을 주창했다 할 만하다.
이밖에도 저자는 역사와 시간, 영화와 역사의 접점, 미시사의 성격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어디서나 그의 논지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철학·사회학·인류학·국사학 등 인접분야의 최신 연구동향까지 부지런히 섭렵하고 소화하여 필요한 이론적 자원들을 적시적소에 동원하고 적절한 예증과 탄탄한 논리 구성으로 언술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는 것도 이 책의 강점이다. 정확한 어휘 구사와 유려하면서도 힘있는 문체는 책읽기의 즐거움까지 맛보게 한다. ‘민족주의 담론’을 비판하면서 한국사 분야의 이런저런 사건과 국면들을 저자 나름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논평한 부분들도 흥미로운데, 그러나 동학농민군과 보수유림층의 관계를 들어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독립운동의 전사(前史)로 함께 자리매김할 수 없다고 한 대목(178면)처럼 납득이 잘 안 가는 부분도 몇군데 눈에 띄었다.
3. 조한욱(趙漢旭)의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는 구미 역사학계에서 근간에 진행되어온 ‘문화로의 전환’ 추이에 관한 일괄 소개서이다. 문고판 162면 분량에 아기자기한 구성과 쉬운 문장으로 ‘신문화사’(new cultural history, 저자의 용어로는 ‘새로운 문화적 역사’ ‘문화로 본 역사’)의 등장배경, 주요 연구사례, 전반적인 특징과 의의 등을 풀어 서술했다. 안 그래도 저자는 지난 몇년 동안에 단튼(R. Darnton)과 린 헌트(Lynn Hunt)의 저서와 편서를 잇따라 번역 출간했으니, 신문화사의 전도사를 자임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학계와 독서대중 양쪽을 향해 던지는 그의 발언은 자못 확신에 차 있고 낙관적인 음조이다.
먼저, 저자의 핵심 논지와 그 함의들을 간추려보면 이렇다. 신문화사의 근본 취지는 경제나 정치가 아닌 문화를 통해서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과거인들의 상징세계와 의미체계와 망딸리떼를 통해 과거를 읽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문화가 역사연구의 중심대상으로 자연스럽게 부각될 것이다. 그러나 특수 분야사보다는 역사를 보는 일반적 방식으로 위치지어지는 것이 이전의 문화사와 다른 점이다. 여기에는 경제적·사회적 관계 역시 문화적 실천의 영역이요 문화의 산물이라는 매우 혁신적인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이 점에서 신문화사는 역사이론 및 역사서술상의 일대 패러다임 전환을 획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헌트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의 카의 언명을 패러디하여, “역사연구가 문화적으로 바뀔수록, 또한 문화연구가 역사적으로 바뀔수록 서로를 위해 좋다”고 썼다. 신문화사의 등장을 고무했고 대부분 거기에 편입되기도 한 연원적 흐름으로는, 기어츠(C. Geertz)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인류학적 역사, 톰슨(E.P. Thompson) 중심의 영국 문화주의적 사회사, 프랑스의 망딸리떼사(특히 아날 제4세대), 독일의 일상생활사, 이딸리아의 미시사 등이다.
1장에서 저자는 신문화사의 등장배경을 맑스주의 역사학의 계급환원론적 경향과 아날학파의 사회경제사 치중 및 구조사 우위 경향에 대한 반발에서 찾았다. 그러고는 신문화사가 ‘사회사 넘어서기’를 시도한 것처럼 서술했다. 그러나 결론에서는 신문화사의 새로움이 사회경제사를 대체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신문화사는 사회사의 기본지향이 되어온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한다. 그 대신 기왕의 역사해석이 거대설명의 틀로써 포착하지 못해온 측면, 인간 삶의 미세한 계기들을 감싸안는 점에서 ‘새롭다’는 것이다(123면).
평자도 결론 부분에서의 저자의 서술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에 반해 1장의 설명과 서술은 지나친 단순화와 희생양 만들기식 논리에 빠져든 감이 짙다. 이보다는 신문화사가들의 사료해독 방식을 예시하고 설명한 2장에서 5장까지의 내용에서, 신문화사의 새로움은 좀더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인식된다. 저자의 용어법을 따르면 그것은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뜨리기’의 네 가지이다. 각각의 해독방식의 실례로 저자는 단튼의 『고양이 대학살』을 비롯하여 주로 영어권 신문화사가들의 저술을 뽑아 재미있게 설명했다. 개중에는 국역본이 있는 경우가 꽤 되므로, 앞으로 국내에서도 신문화사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수용도가 급속히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학생들로 하여금 신문화사 관계 저술들을 읽고 토론하게 하여 독창적인 해석을 이끌어낸 것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모범적 사례로 여겨질 만큼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신문화사는 역사학의 지평을 확대해 풍요롭고 흥미롭게 만들었으며, 역사서술의 대상과 자료의 범위를 대폭 확장해주었다. 그러나 ‘섬세한 감수성’과 흥미의 측면에 매몰되어 역사학 고유의 비판정신이나 역사의 방향감각을 잃게 하지 않을까 저자는 우려한다. 또한 신문화사가 거대담론을 너무 쉽게 비판만 한 것이 아닌가 자문하고, 거대담론을 다시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를 원한다.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결론 부분에서의 이런 문제제기나 소망은 서론 및 본론의 논지와 유리된 것이어서, 과연 얼마나 진정어린 얘기인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냥 해보는 공치사가 아니라 정말 진지한 문제제기였다면, 맥없이 논의를 끝내버릴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진전시키는 성의와 깊이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인지 “문화를 통해 본 역사가 가야 하는 길은 역사의 현장에서도 밀려나고, 역사책 속에서도 밀려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주변부 사람들의 몫을 정당하게 찾아주는 일”(121면)이라는 언명도 그다지 큰 울림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4. 조한욱이 신문화사의 한 지류로 예거한 미시사(microstoria)는 1970년대에 이딸리아에서 태동해 이제는 널리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독특한 연구방법의 흐름이다. 그동안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도 알려지지도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 곽차섭(郭次燮)이 엮은 『미시사란 무엇인가』를 통하여 그동안의 성과와 연구경향을 어느정도 파악해볼 수 있게 되었다. 450면 분량의 이 번역서에는 제1부에 미시사의 이론과 방법에 관한 논문 4편, 제2부에 창시자인 진즈부르그(C. Ginzburg)의 민중문화 연구에 관한 해설과 논평문 3편, 제3부에 미국의 중세사가 데이비스(N.Z. Davis)의 화제작 『마르땡 게르의 귀향』을 둘러싼 방법론 논쟁문 3편이 실려 있다. 엮은이의 글인 서설과 7장은 미시사의 영역 탐사를 위한 좋은 지도 겸 안내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진즈부르그가 술회하고 있다시피(1장), 미시사는 원래 아날학파의 계량적 방법과 계열사의 승리에 대응하여 학문적 종속성을 불식하고 자국의 연구여건에 맞는 연구방법을 개발하려는 의욕에 의해 창안된 후, 이딸리아 역사학의 독립성과 자존심의 보루처럼 기능해왔다. 이 사실은 학문의 국제적 교류의 필요성 못지않게 자주성 확립도 긴요한 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 학계에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미시사가 주제의 성격이나 기본적 시각 및 접근방법 등 여러 면에서 망딸리떼사와 구분되기 어려운데도 왜 별도의 이름이 붙여졌나 하는 의문점도 이로써 풀린다.
진즈부르그부터가 그랬듯이 이딸리아 미시사가들은 적어도 중세말 이전의 민중적 망딸리떼와 민중문화의 영역을 즐겨 연구하면서 민중적 삶의 구체적 진실을 포착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쌓아왔다. 그래서 미시사는 ‘민중문화의 고고학’이 되며, 엮은이의 제안대로 ‘미시문화사’로 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에는 그들 대부분이 맑스주의자이거나 좌파 성향이 강한 이들인 동시에, 민속과 대중문화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을 지녔던 그람시(A. Gramsci)의 지적 후예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문화와 지배계급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견고한 지배/종속 관계를 전제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보다 각각의 독자성과 상호 영향을 강조하는 바흐찐(M. Bakhtin)의 ‘상호순환적’ 문화모형에 주로 의거해서 설명해왔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연구시각과 접근방법을 예컨대 조선후기의 민중문화에 적용해 충분히 활용해볼 만하다.
미시사가들은 자료의 부족이나 공백을 독특한 방식으로 메우고 처리해왔다. 우선 경계가 뚜렷한 소집단의 개개인들로 관찰규모를 축소하고, 한정된 문헌자료를 집중적으로 세밀히 분석하는 데 연구의 토대를 둔다. 사냥꾼이나 탐정과 같은 자세로 조그만 ‘실마리’라도 잡아내면 그것에 대한 ‘합리적 추론’을 통해 결론을 얻어낸다. 연구된 사례의 대표성 문제가 종종 비판의 촛점이 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례적 정상’의 개념으로 맞받아친다.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행동의 흔적들은 의외로 문헌에 잘 기록되지 않기 때문에, 통계학적 대표성 못지않게 ‘역사적 대표성’의 차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부분도 있겠지만, ‘합리적 추론’이라는 개념과 사례의 대표성 문제는 두고두고 방법론적 논쟁의 쟁점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제3부의 논쟁적 글들에서 드러나듯이, 역사서술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하는 양식과 그 한도, 특별한 사건에서 표출되는 개인심리적 특성 또는 ‘생존전략’을 얼마만큼 일반화할 수 있을지의 문제, 데이비스처럼 5백년 역사를 가로질러 적용 가능한 심리적 과정에 대한 가정에 기초하여 증거를 추론한다고 했을 때(386면) 범해질지 모를 심리학적 몰역사주의의 문제 등이 그렇다. 핀레이(R. Finlay)가 데이비스를 향해 “도대체 역사쓰기와 소설쓰기를 어떻게 구별하겠는가?”라고 추궁 섞인 항변을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그런데도 데이비스가 사뭇 당당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면, ‘자료’ ‘증거’ ‘사실’ 들에 관한 실증주의적 규범은 이제 신화로 화했고, 그보다는 인간 삶의 전면적 진실을 여하한 방법으로든 포착 또는 설명하기를 시도하는 것이 새로운 역사학의 미덕처럼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5. 다른 분과학문들에서도 대부분 그렇지만 역사학의 위기는 실상 주도적 패러다임의 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패러다임의 위기가 있을 따름이지 역사학의 위기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패러다임 교체와 더불어 역사학 자체는 또 한번의 자기갱신을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는 그 자체로 혁신의 기회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역사, 신문화사, 미시사, 이 모두는 역사학이 기존 사회사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기혁신을 기하게끔 하는 자극제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신문화사 등장과 전개는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뒤늦게 이루어져서 그 신선미가 돋보이는 것일 뿐, 넓은 의미의 신문화사적 시각과 방법은 그보다 앞서 영국·프랑스·독일·이딸리아 각국에서 고유의 지적 풍토와 문화적 조건을 매개로 형성되어 점차 파급·확장되어왔다. 그렇게 보면, 신문화사는 이미 오래 전에 아날학파 또는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구조사적 패러다임과 경합하기 시작했던 것인즉, 그 ‘새로움’은 지나치게 과장된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신문화사의 대극에 ‘사회사’가 세워질 때 그 정체성이랄까 의미는 일관성도 없고 두루뭉수리로 매겨지면서 많은 혼란과 오해를 유발하고 있다. 앞의 책들에서처럼 향후 역사학의 바람직한 진로로 ‘아래로부터의/밑으로부터의 역사’가 내세워졌을 때, 그것은 사회사에 속하는가 아닌가? 평자는 이론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역사의 속살과 밑바닥으로 파들어가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야말로 사회사 본래의 정신을 구현하는 역사모형이라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신문화사와 사회사의 관계를 상호배제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논법은 이제 재검토돼야 한다. 『고양이 대학살』의 경우도 그랬듯이, 사회사 연구의 성과가 축적되어 있지 않으면 신문화사적 자료해독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신문화사는 “사회사의 뼈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라고 한 어느 연구자의 비유는 매우 적절하며, 양자 사이에 ‘아름다운 협동’이 이루어져서 안될 까닭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신문화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사회사라기보다 목적론적·도식주의적 거대담론임을 다시금 분명히해둘 필요가 있다.
아마도 신문화사적 시각과 방법은 국사학계에 유익한 자극을 줄 것이려니와, 서양사학과 한국사학간 교류·협력 증대의 중요한 계기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실은 그동안에도 그런 시각과 방법으로 한국사의 특수한 국면과 흐름들을 연구하고 해석한 예가 상당수 있었다. 역사민속학 분야와 향촌사회사 연구, 민간신앙·민중연희 연구들 가운데서는 특출한 성과들도 더러 나왔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런 선행연구의 경험을 최대한 살리면서 외국의 사례를 참조하여 연구방법을 더 정교화하고 연구의 수행을 조직화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방안들이 강구됨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