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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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李相國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등이 있음.

 

 

 

살구꽃

 

 

살구꽃이 피었습니다

강선리 이장네 마당

짚가리에 기대어 피었습니다

지난 겨울 찬바람 불 때

발 시려운 새들 찾아와

체온을 나누던 가지 끝마다

붉은 꽃이 피었습니다

 

 

 

벽에 기대어

 

 

그런 날엔

티브이도 시시해서

벽에 기대어 시무룩하게 바라보면

형님은 또 담배를 붙여 물고

그림자처럼 앉았던 형수는 저것 보라며

슬픈 주먹총을 놓는 거였다

 

암종 든 한쪽 폐를 병원에 두고 오고도

담배를 두려워 않는 사람,

뜯어낸 늑골 때문에

생이 한쪽으로 자꾸 휘면

기우는 반대편에 삶의 잡동사니들을 얹어

용케 균형을 잡아가는

늙은 전사야

 

낡은 형광등이 찌르레기처럼 우는 저녁

큰조카는 괜히

날이 너무 가물지요 하고

누구에랄 것도 없이 묻고는

그 뒤끝을 허물려고

연신 손으로 파리를 낚아채는 시늉을 하는데

 

해 지고 나면 땅거미가

들과 마을을 차례로 덮어오듯

한발 한발 다가오는 거대한 그 무엇과

겁없이 맞서는 형님의 아름다운 싸움을

나는 또 천치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미천골의 밤

 

 

미천골의 어둠은 짐승 같아서

외딴곳에서 마주치면 서로 놀라기도 하고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나는 그 옆구리에 누워 털을 뽑아보기도 하고

목덜미에 올라타보기도 하지만

이 산골에서는 그가 제왕이고

상당한 재산을 불야성에 바치고

어느날 앞이 캄캄해서야 나는

겨우 그의 버러지 같은 신민이 될 수 있었다

저녁 밥숟갈을 빼기 무섭게 시커먼 밤이 내려오면

구렁이처럼 친친 감아오는 어둠에 숨이 막히거나

커다란 젖통에 눌린 남자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들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을 생각하고는 했다

또 어떤 날은 산이 노루새끼처럼 낑낑거리는 바람에 나가보면

늙은 어둠이 수천 길 제 몸속의 벼랑에 몸을 던지거나

햇어둠이 옻처럼 검은 피칠을 하고 태어나는 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들과 냇가에서 서로 몸을 씻어주기도 했다

나는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고

생각과 몸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둠을 몸처럼 입고 다녔으므로

나도 나를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밤마다 미천골의 어둠이 더운 고기를 삼키듯 나를 삼키면

그 큰 짐승 안에서 캄캄한 무지를 꿈꾸거나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 때문에

나는 때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그 속을 날아다니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