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1968년 『시인』지로 등단. 시집으로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등이 있음.

 

 

 

白鶴峯 1

 

 

멀리서 보는

白鶴峯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이제야 알겠구나

흰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白鶴峯 2

 

 

저기

희미한 한등

불을 밝히고

 

암자에서 누군가

칼을 내린다

 

밤에도

하얗게 빛나는 白鶴峯

抱卵의 山勢 안에 깊이 안겨

 

한등

희미한 불을 밝히고

누군가 이 밤에 저기서

칼을 내린다

 

안쓰러운 생명들 위해

생사대립 위에 가차없는

칼을 내린다

칼을 내린다

 

서녘의 외로운 달은

밤새워 떨고

 

검은 숲속의 주린 나무들

내내 울부짖어

 

피비린 옛 역사를

소리소리 외쳐대는 곳

 

지금 여기

白羊寺에 와 있다

 

험했던 시간과 험했던 산천에

험했던 험했던

투쟁의 스님

知詵禪師

큰 아픔으로 주석하는 곳

 

佛龕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한마리 白羊의 흰 그늘에

공명하는 칼끝 바람소리

귀기울이며 마주앉아

차를 마신다

 

나 지금 여기

白羊寺에 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밤새워

칼을 내린다

 

옛 싸움의 기억들 위에

칼을 내린다

칼을 내린다

미소 속에 끊어

멀리 바람에 흩날려 떠나보낸다

 

그 옛날

누군가

여기서 돌아갔기에,

피투성이 걸레처럼

갈가리 찢어발겨졌다는

어둡고

참혹한 전설이기에.

 

 

 

白鶴峯 3

 

 

길은

아무리 곧아도

산을 뚫지는 못한다

 

돌아가거나 넘는다

 

새하얀

白鶴峯 아래

흰 白羊寺 있는 까닭인가

 

돌고 넘는데

몇 세상이 걸릴까

 

돌고 넘기 위해

몇번을 죽어야 하나

 

밤새워

형광등 타는 소리 소리

차 한잔 앞에

오똑 앉은 知詵스님의

저 시뻘건 방에 갇혀

죽기로 좌선하던 이야기,

아하

 

앞산 등성이에

붉은 달 떠오르고

 

바람은

마루 밑

새끼 낳는 고양이처럼 시끄럽고

 

시냇물은

돌틈에서 외치듯 외치듯

용솟음치니

 

아하

산천이 모두 다

스님의 용맹을 걱정하는구나

 

‘和尙은 현실을 보시오!

和尙은 옛 시간을 배신하는

현실을 못 보시오?’

소리소리 떠드는구나

 

잠시

방을 나와

밤하늘 쳐다보니

 

달이

빙긋 웃어 왈

‘뚫어 보았으니

이젠 돌아들 가시오’

 

나도 웃음으로

우러러 왈

‘………!’

 

꿈결 같은 신새벽

白羊寺 夜話

한 토막.

 

 

 

金山寺 밤뜨락에서

 

 

어미산 아래는

금산사

제비산 앞에는 금평못,

우주의 음부 곁에 우뚝 섰구나

미륵이 섰다

한밤

뜨락에 나서

달빛 속의 산

저 꼭대기에 깊이 박힌

쇠를 뽑으라 뽑으라

기도할 때

내 기도할 때

댓잎은 우수수 바람에 지고

어디서 여자 울음소리

내내 들려라

여기가

진표와 진훤의 삼한 미륵땅

여기가

정여립의 대동계 미륵땅

여기가

갑오동학과

강증산의 큰 율려

큰 황극의 후천 미륵땅

또한

高首婦의 땅

母嶽이니

신발을 벗고

조심조심 마루 올라라

금평물이

원평으로 콸콸콸 쏟아져라

미륵은 한순간,

이윽고

여자의 때가 되었으니

내 이제

다 마쳤구나

달은 검은 숲속에 잦아들고

내 넋은 이내 깊은 잠에 든다

아아

눈부신 황극이여

빛나는 금산이여

댓잎은 우수수 바람에 지고.

 

 

 

廣濟局에서 한낮에

 

 

날개 피묻은

나비 한마리

내내 눈가에 날더니

텅 빈 廣濟局

좁은 방안 들어서자

없다

 

없다

구릿골에서 온다는,

물 많은 금평못

우주의 자궁에서 온다는,

와서

입으로 뇌수의 피고름 빨아

인류를 모두 구할

큰 제비 온다는 봄소식

아예 자취 없다

 

아아

오고 오지 않는

율려의 세월이여

 

나비도 제비도 아닌

후천 여인의 신풍류여

 

잠시 못가에 서서

모악을 바라보니

 

기이한 기이한 시간을 날아 저기로

나비가 간다

날며

사라져 가

그마저 자취 없다

 

봄 한낮 구릿골

廣濟局 앞 텅 빈 뜨락에서

무기미한 내 스스로의

그늘을 두고 생각한다

 

방금의 나비는

현실인가

환상인가

누군가 이제 맞이할

새봄의 예감인가

죽음의

기인 긴 죽음의

불길한 조짐인가

 

대답은

여기 지금

없다.

 

 

 

흰 방

 

 

서서히

죽어간다

 

여기

허공의

흰 방에 갇혀

 

서북쪽과

남쪽을 바라보며

 

흰 그늘이 마침내는

강화와 지리에서 지펴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서서히

죽어간다

 

때론

새들이 떼를 지어 창밖을 날아가고

때론 화사한 꽃소식도 멀리서 들려온다

 

때때로

미쁜 님들의 아리따운 개벽의 복음이

잠시잠시 신문에 스쳐가기도 하지만

 

너는 무엇인가

너는 누구인가

 

허공이 내게 묻는다

 

대답은 늘

허공에서 흰빛이 날 때까지

새하얀 그늘의 그 아픈 거룩함이

강화 지리 굽이굽이

저 푸르른 물과 산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그날에까지 그날에까지

 

허공을 모심,

죽어가며 끝끝내 허공을 모심

 

슬프디슬픈 모심이여

 

허공인 당신의 빛을 내내 기다림

 

그것이 바로

나,

 

꿈결 같은,

살아 있는 지금의 다름아닌

 

서서히

죽어가는

 

여기

허공의

흰 방에 갇혀

 

서북쪽과

남쪽을 바라보며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검은 방

 

 

밤마다

앞뒤 좌우 다 끊고

 

검은 방

든다

 

들숨 날숨

기억도 희망도

 

한가닥 남겨진 자존과

오랜 죄의식마저도 아예

멀리 끊어 흩어버리고 밤마다

 

검은 방

든다

 

캄캄한 어둠 저편에

희미한

영신들 널뛰는 소리

 

뼈마디 우둑이고

온몸 뒤틀리고

뒤트는 옥돌 신음소리 신음소리

 

밤새워 앓던 나

내 속의 나

道胎인가 되살아나

새 몸뚱이로 되살아나

이윽고

방을 나선다

 

어둠속 아득한 곳

나를 이끄는

반딧불 같은

난초잎 서걱임 같은

아내의

작고 희미한

웃음소리 단 한번

 

그리고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

 

‘당신을 아직은 살려두리니

가루가 되도록 일을 하시오

모심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으시도록!’

 

그리하여

다 끊고

이젠 밤마다

 

검은 방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