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발굴 | 故 김수영 산문
해제
여기에 실리는 김수영(金洙暎, 1921〜68)의 산문은 현재까지 그의 전집(민음사 1981)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들로, 미발표 유고가 아니라 김수영의 생존시에 이미 발표된 것들이다. 그와 그의 문학에서나, 60년대 사회문화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들이지만 이 글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어 이를 공개한다.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는 1960년 4월혁명을 전후로 해서 씌어진 글이다. 5월호 잡지가 발간되기 위해 필요했을 원고마감 시한을 고려하면 4월혁명 이전에 씌어졌으리라 생각되는데, 이후 김수영의 현실인식의 변화를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참고로 말하면, 이 글은 어떤 연구자의 김수영 작품목록에서는 시로 분류되어 있던 것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은 현실과 타협하는 자기를 비판하고 시인이 지켜야 할 양심의 정도를 내내 강조했던 김수영의 역설적 글쓰기 방식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산문이다. 그의 「도적」(1966.10.8)이란 시를 사후에 설명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텐데, 그 자신을 ‘초고급속물’이라 지칭하는 대목은 그의 양심론에 값한다.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는 당시 공화당에 의해 자행된 1967년 6·8 부정선거와 그 파장의 원인을 ‘인간의 부재’ ‘사랑의 부재’로 연결시킨다. 김수영 후기시의 주제인 ‘소음’과 ‘사랑’이 여기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학생시위에 대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시가 건재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진술하는 부분은 그가 일찍이 월북시인 김병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도 강조한 바 있다.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라는 진술은 지금에 와서도 왜 여전히 김수영이 문제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수영이 당대의 번역가였다는 사실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그 스스로 말하는 현실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김수영이 외국 잡지와 서적을 끊임없이 탐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찾은 네 편의 글은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신비주의와 민족주의의 시인 예이츠」와 「도덕적 갈망자 빠스쩨르나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을 번역한 신구문화사판 전집에 작가론으로 수록된 글이다. 두 글 모두 두 사람의 문학적 일대기를 스케치하고 있는데, 그는 예이츠에게서 ‘쉬운 싸움을 거부하는 사람의 불굴의 시심’을 보고 빠스쩨르나끄에게서 ‘극도로 유동적이고 시흥적(詩興的)인 산문정신’을 본다. 김수영 산문 문체의 파동적 특질, 그리고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반시론」)이라고 반복하는 그의 절규가 여기에서 또다른 근거를 얻는 셈이다. 「안드레이 씨냐프스끼와 문학에 대해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한 이유로 숙청당한 씨냐프스끼의 작품과 문학관을 소개한 글이다. 김수영이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작가들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예렌부르끄나 브레히트 등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해학」은 김수영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신구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글로서, 그가 뮤리엘 사라 스파크의 장편소설 『메멘토 모리』를 번역하고 작품론으로 쓴 것이다. 김수영이 그의 문학적 생애 동안 집요하게 천착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라는 주제이고 라이오넬 트릴링의 영향 속에서 죽음을 현대시의 진정한 문제로 생각했다는 점을 고려하고 보면, 이 글은 그의 시의 비밀을 풀기 위한 또하나의 열쇠가 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거운 죽음을 해학의 상승으로 풀어내는 스파크의 강인한 정신이다. 참고로 말하면, 이 글은 영국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스파크를 소개하고 있는 「새로운 윤리 기질」(1966.7)의 몇 단락과 동일하다. 착오 없기를 바란다.
김수영의 자료를 소개하면서 첨가해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 그의 작품목록이 좀더 치밀하게 재작성되어야 하리라는 점이다. 예컨대 「민족주의의 A·B·C」 같은 글은 글쓴이가 ‘金洙永’으로 되어 있는데, 글의 내용이나 문체로 보건대 ‘金洙暎’의 글은 아닌 듯싶다. 좀더 확인해볼 문제이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소홀해지고 있는 원전비평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朴秀淵/문학평론가 QKRTK@chollian.net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
지성인은 원래 우리말로 바꿔 말한다면 ‘선비’라 할진대, 정의를 갈구하는 이유에서 자기 몸을 항시 항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데 있을 것이다.
이번 3·15선거 결과로서 일어난 학생데모 사건을 위시한 마산사건을 보고 지성인이라고 해서 별달리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양상이란 것이 너무 악착하게 횡포하고 굴욕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도록 가슴이 메어질 지경이다. 정치의 자유란 것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의 하나이고, 우리나라와 같이 민주주의 국가가 싹틀까 말까 한 것을 해도 보지 못하게 포장을 쳐서 질식시켜버리려는 마당에 있어서는 정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요즘 외국잡지를 보면, 소련 같은 무서운 독재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예렌부르끄 같은 작가는 소위 작가동맹의 횡포와 야만을 막기 위해서 작가들의 단결을 호소했다 하거늘, 항차 인권의 최위기(最危機)에 처한 우리나라 지성인들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번 3·15선거 전후에 하는 꼴들이란 하다 못해 시를 쓴다는 사람들까지도 권력의 편에 가담하여 명리(名利)에 급급하고 있으니 무섭기만 하다.
나는 정치문제에는 도대체가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고 말해본 일도 없고 또 잘 알지도 못하지만, 이번 선거의 만행은 정치문제를 떠나서, 또는 지성의 문제를 떠나서 전국민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분격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생리적인 불구자이거나 ‘미라’이거나 혹은 허수아비일 것이며 대한민국의 백성이 아닐 것이다. 국민 된 자라면 어찌 엎드려 누워서 모른 체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미국의 시인 휘트먼이 말하듯이 자유란 것은 두번째나 세번째나 혹은 다섯번째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맨 마지막으로 생명과 더불어 없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그처럼 끝까지 싸울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 싸움〔抗拒〕이 우리의 싸움의 서막의 서곡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앞으로 건설할 빛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구상하여볼 때, 염두에 들어오는 무수한 고생다운 고생의 첫머리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싸움의 전망이란 것이 극히 암담한 것이고, 지성이 도저히 폭력화될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지성인은 그래도 조리있는 설득과 아름다운 이성으로 줄기차게 자기들의 맡은 각자의 천직을 고수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슨 데모사건 같은 것에 있어서도 정력이나 인내 이상의 그 몇배의 진실성이 없이는 되는 것이 아니다. 될 수만 있으면 조용히 아름답게 그러나 강하게 싸우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싸우는 법을 일반 민중에게 깨우쳐주는 것이 지성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번 학생데모 사건은 오히려 야당인 민주당을 앞서서 걸어가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 되었으니, 야당은 눈앞의 목적에 편중하지 말고 좀더 가라앉은 방향으로 좀더 먼 곳에 목표를 두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얼마나 뒤떨어졌는가. 학문이고 문학이고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벅찬 물질만능주의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의 구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난호의 『새벽』지에 게재된 러쎌의 소설이라든가, 요즘 내가 읽은 모라비아의 『멕시코에서 온 여인』이라든가는 모두가 벅찬 물질문명에 대한 구슬픈 인간정신의 개가(凱歌)이었다.
지성인은 눈에 뜨이지 않게 또 눈에 뜨이지 않는 성과를 위해서, 그러나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정신을 위해서 싸워야겠고, 그러한 무장이 항시 되어 있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아니 3·15선거를 중심으로 해서 바람 속에 들어간 문화인이 어처구니없게 불쌍하기만 하다. 하나 어제까지 우리들이 싸워왔듯이 오늘도 우리는 싸워야 하고, 오직 내일의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나는 확신하다.
〔새벽 1960년 5월호〕
이 거룩한 속물들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일껏 하던 놀음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못한다는 말의 ‘멍석’이 청탁이 되는 예를 글쓰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번씩은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매일같이, 매달같이 너절한 신문소설과 시시한 글들이 쉴새없이 쏟아져나올 수 있겠는가.
‘속물론(俗物論)’의 청탁을 받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런 얄궂은 생각과 쓰디쓴 자조의 미소뿐. 도무지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고, 붓이 철근같이 안 움직인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
우연히도 어제 우리집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뜰 아래의 헌 재목을 쌓아둔 광의 바깥벽이 며칠 전의 비오던 날 무너져버렸다. 이 헌 재목은 다른 게 아니라 재작년 초겨울에 앞마당 밖의 양계장을 하던 자리에 세운 집이 무허가로 헐려서 뜯어낸 것들이다. 한 백평 가량의 공터를 빌려서 매년 토지세를 내고 양계를 하다가, 그것이 수지가 안 맞아서 여편네의 고안으로 그 자리의 일부에 이십평 가량 줄행랑 비슷하게 하꼬방을 드리고, 세를 주었는데, 땅주인이 노발대발하고 구청에 찔러서, 근 일년 동안을 승강이를 하다가 헐린 것이다. 그 비극의 재목을 처넣어둔 광의, 블록으로 싼 바깥길 쪽 벽이 헐린 뒤에도, 바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한 우리 부부는 그 담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속에 든 기둥, 널빤지, 문짝, 서까래 부스러기들이 썩은 생선뼈처럼 그대로 바깥으로 꿰져나갔다. 단돈 십원에 벌벌 떠는 여편네의 생리로서 이 헌 재목이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이 재목은 생돈 이십만원을 곱다랗게 손해를 보고 남은 원한의 유산(遺産)이다. 그 재목이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예측한 대로, 도난을 당했다. 그중에서 제일 값진 현관 문짝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그 담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은 웃고만 있었다. 개가 짖어도 나가보지를 않았고, 나가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친구 Y가 집을 증축하겠다는 말을 듣고 우리집 재목을 갖다 쓰라고 했다. 이 친구가 바로 어제 이 재목을 가지러 왔다. 그래서 우리집에서 삼십리 가량 떨어진 금호동까지 재목을 싣고 갈 인부를 얻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여편네는 우리 동네에서 그중 가난한 아무개 아버지를 불러왔다. 한 리어카가 잔뜩 되는 나무를 골라내고 나니, 광이 허술해지고 통로까지 생기었다. 이 통로를 메우게 하려고 광 밖에 세워두었던 나무기둥들까지 집어넣어서 엉성하게 밖으로 난 구멍을 메우게 하고, 임시로 담이 헐린 곳에 가시철망을 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아무개 아버지가 가시철망은 치지 않아도 된다고 한사코 반대한다. 여편네는 자꾸 치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다가 몇차례 옥신각신을 한 끝에 아무개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주인의 명령에 못 이겨서 가시철망을 친다. 그러자 바깥길에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구경들을 한다. 그 아이들 중에는 이 아무개 아버지의 어린애들도 끼여 있다. 그런데 이 아무개의 아버지의 어린애의 손을 잡고 있는 옥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처녀아이가 며칠 전에 나무를 빼가고 있는 것을 나는 우연히 창 너머로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이 아무개 아버지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던 나의 의심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그래서 유심히 이 아무개 아버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이 아무개 아버지는 별안간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면서 자기의 어린것들과 옥색빛 스웨터의 처녀아이를 가라고 쫓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철망을 다 쳤다고 해서,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보니 꿰어져나온 생선뼈의 한 귀퉁이에 쳐놓은 철망은 단 두 줄. 그것은 대포를 들고 오는 도둑에게는 거미줄만한 역할밖에는 못할 정도의 것이다.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아무개 아버지가 재목을 싣고 간 뒤에, 혼자서 무너져 부서진 블록 토막을 주워 모아가지고, 거미줄 밑에다 엉성하게 쌓아올렸다. 이것은 도둑을 막거나, 도둑에게 호통을 치기 위한 방폐라기보다는, 도둑에게 애소하는 눈물의 제스처다. 물론 이런 허약하고 비겁한 제스처가─그것이 아무개 아버지이든 누구이든간에─도둑에게 통할 리가 없다.
이런 어리석은 어제의 경험이, 속물론을 쓸 자격을 이미 상실하고 고민하고 지친 나의 머리에, 아주 아득한 옛날의 기억처럼 아물아물 떠오르는 것이 신비스럽기까지도 하다.
이렇게 지나치게 서론이 길어진 것도 역시 속물론을 쓰기 싫은 심정의 서투른 지연작전이라고 생각해주면 된다. 나를 보고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는 것은 아무개 아버지를 보고, 자기가 도둑질을 한 집의 담에 가시철망을 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더 어색한 일이 없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까짓 것, 그저 담뱃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을 해야 하고, 자식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러다가 보면 차차 돈도 생기고, 살림도 제법 안정되어가고, 전화도 놓고, 텔레비도 놔야 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오는 젊은 기자들에 대한 체면이나, 다음 청탁에 대한 고려를 해서도, 다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헌 잡지 나부랭이나 기증받은 책까지도, 하다 못해 동화책까지도, 말끔히 먼지를 털어서 비어 있는 책꽂이의 공간을 메워놓아야 한다. 그리고 베스트쎌러의 에쎄이스트로 유명한 A, B, C의 뒤를 따라 자가용차를 살 꿈을 꾸고, 펜클럽 대회가 빠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戰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 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속물이지 고급속물은 아니다. 고급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속물이란 자폭(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속물을 미화하고 적당화시킴으로써 자기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초(超)고급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深淵)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거룩한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양서점(洋書店)에 있는가. 양서방(洋書房)의 주인은 일본 고본옥(古本屋)의 주인에 비하면 어디인지 모르게 거만하다. 양서방의 카운터에 타이프라이터를 놓고 앉아 있는 좁다란 바지통의 사나이의 그 야무진 눈동자, 우리들은 이 배미사상(拜美思想)의 눈동자를 오늘의 지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가. 그의 눈동자에는 나일론 재킷이 씌어져 있나. 혹은 신간 양서(洋書)를 진열해놓은 외국 대사관 도서실의 카드상자 앞에 앉아 있는 청년과의 대화, 지성적인 청년에게, “제임즈 볼드윈의 『조바니스 룸』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봐 보아라. 그는 대뜸 경멸하는 표정으로 변하면서, “여기에는 『제임즈 본드』 같은 저급한 책을 보여주는 데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 얼마 전에 내가 당한 일이다. 이 말을 듣고 “네 그렇습니까” 하고 그대로 물러나왔더라면 멋이 있었던 것을 원래가 고급속물도 저급속물도 아닌 나는, 내가 찾고 있는 책이 ‘저급한 제임즈 본드’가 아니라 ‘고급한 제임즈 볼드윈’이라는 설명을 누누이 해주었다. 청년은 다시 발끈 화를 내면서, “그런 이름은 모르니까, 저 카드서랍을 찾아보세요!” 물론 카드서랍에 『어너더 컨트리』를 쓴 흑인작가의 옛날 소설 이름이 들어 있을 리가 없다. ‘B’자의 서랍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볼드윈의 옛날 소설은커녕 그의 근간 저서도 없고, 도대체가 정치가나 경제학자나 신학자나 드레스 메이커의 ‘볼드윈’도 없다. 이것은 도서관원만이 속물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 자체가 거룩한 속물이다.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십일층인가의 고층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 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구원은 무대를 바꾸어놓아야 한다. 사회자가 나쁜 게 아니라 사회자가 서 있는 자리가 나쁘다. 사회의 연단과 마이크의 위치를 관중의 뒤쪽에 놓아야 한다. 관중이 안 보이는 곳에. 그러나 시끄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한 놈이 하던 목소리가 관중이 안 보인다고 사회자가 수시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사회자가 관중보다 더 많아진 나라가 있다. 이것을 고치려고 어떤 나라에서는 천장에다 사회석을 만들기도 하고, 마룻바닥 밑에다 유리를 깔고 집어넣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천장과 마룻바닥 밑은 관중의 고개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다시 끌어내려서, 이번에는 사회자를 중심으로 하고, 다시 옛날의 약장수나 요술쟁이들이 하는 식으로, 둥그렇게 모여앉도록 했다. 민주주의의 방송망과 텔레비망이다. 그러나 역시 속물들은 여전하다. 하지만 일루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모두 다 유명하게 만들어라.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더 간판을 늘려라. 하나님은 오늘날의 속물의 근절책으로 이 방법을 시험하고 있고, 어느정도 효과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쓰기 싫은 글을 억지로 여기까지 쓰고 나니 피곤하기만 하다. 하기는 피곤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약(藥)이다. 미국의 오늘의 모든 폐해는 이 피곤을 모르는 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을 흉내내기 시작한 지 아직 얼마 안되는 우리들은 언제 피곤을 배울까. 우리들은 아직도 배가 고픈 단계에 있다. 피곤도 배를 제대로 채우고 나서야 느끼게 될 것이니까. 앞으로도 한참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라디오 드라마와 유행가를 거의 도맡아 쓰고 있는 친구로 속물을 극복한 위대한 속물이 있다. 신문의 역사소설을 근 십권이나 쓴 선배 중에도 이런 분이 있다. 이쯤 되면 속물도 애교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나일론 재킷을 분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고, 어찌나 시간이 걸리는지, 요즘에는 그 감별까지도 포기하고 있다. 이제 나도 진짜 속물이 되어가나보다.
〔동서춘추 1967년 5월호〕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
시인과 현실
수도 서울의 곳곳의 로터리와, 광화문에서 중앙청 앞까지 뻗친 길 한가운데의 잔디밭 위에 채송화니 한련이니 장미이니 국화이니 샐비어꽃이니 다알리아니 하는 꽃들이 심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지가 오래다. 그전에 중앙청 앞길의 같은 잔디 위에 학생들이 만든 치졸한 선열들의 동상이 세워졌을 때는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적지 않이 시비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것은 철거의 운명을 보게 되었는데, 이번의 각 로터리의 유치한 미화작업에 대해서는 저널리즘이 이것을 지적하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 무얼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 그만인 것도 같지만, 나는 워낙 소인이 돼서 그런지 신경과민이 돼서 그런지,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꺼멓고 뻘건 흙이 내솟은 긴 네모꼴이나 바른 네모꼴의 벌거벗은 흙 위에 피워놓은 어린이들의 소꿉장난 같은 꽃들을 볼 때마다 치가 떨릴 정도의 분격을 느끼게 된다. 그 어울리지 않는 불쌍한 꽃들은 지나가는 차량들의 다이너모의 먼지를 있는 대로 다 뒤집어쓰고 울고 있다. 우리들까지 왜 이렇게 욕을 보이나. 누가 우리들을 보아준다고 그러나. 우리들도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어야 할 텐데 누가 그 밥을 주나. 그 밥을 제대로 줄 돈이 있는가. 그런 돈이 있으면 공중변소라도 짓지…… 나를 보아줄 만한 사람은 자연히 배부른 사람들뿐일 텐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네 집 정원에 없는 나무가 없고 없는 꽃이 없다. 이렇게 그 꽃들은 울고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 좀 유식한 꽃들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우리들을 이 기계의 고도(孤島) 속에 유형시킨 유사 이래의 모욕을 준 자가 누구냐. 우리들은 너희들의 삭막한 기계의 사막 속에 어울리는 생물이 아니다. 외국 손님들을 위해서 특히 이런 영광된 자리에 뽑힌 행운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우리들을 심느라고 수고한 사람들과 앞으로 아침저녁으로 밥을 줄 시녀노릇을 할 불쌍한 영세 실업자들에게 돈벌이를 시켜주니, 그것만 해도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외국 손님들이 우리들 같은 볼품없는 꽃들이 미스코리아로 뽑혔다고 욕을 할 줄 알지만 그런 오버쎈스를 집어치우라고? 사실은 우리들을 일부러 이렇게 유치한 꼴로 심었다고? 너무 똑똑한 꼴로 심으면 외국 손님들이 경계를 하고 돈을 안 주니까, 이렇게 초라하게 심어서 동정도 받고 경멸도 받는 것이 돈을 끌어내기가 오히려 쉽다고? 부정부패가 있는 나라는 부정부패가 있는 나라에게만 안심하고 돈을 준다고? 그러니까 우리들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지! 그렇게 경멸을 받아야 돈이 나온다면, 꽃 대신에 똥이라도 깔아놓는 게 좋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로터리를 지나갈 때마다 꽃 대신 똥을 보고, 꽃향기 대신에 똥냄새를 맡는다. 이런 사소한 일 같지만 무시할 수 없는 착오의 난쎈스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민회관의 창문 밖에 장식해놓은 유치한 철책, 그것과 똑같은 돈화문의 잔디밭 가의 철책, 자유쎈터의 정원에 심은 장미꽃, 사방의 고층건물에 눌려 날로 빈약해져 보여가기만 하는 덕수궁의 연못 앞의 철책, 창경원과 조선호텔의 지붕의 오색찬란한 물감전등 등등…… 모두가 소름이 끼치는 일들이다.
요, 2,3년 내로 시단에서는 소위 ‘참여시’라는 것의 논의가 무슨 새삼스러운 일처럼 성행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S대학에서 ‘현대시는 왜 안 읽히느냐’는 제목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연단에 올라가기 전에 학생들의 틈에 잠시 앉아 있으려니까, 뒤에 앉은 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데, 소위 현역시인이나 현행시(現行詩)에 대한 이들의 원망이 대단하다. ‘무어? 김수영이란 치가 있나? 야, 막 까주라 까줘!’ 하고 씨근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결국 그날의 시에 대한 토론은 촛점도 못 잡은 채 만담 정도로 그쳐버렸지만 그후 나는 학생들의 이런 현 시단이 산출하는 시에 대한 전면적인 불만을 간단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분격의 촛점은 어디에 있나? 물론 결정적인 문제는 현 시단이 독자의 요구에 호응할 만한 변변한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 현 시단이 시단다운 위풍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 그들의 시에 대한 이런 불만은 사회 전반에 대한 불만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고, 그렇게 보면 내가 로터리의 꽃에 대해 느끼는 분격 같은 것이 그들에게도 뿌리깊이 박혀 있다. 아니 오히려 나의 경우보다도 더 뿌리깊은 뜨거운 것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시에 대한 불만의 비상구를 생각해보았다. 시의 본질이나 시의 사회적 사명의 원칙론에 입각해볼 때, 시에 대한 불만의 비상구란 엄격히 말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팽창·비대해가는 매스컴의 위력을 생각해볼 때, 시의 수난은 본래의 자기의 몫의 수난 이외의 가외의 부당한 수난의 몫까지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가외의 부당한 수난의 몫은 우리가 책임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었다. 내가 우선 생각한 이 불만에 대한 비상구는 우리에게 대중가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중가요라고 했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행가가 없다. 내가 연상하는 유행가란 프랑스의 샹송이나 미국의 베시 스미스의 블루스같이 참다운 대중감정을 반영하고 발산하는 노래다. 참다운 대중의 고민의 살점을 도려낸 노래다. 이런 노래가 우리에게 없다. 텔레비에 매일같이 나오는 프랑스의 샹송이나 미국의 재즈송을 가지고는 우리의 노래라고는 할 수 없다. 「인생은 나그네 길」 「곰」 「대머리 총각」 「섬마을 선생님」 같은 것도, 오늘날의 획일주의와 분석철학과 관료주의와 기술주의의 ‘인간소외’ 시대의 대중의 고민과 희열을 대변하기에는 너무나 시대착오이고, 허약하고, 도피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 범죄의 책임까지를 로터리의 잡꽃 같은 초라한 현대시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당한 책임의 부담의 변명과 전가(轉嫁)의 변명을 로터리의 꽃 같은, 혹은 똥 같은 허약한 현대시인이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집 지붕 위엔 오늘도 아침부터 6·8범죄를 항의하는 학생들의 데모를 감시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뜨고 있고, 지금 나의 머릿속에서는 학생과 정부와의 끈질긴 대결이 곤봉과 돌팔매질로 서로 겨루고 있다. 아니 곤봉과 돌팔매질이 서로 겨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곤봉과 최루탄과 돌팔매질이 온통 나를 향해서 쳐들어오고 있다. 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죄,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죄, 6·8사태에 성명서 하나 못 내놓고 있는 죄, 그리고 이 죄를 남(이를테면 대중가요)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죄에 대해서. 그러니까, 나의 죄도 그렇고, 6·8파동을 빚어낸 정부의 죄도 그렇고, 이것은 그 원인이 6·8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5·3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막스 셸러는 기계주의사회의 폐단을 갈파하고, 시(詩)의 지식(그의 어휘를 빌리자면 ‘해탈의 지식’)을 주장한 「조화(調和)시대의 인간」 등의 일련의 논문을 1920년대에 벌써 발표했다. 현대사회의 정치기구의 횡포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예언한 야스퍼스의 『현대의 정신적 상황』은 1931년에 발표된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6·8사태는 5·16 이후에 추진된 ‘근대화’가 약 40년 후의 이 땅에 수입할 서구의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문명의 총 병균의 헛게임 쇼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 쇼의 주밀한 구성에 나는 흐뭇한 감까지도 든다. 악(惡)도 이만큼 빈틈없이 세련되면 한번 싸워볼 만하다. 새삼스럽게 뇌까리고 싶지도 않지만 6·8사태의 수습에 여당이 주장한 것은 ‘부정이 있으면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증거가 어디 있는가. 증거는 없다. 증거가 없게끔 그렇게 잘했다. 그래서 그렇게 너무나 잘한 선거에 국민들이 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국민들이 이런 식의 부정에 놀라는 것도 우리들이 아직도 촌티를 가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근대정치의 악의 경험이 얕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앞으로 좀더 악의 훈련이 쌓아지면 이것도 또 만성이 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나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그런 전망이 짙다.)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텔레비의 프로의 해독이 너무 지독하다고, 종로 네거리에 모조리 텔레비를 내다가 소각하라고 외친들 약삭빠른 근대화한 정치인들이 그 말을 그대로 이행할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오히려 이런 요구를 촌영감의 헛소리 정도로 비웃으면서, 이런 불평을 막으려고 하루바삐 총천연색 텔레비를 수입해오는 길을 생각하는 것을 기발한 아이디어라고쯤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야당이란 신민당은, 그간의 소식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부정이 있으면 증거를 대라’는 말을 고지식하게 그대로 듣고(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부랴부랴 ‘증거’를 수집하느라고 지방으로 뛰어내려가곤 했다. 이런 야당이니까, 학생들이 시끄럽게 야단을 치는 것도 당연하다. 도대체가 학생들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야단을 치는 것도 사실은 진정한 야당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도의 신임 지사는 선거공약에서, 잠자리가 나는 동경(東京)을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고상한 정견까지는 바랄 수 없다 하더라도,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철폐하겠다는 포부 정도라도 똑똑히 말할 수 있는 입후보자가, 그렇게 공허한 무수한 낱말을 대량소모하고 떠들어댄 두 차례의 선거에서, 단 한명이라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모 신문소설에서, 육교는 로맨스가 없어서 싫다, 지하도에는 어떤 어여쁜 여자라도 본 추억이 담겨질 수 있지만, 육교는 그 정도의 낭만도 없는, 그야말로 실용 일변도의 산물이 되어서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한 것을 읽은 일이 있다. 이 불평은 로터리의 꽃에도 적용된다. 인간이 사랑이 없이 살 수 없듯이, 꽃은 나비와 벌이 없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나비와 벌이 오지 않는 꽃은 죽은 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말살하는 정치기구가 아무리 방대하고 근대화하고 세련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이 없는 정치, 사랑이 없는 정치, 시가 없는 사회는 중심이 없는 원이다. 이런 식의 ‘근대화’는 그 완성이 즉 자멸이다. 6·8파동의 원인은 그만큼 멀고 심각하며, 거기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외침은, 그 정치적 효과야 어찌되었든, 우리 사회에 아직도 시가 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얼마 전에 S신문의 창간기념호에 이런 표어가 실려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 나라의 번영은 부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이 평범한 자유의 표어가 사실은 5개년 경제계획과 같은 비중으로 자유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현정부의 사실은 가장 허약한 맹점을 찌르는 교훈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학생들의 외침은 그때그때의 이슈에 따라서 표현은 다르지만, 그들이 원하고 있는 근본요구는 한결같이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상식적으로,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유의 죽은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시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고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인 것이다.
〔사상계 1967년 7월호〕
신비주의와 민족주의의 시인 예이츠
급작스런 일격, 거대한 날개는 아직도
비틀거리는 소녀를 치고 있다.
그녀의 가랑이는 그 검은 죽지에 애무당하고,
목덜미는 부리에 물리었다.
그는 그녀의 가눌 수 없는 가슴을
제 가슴으로 짓눌렀다.
─「레다와 백조」(Leda and the Swan)에서
제우스가 백조로 변하여 레다를 능욕하는 것을 주제로 한 이 시는 불과 15행을 가지고 희랍신화의 대계(大系)를 메타피지컬하게 나타냈다고 하는 것이 평론가들의 견해다. 그리고 예이츠의 이러한 신비주의는 그의 시가 현대적 주제와 연결될 때 더욱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의 시적 이상(理想)이란 “자신을 시 속에 담고, 정상적이고 정열적이며, 사리를 분별하는 자아,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격을 시 가운데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자서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예이츠를 가리켜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시인’(the greatest poet)이라 하고, T.S. 엘리어트를 ‘가장 중요한 시인’(the most important poet)이라고 한다. 엘리어트가 ‘가장 위대하다’는 평을 못 받고 ‘중요한’이란 형용사를 그 이름 앞에 달게 된 것은 예이츠가 인생 전반, 그리고 인간과 영혼, 자연 등, 전 우주적인 것을 주제로 삼는 데 비해 엘리어트는 주로 현대적 문제점을 찾는 데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이츠는 오스카 와일드나, G.B. 쇼처럼 아일랜드 태생이다. 그러나 와일드나 쇼가 문학의 출발을 런던에서 갖고, 생애의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낸 데 비하여 예이츠는 런던에서 문학적 수업을 쌓은 후 일찍 고국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그가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로 돌아온 데는 개인적 이유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영국과 아일랜드와의 관계, 그리고 아일랜드와 아일랜드를 조국으로 갖는 시인 예이츠와의 관계가 개재한다. 이 점은 후에 상세히 기록하겠다.
그는 1865년 7월 13일, 더블린 시의 교외인 쌘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처음엔 변호사였으나 후에 가서는 유명한 화가가 된 J.B. 예이츠였다. 예이츠의 양친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양쪽이 모두 앵글리칸 교회의 목사였다. 그러나 예이츠와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J.B. 예이츠는 헉슬리 등의 영향을 받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고, 예이츠는 아버지와도 다른 자신의 종교를 만들었다고 스스로 말한 바 있다. 예이츠는 말하기를 자신의 종교란 변함없는 시적 전통을 가진 하나의 어김없는 교회라고 했다.
아버지 J.B. 예이츠는 그에게 예술적 감흥을 불어넣어주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으며, 그가 시인이 되겠다고 하자, 부디 훌륭한 시를 제작하라고 그를 격려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 있는 슬라이고(Sligo) 출신으로서, 이 슬라이고는 항상 시인 예이츠가 그리워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소년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낸 때문인지는 모른다. 물론 그의 학교생활은 런던에서였다. 그는 런던에서 고돌핀다, 해머스미스 두 학교를 다녔지만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것은 슬라이고였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은 슬라이고였다.”
이렇게 예이츠가 술회할 정도로 슬라이고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다. 「이니스프리」를 위시하여 「벤벌벤」 등 많은 작품에는 슬라이고 근방의 호수와 산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열다섯살 때 그는 런던에서 더블린으로 돌아와 에라스머스 스미스 학교에 들어갔다. 1883년에서 1886년에 이르는 동안 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미술공부를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자기는 화가가 되기보다는 시인이 될 천분이 많음을 자각했다. 그는 아일랜드와 문학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학과 조국에의 사랑은 그의 생애와 함께 계속되었다. 합리주의자의 가정에 태어난 예이츠였지만 그는 자연에 의해 성장되었다. 그렇게 종교적인 가문이었지만, 그는 앞에서 말한 자신의 종교, 즉 ‘시적 전통에서 우러나온 새로운’ 종교에 의해서 자신을 키워간 것이다. 자기가 예술가의 아들이라는 것을 뽐내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예이츠가 고등학교를 나오자 예이츠 가문에서 2대나 다닌 바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기를 희망했지만, 학교공부를 게을리한 예이츠는 더블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에 들어갔다. 예이츠는 시를 부업으로 하는 화가가 되어 생계를 세우겠다고 말했지만 자기의 문학적 천분을 기르는 데 전력했다.
그가 시인으로서의 관록을 뚜렷이 인정받은 작품은 장시 『어신의 방랑』(The Wandering of Oisin, 1889)이었다. 1대를 풍미한 유물론과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미의 세계에 몸을 맡긴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켈트(Celt)적 요소를 자기 문학의 소재로 삼았다. 이 『어신의 방랑』에는 아일랜드의 전설과 구전설화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엿보인다. 그리고 신비한 몽상에 잠긴 듯한 그의 초기시의 특색이 여실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삼기(三期)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첫째가 그의 런던생활이다. 런던에서 예이츠는 상아탑 속에 웅크리고 앉은 세기말 시인들과 접촉을 갖게 되었다. 어니스트 라이스와 더불어 예이츠는 ‘시인 구락부’(Rhymers Club)를 창설하였다. 구락부의 스타들은 도우슨과 라이오넬 존슨이었다. 1895년까지 예이츠는 여섯 권의 책을 발행하였다. 당시의 예이츠의 모습을 라이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매우 창백하고, 바싹 말랐으며 이마 위로 갈가마귀 같은 머리칼을 늘이고 있는 사나이. 그의 얼굴은 어찌나 좁은지 그의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겨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다.”
때는 바야흐로 켈트족의 여명기, 상징주의 시대, 장식의 시대, 안이한 음률과 지나친 평이의 시대였다.
1886년에 예이츠가 아일랜드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음 산란해 어쩔 줄 모르는 성인(成人)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해에 아일랜드 혁명이 불꽃을 올렸다. 내셔널리즘에 눈이 떠가고 있던 예이츠가 이 불꽃에 스스로의 몸을 점화한 것은 물론이다. 1886년의 이 혁명으로 영국의 지배로부터 아일랜드는 자치(Home Rule)를 쟁취한 것이다. 이 혁명을 계기로 아일랜드의 내셔널리즘은 더욱 열을 띠어갔다. 이른바 켈틱 르네쌍스(Celtic Renaissance)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기들의 과거의 문학, 즉 민간설화나 구전설화에 이르는 민속문학(Folk Literature)의 부활로부터 켈틱 르네쌍스를 시작한 것이다. 이 민속문학이 차츰 발전되어 본격적인 예술운동으로 파급되었던 것이다.
그때 예이츠는 프랑스 망명을 마치고 돌아온 철저한 내셔널리스트 올리어리(John O’Leary)를 만났다. 물론 예이츠의 내셔널리즘은 올리어리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올리어리의 내셔널리즘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임에 반하여 예이츠의 것은 아일랜드 민족의 전설을 발굴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취하자는 것이었다. 앞에 말한 『어신의 방랑』도 올리어리의 자극을 받아 쓴 것이며, 그 출판도 올리어리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해인 1886년에 예이츠는 미모의 내셔널리스트 모드 곤을 만났다. 그러나 예이츠가 예술을 바탕으로 한 내셔널리스트인 데 비해 그녀는 선동적인 내셔널리스트였다. 두 사람의 이 기질적 차이는 10여년의 애정과 동지애에도 불구하고 결실되지 못했다.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모드 곤과의 맺지 못한 사랑의 결말 등, 그의 신변에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생애의 원숙을 가져다주었다. 이때 그는 자기 자신을 사회주의자 또는 페니언(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미국 내 아일랜드인의 조직체의 회원. 이 회는 1858년에 조직된 비밀결사)이라고 불렀다.
레이디 그레고리와 예이츠의 우정 내지 동지애는 너무나 유명한 것이었다. 그가 레이디 그레고리를 처음 만난 것은 1896년이었다. 그녀는 예이츠를 쿨(Coole)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살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공동작업’을 했다. 그들은 마침내 후에 애비 극장(Abbey Theatre)이 된 아일랜드 문예극장을 창립했다. 1899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학술원을 설립하였다. 이 극장에서의 그의 첫 공연작품은 1892년에 쓴 『캐슬린 백작부인』(Countess Cathleen)으로서 『어신의 방랑』 다음에 쓴 작품이었다. 그는 애비 극장을 위해 작품을 쓸 뿐만 아니라 실제 공연에도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말하자면 극작(劇作)과 극장관리와 극장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통하여 아일랜드 연극에도 그의 공헌은 큰 것이었다.
한편 그의 시에도 변모가 깃들이기 시작했다. 그 변모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시에 리얼리티가 나타난 것이다.
그가 초기의 시풍에서 벗어나 이러한 리얼리티, 즉 현실에 접근해가는 새로운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3년에 나온 시집 『일곱 개의 숲속에서』(In the Seven Woods)에서였다. 그가 사용한 시어나 씨츄에이션은 시적인 것에서부터 일상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테마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또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풍은 그 다음에 나온 시집 『초록 투구, 기타』(The Green Helmet and Other Poems)를 거쳐, 『책임』(Responsibility, 1914)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고해진다.
그의 시가 현실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은 자기의 초기시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자신이 처한 현실적 위치가 복잡해진 데 있다 하겠다. 레이디 그레고리를 만난 후 쿨에 가 있는 동안 그는 정치생활에 환멸을 느꼈다. 1902년엔 국민극단(The lrish National Theatre Society)의 단장, 1904년에는 애비 극장의 개관으로 연극사업에 전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2년 흥행이 성공한 작품 『캐슬린 니 훌리한』(Cathleen ni Houlihan)의 헤로인으로 무대에 나섰던 그의 옛 애인 모드 곤은 결혼해버렸다.
이 시기에 나온 주요작품으로는 앞에 말한 『캐슬린 백작부인』 『캐슬린 니 훌리한』 『베일 해안에서』(On Baile’s Strand, 1904) 『데어드르』(Deirdre, 1907) 등 시극(詩劇)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켈틱 민화(民話)에서 취재한 것들이다. 예이츠는 그후에도 시극을 썼지만 자기 나라의 전설과 민화 등에서 재료를 얻어오는 극작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시극은 상연에 적합한 공연물이라기보다는 시적 웅변(Poetic Speech)을 통한 미의 창조에 그 중점을 두고 있었다. 또 그는 1917〜1926년엔 일본의 고전극인 ‘Noh(能)’의 형식을 빌려 시극의 새로운 실험도 시도하였으나 이것 역시 무대에서의 현실적인 공연은 의식하지 않고 쓴 듯하다.
어쨌든 그가 시에서 시극 쪽으로 발을 옮긴 데는 우리의 관심이 기울어진다. 비록 그것이 민족문화의 르네쌍스를 갖자는, 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려는 목적의식에서 우러나왔다 할지라도 문학의 가장 고급한 형식이라는 극에 그의 관심이 기울어졌다는 것은 그의 정신세계의 고매한 일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시적 관심이 현실적인 데로 접근한 것은 앞서 지적한 바이지만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동기는 1908년부터 그가 교우를 시작한 미국 출신의 예이츠보다 연소한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영향이다. 현실적 접근이라는 변신 이외에 그의 시에는 이미지즘(Imagism)의 경향을 개척하려는 국면이 보이기도 한다. 시의 대상을 영혼의 통과를 거치지 않고 직접 취급한다든가, 주제의 선택이 자유로워졌다든가, 언어의 절약과 사상의 집중을 기하려는 그의 태도에는 그때까지의 낭만적 시인(Romantic Poet)에서 벗어나 현대적 시인(Modern Poet)으로서의 출발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면으로 볼 때 E. 파운드의 영향은 거의 확실하다 할 수 있겠다.
그후 수년간 그의 시작(詩作)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예이츠의 진면모는 『쿨호의 백조』(The Wild Swans at Coole, 1919) 이후의 그의 후기시에서 찾아야 한다는 정론이 있다. 추측컨대 이것은 그의 제3기(제2기는 결혼 직전까지다)부터의 작품이 즉 제2기 이후의 침체기가 지난 후에 씌어진 때문인 것 같다.
1917년 10월 그는 갑자기 죠지 리즈와 결혼했다. 그의 부인은, 시인으로서의 예이츠의 불행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비적인 것으로 향하는 예이츠의 시적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아내로서, 그리고 시인의 반려로서의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죠지 리즈는 예이츠의 기분을 전화시키려고 자기 자신이 영매(靈媒)가 되어 이른바 자동기술(Automatic Writing)을 시작했다. 작품 『비전』(A Vision)은 이 자동기술을 토대로 한 그의 비교(秘敎), 철학, 사학(史學)에 대한 그의 연구와 사색을 집약하여 이루어진 예이츠 자신의 철학이기도 하다. 이 시는 그의 초기시의 백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 신화보다 복잡하고 체계화된 것으로서 달〔月〕과 현대문명의 단계를 비교시킨 것이다. 이 난해한 산문작품 『비전』의 체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의 후기시에 대한 충분한 감상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예이츠의 중요작이다. 그의 시 중에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제2의 강림」(The Second Coming, 1920) 「레다와 백조」 「비잔티움으로의 항행」(Sailing to Byzantium, 1928) 「비잔티움」(Byzantium, 1932) 「영혼과 자아의 대화」(A Dialogue of Self and Soul, 1929)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위의 제 작품을 포함하여, 이 시기에 출판된 예이츠의 시집으로는, 『탑』(The Tower, 1928) 『돌아 올라가는 층계, 기타』(The Winding Stair and Other Poems, 1929) 등이 있다.
예이츠는 아내의 영매 역할로써 자기의 모든 활동이 부활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영매가 되어 예이츠에게 바치는 그 신비는 그를 언제고 반쯤 잠든 사람 같은 기분에서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선경(仙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기 자신이야 그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었지만, 비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한 가운데, 1923년, 예이츠는 노벨문학상을 타게 되었다. 그후 그는 오랫동안 국제적인 명사급에 속해서 살아왔다. 그가 여행을 하면 가는 그것이 유럽이든 미국이든 그는 신문기사의 좋은 재료가 되기도 했다.
이상 언급한 그의 생애의 세 가지 단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될 일이 일어났다. 예이츠 자신도 이러한 것을 노벨문학상을 탈 즈음해서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대강 이러한 사실이다. 즉, 그가 젊었을 때 그는 자기의 뮤즈가 늙었나보다고 종종 술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늙은 다음에는, 자기의 뮤즈는 젊은 것이라고 말하게 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론가의 입증이나,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보면 사실이었다. 한 시인의 최후의 작품이 최우수작품이었다는 예는 문학사에서 예이츠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쉽게 젊지도, 쉽게 노쇠하지도 않는 뮤즈를 지닌 유일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수식이 없이 간결한 시구(詩句), 나긋나긋하지 않고 오히려 단호한 아름다움, 예리함, 통일성, 객관성 등은 그가 젊었을 때는 아무리 해야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것이 그의 노경(老境)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는 노인들의 나라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은 서로 품에 안고,
새는 나무 위에,
—죽어가는 세대—를 노래한다.
연어 뛰는 폭포, 고등어가 들끓는 바다,
물고기, 짐승, 날것 들은,
잉태하여 낳고, 죽어가는
긴 여름을 찬양한다.
육감적인 음악에 매혹되어
영원한 지(知)의 모든 유물을 등한히 한다.
─「비잔티움으로의 항행」에서
이것은 1928년, 그러니까 예이츠의 나이 예순세살 때 쓴 것이다. 환갑을 넘은 예이츠 할아버지가, 무너지는 현대를 떠나 ‘정신이 존재하는’ 옛 도시 비잔티움을 찾아가는 노래다. 그러나 회고적인 감상도, 시기를 놓친 노인의 비애도 없다. 현대에 대한 비판과, 공감할 수 없는 물질성 앞에 영혼을 제시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1933년에 예이츠는 더블린 교외에 집과 땅을 샀다. 해마다 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해외로 떠나는 겨울철을 제하고는 그는 거기서 살았다. ‘초자연적인 노래’라고 이름붙인 철학적인 시들을 포함하는 『3월의 보름달』(A Full Moon in March)에서 『최후의 시』(Last Poems)에 이르기까지 그가 줄곧 시작을 계속했다는 사실은 “스물다섯이 지나면 시쓰기를 그만두는”(엘리어트의 말) 시인들에 비할 때, 가히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만도 하리라. 이 마지막의 시편들은 일견 초연하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시의 이면에는 불안과 비애와 분노 등 노인으로서의 심경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게 다 늙게 된 자기에게 아직도 시를 쓰게 하는 것은 육체적 욕망과 광란이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호레이스 그레고리는 예이츠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 두 세계의 시민임을 믿고 있었다. 한 세계는 가시(可視)의 세계요, 또하나는 미지의 세계다. 그는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마치 자신의 시처럼 오고갔다……”
또 데스먼드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의 눈앞에 우리나라의 고유한 영혼을 마치 책을 펼치듯이 전개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전개한 나라는 아일랜드보다 더 넓은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B.I. 에번스는 말하기를
“그의 산문, 특히 후기에 속하는 대부분의 산문들은 그의 시들과 함께 걸작이며, 또 그의 시를 해설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생이 비극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이츠 자신의 말이다. 정말 그 자신의 일생은 비극정신의 구현이었다고 보아 마땅하리라. 그가 시에 있어 한자리에, 또는 한가지 세계에 침체됨이 없이 끊임없는 자기변혁을 감행한 점, 또는 노후에도 안일과 평안을 버리고, 예술에의 헌신을 한 점 등은 바로 비극정신의 구현이 아니겠는가? 그의 생애를 평하는 리처드 엘먼의 요약적인 증언은 이렇다.
“예이츠의 생애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속적인 전투였다. 그리고 그는 그 전투에 있어 쉬운 싸움을 선택할 수 있었을 때에도 가장 어려운 싸움을 택했던 것이다.”
예이츠가 쉬운 싸움을 거부했다는 것, 그것은 예이츠의 강인한 정신성을 말해주기도 하며, 불굴의 시심(詩心)을 말해주기도 한다. 진정한 시심이란 가장 어려운 것을 극복했을 때 만족스런 작품을 생산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937년, 이미 일흔두살이 된 예이츠는 호흡과 보행이 곤란할 정도로 노쇠하였다. 그의 영혼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육체는 너무 멍들었던 것이다. 그는 요양을 하기 위해서 남부 프랑스로 떠났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8년 겨울 까프 마르땡에 체류하고 있던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최후를 이역(異域)에서 마친 그 많은 대가들, 똘스또이나 앨런 포우나 또는 스땅달처럼 1939년 1월 28일에 멀리 그의 고향인 더블린을 그리워하며 객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야 그의 무덤에는 하나의 꽃다발이 도착되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보내온 것인데, 그의 장례식은 임시로 로끄브륀느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찾아준 친구도 드물었던 것이다. 예이츠는 1938년 9월에 탈고한 작품 「벤벌벤 산 아래」(Under Ben Bulben)에서 자기의 영면(永眠)의 장소를 지정한 바 있었다. 그 장소는 그가 못내 그리워하던 슬라이고였다. 그러나 그의 유해가 의장대의 영접을 받으며 슬라이고에 돌아와 묻힌 것도 1948년 9월이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의 묘지의 석회석 묘비에는 손수 쓴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차가운 눈길을,
삶과 죽음 위에 던지며,
지나가거라, 말탄 자여!”
끝으로 예이츠의 극운동에 관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민족문화의 중용을 위해서는 예이츠가 레이디 그레고리와 또 그가 픽업한 씽의 도움으로 전개한 극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대중을 결속시키고 개인으로부터 전체로 이끄는 것은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어느 사실에 그들의 흥미를 집중시키는 일이다. 예이츠가 전개한 자기 나라의 민화를 소재로 한 극운동은 민족문화를 융성시키는 데는 다시 없는 촉진제였던 것이다. 더구나 민족정신의 중흥 이외에 연극예술의 발전이란 획기적인 소득도 생각할 때, 아일랜드의 르네쌍스가 아닌 한국의 르네쌍스가 몹시 아쉬워진다.
■ 略연보
1865 7월 13일 더블린에서 출생.
1917 죠지 리즈와 결혼.
1886 시 『모사다』
1889 시 『어신의 방랑』
1899 시 『갈대 속의 바람』
1903 시 『일곱 개의 숲속에서』
1913 시 『절망 속에 쓴 시』
1914 시 『책임』
1919 시 『쿨湖의 백조』
1922 시 『후기시』, 시 『일곱 편의 시와 小品』
1928 시 『탑』
1929 시 『돌아 올라가는 층계, 기타』
1929 시 『選詩集』
1932 시 『아마도 음악을 위한 언어』
1933 시 『시전집』
1935 시 『3월의 보름달』
1940 시 『최후의 시』
1892 희곡 『캐슬린 백작부인』
1894 희곡 『소망의 나라』
1900 희곡 『그늘진 나라』
1902 희곡 『캐슬린 니 훌리한』, 희곡 『수프 접시』
1903 희곡 『모래 시계, 기타』
1904 희곡 『王家의 문지방』, 희곡 『베일 해안에서』
1907 희곡 『데어드르』
1910 희곡 『초록 투구, 기타』
1912 희곡 『애란 극장을 위해 쓴 극』
1921 희곡 『댄서들을 위한 희곡 4편』
1923 희곡 『산문과 운문으로 쓴 극』
1924 희곡 『고양이와 달〔月〕』
1928 희곡 『오이디푸스와』(번역)
1934 희곡 『희곡 전집』, 희곡 『시계탑의 왕』
1938 희곡 『헤느에의 달걀』
1893 에쎄이 『켈틱의 여명』
1897 에쎄이 『숨은 장미』
1903 에쎄이 『선과 악의 관념』
1911 에쎄이 『J.M. 씽과 그 시대의 아일랜드』
1925 에쎄이 『비전』
1916 자서전 『소년기와 청년기의 환상』
1922 자서전 『흔들리는 베일』
1936 자서전 『극작가』
1923 노벨문학상 받음.
1939 1월 28일 사망.
〔노오벨상문학전집 3, 신구문화사 1964〕
도덕적 갈망자 빠스쩨르나끄1
1. 어린 시절의 환경
보리스 빠스쩨르나끄는 1890년 1월 29일에 모스끄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그 당시 신학교 건너편의 2층집 문간방 아파트에 들어 있었다. 빠스쩨르나끄는 자기의 유모와 함께 신학교 교정에 들어가서 놀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나이 3세 때 그의 양친은 궁내성(宮內省)이 관리하고 있는 미술학교 관사로 이사했다. 1894년에 그는 이 관사 발코니에서 알렉산드르 3세의 장례식 행렬을 구경했으며, 그후 1896년에는 니꼴라이 2세의 대관식 광경을 구경했다. 이 미술학교는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후원으로 경영되고 있는 학교였다. 빠스쩨르나끄의 가족은 이 학교 관사에서 그후 20년 동안을 살게 되었는데, 그들이 이 학교로 온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부친인 레오니드 빠스쩨르나끄는 유명한 화가였고,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모스끄바 화단의 지도적인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레프 똘스또이의 절친한 친구로서 그의 소설 『부활』의 삽화를 그려주기까지도 했다.
똘스또이 집안과의 친밀한 교제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1910년에 똘스또이가 죽었을 때도 빠스쩨르나끄의 집안 식구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야스나야 뽈랴나로 달려갔다. 당시 20세의 대학생이었던 보리스는 관 속에 누워 있는 똘스또이의 뚜렷한 인상을 간직할 수 있었고, 생전에 똘스또이 옹이 그들의 아파트를 방문한 일도 역력히 기억하고 있었다. 1918년에 그가 쓴 「뚤라에서 온 편지」에는 아스따뽀프에서 숨을 거둔 똘스또이 옹의 임종기의 영기(靈氣)가 스며 있다. 그의 부친과 똘스또이와의 친교는 이 시인에게 지워질 수 없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우리들의 온 집안에서는 똘스또이의 정신이 샅샅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그 고뇌에 찬 도덕적 거인의 정신은 『의사 지바고』의 영혼 속에도 스며 있다고 생각된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민감한 소년기는 그의 부친의 회화세계와 똘스또이의 도덕적 분위기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의 음악적 감성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나는 어머니가 집에서 예술적으로 치는 피아노 소리에 습관이 되었다. 그 피아노 소리는 나에게는 음악 그 자체의 불가분의 특성처럼 생각되었다.”
빠스쩨르나끄 부인(본명은 로자 까프만)은 자기 집과 똘스또이 가정과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그녀의 아들은 그의 부친의 당시의 화단의 명성들─쎄로프, 레비딴, 브루벨 같은 화가들─과의 교제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풍부한 음악적 배경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회화와 음악과 문학과 고매한 도덕적 갈망은 이 장래의 시인의 소지(素地)를 만드는 데 섬세한 여러가지 역할을 했다.
2. 음악에서 문학으로
11세 되던 해에 보리스 빠스쩨르나끄는 제5모스끄바고등학교 제2학급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특히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주력해서 가르치고 있었다. 12세 때에 다리를 부러뜨렸는데, 치료를 잘못 받았기 때문에 절뚝발이가 되었다. 이 사고 때문에 그는 1914년에 병역 근무에서 면제되었다. 양친을 통해서 스끄랴빈2을 만나게 되었고, 이 음악가에게서 무서운 영향을 받은 다감한 보리스는 장래 작곡가와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러한 결정은 대체로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찬성을 받았고, 빠스쩨르나끄의 장래의 진로는 이미 결정된 것 같은 감을 주었다.
그후 6년 동안을 빠스쩨르나끄는 음악에만 정력을 기울였다. 그는 스끄랴빈 앞에서 자기가 작곡한 것을 연주했다. 이때 그는 젊은 명수로서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빠스쩨르나끄는 결국 음악가의 생애를 단념하고 말았다. 완전론자(完全論者)인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작곡의 역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음악과의 결별은 철저한 것이었다. 그가 자백하고 있듯이 그는 음악회에까지도 일절 발을 끊고 가지 않았다. 그의 정열은 문학으로─서정시와 산문으로─쏠리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감정과 음악에서 받은 훈련은 그의 시와 산문의 수많은 구절에 반영되고 있다.
빠스쩨르나끄는 천직으로서 음악에 생애를 바칠 생각은 버렸지만, “내가 미칠 듯이 사랑한” 스끄랴빈과의 조우(遭遇)는 그의 예술적 의식에 영원한 인상을 남겼다. 스끄랴빈의 영기(靈氣)는 오래도록 그의 주변에서 떠나지 않았고, 불가사의한 놀라운 진정한 거인다운 충격을 주었다. 선과 악에 대한 의논을 하고, 레프 똘스또이를 논박하고, 초인(超人)을 설법하고, 초도덕주의(超道德主義)와 니체주의를 변호한 스끄랴빈─이러한 스끄랴빈은 포착할 수 없는 신비성이 충만한, 세계의 수많은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비와 미신에 마음이 끌렸고, 섭리에 대한 강력한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빠스쩨르나끄는 모스끄바대학에 들어가서 철학을 전공했다. 1912년 봄과 여름을 그는 마르부르크대학과 이딸리아에서 보냈다. 마르부르크대학에서는 코엔 교수 밑에서 연구를 했고, 이딸리아에서는 플로렌스와 베니스를 방문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뒤 모스끄바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1913년에 동교를 졸업했다.
대학시절부터 벌써 그는 당시의 시(詩)의 혁명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개성과 재능은 아카데미의 돌파구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시는 그러한 요구의 답변이 되었다. 그의 초기시는 1912〜1914년부터 시작된다. 그후 곧 산문도 쓰기 시작했다. 그 당시 그는 릴케─릴케를 처음 본 것은 1900년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작품에서 그를 재발견하게 되었다─와 같은 시인들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상징파의 블로끄, 아끄메이즘의 안나 아흐마또바, 미래파의 마야꼬프스끼, 이미지스트인 예쎄닌, 러시아의 제임스 조이스라고 하는 벨리3 같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있었다. 고전시인 중에서는 레르몬또프와 셰익스피어가 가장 명확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새로운 현실과 기술면을 추구하는 신경질적인 잡다한 이즘의 시대 속에서, 이러한 슬로건과 묵시적 기대(期待)의 경쟁적인 도가니 속에서, 이 젊은 시인은 천천히 자기의 독립적인 위치를 모색해갔다. 1913년에는 베르아랑을 만나기도 했다. 레오니드 빠스쩨르나끄는 1910년에 릴케의 초상화를 그렸을 때 모스끄바에서 베르아랑의 초상화도 그린 일이 있었다. 빠스쩨르나끄의 자전적 기록인 『여권(旅券)』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속에는 이러한 시인들─특히 릴케, 블로끄, 마야꼬프스끼, 예쎄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
빠스쩨르나끄는 1914년 여름을 시골과 모스끄바의 두 곳에서 보냈다. 그해 여름은 새로운 인상을 많이 받았고, 그중에는 불길한 예감을 주는 것도 있었다. 그는 마야꼬프스끼를 처음 만났다. 잠시 동안 두 집 가정─하나는 문학가의 가정이었고, 하나는 부유한 상인의 가정이었다─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한 처녀시집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 시집의 배경에는 문학적 이즘의 격동하는 자극적인 생활이 있었다. 그런데 8월에 전쟁이 터졌고, 보병들의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병역 면제자인 빠스쩨르나끄는 1915년과 1916년을 우랄 지방의 여러 군수공장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붓을 쉬지 않았다는 것은 그동안의 작품이 제2시집(1914〜1916)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모스끄바로 다시 돌아왔고, 정치와 문학적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들어갔다. 1917년은 그가 『나의 자매─생활』을 쓴 특기할 만한 해였다. 이 시집은 그 뒤 5년 후에 출판되었는데, 이 시집으로 그는 비상한 힘과 참신성을 지닌 서정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내란은 구(舊) 러시아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지식인들을 분열시키고, 러시아 문학의 전통의 계속을 파괴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작별이 있었다. 20년대의 초기에 빠스쩨르나끄의 가족들은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들은 결국 영국에 정주하게 되었는데, 보리스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후 계속 모스끄바에서 살았다. 그가 고국을 떠난 것은─유럽에 간 것은─단 두번밖에 없었고, 두번 다 단기여행이었다.
1930년에는 코카서스와 그루지야를 혼자서 찾아다녔는데, 레르몬또프가 지극히 낭만적인 필치로 묘사한 이 지방은 빠스쩨르나끄의 후기시의 일부와 그가 번역한 그루지야 시인들의 작품이 증명하고 있듯이 그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1920년대에 눈부신 활동을 계속하고, 문단에 사실상 상당한 영향을 끼친 빠스쩨르나끄는 새로운 스딸린의 사회주의리얼리즘 시대와는 전혀 생리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1932년부터 차차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뜨로쯔끼파의 숙청이 한창 벌어진 1937년경에는 소련 작가동맹에서 거의 축출될 뻔했다. 독소전쟁중에는 겨우 『시발 열차에서』라는─애국적 기분으로 쓴─시집이 나왔을 뿐이었다. 전후에도 줄곧 침묵을 지켰고 그루지야 시집, 괴테, 쉴러, 셰익스피어의 비극 등의 번역에 몰두했다. 이처럼 위험한 숙청의 시기를 반(半)은둔자로서 간신히 연명을 해가면서, 그는 내면적으로는 소박하면서도 화강암 같은 완강한 뻬레젤끼노4의 성인으로 발전해갔던 것이다.
3. 시의 운명
정신면으로도 기술면으로도 지극히 독창적인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서정시는 시초부터 붕괴하는 세계에 직면하고 있었다. 1914년 초여름에는 누구 하나 앞으로 수십년 동안을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을 물들일 혼란과 단절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름은 무덥고 풍만한 앞날을 약속했다. 나는 클라이스트의 『깨어진 독』을 번역하고 있었다……” “전쟁이 선포되자 날씨는 갑자기 변했다…… 여인네들은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여름—이야기』5에도 “아직도 개인에게 주의를 기울일 줄 알고,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기가 쉬웠던 그 마지막 여름”에 대한 애석한 감정이 메아리치는 향수의 음조가 담겨 있다. 그러나 빠스쩨르나끄도 대부분의 그의 동시대인들처럼, 눈앞의 현재와 가까운 장래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새로 젖을 뗀 현대의 거수(巨獸) 속에 든 대중의 압박의 거대한 가능성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 자신의 시적 감정의 긴급한 요구와 그 자신의 새로운 세계의 위안—“그는 수수께끼 같은 부활, 다시 말하자면 역행할 줄 모르는 완전한 르네쌍스를 희망했다”(『마지막 여름—이야기』에 나오는 Y씨)—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문학적 배경 역시 야망과 예언과 실험에 가득 차 있었다. 안드레이 벨리가 말한 것처럼, 헤라클레이토스의 정신이 충천하고 있었다. 세계는 유동적으로 되었다. 그것은 물처럼 범람하고 불처럼 춤을 추었다. 벨리의 산문의 기발한 이미지, 빠스쩨르나끄의 번개 같은 운문, 흘레브니꼬프6의 시어(詩語)의 공격, 마야꼬프스끼의 요란한 도전은 이러한 경향의 창조적이며 파괴적인 격동을 반영했다. 블로끄는 이 현상을 ‘음악의 정신’이라고 규정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불안의 정신, 무의식의 심부(深部)에서 준동하는 미지의 정신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것은 급속도로 붕괴하는 세계의 압력 속에 든 서정시의 소리였다. 수많은 태도와 기분과 표현 속에서, 빠스쩨르나끄의 소리는 본질적으로 서정적이고, 주관적이며, 외면상으로는 얼마간 밀봉적(密封的)인 것이었다. “예술에서는 인간은 침묵을 지키고 이미지가 말을 한다.”
1914년에서 1916년 간의 시집 『보루 위에서』에서, 빠스쩨르나끄는 이미 마야꼬프스끼의 낭만주의와 자기투영을 거부하고 나섰다. 마야꼬프스끼의 충격은 빠스쩨르나끄로 하여금 거의 문학을 포기할 생각까지도 갖게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낭만적인 태도’와 ‘시인의 생활’로서의 생활의 개념만을 포기했다. 그 다음에 나온 『나의 자매—생활』과 『테마와 바리에이션』의 두 시집에서, 그는 섬세한 서정적 감정과 이채로운 이미지와 참신한 테크닉의 시인으로서의 그의 주장을 공고히했다. 『나의 자매—생활』은 상징파와의 결정적인 결별뿐만 아니라 마야꼬프스끼와의 결별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빠스쩨르나끄의 말을 빌리자면, “이 시집에는 시에 관해서 조금도 동시대적인 것이 아닌 표현이 들어 있었다……”
빠스쩨르나끄의 『의사 지바고』로 인한 그의 소위 ‘갑작스러운’ 인기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것 같다. 쏘비에뜨의 관료들은 역시 그를 비방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쏘비에뜨와 서구 세계의, 20년대와 30년대의, 빠스쩨르나끄에 대한 비평을 살펴볼 때, 필경 그의 작품이 결코 쉽사리 소멸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쏘비에뜨 측에서는 그것은 마야꼬프스끼, 예렌부르끄, 찌호노프, 안또꼴스끼7를 위시한 수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저명한 소련의 작가인 페진8은 1956년에 『노비 미르』(Novyi Mir)지의 편집자의 일원으로 『의사 지바고』를 동지에 게재할 것을 반대한 사람인데, 그는 1936년에 『문학신문』에서 “시인 빠스쩨르나끄는 산문의 영역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여러분 시인들이 그를 시인으로서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우리들 산문작가들은 그를 산문가로서 자랑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영국의 시인이며 소련 문학가인 죠지 리베이9는 그의 사화집 『소련문학집』(1933년, 런던)에서 “가장 무시할 수 없는 소련의 현역시인 빠스쩨르나끄는 그의 독특한 독립적인 태도 때문에 여전히 유력하기는 하지만 고독하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또한 앙드레 말로는 1935년에 빠리에서 열린 세계작가회의에서 빠스쩨르나끄를 맞이하면서 “우리들의 앞에는 우리들의 시대의 가장 비범한 시인의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1933년에 빠스쩨르나끄의 『시전집』이 나왔을 때는 이미 그의 영향이나 명성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나왔을 때는 바로 스딸린 시대의 급격한 변화가 재촉되던 무렵이었다. 분위기는 점점 더 서정성이 퇴색하고, 슬로건을 환영하는 깔색 없는 경향으로 흘렀고, 빠스쩨르나끄는 위안과 보수를 위해서 셰익스피어 비극의 번역을 시작했다. 1936년에 『시전집』의 재판이 나오고 나서는, 10년 동안을 새 시작품이라고는 거의 하나도 발표한 것이 없다. 빠스쩨르나끄는 번역가로서 전단적인 재판과—삘냐끄와 바벨의 경우와 같은10—불가사의한 실종의 악몽적인 시기를 겨우겨우 연명해나갔다. 그는 계속해서 시작(詩作)을 하고 있었지만 발표할 길이 없었다. 전쟁은 여타의 여러가지 공포도 있었지만, 내면적인 긴장을 어느정도 완화해주었고, 국민적 단결과 ‘위대한 러시아의 전통’을 가일층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개인과 국가 운명의 새로운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서정적 음조가 소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음조는 『시발 열차에서』와 『광활한 대지』의 얄팍한 두 권의 시집으로 되어 나온 빠스쩨르나끄의 전시(戰時)의 서정시의 일부에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시작품들은 대체로 무게있는 음조와 서술의 이례적인 단순성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개똥지빠귀」 같은 시에서는 초기의 다이내믹한 태도와 후기의 사실적인 음조를 상징적으로 결합시켜놓은 것 같다. 또한 이 시에서 그는 지난날의 주제인 시인의 독립적인 비전과 노래에 대한 권리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개똥지빠귀들의 그늘진 정자가 바로 이렇다.
그들은, 예술가들처럼, 이 힘에 가락을 맞추면서
갈퀴가 쓸어간 성큼한 숲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또한 내가 취하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1943년에서 1945년의 빠스쩨르나끄는 1937년부터 1939년 당시처럼 그렇게 고독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대중 앞에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지식층 사이에서도 점점 더 많은 주목과 갈채를 받았다. 햄릿의 역자(譯者)는 이제 산문의 대작의 구상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6년에 문학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배격하는 즈다노프 법령이 나오자 그는 다시 침묵으로 들어갔고, 이 침묵은 스딸린이 죽은 뒤에 개똥지빠귀 모양으로 잠시 동안 비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의사 지바고』는 1956년 여름에 『노비 미르』(Novyi Mir)지의 편집부에 원고를 제출했다가, 동년 9월에 동지의 편집위원들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1957년 가을에 이딸리아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58년의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세계 냉전의 와중에 휩쓸려들어갔고, 1958년의 11월에 소련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처분을 당했다. 그로부터 20개월 후인 1960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4. 화가의 눈과 시인의 환상력(幻想力)
빠스쩨르나끄는 대중을 위한 시인이나 작가는 아니었다─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의사 지바고』를 통해서 전세계의 독자—아직은 작가의 동국인(同國人)이 어처구니없게도 제외되고 있지만(빠스쩨르나끄의 복권이 이루어진 다음해인 1988년에 와서야 비로소 『의사 지바고』의 러시아판이 출간됨─편집자)—를 얻었고, 현재 그밖의 그의 작품들까지도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다.
시인의 소설이며 일생을 그린 소설인 『의사 지바고』는 빠스쩨르나끄의 전세계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동국인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경시켰다. 오늘날의 빠스쩨르나끄는 레프 똘스또이의 도덕적 위치에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인의 부친은 일찍이 똘스또이의 『부활』의 삽화를 그려준 일이 있었다. 책형(.刑)의 주제와 함께 부활의 주제가 『의사 지바고』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생활과 역사의 모든 격변의 결과로서, 상징적 인도주의자가 예언자의 뜨거운 입술을 통해서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볼 때(뿌슈낀의 『예언자』와, 같은 제목의 빠스쩨르나끄의 시를 보라), 우리들은 이 현상이 러시아 문학의 전통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의사 지바고』가, 생명과 죽음의 주제나 미학과 도덕의 주제는 풍부하지만, 빠스쩨르나끄의 작품영역에서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의사 지바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종래의 시와 소설에 잠복해 있었거나 간간이 시사된 일이 있는 주제의 보다 더 완전하고 보다 더 명확한 서술이다. 고민하는 휴머니티의 주제와 부활의 비유는 『마지막 여름—이야기』에도 나타나 있다.
『의사 지바고』의 독자들 중에는 그 속에 든 작가의 내러티브가 명확하지 않다고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의 소설이다. 그리고 시인은 간결하고 통렬한 것을 좋아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에는 바이런적인 맛이 풍긴다. 혹은 무슨 비밀결사 같은 냄새가 난다. 이 작품은 작가가 그의 이딸리아인 친구(소설가)한테 보낸 것을 이 친구가 밀라노의 펠트리넬리라는 출판사에 내주었고, 펠트리넬리는 출판을 보류하라는 소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이 소설을 출판했다. 이러한 소련의 압력은 그후 영국 출판사들한테도 가해졌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최초의 산문은 1915년에 쓴 시인 하이네의 연애사건을 취급한 것이다. 이 작품은 1925년에 출판된 그의 소설집 속에 들어 있고, 1933년에 『공로(空路)』라는 제목을 붙여 내놓은 재판(再版) 속에도 들어 있다. 단편집 『공로』 속에는 그밖에 「루베르스의 유년시절」(1918), 「뚤라에서 온 편지」(1918), 「공로」(1924)가 들어 있었다. 이런 초기 작품들은 섬세한 심리적 통찰에서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곤란하고 형이상학적인 데가 많은 산문의 시적 특질에서도 특징이 있었다. 1932년에는 빠스쩨르나끄는 『여권(旅券)』을 그 당시까지의 그의 가장 중요한 산문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여권』은 세간사(世間事)와 예술에 대한 시인의 비평과 판단과 해설이 삽입된 자서전적 기록이다. 최근에 나온 『나는 기억하고 있다』(1959)—여기에서는 만년의 빠스쩨르나끄가 그 전날의 자기를 심판하는 위치에 앉아 있다─도 역시 『여권』과 같은 자서전의 초록(抄錄)이다. 『여권』과 같은 중기의 산문의 대표작으로는 『마지막 여름—이야기』가 또 있는데, 이 작품은 대부분이 꿈으로 되어 있고, 이 꿈이 또한 자전적 기록과 역사에 대한 도덕적 비평으로 꾸며져 있다.
빠스쩨르나끄의 산문은 극도로 유동적이고 시흥적(詩興的)이기 때문에 흘러가는 인상이나 연관성을 포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러한 인상이나 연관성은 보다 더 영속적인 시인의 이미지의 현실성 속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예술은 활동만큼 현실적이고 사실(事實)만큼 상징적이다.” 이것은 화가의 눈과 시인의 상상력이 함께 작용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1930년대 후기에 들어서자 빠스쩨르나끄는 좀더 길고, 좀더 복잡한 장편소설을 써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은유가 적은 새로운 단순한 문체를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보다 더 광범위한 일상적인 세사(細事)를 포착할 수 있는 좀더 현란하지 않고 몽롱하지 않은, 투명한 작풍을 완성하기 위해 약 15년 동안 애썼다. 그러나 이러한 만년의 작풍—「후방(後方)」이나 『의사 지바고』의 작풍—은 『마지막 여름—이야기』나 『공로』와 같은 비교적 초기의 작품—“산문적인 데가 하나도 없고…… 작가가 사건보다도 기분과 이미지에 몰두한” 시인의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쾌락을 감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대조적인 의미에서 흥미를 더 돋구어주고 있다.
작품 「후방」은 완전한 제목을 붙이자면 “장편소설의 1장에서 빼어낸 두 개의 발췌문—후방”이다. 이 단편은 1938년 12월 15일 소련작가동맹의 기관지(2주일에 한번씩 발간된다) 『문학신문』(69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빠스쩨르나끄는 1937년부터 대작을 써볼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 두 개의 발췌문의 모체인 그가 의도한 장편소설이 완성을 보았는지 중단되었는지 자세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그것은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에 『의사 지바고』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고 보면 이 단편은 『의사 지바고』의 초안을 엿볼 수 있는 희귀한 문헌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빠스쩨르나끄의 산문의 쇠사슬의 중요한 하나의 고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가 처한 독특한 역사적 위치에서의 예술가로서의 그의 전반적인 발전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略연보
1890년 1월 29일 모스끄바 출생.
1913년 모스끄바대학 졸업.
1914년 『구름 속의 쌍생아』(시집)
1918년 「루베르스의 유년시절」 「뚤라에서 온 편지」
1924년 「공로(空路)」
1926년 『슈미뜨 해군대위』(서사시)
1932년 『여권』
1938년 「후방(後方)」
1956년 『의사 지바고』
1958년 노벨문학상 받음.
1960년 사망.
〔노오벨상문학전집 6, 신구문화사 1964〕
안드레이 씨냐프스끼와 문학에 대해서
근년에 소련의 어느 곳에서 한 신진작가가 비밀리에 현대의 러시아인의 생활에 대한 빛나는 풍자소설을 써왔다. 그는 자기의 작품이 공식적인 당국의 검열에 통과될 수 없고, 러시아에서는 출판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을 자인하고 쓰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그는 4권의 작품을 구라파에 밀수출해서 출판했다. 그는 아브람 떼르쯔(Abram Terts)라는 필명을 사용해왔는데, 이 이름은 사실은 모스끄바대학에서 금지되고 있는 학생의 노래에 나오는 한 인물의 이름을 따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월에 이 아브람 떼르쯔가 사실은 안드레이 씨냐프스끼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반소적(反蘇的)인 선전을 했다는 죄명으로 모스끄바재판소에서 7년간의 중노동형의 선고를 받게 되자, 그의 이름은 갑자기 전세계적인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의 최초의 작품이 1959년에 빠리에 나타나고 나서부터 그의 저서는 구라파와 미국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켜왔다. 철학적 우화인 그의 처녀작 『재판은 시작되다』는, 1960년에 『타임』지의 논평을 보면 “혁명 이후에 소련에서 나온 아마 가장 이색적인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데, 사실상 이 소설이 소련의 현대의 다른 해빙기 문학─이를테면 자먀찐의 『우리들』이나, 예렌부르끄의 『쥬레니또』나, 삘냐끄의 『마호가니』 같은 작품─하고 다른 것은 이것이 소련 당국의 검열을 전혀 무시하고 썼다는 것과 구라파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수년 전에 『사상계』지에 소개된 일이 있고, 그의 그후의 환상적인 소설 「고드름」은 역자가 재작년에 『현대문학』지에 번역해낸 일도 있었다. 소련 작가들이 당국의 검열의 한계를 벗어나는 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씨냐프스끼는 위선 이 한계에서 도망쳐나오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는 자먀찐과 망명중의 예렌부르끄의 전통의 여운(餘韻)을 고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에는 마레끄 후라스꼬의 세대의 절망적인 풍자의 터치와 도스또예프스끼의 ‘종교재판소장’이 주요한 기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비평논문 「사회주의리얼리즘은 무엇인가?」(이 논문은 익명으로 불란서의 『레스쁘리』지에 처음 발표되었고, 영국에서는 『쏘비에뜨 써베이』지에 발표되었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을 보면 그 자신이 상당히 맑스주의의 수련을 쌓은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의 문제는 공식적인 공산주의의 신조를 철학적으로, 심리적으로 또한 예술적으로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작품에는 여러가지 주제에 대한 가지각색의 스타일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작품의 어느 것에서나─다소간 직접적으로, 또한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형태로─목적의 관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나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의 찬사로서 나타나거나, 그의 ‘혁명적 발전’ 단계의 생활에 대한 풍자로서 나타나 있다. “우리들의 전반적인 문화나, 우리들의 전반적인 사회가 그렇듯이 우리들의 예술은 철두철미 목적론적이다. 그것은 보다 더 높은 운명에 복종하고 있고, 그 때문에 순화(純化)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 일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전목적은 될 수 있는 대로 하루속히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서구라파의 ‘성난 젊은이’들의 운동을 지지해온 정신이 동구라파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도덕적·심미적 본질 같은 것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시대의 한결 기분 좋은 풍자의 하나일 것이다.
감옥소를 영원히 철폐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새로운 감옥소를 구축했고, 국경선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주위에 중국의 만리장성을 쌓았고, 우리들의 장래의 노동을 힘 안 드는 기분 좋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강제노동을 도입했고, 한방울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끝없이 죽이고 또 죽였다…… 우리들의 목표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물려받은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아니되었고 우리들의 적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러시아의 전능(全能)을 주장하지 않으면 아니되었고, 『쁘라브다』지에 거짓말을 쓰지 않으면 아니되었고, 비어 있는 왕좌에 새로운 제왕을 앉히지 않으면 아니되었고, 장교의 견장(肩章)을 유행하게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고, 그것으로 고문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가끔, 공산주의의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은 하나의 마지막 희생─즉 공산주의의 포기─일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여, 주여,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오! 결국 이 세계는 신의 영상(影像)과 모습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공산주의는 아직 신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거의 흡사한 데까지 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어서서, 피곤한 몸으로 비틀거리면서, 우리들의 충혈한 눈으로 전 우주를 둘러보지만, 우리들이 찾으려고 원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젊은 러시아의 작가가 ‘사회주의리얼리즘’에 대한 결정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특히 그의 소논문의 종장(終章)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스딸린의 죽음은 우리들의 종교적 미학의 제도(制度)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따라서 레닌의 예찬을 부활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대용품이 될 것인가. 레닌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같이 보이며, 너무나도 현실적인 인상을 준다. 그는 머리가 까진, 키가 짤따막한 부르주아다. 그러나 스딸린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과장법을 위해서 특히 생겨난 것같이 보였다. 신비적이며 전지전능한 그는 우리들의 시대의 기념상(記念像)이었고, 그가 신이 되기 위해서 갖고 있지 않은 단 하나의 것은 영원성이었다. 아아, 우리들이 다만 머리를 좀 써서, 그의 죽음을 기적(奇蹟)으로 둘러싸게만 했더라면! 우리들이 다만,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 승천을 해서, 거기에서 그가 그의 신비적인 수염 뒤에서 여전히 묵묵히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무전(無電)으로 공포만 했더라면! 그의 유품은 중풍환자와 정신이상자를 고칠 수 있었을 것이고, 잠자리에서 아이들은 끄렘린 궁전의 빛나는 별들을 지켜보면서 창가에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1962년에 아서 J. 슐레징거 2세는 씨냐프스끼의 이 논문을 “내가 본 소련사회의 작가의 궁경에 대한 진단서 중에서 가장 계발적(啓發的)인 것”이라고 불렀다. 그 이듬해에 씨냐프스끼는 ‘환상적인 예술’에의 모험이라고 생각한 소설 「고드름」을 역시 구라파에 보내서 발표했다. 그는 그의 ‘환상적인 예술’에 대해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환상적인 예술에 희망을 두고 있다. 그것은 목적 대신에 가설(假說)을 갖게 되는 예술이며, 일상생활에 묘사에 있어서 그로테스크한 것이 사실적(寫實的)인 것에 대치(代置)되는 예술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시대의 정신에 가장 잘 부합할 것이다. 호프만과 도스또예프스끼의, 고야와 샤갈의, 그리고 마야꼬프스끼의 상상력…… 이런 것들은 우리들에게 환상적인 것과 황당무계한 것을 통해서 진실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여기에 역출한 『찌호미로프의 실험』은 씨냐프스끼가 지난해 7월에 아브람 떼르쯔의 필명으로 역시 구라파로 수출해서 발표한 최신작이며, 미국에서는 만야 하라이의 번역으로 판테온 서점에서 작년에 출판되었다. 여기에 실린 부분은 이 『찌호미로프의 실험』의 ‘머리말’과 ‘제1장’이며, 역시 만야 하라이의 영문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라이는 이 소설을 오웰의 『동물농장』과 같은 심각하고도 경쾌한 우화적인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체호프의 ‘벚나무골’의 근방에 있는, 궁벽진 신화적인 러시아의 거리에 사는 자전차 수선공인 렌야 찌호미로프라는 불쌍한 청년의 정치적인 흥망을 다룬 것이다.
렌야 찌호미로프라는 이 주인공의 이름은 러시아의 원어로 따져볼 것 같으면 이 인물의 성격까지도 암시하는 특색을 가졌지만, 우리말로 고쳐 번역하려면 어색하게 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원명을 그대로 썼다. 그런데 렌야 찌호미로프의 ‘찌호미로프’라는 낱말은 ‘평화와 고요’와 ‘세계평화’의 두 가지 뜻을 시사하는 것이며, ‘렌야’는 레닌과 관련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 ‘렌’ ‘태만(怠慢)’이나, 러시아의 설화에 나오는 숲의 요정인 ‘레쉬’와 관련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근대의 농민 출신의 제왕과, 과학시대의 어린아이와, 몇명의 소련의 통치자들의 초상의 혼합물이다. 그는 “모든 다른 물건들처럼 인간은 개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의 인민들을 개조하려고 그는 그들을 교묘한 프로파간다의 비밀무기와 그 자신의 마술적으로 교화된 카리스마를 가지고 채찍질을 한다. 그리고 렌야는 시민들에게 그의 꿈을 먹인다─그들은 개울물을 샴페인으로 생각하고 마신다─그리고 “이런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은 스딸린 치하에서 한 것처럼 유쾌하게 도랑을 파고 있다.”
렌야의 통치자로서의 종말은 비참하지만, 드디어 평화는 다시 회복되고, “도시는 또다시 경찰의 손에 장악되게 되고 노파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세계의 파멸은 당분간 모면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는 계속되어간다.
씨냐프스끼의 유죄선고에 대해서는 세계의 국제펜클럽이 항의문을 소련정부에 속속 발송했고, 미국에서만도 백여명의 학자들이 소련 수상에게 구제를 위한 서한을 보냈다고 하는데, 지난 2월 15일의 외신에 의하면 그는 준노동형에 복역하기 위하여 곧 시베리아의 노동수용소로 이송될 것이 예상되고 있다고 한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이 소설은 씨냐프스끼가 아브람 떼르쯔의 이름으로 서구라파로 수출한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다.
〔자유공론 1966년 5월호〕
죽음에 대한 해학
오늘날의 영국 소설의 대표적 중견을 꼽으라면 그레이엄 그린, 앵거스 윌슨, 콤프턴 버넷, C.P. 스노우, 존 웨인에다가 여류작가로서 아이리스 머독과 뮤리엘 스파크를 빼놓을 수가 없다. 60년대의 영국문학의 새로운 특징으로서의 이들의 공유점을 생각해볼 때, 이들에게 한결같이 어떤 겸손(modesty) 같은 것이 깔려 있는 게 눈에 뜨인다. 이들은 문학가로서의 자기들의 한계점을 강조할 뿐 아니라, 대부분이 자기들의 일에 이익을 줄 수 있는 모든 엄청난 주장을 행복스러울 정도로 무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로렌스는 “소설가로서 나는 나 자신을 성인(聖人)보다도, 과학자나 철학자나 시인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호언했지만, 이들 중에 이런 묵시록적인 문학관을 믿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또한 이들은 낡은 자연주의의 기준을 무턱대고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이를테면 지드 같은 “나는 모든 사물을 소설 속에 담아보고 싶다”는 식의 거만한 태도로 소설을 쓰고 있지도 않다. 낡은 리얼리즘도, 낡은 포멀리즘도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고, 도대체가 이들은 자기들 자신이 하나의 우주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이들의 이러한 겸손은 철학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리얼리티의 이미지로서의 소설 관념을 피하고 있고, 따라서 자기들의 상상력을 리얼리티의 구성요소나 보충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총체적으로 인식적이라기보다도 강렬하게 윤리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60년대의 영국의 소설가들은 난삽한 인식론적인 것을 파고드는 프랑스의 전위작가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들에게서 프랑스적인 안티 노벌(novel)의 기치를 찾아볼 수는 없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뷔또르 같은 작가는 소설이 본질적으로 리얼리티에 기여하는 것이고, 새로운 소설가의 임무는 구세대의 소설가들이 과한 낡은 리얼리티의 서술을 교정하는 일이며, 따라서 모든 훌륭한 소설은 안티 노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영국 작가들은 감지자(感知者)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교양 있는 상식의 눈으로서 감지된 사물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들 자신의 분투적인 견지에서,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의 관계를 거의 전반적인 문제로 삼고 있다. 이런 관계의 문제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뮤리엘 스파크라고 볼 수 있다.
뮤리엘 사라 스파크(Muriel S. Spark, 1918〜 )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태생으로서, 문필활동은 19세기 문인들의 평전(評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51년에 『광명(光明)의 아들—메어리 셸리 재평가』를 발표한 다음 『존 메이스필드 연구』(1953), 『에밀리 브론테의 생애와 작품』(1953) 등을 발표하고 있다. 소설가로서의 스파크의 활동은 1951년에 『업저버』지의 단편소설 꽁꾸르에서 일등상을 획득한 때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그후 영미의 각 잡지에 단편들이 발표되고, 57년에 장편소설 『위로하는 사람들』을 발표하고, 계속해서 58년에 『로빈슨』을, 동년에 단편집 『날아가라, 새야』를 59년에 『메멘토 모리』를, 60년에 『페컴 라이 기담(奇譚)』과 『독신자』를, 61년에 단편과 라디오 드라마를 모은 『연기하는 목소리』와 『진 브로디 양의 청춘』 등, 연이어 문제작을 발표하고, 최근에는 『철학박사』라는 희곡이 런던의 신예술 극장에서 상연되는 등, 영미 문단의 화제를 독차지하고 있다.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의 뜻은 “죽음을 잊지 말라”는 것인데, 이 말이 유럽문명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관념의 기원은 적어도 고대 이집트에까지 소급되고 있는 것 같다. 이집트에서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 미라나 사람의 해골을 갖다놓는 습관이 있었다. 손님들이 그것을 구경하고 있으면 주인은 “죽음을 잊지 말라”라는 주지(主旨)의 인사말을 한다. 어원적으로는 사람에게 죽음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물건(이 경우에는 미라나 사람의 해골) 자체를 메멘토 모리라고 불렀다.
피라미드국의 왕족들은 영원한 생명에의 가능성을 잡아보려고 온갖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은 반면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삶 그 자체의 긴장과 고양을 위해서 살려보려는 기술을 몸에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가면서 지중해와 그 주변의 문명권 속에서 오랫동안 이어 내려왔다.
로마의 장군들은 개선(凱旋)을 해가지고 행진해 들어올 때면, 자기의 전차에 노예를 하나 태워가지고 들어왔다. 영광에 싸인 장군의 귓전에서, 노예는 끊임없이 이런 말을 속삭인다—“뒤를 돌아다보아라. 그대가 단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제정(帝政) 러시아에서는 대관식 때에 여러 종류의 대리석을 날라 들여오는 관례가 있었다. 새 황제는 즉위하는 날 신중하게 자기의 묘석을 고르는 것이다.
“그대는 흙이니라. 멀지 않아 그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들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다”(찬미가) 등의 시구(詩句)에 있어서는, 드높은 결정도(結晶度)의 말 그 자체가 지극히 효과적인 메멘토 모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랍의 서정시에서도, 이를테면 아나크레온의 “우리들은 한줌의 재로 화해버린다”라는 아름다운 단장(斷章)이 있다. 테렌티우스의 희극에 나오는, 뼈를 넣는 고항(古缸)에는 그후에 니체가 즐겨 쓴 그 소름이 끼치는 명(銘)—“인간에 관한 어떠한 일도 나에게는 무연(無緣)치 않으니라”—이 새겨져 있었다. 햄릿은 엘시노아의 무덤 앞에서, 그 전날에 쾌활한 익살을 부리던 어릿광대인 요리크의 두개골을 바라보면서 외친다. “어서 부인네들의 방에 가서 일러주고 와. 부지런히 1인치나 되도록 처바르고 싶겠지만, 멀지 않아 이런 얼굴이 되는 거라구.” 요리크의 두개골과 햄릿의 대사에는 두 개의 강렬한 메멘토 모리의 무참한 이중창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무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근대적인 감상(感傷)일 것이다. 고약한 취미의 불쾌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천박한 반응일 것이다. 분명히 모든 메멘토 모리는 냉수를 등골에 끼얹으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고, 냉수가 가장 유효한 순간에 끼얹어지게 꾸며져 있다. 축제의 술이나 환성에 취해 들어가려는 마음에, 그것은 한 조각의 정기(正氣)를 불러일으켜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연회(宴會) 행진의 중지를 바라는 소리는 아니다. 편안한 체념과 무위(無爲)에의 유혹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각성된 생명을, 끊임없는 새로운 출발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의 악의가 깃들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기 위한, 너무나도 자명한 기본적인 진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양념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종류의 진실을 확보하기 위해서 먼 고대의 장군들은 노예를 사용하고, 왕후들은 일부러 입이 건 어릿광대를 고용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뮤리엘 스파크라는 소설가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솜씨가 능란한 어릿광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탁월한 어릿광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조리 그녀는 갖추고 있다. 첫째로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것. 둘째로 간결한 말투를 잘 쓰는 명수라는 것. 셋째로 착상이 기묘하다는 것. 그리고 넷째로 인간세계의 여러가지 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용기를 갖추고 있다는 것.
재미있고 익살스럽다는 점에 있어서, 스파크는 이미 정평이 있다. 그녀의 작품에 대한 서평이나 광고문에 가장 빈번히 나오는 형용사는 ‘익살스러운’(funny)일 것이다. 정신적인 고민으로부터 곤란한 배설행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세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것도 아주 익살스러운 돌발적인 웃음의 대상이 된다. 불쌍하다, 웃는 것은 좋지 않다는 식의 상냥하고 따뜻한 예의범절은 그녀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아마 카톨릭 작가인 스파크로서는 연민은 그러한 데에 있지 않은 모양이다.
간결한 말투는 스파크의 특히 장편소설의 커다란 특징과 연결되어 있다. 처녀작 『위로하는 사람들』 이후, 그녀의 소설에는 똑같은 어구와 똑같은 문장의 반복이 여간 많지 않다. 가장 최근에 쓴 『자력(資力)이 빈약한 아가씨들』 같은 것에는 몇십 행의 문장이 두세 번씩 되풀이되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이런 반복부분을 잘라버리면 소설의 길이가 아마 삼분지 일도 더 줄어들 것 같다. 원래가 그녀의 장편은 영국적인 표준에서 보면 약간 긴 중편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그것은 참말로 안하무인 격의 반복이지만 조금도 그것이 지루한 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극도로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물론 반복의 기술이 능란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다고 볼 수 있다. 전후관계에 따라서 똑같은 문장이 번번이 뜻하지 않은 새로운 의미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까. 그러나 좀더 큰 비밀은 그녀의 문장의 질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반복에 견딜 수 있는 문장인 것이다.
착상의 그 묘한 점에 대해서는 “죽을 운명을 잊지 마시오”란 전화의 예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지극히 현대적이고 일상적이고 과학적인 소도구에다가 지극히 비현대적인 신비적 관념을 갖다붙이는 수법은, 말하자면 스파크 세계의 기초구조다. 이런 스파크적인 발상 속에서 현대 풍속에 대한 그녀의 활발한 호기심과, 카톨릭에의 개종자로서의 그녀의 발랄한 탐구심이 과부족 없이 결합되어가지고, 기상천외한 부조리한 웃음을 낳는다.
네번째의 조건인 스파크의 통찰력과 용기에 대해서도 역시 개종자로서의 그녀를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 영국에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의 신앙을 택한다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여러가지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카톨릭 제국(諸國), 이를테면 프랑스 같은 나라에 있어서의 프로테스탄트와 거의 같은 위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스파크는 분명히 소수자로서의 카톨릭의 전투성이나 혹은 전위성을 다분히 갖고 있다. 그녀의 처녀작 『위로하는 사람들』은 소설이라는 표현형식 그 자체를 문제삼은 소설이었다. 앙드레 지드의 『사전(私錢)꾼』의 카톨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소설이라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의 의미, 다시 말하자면 픽션과 리얼리티와의 관계를 묻는 일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녀의 소설에는 거의 전투적인 분위기가 없다. 똑같은 카톨릭 작가인 그레이엄 그린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기독교적인 여러가지 관념이 스파크의 세계에서는 거의 언제나 그린의 그것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네가 어떤 죄를 저지르든간에, 수많은 성인들이 벌써 그것을 저지르고 있단 말야.”
“위대한 성인들의 병과 쇠약을 이 몸이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전자의 날카로운 아이러니는 그린의 취미에 맞는 것이고, 후자의 기발한 진지성(眞摯性)은 스파크의 취미다. 그런데 이 두 작가의 개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제각기의 작품 속에서 이런 인자스러운 관념에 부여하고 있는 역할일 것이다. 그린은 전자를, 자기는 이미 구원을 받을 여지가 없는 죄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한 등장인물의 정신착란에 걸린 마지막 자존심을 때려부수기 위해서 사용한다. 스파크는 여명(餘命)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환자들의 비참하고도 익살맞은 생활을 가차없이 묘사하는 문장 속에서, 어쩌다 새어들어온 밝은 햇빛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며시 후자를 삽입하고 있다.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가짜 구원의 밧줄을 잘라버려주는 것도, 뜻하지 않은 구원을 던져주는 것도 두 쪽이 다 틀림없이 기독교적 연민일 것이다. 똑같은 신앙 속에서 그들은 제각기 다른 종류의 통찰력과 용기를 끌어내고 있다. 그린의 그것에는 숨이 막힐 듯한, 지극히 현대적인 준엄성이 있고, 스파크에게는 오히려 고대적인 솔직성과 관대한 품격이 있다.
아무리 비참한 상황을 그리더라도 결코 웃음을 잊지 않는 스파크의 강인한 자세는 그런 너그러운 용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들이 잊어버리고 싶은, 구태여 보고 싶지 않은 불쾌한 진실을 그녀는 가차없이 파헤쳐내지만, 자칫하면 심술이 고약한 힐난처럼 되기 쉬운 아슬아슬한 곳에서 분방한 웃음과 익살스러운 힘으로 그녀의 발언은 상쾌한 뒷맛을 남겨준다. 그것은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이상하게도 우리들의 정신을 고무해준다. 진짜로 최상급의 익살배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점에 있어서도 그녀는 아마 먼 옛날의 탁월한 어릿광대들의 정통적인 후계자일 것이다.
〔현대세계문학전집 1, 신구문화사 1968〕
표기 관련 편집자주
✽노출되어 있는 한자는 한글로 바꾸었고 필요한 경우에는 괄호 안에 씀을 원칙으로 했다.
✽외래어는 현 외래어표기법에 따랐으며 현지의 발음을 고려하여 표기했다. 예)나이롱·쟈케트→나일론 재킷, 파스테르나크→빠스쩨르나끄
✽「이 거룩한 속물들」에서 김수영의 것으로 보이지 않고 잡지편집부에서 단 듯한 중간제목(차례대로 “도둑에게 보내는 눈물의 제스쳐” “고독의 쟈케트를 입은 속물” “하느님,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은 뺐다.
✽「도덕적 갈망자 빠스쩨르나끄」에서 본문 뒤에 있던 후주는 본문의 해당 면 아래의 각주로 옮겨왔다.
✽명백한 오식은 바로잡았다. 예)환련→한련(「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 앞부분), 아폴로→제우스(「도덕적 갈망자 빠스쩨르나끄」 앞부분)
--
- 본고(本稿)는 영국의 시인 죠지 리베이(George Reavey)의 빠스쩨르나끄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기초로 해서 꾸민 것이다. 리베이씨는 케임브리지대학 재학시부터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윌리엄 엠프슨, 리처드 에버하르트와 함께 『익스페리먼트』지를 창간했다. 그는 또한 저명한 러시아 문학가이기도 하며, 빠스쩨르나끄와 그의 작품과의 친교는 193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오늘의 소련 문학』 『빠스쩨르나끄의 시』 등 러시아 문학에 관한 여러 저서를 썼고, 고골과 뚜르게네프를 번역했다. 현재는 롱아일랜드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이밖에도 빠스쩨르나끄의 『여권』(Safe Conduct)과 『나는 기억하고 있다』(I Remember)의 두 개의 자서전과 그의 시작품, 단편집을 참고로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역자도 빠스쩨르나끄에 접한 것은 『의사 지바고』가 처음이며, 우연한 기회에 그 부록에 붙은 「지바고의 시」(부록으로 흔히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소설의 마지막 장임─편집자)를 번역해준 일이 있을 뿐 그의 산문 영역을 대충 훑어볼 수 있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스끄랴빈─알렉산드르 니꼴라예비치 스끄랴빈 Alexandr Nikolayevich Scriabin(1872〜1915). 작곡가. 피아니스트. 모스끄바에서 탄생. 도이치 낭만파 후기와 인상파의 영향을 받고, 그후 인습에서 탈피, 신비적 종합예술의 의상(意想)에 탐닉. 음, 색채의 결합을 시도, 연주와 동시에 스크린에 색채를 비추는 ‘색채 피아노’를 연구. 한때 세계의 시청을 집중. 대표작으로는 「프로메테우스」(1910), 관현악곡, 피아노 협주곡(1894), 교향곡 제1·2·3 피아노 쏘나타 10곡, 「법열(法悅)의 시(詩)」(1908) 등이 있다. 레오니드 빠스쩨르나끄가 그린 스끄랴빈의 초상화가 있다.↩
- 블로끄─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끄 Alexandr Alexandrovich Blok(1880〜1921). 시인. 러시아 상징주의파의 대표이며, 예쎄닌, 마야꼬프스끼, 빠스쩨르나끄와 함께 20세기 쏘비에뜨의 4대 시인. 쏠로비요프의 신비사상에 매혹되어 영원의 여성을 노래한 종교적 상징시 『아름다운 부인을 노래하는 시』(1904)를 발표하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음. 점차 리얼리스틱하게 되면서 애국적인 색채가 짙어짐. 유명한 『12』(1920)는 혁명 후에 씌어진 것으로 종교적 분위기에 자란 그의 혁명 찬미의 표명.
안나 아흐마또바 Anna Akhmatova(1888〜 ). 여류시인. 1907년부터 시작을 발표. 1912년에서 1915년에 쓴 서정적인 사랑의 시로 유명해짐. 혁명 후에는 1923년에 시집을 낸 후, 17년간의 침묵을 겪고 나서 1940년에 시집을 발간. 1946년 즈다노프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고, 소련작가동맹에서 제명처분을 당함. 1950년에 수많은 애국시를 발표했지만 내용은 저하됨. 그녀의 작품 중에는 아끄메이즘의 가장 좋은 특질이 담겨 있는 것이 있음(아끄메이즘은 1912년에 상징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러시아의 시운동. 아끄메이스트들은 상징주의 시의 신비성과 모호성을 반대하고 명석, 정밀, 견고한 시풍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 그들은 또한 生의 씩씩한 영웅적인 면을 강조).
벨리─보리스 니꼴라예비치 벨리Boris Nikolayevich Bely(1880〜1934). 시인. 소설가. 모스끄바에서 탄생. 러시아 상징주의파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 1912년에는 인지학(人智學)의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에 경도. 1902년부터 제1·2·3·4 『심포니』를 계속해서 발표. 산문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장편소설 『뻬쩨르부르끄』. 운율의 대가로서 인정을 받은 그의 작품의 일부는 음악적이며 율동적인 산문으로 씌어짐(본명은 ‘보리스 니꼴라예비치 부가예프’이며 ‘안드레이 벨리’로 더 많이 알려져 있음─편집자).↩ - 뻬레젤끼노—빠스쩨르나끄가 1937년경에 낙향한 곳. 그는 여기에서 거리와는 절연하고 독서와 사색과 산보로 소일하면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지금 그가 살던 이곳 오두막집과 정원은 또하나의 야스나야 뽈랴나로 되어가고 있다.↩
- 『마지막 여름—이야기』—빠스쩨르나끄의 중기에 속하는 장편소설. 소련에서는 『의사 지바고』가 출간되지 못하고 있으니까 소련에서 발표된 그의 산문으로는 이것이 마지막 것이 된 셈이다. 죠지 리베이가 번역하여 내놓은 영어판이 있다. ↩
- 흘레브니꼬프—벨레미르 흘레브니꼬프 Velemir Khlebnikov(1886〜1922). 쏘비에뜨의 실험적 시인. 처음에는 상징주의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후에는 미래파와 관계를 맺고 시어(詩語) 창조에 노력. 슬라브족의 가장제도적(家長制度的) 과거를 이상화. 10월혁명을 환영. 후기시에서는 미래의 사회에 대한 환상적 묘사를 시도. 마야꼬프스끼의 존경을 받음. ↩
- 찌호노프—니꼴라이 쎄묘노비치 찌호노프 Nikolai Semyonovich Tikhonov(1896〜 ). 저명한 쏘비에뜨 시인. 제1차 세계대전과 내란에 (적군 의용군으로) 참전. 처녀시집은 1916년에서 1917년에 쓴 전쟁시. 1934년까지 장시 『사미』, 시집 『목자들』, 소설 『전쟁』 등의 작품을 발표. 제2차대전중에는 포화 속에서 장시 『끼로프 우리들과 함께』, 시집 『화염의 해』, 단편집 『레닌그라드 이야기』를 발표하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짐.
안또꼴스끼 Antokolsky—주로 1935년 이후에 활약한 쏘비에뜨 시인. 아르메니아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의 작품이나 작풍 등 그밖의 자세한 것은 불명.↩
- 페진—꼰스딴찐 알렉산드로비치 페진 Konstantin Alexandrovich Fedin(1892〜 ). 저명한 소련의 소설가. 러시아의 전통적인 사실주의 및 고르끼의 영향을 많이 받음. 『도시와 해』(1924)에 의해서 작가적 지위 확립. 이후 소설, 희곡을 많이 발표. 혁명기 인%리겐찌야의 성장과 몰락의 과정이 그의 작품의 주요한 테마가 됨. 대표작은 『형제』(1928), 『유럽의 약탈』(1934) 『나는 배우였다』(1934)↩
- 죠지 리베이—주 1) 참조.↩
- 삘냐끄—보리스 안드레예비치 삘냐끄 Boris Andreyevich Pilnyak(1894〜1937). 소설가. 1915년에 처녀작을 발표. 내란을 취급한 소설 『발가벗은 해』(1922)는 동물의 수준으로 타락한 생활상을 묘사. 1926년에 발표된 소설 『꺼지지 않는 달 이야기』는 작전 테이블 위에서 죽은 전쟁위원 후룬즈의 이야기를 쓴 것인데, 이것이 스딸린의 명령으로 행해진 ‘의약(醫藥) 살인’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음. 이것으로 회복될 수 없는 난경에 빠짐. 그의 소설 『마호가니』는 러시아에서는 출판이 거부되어, 1929년에 베를린에서 발표함. 이것이 문제가 되어 소련작가동맹에서 제명처분을 당함. 1937년에 실종. 총살당했다고 믿어지고 있음.
바벨—이싸아끄 에마누일로비치 바벨 Isaak Emanuilovich Babel(1894〜1938). 저명한 소련 단편 작가. 오데싸에서 탄생한 유태인계 러시아인. 1915년에 발표된 그의 초기 단편들은 지극히 육정적인 것이었고, 호색문학으로 규탄을 받음. 그후 1923년에 발표된 단편들은 호평을 받고 뛰어난 작가로서 인정을 받음. 그의 소설은 피와 죽음, 냉혈적인 범죄, 영웅적인 행동과 잔인성을 취급. 폴란드 원정을 취급한 것으로 『붉은 기병대』(1923)가 유명. 그는 1937년에서 1938년의 숙청에서 총살당했다고 추측되고 있음. 그의 소설은 러시아에서 다시 출판되게 되었고, 1956년에는 1937년 이래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논의됨.↩